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창세기 2:15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전부를 인간의 지배 아래 놓으셨듯이, 이제 그분은 특별히 에덴 동산을 사람의 보호와 책임 아래 두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몇가지 일과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일은 일하는 자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창조성 안에서 즐거움과 성취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셨으며, 인간에게 통치권을 주셨다는 두 가지를 함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그분의 통치권을 공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할 수 없는 자연지배가 가능한 것입니다. 창조적 일에 대한 우리의 잠재력은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 형상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일은 우리 인간성의 불가결한 부분입니다. 이  때문에 실업은 기독교적 시각에서 볼 때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실업은 하나님이 주신 일하는 자로서의 부르심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지런히 일하는 대신에 게으르다면, 또는 창조적으로 일하는 대신에 파괴적이라면, 우리의 인간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인간적 성취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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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뢰이신 주님

시편 4편

시편 4편에서 다윗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에게 신뢰를 두는 자신이야말로 참된 안전과 기쁨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진 기쁨은 사람들이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수확할 때 가지는 기쁨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이미 체험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미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천명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요 주님으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이 신뢰는 영영히 요동하지 않는 바위며 요새이고, 하나님은 필요를 따라 우리에게 양식을 내려주시는 분임을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삶에서 많이 체험하신 분 중에 대구 삼덕교회 고 홍대위 목사/선교사 가 계십니다(1973년 작고). 그분이 간증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930-40년대에 홍선교사가 중국 산동성 교주에서 전도할 때의 일입니다. 홍선교사의 모친은 강원도 평창에 계셨습니다. 하루는 모친으로부터 편지가 오기를 손녀딸을 귀국시키라는 권고였습니다. 그 당시 홍선교사의 딸은 15세라 중국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중국교육을 받아 가지고는 한국인에게 출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친의 슬하가 적적하니 모친이 데리고 공부시키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과연 타당하신 말씀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의 친모가 일찍 별세하였고 지금 계모 슬하에 있기 때문에 조모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귀국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청도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거쳐 서울에 도착한 뒤 다시 버스로 평창을 가려면 당시의 돈 50원이 필요하였으나 아무런 여비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 홍선교사는 이 사정을 주님께 기도드리고 돈 50원을 구했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에 스트럭이라는 여선교사가 기도하러 왔습니다. 그는 독신 선교사로 홍선교사와 동역하는 사람이었으며, 가끔 홍선교사의 서재에 와서 함께 기도하곤 했는데 그날은 특별히 일찍 왔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 편지를 한 통 주면서 “내가 돌아간 후에 뜯어 보십시오”하고 나갔습니다. 홍선교사는 곧 그 편지를 뜯어 보자, 그것은 편지가 아니라 10원 짜리 지폐 다섯 장이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편지가 아니라 돈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돈입니까?” 하니, 그녀는 말하기를 “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어제 저녁에 침대에 드러누워 생각을 하니 나의 수중에 돈 백 원이나 여유가 있어서 이것으로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하였더니 목사님께 드릴 생각이 났어요. 목사님은 아이들도 많고 생활에 곤란이 많을 듯 했어요. 그러나 이렇게 많은 돈을 다 드릴 필요가 무엇인가 하여 드릴까 말까 하다가 밤이 새도록 잠을 잘 못잤지요. 오늘 새벽에야 결정하기를 절반은 목사님께 드리고 절반은 다른 일에 쓰는 것이 좋을 듯하여 그 절반 50원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나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그 말을 듣자 홍목사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어제 저녁에 돈 50원을 주님께 구한 일이 있습니다.” “무슨 급한 용도가 있었던가요?” “네 어제 모친의 편지에서 손녀를 보내라고 하시기에 그 여비를 계산하니 꼭 50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간구하였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면 그렇지” 란 소리를 연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무쪼록 안심하고 잘 쓰라고 부탁하고는 가버렸습니다. 여비가 마련되었기 때문에 며칠 후에 청도항에서 배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태워주기 위해 딸을 데리고 기차에 올라앉아 교주에서 청도까지 가야만 하였습니다. 약 백리의 길이라 차 안에서 이러 저러한 생각을 하던 중에 여비를 잘못 계산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50원의 여비는 청도로부터 평창까지 가는 여비요, 교주에서 청도까지의 여비를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차비는 1인당 1원이니 두 사람에게 2원이요, 또 청도에 도착하는 즉시로 승선하는 것이 아니라 여관에서 1박하고 내일 승선하게 되었으니 여관 숙박료가 또 1인당 1원씩이요, 본인이 돌아갈 차비가 1원이니 도합 5원이 부족하였습니다. 너무도 답답하여 딸에게“애! 너의 여비가 5원이 부족하구나” 하니 딸은 얼른 대답하기를 “청도에 가서 꾸세요” 하였다. 그러자 홍선교사는 딸에게 “애야! 나는 평생에 돈 꾸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하는 애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글썽하며 “그럼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을 하였습니다. “애야, 우리 기도하자. 응? 하나님께 달라 하자!” 하니 픽 웃었습니다. 홍선교사는 웃거나 말거나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고 나서도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기차는 계속 달려만 가고 있었으며 얼마 후에 성양이란 역에 와서 정차하였습니다. 이 때 마침 청도 편에서 마주 오는 열차가 들어오더니 홍선교사가 탄 기차와 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게 되었습니다. 홍선교사는 우연히 차창을 열고 내어다 보는데 저 편에서도 창을 열고 이 쪽으로 내어다보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홍선교사가 시무하던 교회의 집사였습니다. 홍선교사를 보더니 “목사님, 어디 가십니까?” 하길래 “네 이번에 내 여식을 귀국시키려고 청도로 데리고 갑니다.” “아 그렇습니까” 하더니 자기가 탄 차에서 내려서 홍선교사가 있는 차창 앞으로 와서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 5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더니 “너무 섭섭하니 과자나 좀 사 주세요”하였습니다. 홍선교사는 그 돈을 받을 때 두 눈에서 또 한 번 눈물이 흘렀고 딸도 울었습니다. 어린 소견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기묘하다는 것이 놀라운 모양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청도 항구에서 딸을 태워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1전도 부족함이 없고 또 남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매일말씀나눔

