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C 매일큐티

제 9 계명 & 제 10 계명 (2016.1.25~1.29)

2016.1.25
거짓 증언을 금하는 9계명은 진실한 증언에 대한 책임을 동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진리라고 주장하셨으며,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혐오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은 신뢰할 수 있다는 인정을 받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끄럽지 않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016.1.26
거짓 증언과 진실한 증언은 모두 혀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이 계명은 선이나 악을 초래 할 수 있는, 인간의 혀가 지닌 엄청난 위력을 상기시켜 줍니다. 혀는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 하며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약 3:1-6). 비록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너무나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 (약3:8)는 사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또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1:26)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혀를 제어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했던 기도를 쉬지 않고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울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

 

제10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2016.1.27
마지막 계명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 계명을 통해서 십계명이 시민법에서 도덕법으로, 외적인 행위에 비중을 둔 법에서 내적인 경건에 관심을 둔 법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품었다고 해서 법정에 고소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탐욕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도둑질의 관계는 분노와 살인, 음욕과 간음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죄악, 심지어 범죄 행위로 발전할 성향이 다분하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2016.1.28
이 계명은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것을 통감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는 자신이 흠이 없다고 믿었으며 외적인 의에 비추어 볼 때 그러했습니다. 빌립보서에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의 자전적 고백을 들으면 이와 같습니다 :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하고 “탐내지 말라” 고 한 율법의 10번째 계명을 접했을 때 그는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몰랐다면 죄가 무엇인지 자신은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이 계명이 그의 마음 상태를 환히 보여 주는 바람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롬 7:7-12).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로마서 7장을 읽기를 권합니다.

 

2016.1.29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참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 이다 라고 말했습니다(엡5:5). 이 말씀은 탐욕이 인간에 대한 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 이상으로 그보다 더 크게 무엇인가를(혹은 누군가를) 갈망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리를 다른 그 무엇(누구)에게 내주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탐욕은 이기심입니다. 사실 이 계명은 소비 사회의 탐욕과,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냉소적인 무관심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탐욕의 반대는 만족입니다. 만족은 오늘날의 세계에서보다 신약 성경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히13:5).
 

믿음의 ABC

믿음의 ABC (다윗과 골리앗)사무엘 상 17장

굳센 믿음을 가지고 싶다 –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꾸 들으면 됩니다. 믿음을 실제의 삶에 적용하고 싶다 – 믿음의 ABC를 가지고 시작하면 됩니다 오늘은 사무엘상 17장31-54절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소재로 믿음의 ABC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A –Accentuate positive aspects: 난관을 돌파할 지혜가 나올 때까지, 적의 강점&약점, 나의 강점&약점

어려움에 봉착하였을 때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십시요. 믿음은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남겨두신 것이 무엇인가 헤아리는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길을 찾아나서기를 바랍니다.

