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20. 1. 20 -23

오늘부터는 존 스토트의 저서 『새 사람』을 가지고 아침 묵상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그 내용은 로마서 5장에서 8장까지 주해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받은 위대한 특권 4가지를 – 하나님과의 화평, 그리스도와의 연합, 율법으로부터 자유, 성령 안에서의 자유 – 적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신약성경 가운데 기독교의 복음을 가장 완벽하고 일관되게 설명하는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서신에서 인간의 죄와 버림받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위한 성령님의 사역,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지위, 복음과 윤리와의 관계 등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말합니다. 로마서는 복음의 광대함과 문체의 장엄함, 그리고 함축성에 있어 경탄의 대상이 되어 왔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을 설명하는 바울의 논증 방법 또한 모든 세대의 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로마서 전 16장 중 저자는 5장-8장을 따로 떼어 강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5-8 장은 일관성을 가지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구원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위대한 특권들을 묘사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새롭게 된 사람들’, 바꿔 말하면 그분이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신 이들이 받은 특별한 권리들입니다. 이에 반하여 로마서 1장-4장은 칭의(justification – 의롭다고 일컬어짐)의 필요성과 칭의의 방법에 관한 진술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 의해서만 그리고 오직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뒤따라 나오는 5장-8장은 칭의의 결과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양된 양자의 신분과 성령님에 대한 순종의 삶 그리고 도래할 천국에서의 영광을 소망하는 삶으로 특징지워집니다. 그러므로 이를 전제로 오늘 한 번 로마서 1-8장까지 죽 읽고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로마서 5장-8장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과의 화평(5:1-19) (2) 그리스도와의 연합(5:20-6:23) (3) 율법으로부터 자유(7:1 – 8:4) (4) 성령님 안에서의 삶(8:5- 39). 한편 오늘부터 묵상해 볼 부분은 로마서 5:1-19로 주된 주제는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이 부분 역시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11절까지의 첫 번째 단락은 칭의(稱義- 의롭다고 선언되다)의 열매, 곧 칭의의 결과를 묘사합니다. 12-19절까지의 두 번째 단락은 우리에게 칭의를 주신 칭의의 중보자 곧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면 5장 1-2절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구절들은 칭의의 결과를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문장으로 요약한 말씀입니다. 첫째,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1절). 둘째,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2절 상).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2절 하). 이 말씀에 따르면 칭의는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과 지금 그 안에 서 있게 하는 은혜, 그리고 장차 받을 영광을 열매로 맺습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세 가지 시제 혹은 세 가지 국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1)칭의의 직접적 효과인 ‘하나님과의 화평’ (2) 칭의의 지속적 효과인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 (3) 칭의의 궁극적 효과인 ‘하나님의 영광’ 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 같은 죄인들은 절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반드시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속죄가 효력을 나타내는 첫 관문이 바로 칭의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이런 칭의의 세 가지 결과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가 율법의 행위들에 의하여 그분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해서 죄에 대한 지식이 오기 때문입니다.” (롬3:19, 사역)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1-2). 이 본문에서 나오는 칭의는 구원에 대한 세 가지 시제 혹은 세 가지 국면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를 자세히 볼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화평’은 칭의의 직접적인 효과에 대해 말해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되어 하나님과 불화상태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칭의의 직접적인 효과는 그러한 불화 상태를 평화의 상태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둘째,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은 칭의의 지속적인 효과에 대해 말해줍니다. 이는 우리가 은혜 안에 계속 들어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새영어성경(NEB)은 이 구절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라고 번역합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이미 들어가 있고, 지금도 그 안에 서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영광’은 ‘천국’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은 자신을 천국에서 완전하게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뿐만 아니라,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그와 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3:2). ‘바란다’는 말은 소망을 뜻하고, 여기서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참되고, 확실한 신뢰 혹은 기대를 말합니다. JB 필립스가 ‘행복한 확신’이라고 번역한 이 소망은 , 너무나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영광의 소망을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확실히 믿으며 기대하며) 즐거워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1-2).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각 부분은 그리스도인이 된 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변화되었음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즉 그것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조화로운 삶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여기에 이웃과의 관계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과의 화평,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 하나님의 영광, 이 세 가지 요소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요약임이 분명합니다. 화평’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이미 끝나버린 불화 상태를 떠올리게 됩니다. ‘은혜’라는 말에서 우리는 지금도 계속 그 사랑 안에 거할 수 있게 하신 자비의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영광’이란 말에서 장차 나타날 우리의 최종적인 운명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삶에 대한 이런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마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게 된 후, 신자의 길이 대로와 같이 평탄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님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은 자갈만이 아니라, 가시덩굴로 뒤덮여 있는 좁은 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3절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화평, 은혜, 영광 맞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고난도 동반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가복음 10장 29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위하여 집과 전토 그리고 심지어 가족까지 버린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서 축복하시는 방법에 관하여 주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면이 많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축복을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 속에 함몰되어 멸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항상 감사하시고 즐거우면 찬송을, 어려우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매일말씀나눔

