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30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 유명한 말은 교보문고를 만든 대산 신용호 회장(1917-2003)의 삶의 경험과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대산은 집안이 가난하였고, 폐병에 들려 학교에 갈 시기를 놓쳤습니다. 배움에 한이 많았던 대산은 그것을 많은 독서를 통하여 극복하였습니다. 대산은 책에서 만난 수많은 주인공 중에 특히 헬렌 켈러와 카네기를 존경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건강 때문에 진학이 좌절됐기에 헬렌 켈러를 통해 도전정신을 배우고 되새겼고, 제도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세계 최대 철강회사를 일군 앤드류 카네기는 대산에게 사업가의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20세에 만주에 가서 이육사를 만나면서 민족자본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혼란과 6.25의 전쟁을 겪은 대산은 국민교육 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는, 교육과 보험을 연결한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를 세우게 됩니다. 1958년 8월 7일 개업식 때 “저는 25년 이내에 세계적인 회사로 만들고, 가장 좋은 땅에 좋은 사옥을 짓겠습니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말 그대로 20년 안 되어 교보는 세계적인 회사가 되었고, 광화문에 교보빌딩 22층을 건설함으로 자신의 말을 입증하였습니다. 그런데 종로와 광화문을 잇는 그 지하 1층 1,100평의 요지에 수익성 있는 점포들이 아니라, 서점을 계획하고 100만권의 서적을 비치한 것은 대산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교육철학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가치관은 그 사람의 인생 방향을 결정합니다. 물론 대산은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대산의 철학이 따라 올 수 없는 위대한 가르침 뿐만 아니라,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지혜롭게 자신을 평가한 뒤, 옳다고 생각되면 주님을 신뢰하고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2020/10/29
어떤 루마니아의 어린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의 이름이 다 적혀 있는 책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생전 처음 들었을 때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제 이름을 꼭 써주세요. 제 이름은 라다 이오네스큐입니다. 그러나 실수가 있으면 안 되니까 제 이름의 철자를 제가 불러드리는게 좋겠어요.” 그리고 나서 소년은 한 자 한 자를 조심스럽게 발음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덧붙였습니다.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혼동되지 않도록 제 이름과 주소와 생일도 써주세요.” 어린이의 이런 기도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시대가 태평할 때에도 우리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갈등, 노후의 문제, 병의 문제, 재산의 문제, 취업과 일의 문제, 명예와 승진의 문제 등 수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원하는 것들을 얻는 과정에서,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얻었을 때 우리는 늘 주님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습관을 들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어제 작고하신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삶을 생각하면, 세상이냐 하나님 나라를 두고 다시 한 번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됨을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인은 삼성을 세계적인 회사로 키워낸 인물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그분의 선친인 이병철 회장을 능가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 반면, 정경유착과 경영권 확보와 관련되어, 두 번이나 유죄판결을 선고받은 것은 그분의 한계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의 가치와 하나님의 주권이 충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하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주님 손에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1-22).


2020/10/28
여덟 살된 미국 소년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빠는 가끔 저를 무릎위에 앉히고 차를 운전하게 해주시지만, 언제나 아빠의 손을 제 손 위에 놓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통치할 때, 우리나라가 안전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제발 당신의 손을 그분의 손 위에 놓아주십시오.” 이 기도에는 통찰력이 보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는 중보기도와 관련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2:1-3). 사도는 중보기도의 대상은 모든 사람들이며, 여기에는 특히 임금들, 높은 사람들이 포함되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 간구(요청 request), 기도(일반적인 기도), 도고(높은 사람에게 간청함 petition), 감사(감사기도를 의미)를 드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간구란 우리의 부족함과 관련되어 있고, 기도는 헌신의 의미를, 도고는 어린이 같은 신뢰의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는 늘 감사를 동반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도할 특권을 가진 제사장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속전으로 주신 우리 주님을 통하여 기도하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원받을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특히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의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2:8-10).


2020/10/27
성경과 사랑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교육을 받고 자란 열 살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에서는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소년의 부모가 거친 말싸움을 하고 난 뒤 소년은 아버지에게 다가갔습니다.

“아빠, 저를 안과 의사와 이비인후과 의사에게 데려다 주세요.”

“왜?”

“제 몸에 이상이 있나 봐요. 성경에서 들은 것은 들을 수 없고, 성경에서 본 것을 볼 수 없어서 그래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아마 같은 말을 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고, 직접 당신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만드신 세상에 들어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셔야만 하였습니다. 또한, 종의 형체를 취하여 인간이 되셨을 때 또 한 번 자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입니다. 만약 예수님과 같은 겸손한 마음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면, 거의 모든 경우에 우리의 관계가 훈훈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한편 세상은 살기 쉽지 않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면서 늘 기뻐하십시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확실히 체험할 것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2020/10/26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자 알렉스가 기침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말하였습니다.

“알렉스야, 차에 타거라. 널 의사에게 데려가야겠다.”

“왜요?” 다섯 살짜리가 물었습니다.

“기침 때문에”

이들은 병원에 갔다가 목사님 댁에 들렸습니다. 알렉스는 명랑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은 감기에 걸리지 않았어요. 그분이 어떤가 보러 갔었는데, 아무 탈도 없었어요. 감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갔는데, 선생님이 감기에 걸려 있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이예요!”