엘라 골짜기에 골리앗이 등장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 중에 필적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키는 3미터 정도되고 갑옷만 57킬로 그램의 무게에 머리에는 놋투구를 쓰고 전신을 무장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한 숨만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다윗이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어떻게?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책의 저자인 Malcolm Cladwell 은 그 이유를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사울 왕은 신체적인 힘을 기준으로 힘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힘이라는 것이 다른 형태로 – 규칙을 깨뜨린다든지, 힘을 대체할 스피드나 기습과 같은 – 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 전체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 같은 실수는 오늘날도 많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점이 있습니다. 사울과 이스라엘은 골리앗이 누구라는 것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골리앗의 신장과 여러 체격조건을 보고는 결론을 내리기를 우리는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골리앗의 약점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성서에 기록된 골리앗의 행동을 보면 여러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는 방패를 든 소년과 함께 평지로 내려왔습니다. 방패를 든 사람들은 고대에 궁사를 동반하여 전투에 참가하곤 했는데 이는 궁사는 자신을 보호할 방패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대일 칼싸움에서 골리앗은 왜 방패를 든 소년이 필요하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더 나아가 왜 다윗에게 “내게로 오라”고 말하였을까요? 성경은 골리앗이 천천히 움직인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다윗에게 신속하게 다가가지를 못하였습니다. 막대기 한 개만을 가지고 간 다윗을 보고 “막대기들 sticks” 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현재 많은 의학 전문가들이 믿고 있는 바는 골리앗이 소위 acromegaly(거인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키가 큰 사람은 Robert Wadlow 였는데 이 사람이 거인증으로 고통을 당하였고(2미터 70센티) 죽을 때도 계속 자라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인증에는 공통된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신경을 압박하여 심각하게 시력이 제한되거나, 이중으로 보이는 시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인도할 소년이 필요하였습니다.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윗이 자기에게 올 때까지 다윗을 잘 볼 수 없었고 무슨 전략으로 자기를 칠지 잘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오라” 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들고 있는 막대기는 두 개로 보였습니다. 산등성이에서 멀리 이스라엘이 보았던 것은 엄청나게 무서운 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거인의 거대함 자체가 그 거인에게 약점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종류의 거인들과 싸우는데 있어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강력하고 힘있어 보이는 자는 그들이 보이는 것처럼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를 간파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강점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물매를 던지는 기술에는 달인이 되어 사자와 곰에게 던져 이들을 물리치는 경험도 여러 번 하였습니다. 고대 근동의 전쟁은 중장보병, 기병, 궁사나 물매와 같은 무기로 무장한 발사체 군사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중장 보병은 기병에 강하나, 움직임이 둔하여 발사체 군사들에게는 치명적으로 약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병은 발사체 군사들이 맞추기 어려운 빠른 움직임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에게는 강하였습니다. 다윗은 움직임이 둔한 골리앗에게 가서 물매를 던지면 정확히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매는 초당 34미터를 날라가기에 35미터에 접근하였을 때 순식간에 골리앗의 유일한 약점인 이마에 던져 기절 시키거나 두개골을 쪼개고도 남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45구경 권총을 들고 칼을 찬 사람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군복과 칼을 버린 것입니다.

Believe in the promise of the Lord: 주님의 약속을 믿어라 약속을 믿어야 용기가 오고 용기가 와야 지혜를 실현하여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1Sa 17:45-47 KOR)

약속을 믿고 나갈 때 우리의 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예로 다윗의 예를 든다- 사울 왕을 엔게디 동굴에서 살려보낸 것. 심지어 예언이 성취된 사례이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돌에서 떡을 만들어내라고 주문하단든지, 하나님의 기적 아니면 헤어날길이 없도록 자신의 환경을 만든다든지 하는 태도는 죄악된 태도입니다.

Commit yourself to the Lord: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다윗은 용기와 믿음에 의해 능력을 받고 골리앗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이 재빠르게 접근하는 것을 잘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너무 크고 느리고 흐릿한 시력을 가져 다윗이 생각하는 전략을 알아채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은 능동과 수동이 잘 어우러져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 힘을 벗어난 것은 수동이 어울리는 지점입니다.

 

 Gino D’Achille – David and Goliath from the Bible Stories (1968)

육신의 혈통과 그리스도

말씀봉독: 누가복음 3:23-38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나시기까지 77명의 족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담 이래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손에 붙잡혀 하나님을 멀리 떠난 모든 인류의 구원자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강한 자가 집을 지키고 있을 때에는 아무도 세간살이를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강한 자가 오면 빼앗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더 강한 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나셔서 강한 자인 마귀를 결박하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믿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족보에 열거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보면서 살아갔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상이고 덧 없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보내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만이 이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1.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바라보고 산 믿음의 조상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매일큐티

제 8계명 도둑질 하지 말라 & 제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2016.1.18~1.22)

