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C 매일 큐티

2016. 4. 25- 29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가지고 계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불신자와 폭넓은 교제를 나누어야 마땅합니다. 이를 위해서 가능한 한 좋은 취미생활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사우스웨스턴 신학교의 페이지 페터슨 총장님은 곰과 같은 야생맹수들을 수렵하는 클럽에 가담하여 취미생활을 즐겨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런 취미생활을 통해 여러명의 불신자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200 여명을 전도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하였다고 합니다. 이 분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불신자와의 폭 넓은 교제를 나누었기 때문에 이런 전도의 열매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어진 상황에서 불신자들과의 교제의 폭을 넓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결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인과만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 사회적, 지적으로만 결합하고 영적으로는 결합하지 않는 관계를 맺기에는 결혼은 너무나 친밀하고 성스러운 결합이기 때문입니다(고후6:14).

 오늘부터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길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른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가장 잘 예언하고 있는 본문은 이사야 42-53장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예언의 최종적인 성취자로서 오셨습니다. 그분 자신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고 말슴하셨습니다(막10:45). 그분은 가르치시고, 설교하시고, 치유하셨으며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시지 못할 만큼 비천한 일도, 부담스러운 일도 없었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급기야 주님은 여기서 한 번 더 낮추사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자신이 실행했던 섬김의 이상들을 본받고 나아가 그것들을 더욱 발전시키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라고 하시면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다른 모든 면에서처럼 예수님은 섬김에 대해서도 우리의 모델이 되십니다. 섬김을 통해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섬김을 통해 우리의 사랑과 생명을 주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여호와의 종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한 분들은 바로 사도들입니다. 바울, 베드로, 야고보, 유다 이들은 모두 서신서 서두에서 자신들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주저없이 불렀습니다. 이 의미는 자신들을 예수님이 피 값을 주고 사셔서 당신의 소유물로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인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주된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고 말씀하심으로 이를 명백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중적인 예속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부름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고후 4:5). 마르틴 루터는 이런 사상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논문을1520년에 썼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나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논지를 가지고 외견상 상반되나 내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것에 자유함을 받은 그리스도의 종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봉사(섬김)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됨으로 모든 것에 자유를 받았으나 도리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봉사를 하여야 한다면 그런 사랑의 봉사 즉, 섬김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섬김(service)과 사역(ministry) 이 두 단어는 모두 동일한 헬라어 단어인 디아코니아(diakonia) 를 한글로 번역한 말입니다. 이 헬라어 단어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위하여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섬김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우리의 이웃은 모두 몸과 영혼을 가지고 사회라는 공동체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이웃의 전체적인 행복, 즉 신체적, 영적 그리고 사회-정치적인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3가지가 모두 그리스도인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명과 은사에 따라 섬김의 중점이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이 3가지를 함께 또 균형있게 고려하지 못하고 한 곳으로 치우치는데서 우리의 섬김의 문제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로마서 4장 16-17을 강해하는 중 존스토트 목사님은

 “믿음은 생각하는 신뢰입니다” 라고 갈파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하여지지 않고 (롬4:19) 도리어 강하여졌습니다 (롬4:20). 어떻게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따르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사용함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거나, 우리가 진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을 믿으려고 몸을 배배꼬면서 몸부림치거나, 우리의 정신을 바짝 긴장시키기 위해 어둠 속에서 휘슬을 부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믿음은 이치를 따지면서 하는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우리를 직면하는 문제들에 관해 생각해야만 합니다. 믿음은 결코 그런 문제들에 대해 우리의 눈을 감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몸은 죽은 자와 다름없었습니다. 또 사라의 사정 역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 역시 죽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절). 이를 좀 더 낫게 말하면 아브라함은 그와 사라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숙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들을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그 하나님이라는 것을 숙고하였던 것입니다(17). 그리고는 이런 약속들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였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움추려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충분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롬4:21).