이때, 목사님은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의 이야기를 또 한 번 들려주었습니다. 젊은 시절 범브란트는 유태인으로서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어떤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았습니다. 전도하신 분은 “당신은 당신이 저지른 죄들 때문에 예수님에게 가야만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이것이 예수님과의 첫번째 만남이었고,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순수하고 깨끗하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결코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도 없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의 마음을 큰 기쁨으로 채우게 됩니다. 인류 역사상 죄와 사망을 이기신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요일1:7, 새번역).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 구약의 증거(19)

요한복음 5:39-40
AD29년 경 어느 명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안식일에 38년된 불치의 병자를 고쳐주신 주님에게 유대인들은 몰려갔습니다. 그 이유는 안식일에 병고침으로 규정을 위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를 반박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안식일에도 일하실 수 있는 것과 같이 자신도 일할 수 있다고 주장하시면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혔습니다. 놀라는 유대인들에게 그 증거로 5가지를 열거하셨습니다. 그 네 번째가 구약성경의 증거입니다. 예수께서 오실 메시야라는 구약성경의 증거로 오늘 살펴볼 구절은 이사야 53장10절입니다. 이사야 53장 전체가 고난받는 메시야의 모습을 분명하게 그리면서, 고난받는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형벌 받을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 때문이라는 사실을 벌써 7번이나 반복하여 기술하였습니다. 10절부터는 그분이 고난받으라고 요구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시면서, 그 이유와 결과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미 악인들과 함께 죽고, 어떤 부자의 무덤에 묻힌 하나님의 종은 드디어 10절에서 살아나 후손을 보고 오래 살면서, 그분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실 것을 선지자는 알려주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목적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태어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님에 의하여 중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11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2020/10/23
나디아의 생일이었습니다.

“주 예수님은, 작년 생일에는 아빠가 제게 초콜릿 한 개를 선물로 주셨어요. 그러나 지금 아빠는 감옥에 계세요. 당신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예요. 제발 제게 초콜릿 좀 갖다 주세요.” 

이 당시 러시아에서 초콜릿은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언니인 라리싸가 나디아를 꾸짖었습니다.

“우린 정말 필요한 것만을 위해서 기도해야지. 그런 사치품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 되는 거야!” 

나디아의 어머니도 그말에 동조하였습니다.

“우리는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위해서, 우리 옷이 떨어졌을 때 옷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단다. 그리고 병이 나면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초콜릿은 꼭 있어야 할 필수품이라곤 생각되지 않는구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들의 목사님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나디아의 생일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아이들을 위해 초콜릿을 사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 사건은 나디아의 가족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풍요로운 하나님이십니다. 때로 그분은 절대로 필요한 필수품이 아닌 것들에 대한 기도도 이루어 주시는 데서 기쁨을 느끼시는 분입니다. 물론 어른이라면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초콜릿를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디아와 같은 어린 아이에게 있어 초콜릿은 정말 중요한 물품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기도 응답입니다. 주관적인 체험이기는 하지만, 이런 체험은 우리의 신앙을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기도하십시요!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 앞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6:11).


2020/10/22
범브란트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 부부는 아이를 보는 여자에게 미하이를 맡기고 외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윽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고 미하이는 그녀와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미하이의 기도는 “엄마 아빠가 빨리 집에 오게 해 주세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기도를 끝낸 후 미하이는 자기를 돌보는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때 목사님 부부는 정말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돈을 전혀 가지고 나가지 않고 집을 나섰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집에 돌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미하이는 의기양양하였습니다. “난, 내 기도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언제나 이런 식으로 기도를 응답하시지는 않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하이가 가졌던 어린아이의 기도와 믿음은 우리의 삶에 좋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일단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인생에서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시간을 만드신 하나님, 공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 알게 지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큰 이유는 아마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먼저 주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신실하게 계획을 세우고 살아가면서, 오늘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풍성하게 주시는 응답을 체험하고 우리의 마음은 터질듯한 기쁨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서 가지는 큰 특권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2020/10/2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어렸을 적에 자기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엄마, 기도하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어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로버트야?” “내가 그렇게 해보려고 애써 봤거든요.”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시험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기로 작정한 후, 저녁이 되어 자신을 돌이켜 보고, 기도없이 착한 사람으로 사는데 성공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다만, 정직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능력도 역시 같습니다. 논어에 보면 공자는 하루 종일 생각만 하여 무엇인가 이룰려고 노력하였지만, 무익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보고 만지고 연구하지 않으면 창조적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나면서부터 교만한 인간이야말로 자기 능력으로는 그런 품성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좋은 예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박사들의 모임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단에 올라가 보았더니 전부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이거 안돼겠다’생각을 하고, “이 말씀을 듣는 분들은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세계에서 최고가는 박사가 될 것입니다.”하자, 모두들 고개를 들고 목사님을 쳐다 보았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들은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잡초를 자르듯이 나올 때마다 싹뚝 싹뚝 잘라 버려야만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주님께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사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확보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주님께 그것을 받아다가 당신의 뜻대로 은사를 나누어주셔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쉬지말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간구하십시오. 언제나 준비된 마음으로 좌절하지 말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엡6:18, 쉬운성경).


