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4
잠언 12장 10절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언12:8절의 주제는 재물이나 명예 등 인생 전반에 걸쳐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9절은 이것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여 사회로부터 무시를 당할망정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교훈을 줍니다. 이어 10절은 일꾼을 착취하지 말고 돌보아야만 한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의인은 자기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인은 당연히  자신이 부리는 짐승들의 욕구들조차 알아서 돌보아 줍니다. 하나님은 가축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모세 율법에는 안식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쉴 때 집에서 부리는 종들은 물론, 짐승들도 쉬게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출 20:10; 23:11–12; 레 25:1–7). 또한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신25:4)는 명령도 내리셨습니다. 이렇게 가축을 언급하는 이유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논증을 전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열등한 가축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면, 더 고귀한 가치를 가진 종과 하인을 비롯한 인간에게는 더욱 자비로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가축의 필요를 느끼고 돌보라는 말은 자신의 일꾼들을 돌보라는 잠언입니다. 하나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산다면 그분이 우리의 부엌을 책임지신다는 말씀은 성경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고전9:9-10).


2020/12/23
열살된 손녀 아멜리가 방 구석에서 놀고 있을 때, 목사님은 방문한 손님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견해를 가지게 되면 그것 때문에 다른 모든 견해에 대하여는 눈이 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견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천장을 보면 바닥은 볼 수 없게 되고, 바닥을 보면 천장을 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전체를 파악하는 직관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놀고 있던 아멜리가 껴들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하였습니다.

“전체만 보는 것도 역시 못 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왜냐하면 전체만 보면 전체 외에도 전체를 이루는 각기 다른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체’ 라는 말도 실재의 일부에 불과한 추상에 불과해요. 진리는 모든 부분과 그들의 합인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예요”

방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고, 아멜리는 다시 인형놀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어릴 때의 정약용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철학의 3대 과제 중의 하나가 인식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의 문제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떤 누구도 정답을 말하지 못합니다. 오직 창조주만이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는 진리가 아닙니다.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라고 선언하심으로 당신이 창조주라고 선언하셨습니다(요14:6). 이 진리의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죄와 사망의 굴레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음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메시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


2020/12/22
어떤 사람이 농장에서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손을 구하는 어느 농장을 찾아 추천장을 그 농장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농장 주인이 추천장을 뜯어 보니 “그는 폭풍 속에서 잠을 잡니다” 라고 씌여져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하였지만 일손이 필요하였기에 그 사람을 고용하였습니다. 몇 주가 지났습니다. 갑자기 한 밤중에 강력한 폭풍이 농장이 있는 계곡을 흩어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휘몰아치는 비와 윙윙 거리는 바람소리에 놀라 농장 주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구한 일꾼을 불렀지만 그 사람은 아주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헛간으로 뛰어가 가축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았더니 놀랍게도 먹을 것이 넉넉히 준비되어 안전하게 있었습니다. 다시 밭으로 뛰어가니 밀 곡식단들이 잘 묶여져 방수천으로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곡식 창고로 뛰어가니 문들은 잘 잠겨 있었고 곡식은 아무 염려 없이 건조되어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그 주인은 “그는 폭풍 속에서 잠을 잡니다” 하는 말을 이해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말은 항상 신실하고, 우리의 사랑은 항상 따뜻하고 우리의 포옹은 단단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결코 “내가 할 수 있었는데, 내가 하였어야만 했는데”라는 고뇌 속에서 뒹굴면 안됩니다. 이것은 인생을 떠나는 마지막에 더 절박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늘 감사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눅12:35-36).