2016.1.18
8계명은 사유 재산을 보유하고 그것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질서 있고 안전한 사회는 우리의 소유와 상대방의 소유에 대한 명확한 구별을 인정합니다. 그러한 구별을 흐리는 것은 언제나 반사회적인 일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소유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재산을 맡았을 뿐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재산권을 인정해 주어야 하며,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런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8계명은 적용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온갖 종류의 부정직과 속임수, 음모, 부당한 과잉 요구, 암거래, 정해진 시간보다 적게 일하는 것, 탈세 및 관세를 피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말과 행실이 정직하다고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2016.1.19
한편 만약 우리가 8계명을 범했다면 당연히 우리가 취했던 것을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규례에 따르면, 손해 배상은 단순한 상환이상이었습니다. 예컨데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마리로 갚을지니라”(출22:1) 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부정직한 세리였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였을 때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요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일제 시대에 청소년기를 지냈습니다. 어느 일본인 집에 물건을 팔러 들어갔다가 그 집 주인의 구두가 너무나 탐이나서 가지고 도망을 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마다 도둑질 한 것이 생각이 나서 할 수 없이 그 일본인에게 울면서 돌려주었더니 그 일본인이 놀라 그 이유를 묻고는 너무나 감격을 하여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었다는 간증을 들은 바 있습니다. 회개하는 능력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2016.1.20
도둑질을 금하는 8계명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장려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며,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위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부정직한 삶을 살다가 회심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훌륭한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도둑질 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도둑에서 일꾼으로 그리고 구제하는 자로 변화하는 것, 오직 복음만이 그와 같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2016.1.21
6,7,8 계명은 각각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고, 가정과 가족을 보호하고, 재산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반면에 제9계명은 거짓 증거로부터 사람의 명성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사실 좋은 평판이야말로 최상의 보물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22:1)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서 명예를 빼앗는다면 그것은 강도짓이나 마찬가지며, 명예를 훼손하는 일은 살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인격살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9계명이 적용되는 범위는 매우 넓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16.1.22
제9계명이 적용되는 첫 번째 상황은 바로 법정입니다. 재판장과 배심원이 고소인과 변호인의 심리를 각가가 청취할 때, 대개 피고인의 운명은 서약하고 증언하기 위해 소환된 증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불려 나온 증인은 심문과 그에 대한 반대 심문을 받게 됩니다. 위증은 극악한 범죄 행위로 결코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거짓 증인들의 손에 고난을 당한 죄수가 어디 예수님뿐이겠습니까? 거짓 증언은 비단 법정뿐만 아니라 가정, 직장 혹은 더 큰 공동체에서 중상모략 내지는 악의적인 험담 형태로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뒤에서 수근수근거리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망론된 폄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고 2천년전 사도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는 말들은 별식과 같아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내려갑니다. 우리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때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중생이란…

