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9. 10. 21 – 25

죄는 매우 끈질긴 추격자입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요셉처럼 죄에서부터 도망가서 곧장 하나님께 달려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요셉은 자신의 믿음과 가치에 굳게 섰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고용주에게 충실했고 유혹을 정면으로 대결하여 이겨 냈으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켜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보상해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때때로 보상의 시기와 방법이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보디발의 부인은 요셉의 옷을 손에 들고 서 있으며, 그것은 요셉을 불리하게 만든 증거로 전환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아내의 고소를 듣고 분노했고 요셉을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나쁜 소식들이 더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소식 가운데 익숙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하나님은 요셉에게서 감옥행을 면제시켜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감옥에서 요셉과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요셉은 주님과 함께 고난을 겪는 쪽을 선택하였지, 모든 것을 갖는다 하더라도 주님이 거기에 없다면 버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믿음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그런 믿음을 400년 뒤 모세가 본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4-26).

성경을 보면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을 만난 곳은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이들은 호렙 산 꼭대기에서 혼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도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요나나 사도 바울의 경우 같이 어쩌다 바다 한가운데서 나타나신 적도 있습니다. 바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위험한 폭풍과 사악한 세력의 장소로 여겨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고양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가장 약하고 두려워서 낮아졌을 때 오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가 폭풍 가운데 있을 때, 두려워 할 때 오시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려우면 우리의 사고가 굳어지게 마련입니다. 폭풍치던 날 밤 갈릴리 호수에서 항해하는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께서 찾아오신 것과 같이, 감옥이라는 두려움의 장소에 떨어진 요셉의 경우에도 그러하셨습니다. 주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게 되었고 죄수들의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게 되자,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요셉이 성실하였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간수장이 요셉에게 맡긴 모든 일이 제대로 처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감옥에는 많은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그럴 경우 간수장은 책임을 져야만 하나, 유독 요셉에게만 일을 맡기면 아무런 불상사도 발생하지 않고 평화롭게 모든 일이 처리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사 우리 모든 일에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나타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16:3).

그러던 중 요셉이 관리하던 감옥에 떡 굽는 관원과 술 맡은 관원이 죄수로 들어왔습니다. 이들을 시중들던 요셉이 어느 날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요셉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이들에게 어떤 이유인지를 물었습니다. 사실 요셉과 이들은 보디발의 집에 있는 왕의 죄수를 다루는 감옥에 함께 갇혀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망스러운 사정에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도 실망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고 자신의 상처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세계가 좁아지고 오직 자신의 고통만 중요하게 여길 뿐입니다. 타인에 대한 마음이 무감각하게 굳어지고 의미를 상실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만 이렇게 어그러진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죄수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주목하고, 안부를 묻고, 진정한 관심을 표현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가능합니다. 이어령 선생의 최근 조선일보 인터뷰 중 한 대목입니다.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7-18)

박효진 장로가 쓴 ‘하나님이 고치질 못할 사람은 없다’에는 사형수들에 관해서도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개화된 오늘날도 교도관들이 교도소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수 천년 전 이집트의 감옥에서 간수장의 업무를 위임받은 죄수 요셉은 일이 막중하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감옥에 갇힌 일이 모함 때문에 억울하게 발생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분해서 속을 삭이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타인의 안녕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만큼 요셉의 신앙이 성숙해 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주 넘어지는 곳은 바닥이 아니라 산꼭대기입니다. 혜택받고 부러움을 사는 위치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무감각해 지고, 자신의 그 자리를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에게 몰두하게 되는 경향을 사람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폭풍을 겪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총리가 되기 전에 노예로, 죄수로 산 것은 우연이나 사고가 아닙니다. 인생의 폭풍은 다른 것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 가르침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거나 타인의 처지를 공감하는 능력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공감능력 없이 타인과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들고 일어난 파리 시민들에게 프랑스 왕비 마리 앙트와네뜨의 말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백성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나요?” “빵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아요?” 결국 마리 앙트와네뜨는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다 잡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약1:12).