2020/12/21
때로 아이들은 예사스럽지 않은 통찰력을 보여 줍니다. 8살된 소녀의 말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자기들이 경험한 예수님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아무 체험도 없어요. 그분이 나에게 오라고 하셔서 나는 왔어요. 그분이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하셨고, 그것을 나에게 주셨어요. 나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그렇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분이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으면, 그들도 그분에게 안식을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마태복음 11장 28절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께 초청하고 계십니다. 위의 소녀는 이 구절을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안식을 주셨다는 귀절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전도여행을 다니실 때 막달라 마리아 등 여러 여인들이 섬겼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실 때까지 안식을 누릴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 승천하셨어도 만유의 주님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그 소녀의 말은 틀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 안식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매우 큰 통찰력을 우리에게 주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것은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만 하려는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한 열매를 맺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에 장성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 모세의 증거(4)


요한복음 5장 45-47절

AD29년 어느 명절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인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4가지 근거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당신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아니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서로 간에 영광을 구하고 있기 때문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세가 이미 당신에 관하여 기록하였음을 밝히셨습니다. 모세가 이미 구약에서 활동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만, 유대인들에게는 찔리는 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저작으로 알려진 창세기(16장, 22장 등)와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메시지를 전하나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양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자의 정체는 매우 신비스러운 존재였고,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들어오셔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구약적 표현이었습니다. 모세의 기록 후 400년이 지나 왕 다윗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주님에 대하여 노래하였습니다. 이를 입증하듯이 세상에 들어오신 주님은 십자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져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주인이 계심을 하나님은 만 천하에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신실하게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모세의 증거(3)

요한복음 5장 45-47절

AD29년 어느 명절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인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4가지 근거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당신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아니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서로 간에 영광을 구하고 있기 때문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세가 이미 당신에 관하여 기록하였음을 밝히셨습니다. 모세가 이미 구약에서 활동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만, 유대인들에게는 찔리는 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저작으로 알려진 창세기(16장, 22장 등)와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메시지를 전하나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양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자의 정체는 매우 신비스러운 존재였고,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들어오셔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구약적 표현이었습니다. 모세의 기록 후 400년이 지나 왕 다윗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주님에 대하여 노래하였습니다. 이를 입증하듯이 세상에 들어오신 주님은 십자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져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주인이 계심을 하나님은 만 천하에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신실하게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매일묵상

2020/12/14
침례교 가정의 여섯 살 된 아이가 특별히 추운 날 침례를 받았습니다. 다음날 그 아이는 가족들과 함께 찬송을 부를 때  ‘성삼위 일체’ 대신 ‘성사위 일체 우리 주로다’라고 노래 하였습니다. 당연히 지적을 받았으며, 이에 대하여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침례받을 때 네 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어요. 목사님이 나를 물 속에서 넣으시고 ‘성부,,,브루루…성자….브루루….성신…브루루의 이름으로’라고 말씀하셨어요.”

공산주의 국가의 지하교회에는 침례당이 없어서 겨울에 침례를 받게 되면 얼음을 뚫고 침례를 받습니다. 그날 역시 추웠기 때문에 목사님이 떠는 소리인 ‘브루루’가 아이에게는 삼 위 중 네 번째 분이라고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의식 중 하나인 침례는 구약에는 없으며, 신구약 중간기(비시400 – AD30)에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할례와 함께 사용된 의식입니다. 즉 할례받은 이방인들이 물속에서 올라오면 완전한 유대교인으로 새롭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AD28 년에 이르러 침례요한은 이 의식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표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그들 가운에 오신 메시야를 준비하는 의식로서, 오신 메시야 예수님의 명령에 의하여 기독교에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가 뜻하는 바를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침례란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보여주고(롬6:3-5), 이후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벧전3:2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2020/12/15
다섯 살 적에 아들 미하이가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살구나무가 어디서 오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살구씨를 넣고, 흙으로 덮은 다음 물을 주면 때가 되면 살구나무가 자라 나온단다.” 이를 들은 미하이는 흥분해서 자기 동생을 부른 다음, 둘이서 목사님이 가르쳐준대로 하였습니다. 먼저 땅에 보물을 묻은 다음 그 보물에게 물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나무가 생겨나기 시작했나 알아보려고 즉시 땅을 파고는 굉장히 실망을 하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어린 아이들이 한 일에 대하여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 핵심은 “절대로 너희들이 생각나는대로 하면 안 되고 꼭 내가 가르쳐 준대로 하여야만 된단다.” 는 말입니다. 그때 “왜 우리 마음대로 하면 안됩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가 할 말은 하나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있단다!” 이것이 고도로 지식이 발달하였다고 자랑하는 인류가 지식을 얻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기 전에 인간은 어떻게 세상이 구성되어 있는지를 자세히 연구하여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철학의 3대 질문 중 하나입니다. 피조된 인간은 인간 마음대로 하면 절대로 소기의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아이들과 다름 없습니다. 인간은 대상을 연구하여 그 속에 있는 지식을 발견하고 행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삶에서도 같습니다. 과학과 같이 신앙 역시 비약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살아가면,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가 우리 삶 속에 맺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2020/12/16
범브란트 목사님은 어린 아들 미하이에게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가나안 정복에 관한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전쟁을 명령하셨는지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미하이는 “이건 아마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일거예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별없이 구약성경을 읽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린 미하이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2세기 초엽 말시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흑해 남단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선박 건조를 하여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AD 140년 경 로마의 공동체로 이주하여 거액의 헌금을 제공하였지만, 이단적인 교리를 전파하여 로마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전파한 교리는 구약의 하나님 야훼는 복수와 공의의 신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라고 구분한 뒤, 구약의 신에게 얽매인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신약의 신이 예수로 나타나셨다 등등의 내용입니다. 서머나 감독 순교자 폴리캅은 그를 만나 대화한 뒤 ‘사탄의 맏아들’이라고 공박하였을 정도로 복음은 물론 사도바울을 심각하게 오해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의적인 해석을 하여 교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킨 이단들은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났습니다. 지금 있는 이단들 역시 교회 역사상 나타났던 어떤 이단의 반복일 뿐입니다. 말시온의 파문 사건 이후 교회는 신약 27권의 정경화를 추진하게 되었고,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하여 더욱 깊이 묵상하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