중생이란 하나님의 뜻이 새겨져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그 뜻을 이루고자 성경을 통하여 구체적인 삶 가운데서 분별할 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최영의 (배달)씨를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분은 맨 손으로 소의 뿔을 짜르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손 날을 세워 따닥하고 치면 소의 뿔 두개가 전부 잘라진다고 합니다. 대단한 기술과 힘입니다. 곽선희 목사님의 친구 중에 당수를 배운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 어느 날 학교를 갔다 오다가 소에게 일격을 가했는데 그만 소가 죽어 버렸습니다. 그 소임자가 친구 아버님에게 가서 소 값을 물어내라고 야단 법석을 떨었습니다. 친구 아버님은 자기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너 왜 가만히 있는 소를 죽였냐?” 하고 물으니 “소가 나를 째려 보아서 기분이 나빠 죽였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소 값을 물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를 안 친구는 아버지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여기까지 저를 사랑하셨으니 이제는 제가 올바르게 살겠습니다” 후에 그 친구는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행동을 고치는데는 은혜를 주는 것이 최고입니다. 감사함이 나오면 저절로 행동은 고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알코올중독과 같은 것은 다른 조치를 쥐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백년간 애굽 땅에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그 노예살이가 얼마나 심했으면 쇠풀무라고 이야기 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력이 전혀 없이 오직 모세를 보내사 이들을 당신의 기적으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물과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생존하게 하신 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그 후에 가나안 땅을 그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구속하시고 또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연한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져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 뜻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냥 노예살이를 벗어나게 하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너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너희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길에 행할 때에든지 자리에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앉았을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들은 하나님께 반역하여 결국 국가가 멸망하여 바벨론의 포수로 끌려갔고 돌아와서 다시 번성하였으나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죄를 저질러 온 세계에 흩어지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억과 하나님의 말씀의 암기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그 만큼 악하고 우리 주변에는 마귀가 진을 치고 밤낮 우리를 유혹할 방법을 연구하고 실행하고, 세상은 살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 당신 사이에 놓여있는 율법의 정죄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외치는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을 포함한 도덕적 질서는 당신이 천지를 창조하신 바로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한 획이 떨어지느니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형상으로 보내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육신 속에 있는 죄를 정죄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의 삯을 다 청산하셔서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이루셨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의롭다하심을 모든 자에게 보여주셨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역시 의롭다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지고 죽으셨다는 소식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율법을 두시고, 우리의 생각 속에 당신의 법들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빌트인 (built in)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이런 사람들 즉, 중생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중생한 사람들은 성경 구절을 암기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새겨져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그 뜻을 이루고자 성경을 통하여 구체적인 삶 가운데서 분별할 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들어오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사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깨닫게 하시는 것으로 그 가르침에 굳게 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삽화: 신예현, putting the good work into practice (2016) lifeisyea.com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3장 15 – 22절

자신은 고작 물로 침례를 주고 있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침례를 베푸실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침례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 심중에 의논할 때 요한은 밝히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가장 큰 일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사람들 가운데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침례를 받으러 오는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히 지적하여 이스라엘에 알렸습니다. 그는 훌륭하게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 서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요한은 겸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은 고작 물로 침례를 주고 있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침례를 베푸실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행하실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죄인들과 같은 대열에 서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신 모습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태도를 본받아만 하겠습니다.

 

1. 침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은 침례 요한의 겸손함의 원천이었습니다.
3. 그러나 진정한 겸손을 위해서는 죄인들과 함께 침례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야만 합니다

 

매일 큐티

2016. 1. 11-15
제 7 계명. 간음하지 말라

2016.1.11
제 7계명은 각 사회의 결혼제도와 관련하여 이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일컫는 야곱의 경우 4명의 아내가 있었으며 제 7계명이 시내산에서 선포되었을 때의 이스라엘의 상황 역시 일부 다처제였습니다. 이후 제정된 모세 율법만 보더라도 명백히 동거 목적으로 계집 종들을 살 수 있었습니다(출21:7-11). 이런 상황에서 7계명은 남편이 있는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질 때만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간음의 문제를 다룬 산상수훈에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 28)고 하심으로 행위에서 마음의 문제로 이전을 하셨고, 이혼에 관해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단수)와 여자(단수)로 지으시고”(마19: 4) 라고 말씀하심으로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일부일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암시하셨으며,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이 집사와 장로의 임명 조건으로 “한 아내의 남편” (딤후3: 2, 12)을 두 번이나 강조하여 기록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일부일처에 근거하여 제 7계명을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2016.1.12
그리스도인은 성(性)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로 태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 (창1:27) 하셨다는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성(남성과 여성)이 하나님에 의해 고안된 사실과 이는 자녀 출산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두 배우자가 서로 만족을 느끼도록 결혼을 제정하신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결혼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창2:24). 예수님도 앞에 언급하신 두 구절을 친히 소개하시면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막10:6-9)고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바울 역시 남편과 아내의 서로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와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아름다운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엡 5:21-33). 제7계명은 이런 진리를 배경으로 의의를 갖습니다.

