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사도 바울은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언제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죄인들을 위해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 그리고 성령님을 통한 체험과 결부시킵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 역시 성령님의 은총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성취되고 말 것임을 믿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소망은 확실한 근거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흘러넘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지막 심판에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아직 원수와 죄인들이었을 때에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으시도록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 이것으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과 논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분, 곧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로 삼으로십시오. 우리 마음에 계시는 성령을 통해 그분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계속해서 넘쳐나도록 쉬지 말고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와 같은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들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삼켜버린 바 되도록 하십시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6-18).
앞 단락(1-1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와 궁극적인 구원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시켰습니다. 이런 설명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아담과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유추해 답변합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의 행위로 인해 (좋든 나쁘든)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원리를 입증해줍니다. 로마서 5장 12-19절은 어떻게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칭의(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하심)’가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전가될 수 있는지 이른바 ‘칭의의 중보자’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 이전의 인간의 역사를 짧게 언급합니다. 그 인간의 역사는 아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5: 12-14).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12절은 그리스도 이전의 인간의 역사를 세 단계로 요약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첫째, 죄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으며, 둘째, 그 죄로 인해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으며(사망은 죄에 대한 벌이기 때문에), 셋째,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보는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는 죄의 침투와 사망의 침투, 그리고 인류의 사망이라는 세 단계의 역사이며, 모든 인류의 사망은 한 사람의 원죄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이어 13-14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가 어떻게 모든 사람의 사망으로 귀결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 주된 내용은 모든 사람이 아담과 같은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에 사망이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이른 바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그렇기에 죄를 전혀 모르는 어린 아이들도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최후의 심판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모르는 어린 아이는 최후의 심판 대상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왜냐하면)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다만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가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롬5:13 공동번역). 13절은 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대표성 원리를 뒷받침하는지 논증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담부터 모세까지, 곧 인류의 타락부터 율법이 주어지기까지 일어났던 사건을 보자면, 이 기간 중에 사람들이 죄를 범한 것은 분명하나 그들의 죄는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죄를 죄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14절은 “그러나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지배하였는데 아담이 지은 것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 지배를 받았습니다.”(공동번역)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그들이 사망한 이유가 아담처럼 고의적으로 범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인류가 그들의 머리인 아담 안에 속해 있었기 때문임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한편,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14절)이기에,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15절에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사성을 유추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은 아담이 지은 죄와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한 사람이 지은 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은 더 많은 사람에게 넘쳤기 때문입니다.”(롬5:15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로마서에서 매우 어려운 부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15절의 핵심 사상은 많은 사람이 한 사람(아담 혹은 그리스도)의 행위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두 인물 사이의 유일한 유사점입니다. 반면에 이들간에는 극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가 측면을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가 죽음이란 수단으로 군림하게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롬5:21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5:15).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에 두 인물 사이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유사점은 한 사람의 행위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며, 차이점(세 가지)은 아담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의 동기와 결과 그리고 특성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죄를 지은 아담의 동기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동기와 다르고, 아담의 죄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와도 다르며, 아담의 행위의 특성은 그리스도의 행위의 특성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두 행위의 동기 : 15절은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범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파라프토마 transgression.”입니다. 이 단어는 정도에서 이탈한 행위, 탈선한 행위를 뜻합니다. 아담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것에서 벗어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반면에 ‘은사 恩賜: 임금이 은혜로써 신하에게 물건을 내려 주던 일. 또는 그 물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카리스마’로서 은혜로운 행위를 가리킵니다. 아담의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담 자신의 고집과 생각대로 행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행위는 자기 희생의 행위, 곧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두 인물의 행위 사이의 대조적인 동기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아담의 행위의 동기는 자기 주장이었지만 그리스도의 행위의 동기는 자기 희생이었다.” “(왜냐하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둘째, 아담의 행위와 그리스도 행위의 결과에 있어서 나타난 차이점을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15절). 15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의 죄가 많은 사람에게 사망의 무서운 형벌을 가져왔지만, 하나님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많은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란 은사를 충분히 베풀었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15절은 사망을 생명과 대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16-17절에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행위에 의해 일어난 정반대의 결과를 대조합니다.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따라서 아담의 행위는 우리에게 정죄를 가져다주었지만, 그리스도의 행위는 칭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의 죄로 인해서는 사망이 왕노릇 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서는 생명이 왕노릇 하게 된 것입니다. 