스코트 펙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인생은 문제를 만나고 해결하는 전체 과정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 우리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자라는 것은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 이런 이유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환영하며 문제의 고통도 환영하는 법을 배운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결코 형들과 공동체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역경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하나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요셉은 채색 옷이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의 엄청난 꿈들과 높은 위상이 형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감옥 안에서 그는 알 수 있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요셉에게 긍휼의 눈을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정의가 없으면 사회는 범죄로 무너집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의만 존재하고 구체적인 인간의 사정을 배려 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각박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반드시 정의와 사랑이 균형잡혀야 하며, 경건한 사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지혜를 갖춘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할 줄 알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역경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난 은총 중의 하나인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요셉은 채색 옷이 벗겨지고 노예와 죄인의 처지에 놓이면서, 거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이 요셉으로 하여금 총리에 올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능력이었음을 우리는 모두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수요묵상

누가복음 12: 22-34

공자는 전 중국을 주유하면서, 자신을 받아들여 통치에 도움을 줄 나라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 초기에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던 공자 일행이 광 땅을 지날 때였습니다. 당시 광 땅 사람들은 양호에게 피해를 당한 직후였기 때문에 양호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공자를 보자 양호로 착각해 공자와 그 제자들을 포위하였습니다. 5일간 발이 묶인 일행은 일촉즉발의 위기 앞에서 두려움에 떨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하늘의 명이 주어졌음을 자부하고 의연하였습니다. 즉 요.순.우.탕에게 드러났던 도가 문왕에게 이어졌고, 지금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이 도를 없애려 하였다면 어찌 후사자인 나를 두었겠는냐? 내게 하늘의 사명이 있는데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권경자 교수는 해설하기를 “이러한 확신과 자부심이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놓고 인류의 길을 만든 힘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권경자, 논어, 266-7). 어떤 은퇴하신 목사님은 지진의 영향으로 건물이 흔들리자 두려움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분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몹씨 부끄러워 하였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한지 수십년 어찌 이런 지진에 동요할 수 있겠는가 라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받아들이기 전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만물을 조성하시며,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바치도록 명령하셨으며,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권능을 주셔서 이집트로 보내셨고, 거기서 9가지 이적을 행하하도록 하셨으며, 마침내 애굽의 장자를 죽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홍해를 가르시고,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이 백만 명에게 말씀하시며, 율법을 주신 바로 그분이 2천년 전 이스라엘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유대와 갈릴리 땅을 두루돌아 다니시며 착한 일을 하시다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 승천하심으로 대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교회의 주님이시자 머리이시며, 교회를 위하여 만물의 주님으로 등극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깐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섬김과 선한 일에 능숙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 주고 배려해 주며 남이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에 큰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유교와 모든 종교의 이상이 이루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의미는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사회적으로 그분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말합니다.

이렇게 주님 나라를 구하는 삶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근거이며, 이런 삶의 자세 위에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위안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많은 물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필요한 양식과 집 그리고 돌보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특권을 마음에 새기면 왜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주님의 권고를 삶에서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더 이상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신을 위해 은행에 돈만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섬김의 삶 역시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매일말씀나눔

채색 옷을 입음으로써 형들의 질투를 사고 있던 요셉은 드디어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요셉의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는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꿈들은 놀라운 요셉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꾸고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을 불러서 두 번이나 자신의 꿈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처음 꿈은 열 두명의 형제들이 곡식 단을 묶는데, 요셉이 묶은 곡식 단은 일어서고 다른 모든 곡식 단들은 요셉이 묶은 곡식 단 앞에 절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 꿈은 더욱 가관으로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자 형들은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형들에게 잡혀 은 20량에 노예로 팔려서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요셉은 폭풍을 맞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돈 한 푼 없으며, 아무 힘도 없으며,  친구도 집도 없고,. 삶은 계획대로 전개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마음이 드러나고 우리의 인격은 단련됩니다. 바람이 고요하고 물결이 잔잔할 때에도 배 밖으로 나가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평온할 때는 많지 않습니다. 조만간 결혼, 일, 사역, 재정, 건강에 폭풍이 엄습합니다. 폭풍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미래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폭풍을 잘 이겨내는 사람들은 어떤 특질들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요셉의 일생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욥5:7-9).”