2020/12/17
범브란트 목사님은 어린 알렉스에게 욥기 33장 26절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를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는 ‘은혜”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말씀 드리죠. 그러면 그분이 내게 기도하고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면, 그분은 자기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기도를 더 잘하십니다.” 라고 자기나름대로 풀어서 말하였습니다. 어린 알렉스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기도한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祈禱)는 국어사전에 따르면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비는 것’으로 정의하며, 대체로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어린 알렉스의 말은 옳지 않지만, 자유의지를 부여한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따라 행하여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는 의미라면 틀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살지,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인간으로 오신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상급으로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란 우리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와 권력과 명예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지혜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2020/12/18
잠언 12장 9절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

Better to be lowly and have a servant
than to play the great man and lack bread.

Proverbs 12:9

일반적인 가르침인 8절(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굽은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을 특정한 상황에 적용한 것이 9절입니다. 내용은 비록 사회적인 명성이나 평가는 보잘 것이 없지만, 자신의 사정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겉으로는 부요하고 명성을 가진 것처럼 행세를 하나 실제로는 먹을 것이 없을 정도의 가난을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낫다는 의미입니다. 이 잠언은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18:12)” 와도 일맥상통하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생각할 잠언은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5:17)입니다. 인생에서 어떤 것을 우선순위에 놓을 것인가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달라집니다. 실상 인간은 재물도 필요하고 명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이런 극단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에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벧전5:6-7, 쉬운성경)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 모세의 증거(2)

AD29년 어느 명절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인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4가지 근거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당신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아니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서로 간에 영광을 구하고 있기 때문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세가 이미 당신에 관하여 기록하였음을 밝히셨습니다. 모세가 이미 구약에서 활동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만, 유대인들에게는 찔리는 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저작으로 알려진 창세기(16장, 22장 등)와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메시지를 전하나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양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자의 정체는 매우 신비스러운 존재였고, 유대인들은 그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상에 들어오셔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구약적 표현이었습니다. 모세의 기록 후 400년이 지나 왕 다윗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주님에 대하여 노래하였습니다. 이를 입증하듯이 세상에 들어오신 주님은 십자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져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주인이 계심을 하나님은 만 천하에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신실하게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2020/12/11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에서 주일학교 헌금으로 일 파운드짜리 동전과 십 펜스짜리 동전을 주었습니다(참고로 1파운드는 100펜스로서 약 1,500원정도함).

“애야, 사람들만 세례를 받지 개들은 세례를 받지 않는단다.”

“왜요?”