정죄와 칭의, 사망과 생명, 이러한 대조보다 더 절대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실로 이전에는 사망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소속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의 종과 노예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는 이제 사망의 법 아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모든 대적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을 함께 누리는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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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른 실패자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반역자요, 결국 하나님과 적대적 관계에 놓인 원수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러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의인, 즉 고결하긴 하지만 동정심이 없어 매력을 주지 못하는 사람과 선인 (good man), 즉 따듯한 마음을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라도 그를 대신해 죽는 자는 거의 없는데, 원수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원수요 죄인이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곧 그리스도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나 존경받는 선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매력은 물론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 나올 9-11절에 나타난 논증의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9-11절은 한층 더 진전된 논증이며, 가벼운 주제에서 보다 중요한 주제로 나아가는 논증으로, 이런 방법은 옛 진리를 기초로 해서 새로운 진리를 이끌어내는 고전적인 논증 방법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의 구원의 두 단계, 즉 칭의(현재 의롭다고 선언하심)와 영화(마지막 심판날에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를 대조시키고 칭의가 어떻게 영화를 보증하는지를 보여주며, 그 결과 지금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이 해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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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3 – 7
그리스도인들은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 하고, 환난에 처해서도 그것이 산출해 내는 결과 때문에 기뻐한다고 말하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영광에 대한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혹은 “그것은 단지 우리의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결국 영광에 이를 것이라는 말은 좋은 말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는가?” 이런 반론을 사도 바울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 영광에 대한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그 소망은 참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새영어성경(NEB)은 이 구절을 “그와 같은 (영광에 대한)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하든지 그건 당신 마음일 뿐이다. 하지만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재차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5절 후반부에서 대답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 그러한 소망이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는 것이 바울의 요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이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는 소망은 참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때로는 고통을 통해 우리의 인격을 형성하시면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다면 그분이 우리를 하늘 나라에서 영화롭게 하실 것임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어려움에 처해서 가질 수 있는 모든 불안 초조 의심 걱정을 주님의 손에 맡기시고 겸허하게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17:3).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서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구절의 요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결코 멸망당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because God’s love has flooded our inmost heart through the Holy Spirit he has given us.’(NEB) 라고 분명히 대답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는데, 그 원인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내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의 독특한 사역 중 하나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홍수와 같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내적으로 깊이 깨닫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부어 주시는 이 사랑을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능력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 기뻐하고, 남의 허물에 대해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하나님의 응답이 올 때까지 인내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됩니다. 이 같은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 8:16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라고 증거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여기서 우리는 5절에 나오는 동사의 시제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란 구절에서의 ‘주신’으로 번역된 원어 ‘도센토스δοθέντος‘는 수동 분사형이며 시제는 과거에 한 번 있었던 사건을 나타내도록 부정과거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부은 바 됨’이라는 구절에서의 ‘부은 has been poured’이라는 말은 헬라어 수동형 동사 ‘엑케쿠타이 ἐκκέχυται’의 번역으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현재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는 완료형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믿고 회심한 순간에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뿐 아니라,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이미 부은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까지 계속 흘러 넘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단번에 주어진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충만하도록 흘러넘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병헌이 주인공으로 나온 드라마 ‘올 인 (All In)’의 실제 주인공 차민수(70) 씨의 말입니다. 70년대 중반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 갔으나, 거기서 사업과 가정 모두 실패하여 빈손으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과부였지만 부자였던 어머니는 집 안에도 들이지 않고 유복자인 그 아들을 쫓아버렸습니다. 미국에 다시 돌아간 그는 천신만고 끝에 카지노의 포커판을 통해 일어섰고, 지금의 부인을 만나 고아라고 소개한 뒤 재혼하였습니다. 그렇게 냉정하던 어머니의 부탁으로 큰 누나가 미국을 숫소문하여 드디어 자신의 집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때 차민수 씨는 “아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셨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그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시며 우리를 정말 사랑하신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1-5). 이상의 다섯 구절을 요약해 볼 때 우리는 칭의의 결과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삼중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둘째 우리는 지금 은혜 안에 서 있게 되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소망은 하나님이 환난을 통과시킴으로써 우리 안에 이루시는 인격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무엇보다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확실해집니다.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단회적인 판결인 칭의는, 현재의 은혜와 장래의 영광이란 말로 요약되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식 때 정성을 다한 예물을 교환함으로써 서로간의 사랑을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당신을 반역한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내시사 십자가 위에서 죽게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환난을 연결고리로 삼아 화평과 소망, 칭의와 영화를 결부시켰지만, 이제 6-11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연결고리로 삼아 그것들을 다시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어 나오는 6-11절은 칭의의 결과가 보다 상세하게 기술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무력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롬5:6 사역).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6-8절에서의 주제는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들을 위해 죽으셨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이것이 이 구절들의 핵심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이 구절은 우리를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한 ‘연약한’ 자들이라 묘사합니다. 둘째, 우리를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묘사합니다. 셋째, 우리를 의의 표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죄인’이라고 묘사합니다. 넷째,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원수’라고 부릅니다. 죄에 빠진 인간에 대한 이 얼마나 두렵고 가공할 만한 묘사입니까! 우리는 실패자요, 반역자요, 원수들이며,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데 아무런 힘이 없는 무능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야 예수님이 살아 계실 당시에 생존하였던 유대인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한반도의 조선민족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질문도 던질만 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12절 이하에서 다루고 있습니다만, 이른바 대표성 원리입니다. 범죄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음의 형벌을 받은 것과 같이, 불의한 자들을 위해 속죄를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가지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1-2).