제자도는 바로 이 갈림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좁은 믿음의 길을 걸어갔으며 그 결과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여로보암 1세입니다 (열상 11-12장 특히 열상12:26). 그는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10지파를 주겠으며 당신의 법도를 지키고 다윗과 같이 신실하면 그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정치인으로서 가장 큰 약점이 공격받았을 때 그는 그만 그 약점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북이스라엘 왕국에는 예루살렘이 속하여 있지를 않아 자신의 백성들이 절기때면 남왕국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것을 보고 결국 백성들이 배반하여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이 금송아지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라고 선전하였습니다. 또한 레위지파에서 제사장을 뽑지도 않고 절기도 자기마음대로 정한 8월 15일로 하여 유대의 절기와 비슷하게 함으로써 북이스라엘 백성들로 우상의 길로 인도한 장본인이 되었고 20년 뒤 그 가문은 멸망당하였습니다.

믿음은 생각하는 신뢰입니다. 미국에 시드니라는 앰프를 만드는 회사의 공장장이 있었습니다. 회사가 200대의 앰프를 주문 받자 그는 이를 전부 생산하였으나 앰프가 하나도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와 직원들이 설계도부터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도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이분은 사무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는 예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이유를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에  2개의 특정전선을 서로 교차시키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엔지니어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번 시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앰프가 작동하는 것이었습니다. 200대 모두 잘 납품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엔지니어인 나보다 앰프를 더 알고 계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이십니다. 갈림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신뢰하십시요.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계보를 잇는 믿음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Chagall_56Bible_Abraham_SarMarc Chagall – Abraham and Sara (1956)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라

마태복음 5:43-48

 

복음의 열매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주님은 죄인인 우리들을 사랑하사 인간이 되시고 그 죄를 속하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으며 그 죄인들을 의롭다하시려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 전 행동이 사랑의 실천이자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삶이 잘 나타난 것이 세리 마태와의 조우였습니다.

 주님께서 가버나움의 길을 가시다가 세리 마태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다가가사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태는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 당시 세리는 많은 사회적인 차별과 비난은 매우 컸습니다. 이들은 유대법에 의해 회당 출입이 금지되었고 어떤 경우에도 증인의 위치에 서지 못하였고, 부정한 짐승들이나 부정한 것들에 포함되었으며, 강도들과 살인자들과 같은 범주로 분류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세리 마태에게 먼저 다가가사 당신을 따르도록 부르시고 타부시된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으나 그들의 잘못을 한 번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신다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인자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고 하시면서 유대인 사이에서 존재하였던 사회적 장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에 비난 받는 세리는 하나님의 왕국의 사도로 변화되었고 목숨을 걸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례를 본받아 실천하신 분으로 일본의 나가노 목사님과 가가와 토요히코 목사님을 들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 나가노 라는 일본의 젊은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곳으로 가서 개척할 것인가를 기도하다가 동서남북 100킬로 이내에 단 한 명의 교인도 없는 곳을 찾아 일본의 북부 가나사와 지방으로 갔고 여기서 천막을 치고 아내와 아이 둘을 놓고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5년간 한 명의 교인도 없이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드디어 5년이 지난 어느 수요일 저녁 첫 교인이 들어왔습니다. 청년이었고 설교 후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밥을 먹다 말고 식탁 위에 검붉은 피를 쏟아내었습니다. 폐결액 환자였던 것입니다. 20세기 초엽인 이 당시의 폐결핵은 매우 무서운 전염병으로 이 청년은 다니던 신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쫓겨났던 사람이었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순간적으로 갈등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내 진정하고 자기 손으로 핏덩이를 쓸어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청년에게 음식을 다시 가져다주며 함께 먹었습니다. 청년은 배웠습니다. 신앙은 사랑이라는 것을. 천막 교회에서 나가노 목사와 얼마동안을 지내는 동안 기적처럼 청년의 폐병은 나았고 이 청년은 신학교로 되돌아가 졸업하고는 일본 고베와 도교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중국의 빈민 선교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분이 유명한 가가와 토요히코 목사님이었습니다. 종전 후 한국에 와서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것을 사죄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이 분이 빈민구제 활동을 할 때는 심지어 변비가 걸린 환자의 항문을 혀로 녹여내어 변을 보게하였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런 빈민구호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저는 배운 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각혈한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 분이 하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사랑의 시작은 부족한 것이 보일 때입니다. 흠이 보일 때인 것입니다. 가가와 목사님은 사랑이란 남의 실수나 실패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부터 시작하십시요!