 
2016.1.13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제정하신 것은 결혼이라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상황을 통해서만 우리가 성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밖의 다른 모든 상황에서의 성적인 쾌락은 금하시는 것입니다. 제 7계명에서는 오직 간음만을 구체적으로 정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기혼자가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을 경우(대개는 속임으로), 배우자와 원래 약속했던 정절을 부정하고 동시에 자녀들의 성장에도 심한 타격을 줌으로써 결혼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성적 부도덕 행위들도 결혼의 뿌리를 흔들어 놓는다는 점에서 제7계명 속에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016.1.14
제7계명 속에 함축된 여타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혼외정사와 혼전동거를 먼저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성관계들은 서로에 대한 헌신이 결여된 사랑을 경험하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한쪽 배우자는 오랜 기간 관계를 지속하기를 바라는 열망이 간절한 반면에 다른 쪽 배우자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이런 관계는 상대방에게 잔인한 처사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성 간의 결혼이 이성 간의 결혼 관계에 대한 합법적인 대안이라는 ‘동성애’ 단체의 주장을 그리스도인은 물론 모든 사람이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자연의 질서에 역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승인하신 ‘한 몸’의 체험은 오로지 이성 간의 일부일처 관계 속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2016.1.15
7계명과 관련하여 일생 독신으로 사시다가 90살에 소천하신 존 스타트 목사님의 말씀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적인 충동이 너무 강력해 제어할 수 없다는 주장을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동의하는 것은 인간 존재를 동물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아도, 또 그 유혹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주장하는 간증입니다 (고전10:13). 따라서 우리는 성적인 자기제어가 가능하며, “음행을 피해야” 하고, 또한 그분이 “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만 합니다(고전 6:18-20).’

 

소렉 골짜기와 삼손

소렉 골짜기와 삼손 (사사기 13-16)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있을 때 블레셋민족이 가나안 땅 서쪽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점이 대략 비시1,200년경이었다. 이들은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 이렇게 다섯 성읍을 일으켰고 각자 왕이 있어 다스렸다. 이런 강력한 요새와 우월한 병기를 가지고 동쪽 산지에 자리를 잡은 이스라엘을 압박하였다. 이들은 가나안 중부지역에 위치한 쉐펠라(Shephelah- 히브리어: “낮은(low)”) 지역을 통과하여 이스라엘과 접촉하거나 칩입할 수 있었다. 쉐펠라 지역은 통상 “낮은 땅”으로 번역되며, 해변 평야와 유다 산지 사이에 있는 평야지대로서 동서의 길이 약 20킬로미터정도 되고 여러 낮은 구릉들을 가지고 있었다. 쉐펠라 지역은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아얄론 골짜기, 소렉골짜기, 엘라골짜기, 구브린골짜기, 라기스골짜기까지 중요한 5개의 계곡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풍부한 비와 비옥한 토양으로 인해 곡창이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완충작용을 하는 지역이어서,이스라엘 특히 유다와 벤야민 족속의 안전은 이 지역을 침입하는 블레셋 군대를 얼마나 잘 방어하는가에 딸려 있었다.

이 쉐펠라 지역 중 하나가 바로 삼손이 태어나고 자란 소렉골짜기이며, 그의 첫번째 블레셋과의 접촉도 바로 이 소렉골짜기 서쪽 끝에 위치한 마을 딤나였다(사14-15). 딤나에서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잔치를 여는 중 내기에 진 삼손은 여기서 약 38킬로 떨어진 블레셋 성읍 중 하나인 아스글론으로 내려가서 30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의복을 가져다 주었다. 또 한편 자신의 아내를 타인에게 준 것을 빌미 삼아 블레셋을 쳐서 1천명을 죽인 곳도 소렉골짜기 북쪽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레히라는 지역이었다. 이 후 20년간을 이스라엘 사사로 있으면서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소렉 골짜기에 사는 여인 들릴라의 배신으로 가사(삼손의 고향 소라에서 약60킬로 떨어진 남서쪽 해안지대에 위치한 성읍) 로 끌려가 두 눈이 뽑히어 맷돌을 돌렸지만, 하나님의 마지막 은혜로 힘이 회복되었고, 자신이 죽으면서 다곤신당을 무너뜨려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였다. 그 결과 삼손이 죽을 때 죽인 블레셋 사람이 살아있을 때 죽인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사16:30).