일요일(4.14)부터 금요일(4.19)까지는 이른바 고난주간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간은 성경의 사건들을 따라 주님의 행적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치를 하는 도중에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이 당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행위였음을 알려주셨습니다(요12:1-8). 이틑날 일요일 주님은 감람산 동쪽 산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감람산 벳바게까지 가파른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이윽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고 나귀새끼를 데려오게 하셔서 이를 타고 약 1킬로를 내려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마21:1-11/ 슥9:9성취).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르면서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군중들 중에서 나사로를 살린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증언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약 1백만명의 사람들이 세계각지에서 모여들기에 주님을 환영하는 인파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성에 가까이 가시자 우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거부한 예루살렘에 닥칠 멸망을 아셨기 때문입니다(눅19:41-44). 성전에 들어가서 둘러보신 후 날이 저물자 열두 제자를 데리고 성을 나와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 아침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다가 시장하셔서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는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으나 아무 열매도 얻지 못하시자 그만 저주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한 이스라엘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을 내쫒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막1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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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범죄자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눅23:32-43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골고다에서 십자가 처형이 있던 그 날 예수님 혼자만 집행 당하신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의 비중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명의 범죄자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날 로마의 법정에서는 3명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한 명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고, 다른 두 명은 강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23:32-33).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미움과 조롱의 말이 터지고 그리고 절망의 모습이 드려지는 중에, 범죄자 중 한 명은 예수님의 말과 정체성을 옹호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23:42). 사실 로마의 십자가 처형의 모든 절차를 보면 예수님을 비하하면서, 그의 신뢰성을 추락시키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예수님을 때리고, 조롱하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옷을 벗기고,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붙여놓았습니다. 범죄자 중 한 명은 함께 달린 예수님을 보고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등의 비난 섞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편에 달려 있던 범죄자가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겉모습은 범죄자와 같이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800년 전 이미 선지자 이사야가 잘 예언해 놓고 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사53:9).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골고다에서 예수님과 함께 달려 있는 두 범죄자의 존재는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거부와 수용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와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에 관한 수 많은 예와 비유들을 생각나게 하였습니다.대표적인 예들은 오른 편에 구분된 양들과 왼편에 구분된 염소들의 비유(마25:31-46),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마13:24-30), 못된 고기와 좋은 고기를 가르는 비유입니다. (마13:47-50). 그러므로 이런 매우 극적인 순간에 일어난 결과를 보고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 고난 주간을 보내야만 할 것입니다 (마틴, a visual guide to Gospel events 178-79).