FullSizeRender삽화: 신예현 (www.lifeisyea.com)

금식의 논쟁과 그리스도

누가복음  5장 33 – 39절

 

오늘 본문에서 침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금식에 대하여 질문하였습니다. 주님은 먼저 “신랑의 친구들이 혼인 집에서 금식할 수 있는가?” 라고 반문을 하시면서 제자들이 신랑인 자신과 잔치를 즐기는 것은 옳바른 태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더나아가 새 옷조각과 낡은 옷과 관련한 비유와 새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의 비유를 들어 이런 입장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형성한 일반상식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종교적 열심만으로 이를 깨뜨릴 때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이에 따라 사람들을 자유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전파하신 이 복음은 구원받은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율법하에 놓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을 섬기는 삶을 말하며 이렇게 살아갈 때 비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우리가 살아가는 일반 상식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2.    우리는 복음이 주는 자유를 알아야 합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SBC 매일 큐티

2016. 4.18 – 22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건강과 발전의 첫 번째 조건이, 매일 성경 읽기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조건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고립된 환경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교제의 기쁨을 이미 맛보았다면 결코 교제를 끊어 버리고 살아가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 신자의 경우는 교회의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고 기존신자들의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새 신자들이 가능한 별 어려움 없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인내하라고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의 헌신된 일원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 제자도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헌신된 일원으로 적응하고 나면 그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면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바꾸는 것은 곧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 고독한 면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측면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는 사회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6:6) 하심으로 은밀하게 기도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기도할 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함께 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인 것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영원 전부터 계획되었던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장차 도래할 영원 속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모든 나라와 문화로부터 하나로 불러 모아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수많은 생생한 비유를 통해서 이러한 거룩한 사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현저한 예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백성들을 하나님 가정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의 주춧돌(엡2:19-22)로 묘사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양들로(요12: 27-28), 그리스도의 포도나무 가지로(요15:1-7),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고전12:27) 표현하는 대목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기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지체인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갈라놓았던 장벽을 허무시고, 우리와 화해하심으로써 우리가 서로 화해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신조이자 굉장한 유익을 서로간에 가져다 줍니다. 먼저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안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아이들이 사춘기라는 변혁의 시기를 통과할 때 가정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처럼, 우리가 유혹, 환난, 회의에 시달리고 있을 때, 교회를 통한 거룩한 교제는 우리가 흔들리지 않게 지켜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영국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최근 주일 예배를 계속 빠지고 있는 신자를 심방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벽난로 앞에 조용히 앉아 있더니 부젓가락을 집고 불 속에서 한창 잘 타고 있는 석탄 하나를 집어서 벽난로 바깥에 꺼내 놓았습니다. 그 석탄은 얼마간 깜박이더니 불씨가 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꺼진 석탄을 들어다가 벽난로 속에서 타고 있는 다른 석탄들과 함께 두었습니다. 그러자 몇 초 만에 꺼졌던 석탄은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그는 심방 내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에 그 신자는 교회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지역교회에 소속되는 문제에 관해 존 스타트 목사님은 이렇게 권유하고 있습니다. “눈에 분명히 보이는 지역 교회에 소속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교회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완전히 변칙적인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지역교회를 찾아 교회의 완전한 일원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간곡히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항상 이 교회 저교회를 철새처럼 떠돌아나니면서 한 곳에 둥지를 틀지 못하는, 소위 교회 집시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교회에 등록해서 정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주일 예배 때에는 항상 당신의 자리에 앉기를 바랍니다. 환경이 허락한다면, 성경 공부나 기도회, 십여 명이 함께하는 이웃 간의 교제 모임처럼 주 중에 이루어지는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유익합니다. 성도들 간에 서로를 알아 가고 주 안에서 서로 격려할 수 있으려면 소그룹 모임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리 레위와 그리스도

누가복음 5장 27-32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 세리 레위(마태)를부르셨습니다. 부름받은 레위는 즉각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레위는 잃어버린주님의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은 당신의 양을 알고, 그 양은 주님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영생을 주고 계십니다. 한편, 레위의 초대로 레위의 집에 들어가신 주님과 제자들은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 멸시와 심한 차별 가운데 있던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친교를 나누셨습니다. 지금 주님은 복음 안에서 사회적 장벽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사람들 간에 존재하는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행동을 본받아 우리도 인간이 세운 불합리한 사회적 장벽과 차별을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1.     주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2.     주님은 복음 안에서 사회적 장벽을 무너뜨리신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3.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불합리한 제도나 사회적 장벽을 타파하여야만 합니다.

