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4. 22 – 26

오늘부터 부부 사이의 문제를 정리하고 부모와 자녀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유교의 가르침인 삼강 오륜이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기준이 되어왔습니다. 삼강은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고[君爲臣綱(군위신강)], 어버이는 자식의 근본이며[父爲子綱(부위자강)], 남편은 부인의 근본[夫爲婦綱(부위부강)]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오륜은 군신유의, 부자유친, 부부유별, 붕우유신, 장유유서이며 그 중 부자유친(父子有親)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는 친애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친애는 본능적이고 천성적인 사랑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교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일반계시에 터잡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녀에 대하여는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 하셨고, 부모에 대하여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는 지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유교의 기준인 임금이나 아버지나 남편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만유의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기준이 됨으로 보다 분명하고 차원높은 실천 강령을 주셨습니다.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이런 성경의 가르침이 실현되려면 먼저 부모는 자녀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 어머니는 남편에게 하기를 주께 하듯 하는 어머니이며, 그 아버지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셔서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는 아버지입니다. 이런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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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성경말씀: 눅 4:1-4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다’라는 자신의 책에서 “하나님 때문에 굶어 본 적이 있는가?’ 제목하에 샘물교회를 개척하신 박은조 목사님의 개척 당시의 고백입니다. 서울영동교회에서 17년을 사역하면서 이제 분립개척을 하기 위해 준비하던 9월 어느날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고 서재에 올라와서 누가복음 4장1-4을 읽게 되었습니다. 수도 없이 많이 읽은 본문이었으며, 다음 주일에 설교할 본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신 것과 비교하면서, 개척이라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는 자신과 서울영동교회가 어떻게 인도하심을 받을 것인가에 대하여 계속해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제목은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을 묵상하고 있는 데 갑자기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시고 배가 고프신 상태에서 사역을 시작하셨구나” 라는 생각이 목사님에게 들었습니다. 사단은 그런 예수님에게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했으며,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돌을 떡으로 만드셔서 배고픔을 면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먹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 예수도 이렇게 굶으면서 사역을 시작했다. 너는 나 때문에 굶어 본 적이 있느냐?” 이런 질문이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목사님은 의자에서 미끄러져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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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4.16-20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4:12). 솔로몬은 여기서 자신의 아내를 두가지 은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잠근 동산’이고 또 하나는 ‘봉한 샘’입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남편에게 아내의 즐거움들을 열어 채워주라는 호소입니다. 성경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로부터 여인을 우물 또는 샘으로 표현한 고전이 더러 있습니다. 우물은 샘과 함께 근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는 기쁨의 근원이요, 행복의 근원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뿌리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아내를 샘이라고 표현합니다. 만약 샘이 없다면 갈증을 다스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갈증이 극도에 달하면 죽게 됩니다. 가정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마땅히 시원한 생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아내가 제대로 구실을 못하면 그 가정은 삭막한 사막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부가 서로에게 있어서 항상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부부의 행복을 지키는 열쇠, 곧 부부의 황금률은 무엇이겠습니까? 옥한흠 목사님은 그것을 3가지로 요약하여 말씀하십니다: (1) 마음을 지키라 (2) 서로 헌신하라 (3) 서로 만족하라. 이런 말씀을 실천하기 쉽지 않아 보이며, 어느 가정에서는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만, 이 모든 것은 부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가정에 주인이 된다면 가능해진다는 진리를 우리는 배우고 깨달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만유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우고 인간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살기를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혹은 남편을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난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