“개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멜리는 기뻐 날뛰었습니다. “내 개에게 죄가 없다면, 나와 같이 부활하겠네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쁘게 드릴 수 있는 만큼 드려야 하지만, 또한 기쁜 마음으로 넉넉하게 드리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금융기관에 예금을 하면 그에 적당한 이자를 지급합니다. 삼성전자와 같은 회사의 회사채를 사면 금융기관보다는 더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지만, 금융기관보다는 위험합니다. 또한 KB 금융 등의 주식에 투자하면 시가의 약 5% 배당을 받을 수 있으나, 주가의 등락 때문에 원금 보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투자는 어떻습니까? 엄청난 이익이 돌아오는 것은 물론 안전합니다. 물론 그 이익은 금전으로만 환산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헌금 생활을 잘 하는 것 역시 성도의 본분 중 하나이기에, 이분들은 믿음의 큰 담력과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2020/12/10
어린 학생들에게 예수님의 가족을 그려보라는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한 아이가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네 사람의 머리가 비행기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 성모 마리아, 요셉을 그렸구나. 그런데 이 네 번째 사람은 누구냐?”

“아, 그것은 비행사인 폰티어스예요(Pontius, the pilot)!” 그 어린 학생이 ‘폰티어스’라고 한 것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말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영어로 Pontius Pilate 라 표기하고 ‘폰티어스 파일러트’로 읽습니다. 이 발음은 비행기 조종사인 ‘pilot 파일러트’의 발음과 아주 유사하여 아이는 빌라도 총독을 비행기 조종사로 오인하고 그린 것 같습니다. 주기도문을 배운 한 아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젤리 빵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영어 번역이 ‘daily bread’이나 그것을 ‘jelly bread’로 듣고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이라고 해서 아이들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 그 외침을 들은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마29:49).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는 법을 묻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고 되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되물으십니다. “네가 왜 나를 주님으로 부르고 따르느냐?” 우리는 이에 대하여 바른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5-17).


2020/12/09
일곱 살난 아멜리가 어느날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와서 자기 개에게 세례를 주길 부탁하였습니다.

“애야, 사람들만 세례를 받지 개들은 세례를 받지 않는단다.”

“왜요?”

“개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멜리는 기뻐 날뛰었습니다.

“내 개에게 죄가 없다면, 나와 같이 부활하겠네요.”

마지막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신 고 김준엽 총장(1920-2011)이 그분의 책 ‘장정’에서 쓴 글이 기억납니다. 그분의 부친은 사냥을 돕는 개를 두고 있었습니다. 부친은 매우 개를 사랑하셔서 개가 부친을 잘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친이 세상을 떠나시자, 이를 안 개 역시 먹기를 거절하여 끝내 굶어 죽었습니다. 너무나 주인의 사랑이 그리운 것이지요. 한편 개의 충직성과 영물성을 체험한 김총장님은 일생 개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개가 부활할리는 없지만, 아멜리의 개는 부활을 하여도 주인인 아멜리가 없다면 부활한 것이 하나도 고맙지 않을 것입니다. 개는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부활하여 그리스도 없는 나라에서 영원을 보낸다면 그것보다 의미 없고 지루한 삶은 없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과의 교제가 없다면 아무리 안락하고 휘황찬란하여도 살 곳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배움도 행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시84:10-11, 새번역).


2020/12/08

어느 날 손녀 아멜리가 비난조로 할아버지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할아버진 창문들(windows)에게 절하지 않아요?”
“성경 어디에 그런 어리석은 소리가 적혀 있던?”

아멜리는 재빨리 “과부들(widows)을 공경하라”는 구절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어로 창문과 과부는 전혀 다른 단어이지만, 영어는 매우 흡사한 철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부’는 ‘창문’이라는 영어 단어에서 단지 ‘n’ 이 빠져 있을 뿐입니다. 아멜리는 과부를 몰랐습니다. 이렇게 제한된 어휘와 경험 때문에 실수로 ‘n’이 빠져서 인쇄되었다고 좋게 생각하고는 자신이 그 철자를 보충하여 과부를 창문으로 읽었던 것입니다. 아멜리는 성경에서 발견한 명령이 전혀 상식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멜리가 성경이 하시는 말씀에 복종하려는 의도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해석하고 적용한 성경은 전혀 성경의 취지와 뜻에 어긋난다는 사실은 어른이면 다 알 정도로 어리석습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는 교리는 물론 의식의 해석 적용에 관하여 많은 다툼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으로 안식일 교회는 신약과 구약 사이의 상관관계를 망각하고 안식일 규정을 해석적용하여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어리석은 해석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은 성령께서 후일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게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라고 밝히 말씀하셨음을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지만, 지혜에는 어른과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을 온화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 반대하는 사람들을 회개시키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딤후2:25, 새번역)