20.1.6 – 10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큰 일들을 마치 작은 일들처럼 하게 도우소서. 왜냐하면 제가 당신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들을 마치 큰 일들처럼 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일들이 닥칠 것입니다. 큰 일이 닥칠 때에도 두려워 하지 말고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여 담담하게 처리하며, 작은 일을 하게 될 경우에도 경시하지 않고 주님의 자녀답게 최선을 다해 처리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웃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그들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올 한 해에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자녀들이 자라서 말을 할 수 있을 때, 부모가 제일 자주 하는 질문은 “얼마나 컸지?”입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똑 같은 대답을 합니다. “이만큼 커요!” 보통 아이들은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키를 부풀려서 “나는 커요.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클지 아무도 몰라요” 하고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물론 과학적인 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이들에게 그 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을 작고, 약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중요한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얼마나 크십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크십니까? 데일 브루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두려움의 폭풍 속에서 괴로워할 때, 그 폭풍을 잠재울 능력을 가진 말씀이 바로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용기를 내라! 나니(I AM) 두려워 말라!”입니다. 여기서 헬라어 원문은 “에고 에이미”로서 한글은 “나니” 즉 “나다”로 번역하나 이 말씀은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호렙산 가시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영어로는 “ I AM”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평범한 인사말이 아니고 당신이 바로 이스라엘의 야훼이심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위대한 말씀 속에 바로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쉽게 인생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제자들에게 당신 손안에 바로 이 우주가 들어있음을 이해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결이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의 손안에 있음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4:26-27)

존 오토버그 목사는 “나는 우리가 사는 방식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크기의 산물이라고 확신한다. 많은 사람의 문제는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들은 완전한 능력이 있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항상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너무 작다면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염려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에 지배될 것입니다. 그 결과 만약 전도할 기회가 생기더라도 “거절당하거나 알맞은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어쩌지?”하고 움츠러들게 되고말게 됩니다. 전도가 궁극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재정적 안정도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관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직면하거나 강한 권면의 말을 해야 할 때도 슬쩍 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작은 하나님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으므로 그분 안에서 안정감을 누리지 못하고, 남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으면 십중팔구 그 유혹에 넘어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작은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의 삶을 은밀하게 보시고 어느 날 상을 주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축소시키면 믿음 없는 기도를 드리고, 열정 없이 일하고, 기쁨 없이 봉사하고, 소망 없이 고통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유를 창조하신 지혜로우며 능력이 무한한 하나님이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존 오토버그 목사님이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뉴포트 해변을 걸으면서 술집 안에서 일어난 싸움이 바깥까지 번져 나온 곳을 지나갔습니다. 마치 옛날 서부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남자 세 명이 외로운 한 사람을 구타하고 있었는데 피해자는 피를 상당히 많이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에 별로 경험이 없었지만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기 때문에 목사님 일행은 그곳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 불량배들은 갑자기 슬금슬금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놀라서 그들을 불러 세우고 왜 도망가느냐고 물어볼 뻔하였습니다. 뒤를 돌아다보니 그곳에는 엄청난 거인이 서 있었습니다. 술집 경비원이 분명하였고, 대략 2미터의 키에 몸무게 110킬로그램 정도였으며, 마치 헤라클레스의 아들 같았습니다. 목사님 일행은 몽고(3미터 크기의 전사 상)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의 면전에서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몽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엄청난 근육을 과시하며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실로 싸움을 해결하는 것은 그의 ‘영적 은사’였습니다. 그 순간 목사님의 태도가 변하였습니다. 용기와 자신감이 가득하였으며,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일행에게는 강하고 큰 몽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몽고보다 크신 분과 항상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분은 폭풍 속에 있는 우리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조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우리의 삶에 그것을 반영하지 못하며, 그런 믿음으로 직면해야 할 때 우리는 움추러들고, 기도할 수 있을 때 걱정하고, 후히 나누어 줄 수 있을 때 움켜잡고, 물 위로 걸을 수 있을 때 배 안에서 머물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 때 반드시 두려움이 닥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시각을 가져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믿음의 시각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2020.1.13 – 17

