2020. 24 – 28
당근과 콩 속에 비타민이 많이 들어 있으니 당근과 콩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아이가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탕과 아이스크림 속엔 비타민을 넣지 않으셨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범브란트 목사님은 자기 같으면 이런 대답을 하였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이 비타민을 섭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먹기 싫어하는 것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목사님은 이어 쓰기를, “우리는 좋은 일에서 뿐만 아니라 나쁜 일에서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좋지 않은 일도 환영해야 합니다. 하니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시는데,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도 그 ‘모든 일’ 속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한 것입니다. 섭리(攝-다스릴 섭; 理- 다스릴 리)는 “자연계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이라는 사전적인 정의가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일컫습니다. 영어는 Providence 라고 번역합니다. 어떤 블로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섭리 (providence)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로 Deus povidet (하나님이 준비하신다) 이다. 창 22장에 등장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이삭을 죽이려 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이삭을 드리지 말고 하나님이 준비한 어린 양을 제물로 드리라는 그 사건에 나타난 여호와 이레 (= 하나님이 준비하신다)에서 생겨난 말이다.” 이 번 코로나 19의 재발로 우리 모두 걱정과 혼란 속에 보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일부 교회와 지도자들의 행태는 많은 부끄러움을 가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19의 발발로 대한민국이 방역 강국이라는 사실이 전세계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지금 2차 확산 역시 예상되었던 것이고 저는 훌륭하게 극복하리라고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교회들이 예배를 포함한 제반 모임을 하지 못하는 어려움은 있지만, 이번 코로나 19는 한국 교회의 병폐를 많이 드러냈습니다. 섭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 사태는 교회의 쇄신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기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각종 사건을 만날 때, 거기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그분이 무엇을 예비하셨는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찾고 구하고 두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녀 아멜리가 여섯 살 때,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19:14)라는 말씀을 토대로 한 설교를 듣고, 목사님을 돌아보며 물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때는 다 어린이들이었으니까, 틀림없이 다 천국을 가졌을 거예요. 그런데 어쩌다가 천국을 잃게 되었지요?” 범브란트 목사님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죄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대부분이 어떻게 하여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잊게 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 도둑질, 한두 번 잘못하다가 결국 빠지게 된 특별히 나쁜 버릇 등. 그래서 우리는 천국을 가졌는데 그것을 잃었다. 이에 대하여 성서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을 권하고 있다. … 우리는 그저 한때 우리의 것이었던 것, 우리가 잃어버린 보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만,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말씀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그곳이 천국의 본질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썪지 않고 죄와 사망이 없는 영원한 천국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어린아이가 천국을 가졌다는 말은 신학적으로는 문제가 있습니다. 실상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죄인들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 역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살려고 하는 죄의 씨앗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일정한 나이가 되어 자아를 자각할 때까지는 발현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자들은 죄를 자각하지 못하는 어린아이(7세 혹은 9세 등 여러 설이 있음)가 죽으면, 자범죄가 없기 때문에 심판받지 않고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에 들어 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국은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19:14)는 말씀은 천국 백성들이 가지는 특질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들의 머리는 뱀과 같이 냉철하나, 그 마음은 그들을 위해 죽으신 주님을 닮아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신자가 분별력이 없으면 어린아이의 신앙이고, 선한 양심이 없다면 그 믿음은 이미 끝장난 것입니다. “믿음과 맑은 양심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을 저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파선을 당했습니다.”(딤전1:19, 공동번역).