SBC 매일큐티

2016/4/11~4/15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면 좋을까요? 먼저 우리의 창조와 보존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축복에 대하여 그 다음으로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구속하신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하여, 아울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영원한 부활의 영광을 주실 그 소망에 대하여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루를 마감하는 순간에 오늘 하루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회상하기 위해 되돌아보는 것은 필요한 습관입니다. 물론 하루 동안에 지은 죄 역시 고백하여야만 하지만 이때 반드시 우리 죄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원 또는 간구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면서 많은 말로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은 기도를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줄 알고 계시지만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사랑 안에서 그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고 싶어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분을 어르거나 조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와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실 것 그리고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등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주 기도문에서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 우리는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외관상 서로 부딪치는 이런 말씀들을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만 하겠습니까? 또한 여러분은 기도의 목적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존 칼빈은 기도의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 것들에 대하여 그분께 알려 드린다거나, 의무를 다하라고 재촉하거나, 내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억지로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신자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찾도록 그들 자신을 일깨우고,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함으로써 믿음을 발휘하며, 자신의 염려를 하나님의 품에 내려놓음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한마디로 기도는 하나님 한 분만이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모든 좋은 것을 주실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이 모르는 정보를 알려 드리는 것도, 내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 뜻에 맞게 바꾸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맞추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뜻을 갈망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불확실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일, 다음 주, 그리고 내년에 해야할 일들이 무엇이고 이와 관련된 희망과 두려움을 예상하게 됩니다. 또한 질병에 걸리는 문제, 부모님과 사별, 우리의 죽음, 재림과 부활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 더 멀리 응시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또 일어난다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불확실성이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원, 우리의 기도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오직 한 가지만을 기도할 뿐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며, 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한 마디로 기도 생활입니다. 이 기도 생활은 바로 성령에 의한, 성자를 통한, 성부와의 교제 체험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 삶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것입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훈련이 익숙해질수록,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살전5:17)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요 15:1-8)이 더욱 쉬워질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가 사이사이의 시간 가운데 스며들어 가득 채우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15장 7-8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한다면 무엇이든지 원하고 있는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희들을 위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고 있어서 내 제자가 되는 이 것에 의하여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원어에서 사역).

어떤 중풍병자와 그리스도

누가복음 5장 17-26절

예수께서 가버나움 동네로 돌아오시니 중풍병자가 사람들에 의하여 지붕 위에서 침상채 내려져 주님 앞에 놓여졌습니다. 이는 중보기도의 좋은 예입니다. 왜냐하면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주님 앞에 데려가는 사랑의 수고 자체가 중보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붕이 파손되었지만 이를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넉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시 주저하지 말고 주님 앞에 가져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죄의 문제라 할지라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를 사하시고 능력을 행사하시며 영광을 받으시기를 결정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한편, 어려운 문제가 발생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달을 준비를 하십시요.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거룩하신 뜻을 알게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기도를 통해 한 청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는 죄를 용서하시고 중풍병을 고치신 사건을 통해 깨달아야만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만 합니다

 