사마리아로 가신 그리스도(2)
매일말씀나눔
2020. 1. 28 – 2.1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5:3-4). 여기서 환난은 헬라어로 ‘쓸립시스 θλῖψις ‘입니다. 이 단어는 글자그대로의 뜻은 ‘압력 pressure”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어려움을 일컫는 것입니다. 존 스타트 목사님은 이 단어를 질병이나 괴로움, 슬픔이나 애통이 아니라 불신자들에 의해 받는 박해를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를 꼭 그런 것에 국한하는 것보다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신자들에게 부닺치는 일반적 고난 역시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믿음의 삶에 가해지는 어떤 압력일지라도 환난은 우리를 언제나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구약성경이 예언한 대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러셨습니다 (눅24:36). 그리스도에게 진실인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진실입니다. 종이 상전보다 결코 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13:16).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로마서8:17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을 장래에 받을 영광과 관련하여 좀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언제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며, 장래의 영광을 생각해서 지금 당하는 고난을 언제나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은 그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즐거워합니다. 만일 우리가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면’ 우리는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 또한 ‘즐거워한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즐거워하다’라는 헬라어는 “카우카오마이 καυχάομαι ”로 ‘매우 즐거워한다, 기고만장하여 기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 하에 유독 그리스도인들만은 왜 그럴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시119:71-72)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로마서5:3-5). 그리스도인들은 장래의 영광을 소망 가운데서 뿐 아니라, 현재의 고난 가운데서도 매우 기뻐합니다.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즐거워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것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현재의 고난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3-5절이 이러한 역설을 정확히 설명해줍니다. 3-5절은 우리가 고난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 내는 유익한 결과를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고통 자체를 즐기는 자학자들도,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는 고행주의자들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에서 하나님의 은혜롭고 거룩한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고난이 만들어 내는 열매나 결과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룬다”라는 말은 헬라어 “카테르카제타이 κατεργάζεται”를 번역한 말로 그 정확한 의미는 “노동과 작업을 통하여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제는 현재형으로 계속해서 생산 중이라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고난은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는 연단(입증된 성품 proven character)을, 연단은 소망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열매들은 주님이 십자가의 대가를 치루고 얻은 당신의 백성들이 마땅히 갖추어야만 하는 자질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로마서5:3-5).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그것이 낳은 결과와 맺는 열매를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고난이 만들어 내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로마서 5:3-5은 세 가지 단계로 제시합니다. 1단계 :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 예방접종에 의해 항체가 몸 안에 생기듯이 환난 중에 필요한 참된 인내는 환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고난을 경험해보지 않고서 우리는 결코 인내를 배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난 없이는 인내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2단계 : 인내는 연단 또는 인격을 낳습니다. – 연단이라고 번역된 ‘도키메 δοκιμή ‘라는 헬라어는 시험을 치러 합격한 사람과 같이 성숙한 인격이나 검증을 받은 물건의 질을 뜻합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이 갑옷과 투구가 익숙하지 않아 시험적으로 걸쳐 보다가 입지 않겠노라고 했을 때 의미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 또는 그에 걸맞는 인격을 낳습니다. 3단계 : 연단 또는 인격은 소망을 낳습니다. 이 연단은 궁극적인 영광에 대한 확신을 낳습니다. 환난의 인내를 통해 얻은 성숙한 인격은 장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져옵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의미한 것은 분명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처럼 역사하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온전히 성장하기까지 그분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임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만일 그분이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기 위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마침내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고난을 통과할 때 우리에게 절대로 필요한 지혜를 주신다는 약속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닥친 당면의 문제 역시 잘 해결할 수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환난과 영광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더 나아가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할 수 있다면, 환난은 이러한 영광에 대한 소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만일 영광에 대한 소망이 환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영광 가운데서 뿐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목적)을 즐거워할 뿐 아니라, 목적에 이르는 환난(방법) 또한 즐거워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둘 모두를 즐거워합니다. 어느 날 카프만 부인은 책상 위에 곧 나방이 될 고치들을 놓고, 거기서 나방이 뚫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고치의 구멍은 작은데 나방이 구멍보다 커서 나방이 나오는 모습이 무척 힘들고 고생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가위로 고치의 구멍을 넓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거기서 나온 나방은 좁은 구멍을 뚫고 나온 나방보다 윤이 나고 훨씬 커서 카프만 부인은 신의 창조의 지혜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얼마 후 나방이 날기 시작할 무렵 고생스럽게 나온 나방은 훨훨 날아가고, 구멍을 뚫어 준 나방은 날아가지 못하고 날개만 파닥거렸습니다. 그 이유는 나방의 영양분은 모두 어깨에 있는데, 좁은 구멍을 나올 때에 고생스럽게 힘을 쓸 때 어깨에 있는 모든 양분이 점점 날개 밑으로 내려가 날개 끝까지 그 양분이 옮겨지게 되고 나방은 그 힘으로 날게 되기 때문입니다. 카프만 부인은 이러한 사실을 나중에 깨닫고 자신의 한정된 지식과 경솔함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인격형성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인격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하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하면서 신실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10:3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