폭풍을 이기는 사람의 주된 특징은 스트레스가 가득한 환경을 잘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역경을 이겨 낸 전쟁 포로나 인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의식을 거듭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행동은 엄청난 제한을 받은 대신, 무엇이든 아직 남아 있는 통제력의 가능성에 최대한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이제 요셉도 죄수입니다. 집을 멀리 떠나 아버지와 이별하고,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의 채색 옷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의 채색 옷과 그것이 상징하던 삶은 추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폭풍이 몰아치는 그 한가운데서, 성경은 매우 인상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자유를 잃었지만 자신을 무력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놀랄 만한 주도력과 자율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수동적인 자세를 거부한 포로와 인질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다니엘은 먼저 식단을 통제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또한 산헤드린 앞에 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복음 전파에 대한 함구령을 석방 조건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무엇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지 되물었을 정도였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어떻하였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한, 우리는 절대로 무력한 포로가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 16:24-26).

노예의 삶으로 떨어진 요셉의 상황은 결코 그가 꿈꾸던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맡은 일에 부지런히 전념하였습니다. 종의 신분으로서 주인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자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발전이 일어납니다. 요셉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는 말은, 단지 일꾼으로서 밭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집 안에서 일하도록 승진되었습니다. 실무를 경영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요셉은 보디발의 보좌관으로 승진합니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리고 나서 보디발은 곧 그를 가정 총무로 명합니다. 요셉은 전체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완전히 신임하여 장부 검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고작해야 “오늘 저녁은 된장찌게인가 아니면 김치찌게인가?” 하고 물을 뿐이었습니다. 요셉은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믿었다는 것일까요?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인내로써 요셉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일을 능동적으로 수행하여 나갔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런 삶의 자세 때문에 훗날 이집트에서 총리가 되어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역할, 즉 가족과 세상을 구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6-7).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셉은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두는 것은 인내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운동장을 한 바퀴 더 달리는 것보다 멈추는 것이 쉽습니다. 그 자리에 머무르며 갈등을 해소할 방법을 찾는 것보다 쿵쾅거리며 화가 나서 뛰쳐나가는 것이 쉽습니다. 삶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차라리 그만두는 방법이 항상 달콤하고 편안해 보입니다. “결혼 생활이 힘들어. 벗어나고 싶어. 이혼하기도 힘드니 그냥 이렇게 남남처럼 살지 뭐. 더는 노력하지 않을 거야.” 이때 나오는 대표적인 행동이 졸혼 혹은 별거입니다. “이 일은 내가 꿈꿔 왔던 것이 아니야. 더 훌륭하고 위대한 일을 하려 했다고! 이런 상황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아. 떠나겠어.” 한 사람이 앤서니라는 사막의 교부에게 질문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부는 대답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그분 말씀에 순종하라. 그리고 당신이 어느 자리에 있든지 그곳을 쉽게 떠나지 말라.” 어려움을 만나 포기하지 않고 통제력을 발휘할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좋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도 충성하겠다고 결정할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몰아치는 바람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걸을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듯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39:2-3).

요셉은 이방인이자 노예였지만, 인내하여 드디어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나쁜 소식은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다른 종류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셉은 이제 또 다른 갈림길에 섰습니다. 그것은 이성의 유혹이라는 무서운 힘이었습니다. 요셉은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상관 보디발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는 끈질겼습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결국 기회를 엿보아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옷을 잡고 죄악으로 이끌었을 때 요셉은 그 옷을 벗어버린 뒤 도망하여 그 집을 나갔습니다. 죄는 자신이 대상자를 이길 때까지 끈떡지게 물고 늘어집니다. 그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직 도망가는 것뿐일 때가 있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의 친구 중 한 분이 회사의 중역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분은 출장을 갔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노력했던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호텔 로비에 앉아 실패를 자책하며 외롭게 앉아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보디발의 아내’가 접근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을 유혹이 갑자기 저항할 수 없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갔어야만 하였습니다. 이런 실패를 겪은 사람은 요셉이 당한 유혹, 삶이 계획한 대로 전개되지 않을 때 다가오는 유혹을 압니다. 기도해야만 합니다. 평상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습작전과 같은 죄의 창날은 평소에 기도와 경건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여지없이 가슴이 뚫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6:13).