하나님은 온 우주를 우리 주님을 통하여 지으시고,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는데,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신뢰하고 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생활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인간이 하나님의 광대함, 존귀함, 힘을 인식하고 선언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장려하지 않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로 평가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예배는 생산적인 것 같지 않습니다. 예배로 무엇이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배를 드립니까? 여기에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필요로 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는 보여질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입니다. 땅은 이미 그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고, 세상에는 두려운 일이 가득하며 결국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사망으로 귀결되도록 운명지워졌습니다. 자기가 잘 모르는 벌판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 어린 아이처럼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세상을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과 불안은 인간 존재의 본질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과 경험이 없다면, 세상에 압도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피조물들(경력, 실력, 돈, 명예, 인맥, 권력, 체력 등)을 경배하고 숭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4개월만 교회에 나오지 않고 기도와 찬양이 없으며, 성경을 읽지 않으면 여러분은 세상사람과 다를 것이 없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법인 예배의 감동과 기억이 마음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4-5).    

우리는 때로 베드로처럼 배 밖으로 나갈 때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고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크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에디오피아가 아직 공산주의 치하에 있을 때,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친구와 함께 2주간 설교하러 그곳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을 초청한 지하 교회들은 50권의 주석 성경을 가져올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성경 밀수가 문제를 일으킬까봐 염려가 되었지만 목사님은 시도해 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여러 미국 교회들이 필요한 성경을 기증하였고, 떠나기 직전에 한 여성이 다가오더니 목사님의 손에 한 권을 더 쥐어줘서 목사님의 선교 일행은 총 51권을 가져갔습니다. 당연히 세관 직원이 이 선교팀의 옷 가방 중 하나를 열더니 성경을 압수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오토버그 목사님은 세관의 수장인 관리가 교회 리더들과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일행은 최악의 상황이 올까 봐 두려웠습니다. 에디오피아의 교회 리더들은 감옥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이제는 아예 감옥을 ‘대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감옥은 하나님이 그의 리더들이 성장하기를 원하실 때 보내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요셉처럼 그들 중 일부는 간수들이 쉬러 갈 때 감옥을 책임지기도 하였습니다. 간수들은 라이플 총에서 총알을 빼어 그리스도인 죄수들에게 건네주고 돌아올 때까지 경비를 서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목사님 일행은 여러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관리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관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불법입니다. 하지만 눈 감아 드리겠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도 한 권 갖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1권을 기증받은 것 역시 이 관리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깨달은 목사님은 회고합니다. “그날 내 하나님은 좀 더 커지셨습니다. 주님이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크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기 능력의 배 밖으로 나갈 때마다 그의 하나님은 좀 더 커진다는 진리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3-4).