매일말씀나눔

2019.4.8 – 12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섬김은 일생의 직업을 포함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일생의 직업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행하는 섬김의 핵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진실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직업과 관련하여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인 이상, 이 점은 타협할 수 없습니다. 장차 갖고자 하는 직업이 무엇이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섬김이라는 관점에서 평생의 직업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직업을 유감스러운 것으로, 불가피한 숙명으로, 때론 노골적으로 귀찮은 것으로까지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생계비를 벌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면, 가족들을 부양해야 합니다.이런 관점에서는 직업이란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개인적 야망의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 지위, 권력, 안정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그와 같은 표준에 의해 일생의 직업을 결정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이에 반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직업을 복음 전도를 위한 유용한 영역으로, 다른 방법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보나 이것은 직업을 택하는 이유가 되기에는 전적으로 부적합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직업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부르신 섬김 그 자체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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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요한복음 9:24-25

종교당국자들은 두 번째로 맹인이었던 그 남자를 불러 이르기를,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우리가 이 사람은 죄인인 것을 알고 있다’ 라고하니, 그는 ‘나는 그가 죄인인지는 모르나 하나를 아는데 맹인이었지만 지금 본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파문을 당할지라도 그가 아는 ​​한 가지, 그리고 이 시점에서 그는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한 가지는 ‘그는 맹인이었고, 이제 본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전체적으로 목격자 주제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들에게 ‘결정적인 믿음은 개인적 목격자가 가지는  증거가 특징이다’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전 세대를 거쳐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히 자신의 변화, 즉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가는 자신의 경험에 똑같은 말을 적용해 왔습니다. ‘ 한 가지를 내가 아는바, 내가 맹인이었지만 지금 나는 본다.’

‘차마 신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라는 소책자에는 박영덕 목사님의 간증이 실려 있습니다. 이분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을 두 가지로 증거합니다 첫째가 성경이 증거하는 객관적 진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들고, 둘째 주관적인 증거로 기도응답의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대학원을 마치고 카투사에 입대하여 일병을 단 때였습니다. 그해 5월에 서울의 중앙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8월에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적인 수련회가 부산에서 개최되는데 자신이 강사로 왔으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팜플렛에 강사로 소개해 버렸습니다. 박일병은 영락없이 8월에 강사로 가야만 했고 그 때부터 8월 수련회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6-7월 경에 한 형제를 만났는데,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신앙 생활을 하다가 대학 시절에 신앙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박영덕 일병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박일병은 그에게 두 가지 증거, 즉 객관적 증거인 예수님의 부활과 주관적 증거인 기도의 응답에 대해 설명했습니다.그리고 앞으로 부산에서 개최될 수련회에 비록 일병 신분이지만 참석하려고 기도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그 형제는 고개를 저으며 수련회에 가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인사과에 근무하고 있던 터라 누구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박일병은 반문했습니다. “만약 내가 수련회에 가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는 “만약 박일병이 정말 8월 수련회에 참석하게 된다면,나도 하나님 계심을 인정하고 교회에 나가겠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시 일병인 지위에서 박영덕 청년은 대책이 있을 리 만무하였습니다. 다만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군 생활을 하던 중 부대에 대구 지역 모범 사병 선발 대회가 있어 상부에서 참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응시하였는데 어쩌다 보니 박영덕 일병이 뽑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들려오는 말이 대구 지역 모범 사병으로 뽑힌 사람은 우리 사령부 선발 대회에 나가게 되고 거기서 3등이 되면 3-4일간 휴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알아보니 1등이나 2등은 의무적으로 10월에 있을 전국 카투사 선발 대회에 후보로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박일병은 선발 대회에서 1,2 등이 아니라 반드시 3등을 해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난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가 8월에 있을 의대생 수련회에 가야 하는데 이번 전국 대회에 나가 꼭 3등을 하게 해주십시오” 그 때부터 박일병은 수시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드디어 선발 시험을 치렀고 결국 박일병은 3등을 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며칠간의 휴가 외에도 부대의 배려로 총8박9일의 포상 휴가를 얻어 부산 수련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수련회 참석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던 그 형제는 박일병과 함께 부대에 있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p 112-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