매일말씀나눔

케냐의 고아원에 많은 약품을 기부하도록 만든 밥은 다시 방문 요청을 받고 케냐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 고아원은 케냐에서 가장 큰 고아원이었기 때문에 대통령도 축하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대통령은 밥에게 수도 나이로비를 관광시켜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관광 도중에 그들은 한 감옥을 보았습니다. 밥은 그곳에 있는 죄수들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정치범입니다.” “이런 처사는 옳지 않습니다. 그들을 풀어 주셔야 합니다.” 밥은 쾌활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밥은 관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국무성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신이 밥입니까?” “예” “최근 케냐에 가셨습니까?” “예” “대통령에게 정치범들에 대해 언급하셨습니까?”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들을 풀어 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국무성 관리는 자신들이 그 죄수들을 석방시키려 수년 간 노력했지만 허사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정규 외교 채널과 정치적 수단은 막다른 골목에 닿았는데 이제 죄수들이 석방되었고, 국무성은 그것이 밥 덕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사를 표하려고 전화했던 것입니다. 몇 달 후, 케냐 대통령이 밥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정부를 개편하고 새로운 각료들을 선출하려는데, 그 중요한 업무를 하는 사흘 동안 밥이 와서 기도해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와는 전혀 관계도 없는 밥은 다시 한 번 비행기를 타고 케냐로 날아가, 그 나라의 리더가 정부 각료를 선택할 때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간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밥이 믿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먼저 기도하고 그 나라가 도래하도록 일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삶의 모든 부분을 주님이 채워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16:24).

그렉 르보이라는 분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만 약속하셨습니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행복할 것, 두려움이 전혀 없을 것, 항상 문제에 처하리라는 것.” 폭풍우 치는 날 배 밖으로 나간 베드로는 물 위를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바야흐로 베드로는 영웅이 되려는 시점에 있었습니다. 배 밖으로 나가는 어려움은 이미 겪었습니다. 그는 물 위로 걷는 일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습니다. 폭풍이라는 현실을 바라본 것입니다. 처음의 열정이 가라앉자 폭풍이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람을 본 것입니다.” 마태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한동안 믿음 안에서 걷던 사람이라도 폭풍 때문에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바람을 보았고 무서워하여 물 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전력투구해야 할 임무를 맡거나 새로운 가정을 꾸미는 큰 모험을 시작할 때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희망과 소망이 가득합니다. 배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곧 영웅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해 낼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현실이 다가옵니다. 바람을 보게 되며, 장애물에 직면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갈등이 우리의 사기를 꺾고 계획이 틀어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굴복하여 패배하나, 어떤 사람들은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고, 결국 생존뿐만 아니라 성장하기까지 합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낼까요?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18:10)