2020/12/11

1.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2.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3.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12:1-3


위 3개의 절은 잠언 12장의 도입부분으로, 서로 대비되는 영원한 운명과 관련하여 도덕적, 신학적 교훈을 주고자 의도되었습니다. 1절은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의 성품, 2절은 도덕적 질서를 수호하시는 행위자로서의 주님, 3절은 악인과 의인이 가지는 영원한 운명을 말합니다. 결국 2절의 주님(여호와)은 모든 삶과 심판의 주인이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보전은 주님의 긍정을 받기 때문에, 악인의 소멸은 주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사무엘 상을 보면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행위가 악한 제사장들이었기에 아버지 엘리가 훈계하였지만 무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제사장 엘리 가문의 멸망을 선포하고는 그 증거로 두 아들이 하루에 죽임을 당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심판의 말씀은 20년이 지난 뒤 집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블레셋과 치룬 아벡의 전투에서 두 아들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후 100년이 지난 솔로몬의 등극시 후손 아비아달이 제사장 직에서 파직을 당함으로 심판은 끝났습니다. 이와 같이 의인이 보전되고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주님을 제외하고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심판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모세의 증거(1)

AD 29년 어느 명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인 주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시고 구약성경(모세율법)을 해석하면서 1400동안 살아온 유대인들과 변론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성경이 주어진 참 목적을 오해하고 성경을 통해 영생을 얻고자 잘못 믿고 있음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는 것,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죄악을 담당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구약성경(모세율법)을 보는 전제는 그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필요성은 로마제국을 쳐부술 왕과 장군으로서의 능력 때문에 요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죄를 대속함과 같은 개념은 불필요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구약성경(모세율법)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의 전제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잘못된 전제와 해석 때문에 이단에 빠지고, 주님 앞에 오지 못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 보다도 못한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온유하고 겸손하나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을 깨우치사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당신께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2020/12/04
신약성경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이 되었고, 그 당시 헬라어는 구두점이나 쉽표 등의 문장 기호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단어가 죽 나열되었으며 문맥을 통해 그 의미를 분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영어, 한국어, 중국어, 루마니아어를 포함하여 어떤 나라의 언어도 같습니다. 마태복음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19:4)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루마니아 아이는 끊어 읽기를 잘못하여 “아이들아, 내게 오는 것을 괴로워하지 말아라”는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그 아이를 방문하여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 아이는 

“난 아파요. 하지만 거의 아프지 않아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이들아 내게 오는 것을 괴로워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자기들의 고통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잘못된 이해가 이 아이의 믿음에 결정적인 해를 끼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이해와 동의가 아닙니다. 믿음과 동시에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 오셔서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당연히 그런 믿음에서 참됨과 사랑이 싹터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자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엡3:16-17).