하나님이 하신 일을 묵상하려 할 때 집중하지 못하고 흐트러질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방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주목합니다. 방심상태에서 나의 몸은 현장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어느 곳을 자동으로 떠돌고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 때때로 이런 방심상태로 인하여 고통을 겪고 몇몇은 아예 생활의 한 방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방심은 우리를 예배하지 못하게 막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되 거기서 하나님의 손길에 주목하지 못하고 방심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미스터리를 제거해 버리는 시대에 살면서 미스터리가 없어서 아쉬워합니다. 발신자 추적을 하고, 아기들이 태어나기 전에 성별을 알고, 출구 조사를 하여 투표가 끝나기도 전에 누가 선출되었는지 알고, 텔레비전 마술사들이 항상 숨겨 왔던 비밀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경이를 파괴해 놓고서 그것을 몹시 갈망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너무 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접할 때 우리는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명령하지 않아도 폐는 계속 공기를 흡수하고, 아침에 눈을 뜰 때 매일 잠이라는 작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부활시키는 기적을 잠시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그것을 일으키는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들려올 때 느껴지는 아름다운 선율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귀를 울리는 공기 분자의 진동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공기 분자의 진동의 의미를 알아듣고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기적이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외치는 작은 신현(神顯)입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40:26).

예배가 때로는 지루해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예배의 방식이나, 찬양의 종류 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배 안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산과 폭풍 위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말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미지는 더 작아지고 더 편해지는 경향도 존재합니다. 천사만 봐도 그렇습니다. 천사들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영적 존재에서 편한한 개인의 수호 천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CS 루이스는 성경에서 천사의 등장은 항상 두렵고 무서운 사건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천사를 만나는 모든 경우 “두려워 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항명으로 1965년 감옥에 들어가 12년간 옥고를 치루고 1976년  풀려 나온 고 이인수 장로님이 1985년 장교들이 모인 앞에서 한 간증을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감옥에서 낙망과 절망에 잡혀서 나날을 보내던 중 병까지 들었습니다. 몸무게가 38킬로 그램 정도로 내려갔고 의사도 이제는 끝났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병상에서 위로를 받으려고 성경을 잡고 펴니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 한다는 내용이 적힌 로마서 5장 3-4이 나왔습니다. 마음에 “다 죽어가는 마당에 이런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어”하고 부정하자마자, 옆에 천사가 나타나서 “이 까짓 정도 가지고 낙망하냐!” 고 책망하셨다고 합니다. 이 대목은 아쉽게도 1985년 출간한 그분의 간증집 “언제까지나 당신과 함께”에는 누락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영적 체험 등으로 감옥에서 12년 간을 이겨내고 드디어 석방되어 여러 해 동안 주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항상 하나님과 천상의 존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주님을 경외하면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3:10-11)

C.S. 루이스의 책 『캐스피언 왕자』에서 한 아이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자 아슬란과 우연히 만납니다. “아슬란, 당신은 더 커졌어요.” “그건 네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지, 애야” 아슬란이 대답합니다. “당신이 나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고요?” “나는 나이가 들지 않아. 그러나 매년 네가 자랄 때마다 내가 더 커진 것을 보게 될 거야.” 우리와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이야기가 예배로 끝나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예배는 전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순환시킵니다. 예배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제자들이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아마 베드로가 배 안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제자들이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크시지?” 베드로는 머리 위로 손을 높이 들어올리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만큼 크셔!” 예수님이 배 안으로 들어가시자 바람이 잠잠해졌고 폭풍도 사라졌습니다. 갑자기 제자들은 그들과 함께 배 안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 한결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누군가 배 밖으로 나갈 때는 항상 그렇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결코 전과 같지 않게 됩니다. 결과가 무엇이든, 그들이 빠지든 헤엄치든 무언가는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진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의 남은 인생 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소명을 분별하여 순종하려 할 때마다, 우리의 하나님은 더 커지실 것이며 그에 따라 우리의 예배와 믿음은 더 깊어지고 더 풍성해지고 더 강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 그분을 신뢰하고 나설 사람들을 아직도 찾고 계십니다. 그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이에 대하여 우리들도 믿음으로 응답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히11:1-2, 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