“폭풍에 직면하면 어떻게 해야 견딜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오토버그 목사님은 몇 가지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먼저, 이겨 내는 사람은 자신을 수동적인 피해자로 보기보다, 자신이 운명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계속 자각한다. 두 번째로 이겨 내는 사람은 자기 가치를 배반하지 않는 용기가 크다. 세 번째로 이겨 내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 속에서 목적과 의미를 발견한다 라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물 위로 걷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저 강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특성 하나 하나는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여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형적인 분이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요셉은 17세에 형제들에게 잡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20량에 넘겨졌습니다. 그 후 420킬로 남쪽으로 떨어진 애굽으로 끌려가 결국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은 거기서도 굴하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갔으며, 하나님께서 범사에 그와 함께 하심으로 보디발의 가정총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자 모함을 받았고 노예보다 더 못한 죄수의 신세가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여기에서도 신실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섭리가 또 작동하여 감옥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만 백성의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 이런 요셉의 이야기를 가지고 인생의 폭풍을 이겨내는 요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7-19).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구를 정말 좋아하는 두 친구가 있었는데, 누구든 먼저 죽은 사람이 돌아와서 다른 사람에게 천국에 야구가 있는지 없는지 알려 주기로 했습니다. 그 두 친구 중 한 사람이 먼저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친구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좋은 소식은 천국에 야구가 있다는 거야. 나쁜 소식은 네가 이번 금요일에 투구할 거라는 거야.” 이렇게 우리 인생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반복되어 이루어지는 이야기이며, 요셉의 인생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이 사랑받는 것을 싫어했다” 이것은 나쁜 소식입니다. “요셉의 아버지가 그에게 아름다운 겉옷을 주었다”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형들이 그 옷을 찢고, 피를 묻혀 그가 죽은 것처럼 가장하고, 먼 나라에 노예로 팔았다” 이것은 매우 나쁜 소식입니다.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린 요셉의 인생 또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계속 번갈아 가면서 나타나면서 감옥에 2년 이상 갇혀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끝이 궁금합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반복되는 모든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반전입니다어떻게 끝나는가? 나쁜 소식으로 끝나면, 그 전의 모든 좋은 소식은 헛된 희망만 불러일으킨 잔인한 익살일 뿐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으로 끝나면 이야기 전체가 만회되고, 모든 나쁜 소식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살기에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결국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요셉이 노예로 팔리기 전 청소년 시절에 채색 옷을 입었습니다. 채색 옷은 그가 가장 총애받는, 선택된 아들임을 말해 줍니다. 의심의 여지없는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 삶을 약속하는 징표였습니다. 형들이 방에 들어오면 아버지는 양 떼가 어떤지, 일은 잘했는지 물었지만, 요셉이 방에 들어오면 아버지의 얼굴은 환해지고 눈에서는 빛이 났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아버지가 자랑하고 다니는 아들이었습니다. 백 가지도 넘는 방법(대부분의 부모는 인식하지도 못하지만 어린이들은 십 리 밖에서도 볼 수 있음)으로, 야곱은 요셉을 편애하였습니다. 채색 옷은 그것이 가장 확실한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겉옷이 가족의 문제로 불거진 것은 단지 비싸고 좋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의복은 신분을 표현했습니다. 채색 옷은 요셉이 아버지의 귀염둥이라는 징표였습니다. 노골적인 편애를 공개적으로, 눈에 보이게,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그 옷을 입을 때마다 형들은 어뗳게 느껴졌겠습니까? 자신들은 결코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채색 옷은 가족의 수의(壽衣)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형들은 폭발하였습니다. 요셉의 채색 옷을 벗겨 찢은 후 그를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요셉의 인생의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우연히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가난한 어느 집에서 아들 중 한 명에게만 그것도 오직 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을 대어주었다고 합니다. 형제들은 그런 불공평을 평생 기억하고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 각자를 편애하지 않고 사랑하도록 각고의 노력을 하여야만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하나님의 능력