SBC 매일 큐티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

중보 기도(intercession)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물론이고 원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들과 자신이 회심시킨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예, 롬1:8-10; 골2:1). 우리 역시 우리의 기도 속에 다른 사람들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엡6:18). 오늘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 드린 사도 바울의 중보기도를 올려드리겠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멸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종의 기도 목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기도할 때 질서있게 하도록 도와줍니다. 아마도 그 목록에는 가족과 친구, 친척 또 주 안에서 한 식구가 된 사람, 직장동료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때때로 정부와 국회, 국민 생활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 지도자와 공무원 그리고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특정 인물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세계 평화와 정의에 대해서도 그리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반드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다보면 기도 목록이 너무나 길어지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집니다. 이를 질서 있게 모두 포괄하여 기도하는 방법은 매일 기도해 줄 사람과, 매 주 혹은 매 달 혹은 이따금 기도해 줄 사람의 목록을 각각 작성하여 탄력있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지 목록을 탄력있고 융통성 있게 계속 수정해 가면서 활용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사우스 웨스턴 신학교의 페이지 페터슨 총장님은 젊을 때 친구의 권유로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는 어느 여 성도를 만나러 갔습니다. 이 분은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으며 젊은 페터슨을 보았을 때 기도해 주겠다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에 응하여 기도를 받았는데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는지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였으며 마음에 햇살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너무나 그녀의 기도에 은혜를 받자 매일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No”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유로 그녀 앞에 있는 큰 달력을 들추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매 30분 단위로 일년간 중보기도할 제목과 사람들의 이름이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탁하기를 자신의 생일에 한 번 자기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더니 그 날이 비어있었기에 기쁘게 기도해 주겠다고 약속을 받고 거기에 기입하였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지만 이런 중보기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의 기도생활은 도전을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존 스타트 목사님은 특별한 필요로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 이를테면 시험이나 수술을 앞둔 사람이라든가, 천국의 문턱에 다다른 사람, 이제 막 그리스도께 나아온 사람, 중요한 결정을 앞두었거나 특별한 고난 중에 있는 사람 등을 위한 특별한 메모를 하고 기도해 주는 것을 즐긴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또 다른 위기들이 닥치거나 지나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관련된 사람들을 목록에 추가하기도 하고 그 이름을 지우기도 한다고 합니다. 기도는 상세하고 구체적일수록 좀 더 나은 기도를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기도를 노트에 기록할 경우 응답된 것까지 체계적으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은혜의 확실한 증거자료를 갖고 힘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컴퓨터를 활용하거나 기도 노트를 작성하시기를 권유합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

이것은 감사 기도로 이어지는 것으로 예배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가 하면 감사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찬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 은혜, 광야에서 돌보아 주신 그 사랑 그리고 가나안 땅을 주신 그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너무나도 빨리 잊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말씀대로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렸습니다” (시106:13). 우리는 동일한 과오를 범하면 안되겠습니다. 시편 기자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라고 노래한 것 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배풀어 주신 모든 축복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 이 두가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되새기게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이동하는 여호와의 언약궤

삼상4장-7장을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가 실로에서 기럇여아림까지 이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먼저 실로에서 아벡으로 이동하는데 그 이유는 에벤에셀에서 블레셋에 패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를 담보하기 위해 실로에 있던 여호와의 언약궤를 진중에 놓게 하였던 것이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함께 갔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대패를 하였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7개월동안 블레셋의 수중에 들어갔다. 블레셋은 먼저 에벤에셀에서 남서쪽 약 46킬로 떨어진 해변가에 위치한 아스돗의 다곤 신당으로 이 언약궤를 가져갔으나, 다곤신상의 파괴와 독종 재앙의 발생으로 언약궤를 다시 아스돗에서 동쪽으로 약 20킬로 떨어진  가드로 가져갔으나 독종의 재앙은 여기에도 발생하였고 그 궤를 다시 가드에서 북쪽으로 약 9킬로 떨어진  에그론에 보냈지만 에그론에 이르러서는 불레셋 백성들은 더 이상 독종의 재앙을 견디다 못하여 언약궤를 이스라엘도 돌려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이들은 에그론에서 동쪽으로 약7킬로떨어진 이스라엘 영지인 벧세메스로 보내게 된다(삼상6:12-13). 벧세메스 지역은 여호수아가 제사장 아론의 자손에게 할당한 제사장 도시였다(수21:16). 그러나 이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궤를 적절히 다루지를 못하여 벧세메스의 백성들이 언약궤를 들여다본 순간 70명이 죽임을 당하였기에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 언약궤를 다시 북동쪽으로 약 15킬로 떨어진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어 여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을 지내게 되었다(삼상7:1-2). 

하나님은 이런 언약궤의 이동으로 이스라엘과 블레셋 백성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셨는데, 그 첫째가 아벡의 전투에서 가르쳐주셨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 심지어 하나님의 언약궤로도 하나님을 조작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둘째, 하나님은 다곤신보다 강하시고 이방 블레셋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다.셋째, 블레셋의 영토에서 언약궤가 스스로 이스라엘의 영지에 들어오게 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의 그 어떤 도우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넷째, 벳세메스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 어떤 행동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었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80-8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