2020/12/03
40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1911-2004)의 부모님은 깊은 신앙을 가지지는 못하였지만, 그분의 조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식사 때가 되자 어린 로널드의 부모님은 주의를 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모든 아이들에게 식사 시간에 성경을 한 절씩 암송하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너도 꼭 하나를 외워야 한다.” 로널드는 불과 네 살이어서, 어머니는 쉬운 구절을 하나 찾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우셨다”(요11:35).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가 울자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입니다. 이제 로널드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식사를 위해 열 명의 아이들이 앉았습니다. 암송할 차례가 오자 첫번째 아이가 “예수께서 우셨다” 얼른 대답하였습니다. 로널드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더구나 두 명의 다른 아이들이 같은 구절을 암송하자 할아버지의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이윽고 차례가 된 로널드는 “예수께서 우신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웃었고, 할아버지는 성경에 그런 구절이 없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로널드는 “그분은 지금 울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린이들이 그분이 오래 전에 우셨다는 것밖엔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변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로서는 아주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사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심히 범죄하자 하나님은 사람 지으신 것을 심히 슬퍼하셨습니다(창6:6-7). 결국 그들은 홍수로 전멸 당하고 노아와 그의 가족 8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오늘날도 같습니다. 우리의 불신앙, 죄악, 연약한 믿음, 완악함 등의 사유로 하나님은 근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 살아가야만 합니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2020/12/02
네 살된 어린아이가 미국 백화점에 갔다가 받은 비스킷에는 미국 지도 모양으로 생긴 것이 하나 들어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이걸 보니 무엇이 생각나니?”

“날씨요”

그 비스킷은 아이에게 저녁 뉴스 시간에 텔레비전에서 보는 미국의 모양을 생각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벨과 가인’ 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아벨은 하나님 앞에 형 가인 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질투를 받아 결국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의인이요 억울한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열납을 받지 못하고, 동생 아벨의 제물이 열납을 받은 것을 보자 질투하여 동생을 죽인 살인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동족인 유대인들의 질투를 받아 억울하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 죽으셨으며, 심지어 그 고통의 순간에도 자기를 죽이는 동족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은 증언하기를 아벨의 피는 땅속에서 하나님께 복수를 호소하고 있으나,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해 주시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한 바 뿌린 피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생각나게 되면 과연 지인들은 무슨 생각이 먼저 들겠습니까? 아니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무엇을 먼저 생각하시겠습니까? 한 번 반추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2020/12/01
제2차 세계 대전 중 루마니아에서 목회를 할 때, 범브란트 목사님은 양복이 딱 한 벌 있었습니다. 그것도 때가 되니 낡아 너덜거리게 되어, 목사님은 어쩔 수 없이 새 양복을 하나 샀습니다. 어느 날 아침, 가정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눅3:11)

이 말씀은 AD28년 경 유대 광야에서 침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자, 많은 사람이 와서 회개하고 자복한 뒤, 묻기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에 대하여 대답한 말 가운데 하나 입니다. 이 구절을 듣자 당시 네 살이던 미하이가 목사님의 말을 중단시켰습니다.

“아빠는 지금 양복이 두 벌 있잖아요. 그러니까 한 벌을 누더기 양복을 입고 있는 X 형제에게 주셔야 해요.”

“그분에게 어느 것을 주랴?”

“물론 새 것을 주셔야지요. 하나님은 언제나 제일 좋은 것을 주시니까요.”

그것은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목사님은 어린 아들 미하이의 말을 따랐습니다. 미하이가 네 살의 어린 나이에도 벌써 그런 해석과 적용을 할 줄 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영성을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범브란트 목사님에 결코 뒤지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과 은혜로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이러 저러한 방법으로 늘 돌보아주셔서 헐벗지 않았다는 간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2020/11/30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이 있는 교회를 처음 방문한 어린 소녀가 어머니에게 햇빛이 통과해 들어오고 있는 저 사람들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분들은 성인(聖人)들이시란다.”

어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소녀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난 이제 성인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았어요. 나는 비록 예쁘지는 않지만 나를 통해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빛날 수 있게 하는 소녀가 된다는 뜻이예요”

이 어린 소녀의 영적 통찰력은 놀랍습니다. 특히 성인들 중 슬픈 전기나 그들의 생애에 있었던 어두운 이야기들을 읽을 때면, 그 아이가 내린 성인에 대한 정의가 진실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 정교나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 받는 대표적인 분이 사도 마태입니다. 이분은 당시 민족반역자이자 탐욕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세리의 직업을 가져서, 매우 경멸당하였던 어두운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과감하게 과거를 버리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버린 슬픈 기록이 있기는 하나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용서받고 그분의 증인으로 일생을 사도로서 헌신한 뒤 에디오피아에서 순교하셨다고 로마순교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다 이와 같이 어둡고 슬픈 과거가 있는 죄인들이었으나, 그리스도의 그 은혜의 빛을 통해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