에베소서 1:15 – 19

논어 옹야편에 보면 병에 걸린 백우에 관하여 적고 있습니다. 백우는 공자의 제자입니다. “백우가 병을 앓았다. 공자가 문병 가서 남쪽 창문을 통해 그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명인가 보다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 아니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백우는 덕행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병은 나병이었습니다. 온 몸이 썩어들고, 끊어지는 나병은 천형의 병으로 알려졌습니다. 공자의 마음은 찢어지는듯 했을 것입니다. 그의 투병 소식에 공자가 병문안을 가자 백우는 임금의 방문을 맞이하듯 남쪽 창문 아래 누웠습니다. 공자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어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백우는 자신을 찾았지만 선뜻 들어오지 못하는 선생님을 위해 창문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창문을 통해 죽음을 앞둔 제자의 손을 잡은 공자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덕이 있는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를 거듭 읇조리는 공자의 탄식은 알 수 없는 하늘의 뜻에 대한 답답함이 담겨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백우의 병을 운명으로 돌리는 공자의 착잡한 심경이 느껴진다고 권경자 교수는 논어 주석에서 해설하고 있습니다 (권경자, 논어, 168-69).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산상 설교를 마치시고 내려올 때 문둥병 걸린 사람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 나병 환자는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주님 앞에 나타나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탄원을 드렸습니다. 주님은 내장이 끊어질 듯한 긍휼함으로 가득차셔서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를 만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자 그 나병이 즉시 떠나고 그는 완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병환자를 불러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고” 거기를 떠나셨습니다. 물론 나병 환자는 주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알림으로 주님은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시지를 못하고 밖에 계시나 사람들이 주님을 보러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공자와의 분명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아니 그것은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공자는 나병을 대하여 어쩔줄 모르며 탄식할 뿐이었으나, 주님은 직접 손을 대시면서 고쳐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때까지 구약성경에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례는 오직 하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이 선지자 엘리사로부터 고침을 받은 사건입니다. 그 능력의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전부 청산하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사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대낮에 승천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사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겠습니까?

이를 위해 잠시 9월 16일 광주에서 한 김명수 대법원장의 연설에 대한 중앙일보의 보도를 들어보겠습니다. 

“김 대법원장은 사법농단에 대한 후속 조치와 관련해 “법원에 드러난 문제를 치유하고 다시 출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결국 재판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관료제를 타파하기 위한 고법원장 승진제 폐지, 법원장 추천제 등 제도적 개혁안이 있지만, 그것은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투명한 절차를 통해 흔들리지 않고 정의로운 결론을 내는 바람직한 재판을 하는 것 말고는 (국민 신뢰를 얻을) 방법이 없다”며 “좋은 재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고 최선의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특강에 참여한 학생이 소신을 지킨 판결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묻자 김 대법원장은 법관으로 처음 임관했을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법관이 될 때 하루만 판사를 하게 해주면 다음 날 사표를 내겠다는 생각이었고, 출근 첫날 한 일이 사표를 쓰는 일이었다”며 “지금도 대법원장실 책상 서랍 왼쪽에는 사표가 들어있다”고 말했다. 이어 “제가 법관이 된 이유는 저의 소신에 따라 재판을 하라는 것인데 그 외 다른 이유로 좌고우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재판은 그럴 수 없다. 제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고 강조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회개하게 하시고 당신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신 목적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쫓아 살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고, 이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빛을 사람 앞에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헨리에타 미어즈(Henrietta Mears, 1890-1963)라는 여성은 할리우드 장로 교회에서 수십 년 간 청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빌리 그레이엄, 빌 브라이트 외 수많은 크리스천 리더들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헨리에타는 학생들에게 최고 수준의 교육 자료를 줄 수 없는 것에 좌절하여 차고에 작은 출판사를 차렸습니다. 그 출판사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출판사의 하나인 가스펠 라이트 출판사로 성장했습니다. 헨리에타는 혼잡한 LA에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집을 떠나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들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지만 없다는 것을 알고 세인트 가브리엘 산에 올라가 완벽해 보이는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그 땅이 얼마나 필요한지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나서 땅의 소유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땅 주인은 그 땅을 팔 생각이 없었지만 결국 수락했습니다. 그 땅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기독교 컨퍼런스 센터의 하나인 포레스트홈이 되었습니다. 또한 헨리에타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학생들에게 알려 줄 성경 개관서 한 권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여 스스로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은 수십만권이 팔렸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팔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거듭 거듭 믿음의 걸음을 내딛었고, 거듭 거듭 그곳에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인생에서 좌절을 느낄 때는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당신을 부르고 계신 때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요! 그리스도를 더 많이 신뢰한 것을 후회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세 번째는 긍휼의 징표입니다. 토비라는 형제는 고등학생 때, 세계 기아 문제에 관한 글을 써서, 상으로 월드비전 주최로 아프리카를 두 주 반 동안 견학하게 되었습니다. 토비는 에티오피아의 빈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토비에게 열 살 남짓한 한 에티오피아의 소년이 다가와서 토비의 티셔츠를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아프리카의 햇빛 아래서 셔츠를 입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는 없었기에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토비는 버스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차에서도, 밤에 모인 캠프에서도 토비에게는 단지 티셔츠 한 장을 원했던 어린 소년의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토비는 티셔츠를 모아 에티오피아로 보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당신의 티셔츠를 벗어 주세요”라는 티셔츠 모집 운동을 조직하고는 이 집 저 집을 방문하여 티셔츠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역 방송국의 적극적인 도움과 홍보로 토비는 10,000장이 넘는 티셔츠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티셔츠는 2톤이 넘었기에 에티오피아로 보내는 수송비가 65,000달러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토비는 기도하고 수소문 한 끝에 ‘사하라 사막 이남 지원자들’이라는 단체와 연락되어 결국 에티오피아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토비는 그 중 하나가 그 소년에게 갔기를 바랐습니다. 강렬한 긍휼의 마음이 들 때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일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그렇게 하셨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막1:40-42).