삼손은 모든 그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가장 큰 적인 마귀,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앞으로 주어질 영원한 구원의 토대를 놓으신 것처럼(히2:14-15; 벧전1:3-5), 그도 죽음으로써 다곤 신당과 이스라엘의 가장 큰 원수인 블레셋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72-7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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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by Yea Hyun Shin  

회개의 열매와 그리스도

회개의 열매와 그리스도 (눅 3:7-14)

침례 요한이 온 유대에 회개하라고 외치자 많은 사람들이 요단 강으로 나와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침례라는 의식을 통해서도, 입술의 고백만으로서도, 아브라함과 혈통적인 관계를 가지고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어떻게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 가운데서 정직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함으로써 맺어지는 것이지 유벽한 산이나 인적이 없는 광야에서 홀로 수양하면서 맺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이런 의미에서 서로 나눠주는 삶을 영위하고, 세리와 군인들에게는 정당한 세금과 봉급만을 받고 살아갈 것을 가르쳤습니다. 마지막으로 비록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그 회개의 뿌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속죄와 용서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면 우리는 결코 죄의 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진리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SBC 매일큐티

SBC 매일큐티 (2016/1/4~2016/1/8)

이웃을 향한 사랑: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롬13:10). 이 말씀과 같이 소극적으로 볼 때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말이나 행동으로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것 이라고 요약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 7:12)는 황금률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의 이익을 바라며 그들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도록 섬겨야 할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서 남은 다섯 가지 계명은 이웃을 향한 사랑에 역행하는 다섯 가지 범죄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어떤 이들은 이 계명을 인간 생명을 취하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금지 조항으로 여기고 그와 같이 주장하는데 대표적인 사람들이 사형제도의 폐지론자와 평화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제6계명에 대한 맞지 않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율법이 극단적인 경우에 형벌로써 사형을 규정하고 있으며, 또한 가나안 족속과의 거룩한 전쟁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6 계명이 금하는 것은 인간 생명에 대한 불법적인 살생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거듭 정죄를 받았던 최악의 범죄 가운데 하나가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도피성과 같은 제도를 두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동물을 포함한 일반적인 생명의 신성함보다는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인은 하나님이 특별히 창조하신 피조물에 대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계명의 범위를 살인을 행하는 행위에서 더 나아가 우리의 말과 심지어 생각으로까지 확대하여 적용하셨다는 점을 유의해야만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히브리인의 욕설임)라 하는 자는 공회 (유대인 최고재판소 역할을 하는 산헤드린을 의미)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5:22). 이 말씀의 의미는 부당하게 화를 내는 것과 욕을 하는 것도 살인을 저지르는 것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5:23-24) 고 가르쳐 주심으로 형제를 부당히 분노하게 만드는 행위 역시 살인 죄에 해당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급진적인 규범입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인간 생명의 신성함이야말로 구약에서 사형이라는 형벌이 제정된 근거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창9:6). 성경에 따르면, 사형이란 (살인자의 죽음을 요구함으로써)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생자의 죽음에 상응하는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인간 생명의 유일한 가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살인 사건에 대하여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사형으로부터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창4:13-15). 사견으로는 국가는 생명을 취할 권위, 즉 칼을 가질 권세 (롬13:4)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건들마다 저마다의 사정이 존재함으로 이에 따른 형량의 감경을 고려해야만 하고 대다수의 국가에서 형법의 규정에 그런 조항을 가지고 있습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동일한 원리는 태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문제로 대두됩니다. 태아는 적어도 곧 인간으로 만들어질 존재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일반적으로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야 합니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낙태의 선택권을 지지 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에서는 낙태에 의한 태아의 파괴를 극히 조심스럽게 제한한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종의 살인으로 간주하며, 태아에 대한 실험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입장이 타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