옥목사님이 말씀하신 부부의 황금률 3가지 중 첫 번째는 마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배우자를 위해서 항상 마음을 곧게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결혼식의 서약 시간에 주례자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겠다고 서약하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한 부부는 서로가 완전히 내맡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른 데로 향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배우자에게만 쏟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 의식입니다. 그런즉 남녀가 결혼을 하면 운명공동체가 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관계는 부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항상 믿을 수 있는 관계 또한 부부인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부 관계는 감정에 근거를 둔 사랑일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누구도 자신의 감정이 일생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 후 3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특히 남자들의 마음이 해이하여지기 쉽습니다. 자녀들을 다 키운 부부의 경우 늘상 똑 같은 상황에 결혼 생활을 권태롭게 여길 수 있습니다. 50이 넘은 부부의 경우 심지어 자녀들을 키우는 공동의 책임이 끝났다고 느껴 남편의 그늘에서 혹은 아내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여 이혼을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것이 요사이 현실입니다. 이때 “나는 내 아내(혹은 남편)에게만 마음을 주기로 서약했다. 그런데 혹시나 마음이 흐트러져 있지는 않은가?” 하고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결혼 서약을 포함하여 우리 각 자의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 직고할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옥목사님의 황금률 두 번째는 서로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중심적인 결혼 생활만큼 비극이 없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랑과 결혼을 구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는 희생이 따르니까 결혼을 기피하는 젊은이가 많은 것입니다. 행복한 부부 생활을 하려면 서로를 위해 도와주어야 할 일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인격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을 볼 때 인격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을지라도 바로 이때 남편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인격을 성숙시켜 주기 위해서 희생하지 않는 한 그 아내의 인격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들을 생각할 때 다른 남편들에 비해 어딘가 뒤떨어지고 마음에 존경이 가지 않는 약점이 눈에 보일지 모릅니다. 바로 이때가 아내들이 남편을 위해서 희생해야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그 희생을 통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게 됩니다. 부부의 성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의 모난 성격이 아내의 덕을 통하여 깎여야 하며, 아내의 비뚤어진 성격이 남편의 건전한 성격을 통하여 점차 바로잡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부가 상부상조하는 것입니다. 만약 부부가 서로의 인격성숙을 위하여 봉사하고 희생해 주지 못한다면 그 부부는 노년에 가서 후회하게 됩니다. 존 포웰이라는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만들어가는 것이며 이런 것이 부부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옥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세 번째 부부의 황금률은 서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만족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완전하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성숙하고 훈련될 때 비로소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만족시켜 줄 만큼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은 그만큼 만족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요, 훈련받는 것이요, 질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허물 투성이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완전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부부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완전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가정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가정에 주인이 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남편이나 아내 모두 주님 앞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주님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을 검토 받을 때 주님이 부부의 허물을 깨닫게 하시고 또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가정에 모시고 사는 한 그 가정의 행복은 유지될 수 있지만, 가정의 주인이 주님이 되지 아나히는 부부는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기에 언제든지 서로를 비난하고, 보이는 흠을 기회로 삼아 불만족하려는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인이 된 부부나 가정은 항상 가정의 주인되신 주님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이런 유혹을 이겨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본받아 서로 받아 주는 삶을 영위함으로 인격의 성숙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7).

우리 가운데 아직도 이기주의적 신앙, 이기주의적 결혼 생활을 고수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아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무엇입니까? 남편이 그것을 발견하여 도와주십시오. 남편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위해서 아내가 밑거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부부는 균형 있는 성장을 이룰 수가 있으며 서로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습니다. 아내 혹은 남편을 위해 도와주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이런 가운데 부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 대화를 나눌 때 문제를 해결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이것이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4-6).

수요일터예배

요한복음 12:23-26

조세핀 캠벨은 1852년 미국에서 태어나 1920년 한국에서 죽어 양화진에 묻힌 독신 여선교사입니다. 이분은 27살에 남편과 사별하고 두 자녀도 병으로 잃자 다른 사람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시카고의 간호학교에서 수련하였습니다. 그리고 33세에 중국 선교사로 나가서 상해와 소주에서 10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선교사로 일하면서 익숙해졌을 무렵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 여학교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캠벨 선교사는 45세의 나이였으나 이에 다시 결단하여 1897년서울에 남감리화 최초의 여성 선교사로 파송되어 한국에 왔고 이어 1898년 10월 고간동(현 내자동)에 세운 학교가 배화여고입니다. 배화여고의 처음 이름은 캐롤라이나 지역 주일학교 학생들의 정성을 기려 캐롤라이나 학당이라 하였고 1903년 학부의 인가를 받으면서 윤치호가 ‘배화’ 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기숙학교로서 6명의 학생을 받아들여 가르쳤습니다. 이 학교는 학생들을 기숙사에 수용하고 24시간 신앙 교육이 가능하였습니다. 한국인들도 반응이 좋았습니다. 공짜로 재워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주고, 가르쳐 준다니까 가난한 집 아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결과 개교 1년 만에 학생이 20명으로 늘어 1900년 봄 2층짜리 벽돌 건물 두 채를 지어 교사와 선교사 주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1912년 세브란스 병원 에비슨 원장이 결핵균 등의 감염을 우려하여 새 교사로 이전할 것을 강력히 권고함으로 ‘고간동 선교부 시대’를 15년 만에 막을 내리고(현재는 서울시 경찰청사 앞마다임) 옮겨 간 곳이 필운동입니다. 필운동에 있는 필운대 바로 아래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권율 장군이 살았으며, 맏 사위 백사 이항복에게 집을 물려주고 행촌동으로 옮겨간 곳입니다. 배화 여학교와 남감리회 여선교부가 옮겨 간 곳이 바로 이항복의 생가가 있던 필운대 아래 누하동 149번지였습니다. 1915년 1월 이곳 4000여평의 부지에 160여 평 규모의 2층 벽돌 건물을 짓고 학교를 옮겼습니다. 배화 여고는 민족운동가 남궁억 선생이 여학생들에게 조선역사, 한글 서예, 무궁화 수예를 가르쳤으며, 미국 유학을 다녀온 개화여성 차미리사가 민주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3.1운동 때 나타나 배화 학생 배화 여고 교사 들이 선언서를 시내에 배포하였으며, 3.1운동 1주년을 맞아 1920년 3.1일 새벽 기숙사에 있던 학생 40여명이 필운대 언덕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가 구속되었고 1달만에 집행유예로 석방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세운동 후 배화의 인기는 더 올라가 학생 수가 400명을 넘었습니다. 한편, 배화 여고를 세운 선교사 조세핀 캠벨은 1918년 안식년을 가서 병을 치료하다가 3.1운동 소식을 듣고 조선이 자신이 묻힐 곳이라고 판단하여 한국에 와서 1920년 11월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68세였습니다. 이 배화여고의 학생 중 한 명이 육영수 여사입니다. 한 알의 밀알로 가난과 무지로 찌들은 조선 여자들의 교육을 위해 희생한 캠벨 선교사의 일생은 이 나라 여성교육의 큰 이정표를 마련하였고 지금은 5만명에 이르는 배화 동문으로 성장하는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매일말씀나눔