네 번째는 기도의 징표입니다. 성경 시대나 오늘이나 모두, 물 위를 걷는 이야기는 곧 기도의 이야기입니다. 배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은 뜨겁게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 보험 외판원 밥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밥은 워싱턴에서 정치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더그 코우라는 분을 만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믿음에 대해 배우기 위해 더그와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밥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는 성경 구절을 들고 잔뜩 흥분하여 더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정말 사실입니까?” 그는 다그쳐 물었습니다. 더그는 설명했습니다. “물론 백지 수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기도에 대한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배경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알았어요!” 밥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겠어요. 아프리카를 위해 기도하겠어요!” “좀 범위가 넓군요. 한 나라로 축소시키는 것이 어떨까요?” 더그가 조언했습니다. “아, 좋아요. 그럼 케냐를 위해 기도하겠어요.” “케냐에 아는 사람이나 가 본적이 있습니까?” 더그가 물었습니다. “아니오.” 밥은 그저 케냐를 위해 기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더그는 특별한 계획을 짰습니다. 그는 밥에게 6개월 동안 매일 케냐를 위해 기도하라고 도전했습니다. 그랬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500달러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일이 일어나면 밥이 더그에게 500달러를 주기로 했습니다. 만일 밥이 매일 기도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무효였습니다. 드디어 밥은 매일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더그 코우와 약속한 밥은 매일 기도하기 시작했으나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저녁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동석한 사람들은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소개했습니다. 그 중 한 여성이 케냐에서 고아원 운영을 도왔다고 말했습니다. 밥은 500달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지만 침묵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던 그가 그녀에게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활발함과 연이은 질문에 놀랐습니다. “당신은 우리 나라에 큰 관심이 있으시군요. 케냐에 가 보신 적이 있으세요?” “아니오” “케냐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세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관심이 많으세요?” “어떤 사람이 제가 기도하면 500달러를 주기로……” 그녀는 밥에게 케냐를 방문하여 고아원을 둘러보겠냐고 제안했습니다. 밥은 정말 가고 싶었습니다. 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떠났을 것입니다. 이윽고 케냐에 도착한 밥은 빈곤과 의료 시설 부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워싱턴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그곳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대형 제약 회사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가 본 큰 필요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제약 회사들이 팔리지 않은 의약품을 매년 대량으로 버린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케냐의 이곳으로 보내지 않겠습니까?” 라고 요청했습니다. 일부 제약 회사는 그렇게 했고  그 고아원은 백만 달러가 넘는 의료품을 제공받았습니다. 그 여성이 밥에게 전화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밥을 케냐로 초청하여 큰 파티를 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케냐에 간 밥을 통하여 또 한번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