위성 시대에 살고 있는 한 어린이가 자기 아버지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우린 이제 또 하나의 별을 하늘에 올려 놓았단다. 금방 사람이 타고 있는 인공 위성을 띄웠거든.” 소년이 물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다른 별들은 누가 거기다 놓았어요?” 기독교 신자가 아닌 소년의 아버지는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겨우 몇 사람을 태운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 속에 올려 놓는데 그렇게 많은 천재와 기술과 지적 명석함이 필요했다면, 하늘을 꽉 메운 수많은 별들을 창조하는 데에는 훨씬 더 위대한 지성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인공 위성의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과거 그리스의 철학자 프톨레미는 만약 지구가 자전한다면 광풍에 의하여 지구는 초토화 되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전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구가 모든 물체를 잡아 다니는 중력 때문에 우리는 지구와 함께 돌고 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아는 현대인들은 프톨레미의 주장을 일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구나 별이나 모두 인간이 있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고, 이들 하나 하나의 존재는 엄청난 지혜의 산물들입니다. 여기에 시간의 문제까지 도입하면 현명하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은 돌연 무식을 자인하고 뒤로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공간, 지구, 별들, 시간 모두는 창조주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연만을 보고는 그토록 지혜가 충만한 창조주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창조주를 계시하기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만물- 공간, 시간, 지구, 사람, 우주 등등 -을 창조하셨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이적들, 특히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들은 바로 주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알려주는 표적들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창조의 공로를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유일한 목적과 소원은 성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면 내 교훈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내가 마음대로 말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요7:16-17).
어떤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믿음은 산을 옮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지요? 아빠가 마지막으로 산을 옮긴 때는 언제였어요?” 그 아버지는 당황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요? “믿음은 산을 옮긴다”는 말의 근거는 마가복음 11장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일요일에 이른바 승리의 입성을 하신 뒤 저녁이 되어 베다니로 가신 주님은 다음날 아침 베다니에서 나오셨을 때 시장하셨습니다. 멀리서 잎사귀가 무성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대제사장들과 변론하신 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이튿날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는데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뿌리채 말라 죽어 있었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랍비여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하며 놀라니, 주님은 이에 대하여 믿음의 교훈을 주셨습니다. 첫 말씀이 “하나님을 믿으라”였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2-23) 하셨습니다. 위의 어린 아이는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알프스나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진짜 산을 이리 저리 옮긴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감정의 기복이 심한 인간에게 맡겨져 있었다면 일찌감치 세상은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산과 같은 어려운 문제라고 하더라도, 주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옮겨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면 해결된다는 교훈을 주신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실 이 축복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마지막으로 산을 옮긴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물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히11:1-2, 현대인의 성경).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녀 아멜리가 여덟 살 때 물었습니다. “할아버진 공산주의 감옥에 계셨죠. 그런데 어떻게 자유 세계로 오시게 됐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기독교 단체들이 오천 파운드의 보석금을 내고 자신을 서방 세계로 데려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멜리는 한참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진 십사 년이나 감옥에 있었어요. 서방 그리스도인들이 만 달러를 모금하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려야 했나요?” 목사님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더깊은 곳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최초의 선교사로 중국 내륙에 갔을 때, 그의 전도를 받고 개종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네 영국 사람들은 얼마 동안 복음을 알고 있었습니까?” “일천 육백 년 동안요” “그렇다면 당신들은 왜 이렇게 늦게 왔습니까? 우리 부모님과 조상들은 죄 속에서 돌아가셨고, 바깥 어둠 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위 두 사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분야의 책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첫째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추방당하고, 죽임을 당하여 그분들의 가족이 어려움을 당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는 기도와 물질로 이들을 도와야만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할 것이, 발전해 나가는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이 신앙과 직업에 대한 가치관의 정립이 없고, 실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그들이 성년이 되었을 때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마땅히 이 문제의 해결에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둘째는 믿지 않는 이웃에 대한 선교의 책임감입니다. 그 이웃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가족과 친족 가운데 있습니다. 이들을 위한 선교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서 출발하여야만 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그들 자신의 차이를 발견하기까지 그리스도 안으로 오지를 않습니다. 이를 도우시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성령님 안에서 늘 기도할 수 있게 힘써야만 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깊은 통찰력으로 점점 풍성하여 여러분이 최선의 것을 분별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까지 순결하고 흠 없이 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기도합니다.”(빌1:9-11, 현대인의 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