2018. 4. 9 -13

아내는 남편이 세상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 냉정하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자신만큼은 자상하게 배려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질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크리스천 작가의 고백입니다. “나는 해외 여행을 자주 하는 편인데 비행기 화장실에 가면 거울 밑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다음 손님을 위해 물기를 닦아주세요’ 나는 세면을 한 후에 정말 열심히 물기를 닦는다. 어떨 때는 내 앞사람이 어질러놓고 간 휴지 조각이나 거울에 낀 때와 바닥의 물기까지 깨끗하게 청소한다. ‘그럼 남을 배려해야지’ 하며 아무리 피곤해도 그 일을 거른 적이 없다. 그리고 나처럼 깨끗이 정리하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뭐 저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이 있어? 기본이 안 된 사람들이구먼’ 그런데 막상 집에 오면 문제가 달라진다. 아내와 함께 화장실을 사용하지만 아내를 의식해서 배려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세면대 위의 물이며 거울에 튄 비누 거품, 제대로 닫지 않은 치약 뚜껑, 흩어진 머리카락 등등 신경쓰여도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나오기 일쑤였다.’ 사실 남편들은 ‘전혀 모르는 남보다 더 대접을 받지 못하는 아내’ 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시선을 돌려서 내 아내도 나에게 그런 대접을 받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을 이루는 방법은 바로 이런 것이고, 주님이 명령하신 이웃 사랑의 실천은 역시 자신의 아내에게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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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성경구절 : 마태복음 17:22-27

믿음은 문제가 발생하여야 한 단계 발전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이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사건을 이끌고 계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이 믿음이 자라게 되어 큰 믿음으로 인정되려면 말씀과 상식을 근거로 신앙의 문제를 추론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특별계시이며 상식은 일반계시를 통한 지식이 집적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얻은 권리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권리 행사는 사랑의 목적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 혹시 사랑의 법에 위반되는 것이 있지 않는가 생각한 뒤 믿음의 권리를 행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게 될 것이며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삶은 하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대전에 계시는 어떤 목사님은 90년 초에 교회를 개척하실 때 건물 보증금으로 지급할 중도금 28,000,000원이 필요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도금을 지불할 날이 내일로 다가왔어도 전혀 수중에 돈이 없어 매우 당황스러워 하던 차에 손 아래 누이동생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인삼을 사고 팔아 남은 돈이라고 하면서 봉투하나를 주고 가더랍니다. 그래 열어보았더니 아! 중도금 28,000,000원이 한푼의 차이도 없이 남거나 모자르지도 않게 거기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은혜는 말로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1세겔을 가진 물고기의 기적이 재현된 것이지요! 이런 주님을 우리는 신뢰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기적을 체험하는 방법은 필요요건과 충분요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필요요건으로 3가지가 필요합니다. (1)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핵심은 경외와 순종입니다. 이는 기적의 주관적인 요소입니다. (2)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여야 합니다. 이는 기적의 객관적인 요소입니다. (3) 약속에 근거하던지 아니면 말씀과 상식에서 추론하여 기적이 일어날 타당한 이유와 논리를 개발한 뒤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는 기적의 정당성 요소입니다. 충분요건으로 (4) 받은 줄로 믿고 인내하여야 합니다. 이는 기적의 충분요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