2020/10/20
말썽을 피워 일찍 잠자리로 쫓겨갔던 어린 아들이 금방 돌아왔습니다.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기도했어요.” 어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잘 했다. 너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했다면 말이다.” “아니에요, 나는 좀 다르게 기도했어요. 하나님께 엄마가 지금 이대로 나를 참아 줄 수 있게 해달고 기도했어요.” 이 사례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우리 이웃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우리 생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분은 식물과 동물을 만드시고, 물과 땅과 하늘, 해 달 별들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많은 곤충, 바이러스 할 것 없이 도대체 우리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각종 존재들을 만드셨습니다. 이를 다스리도록 책임을 부여받은 인간은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지혜롭지 않으면 절대로 창조주의 뜻이 실현되도록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연구해야만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 인간들 간에도 서로 다릅니다. 만약 이를 부정하면 인간은 공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못 난 부분은 받아들여 기도해주고, 잘된 부분은 격려하여 더욱 잘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이웃들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다른 이웃이 서 있을 수 있는 공통된 기반을 못 가지기 때문입니다. 인종차별이 이래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우리는 모든 인류를 주님 안에서 받아들일 근본적 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기 보다 나 자신이 변화하여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면서까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모범은 우리 행동과 기도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2020/10/19
범브란트 목사님의 가족모임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손자인 어린 알렉스가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목사님의 아내이자 알렉스의 할머니가 가볍게 꾸짖었습니다. “왜 그렇게 기도했니? 지금은 식사 시간이 아니잖니?” 알렉스가 완강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식사 기도를 했으니, 제게 먹을 것을 주시는 건 할머니 책임이에요.” 알렉스는 어리지만 아주 심오한 진리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마태복음6장 25절 이하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 가운데 다스리는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먼저, 마음을 겸허히 하고 우리가 행하여만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수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세상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든, 아니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알렉스의 할머니께서 알렉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책임을 가지고 있듯이, 그 다음의 몫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킬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만든 중력의 법칙이 세상 끝날까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작동하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11:1, 새번역)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 구약의 증거(18)

요한복음 5:39-40
AD 29년 경 어느 명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침으로 율법을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반박하실 수도 있었지만, 주님은 오히려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나도 일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더욱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샀습니다. 이는 신성모독까지 범하고 있다고 그들이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을 심판할 재판장으로 임명받았음을 선언하시고, 이를 입증하는 5가지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중 4번 째 증거는 구약성경의 증거입니다. 구약 성경 중 이사야 53장은 주님께서 매맞고 억압을 당하시고 처형당하시나, 자기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죄의 짐을 지고 죽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른바 4번 째 종의 노래로써, 그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않고 흔쾌히 부당한 재판과 그 집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행악자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사 죽으시고, 시체는 부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돌 무덤에 묻힘으로 이사야 53장7-9절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물론 그 세대 중 어느 누구도 의로운 그분의 죽음이 마땅히 형벌 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부분도 역시 이사야 53장 8절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을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읽으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 이사야조차 누가 이 예언을 성취하는 분인지를 모르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사야가 죽은지 700년 뒤에 오셔서 이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도래시키셨습니다.

2020/10/16
남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 하던 목사님이 ‘도덕적 용기’의 실례로, “기숙사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소년”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년들에게 또 다른 실례를 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소년이 큰 소리로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들로 가득찬 기숙사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목사님은 어떻습니까?” 인류 역사상 그런 용기를 가진 고위 성직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군부정권이 수 십년 동안 지배하는 동안 그들에게 협력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들의 압력에 저항한 고위 성직자들이 거의 없었다는 데서 잘 입증됩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다윗, 욥, 예레미야 같은 분들은 우리에겐 너무하다고 들릴 수도 있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께 불평할 용기를 가졌습니다. 우리들 역시 역경에 처하였을 때 그분들과 같은 생각들로 가득찼지만, 그런 생각들을 억눌러 왔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우리 속에 깊숙이 박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큰 소리로 질문한 소년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분과 논쟁을 벌일 용기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질문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일 때에도 틀림없이 우리를 용납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대표적인 선지자는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은 불의한 바벨론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수탈당하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하나님께 그런 갈등을 토로하였더니, 하나님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때가 반드시 오니 비록 지체될 지라도 기다려라는 대답을 하시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정답을 주셨습니다. 이에 응하여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시를 지어 불렀습니다. 우리도 용기를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시1:6, 새번역).


2020/10/15
범브란트 목사님이 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방문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못 가진 것들 여러 가지가 생각이 나서 좀 우울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윽고 아이들이 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가정에는 네 살도 채 되지 않은 남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러가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머리카락과 얼굴과 눈썹과 입술과 이와 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는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자기 몸의 모든 부분을 다 언급하며 길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와 우리집에 오신 손님을 행복하게 해주세요”라는 말로 기도를 마쳤습니다. 목사님은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자신도 그 아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은 그 아이의 것들보다 더 큰 크기의 것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집에 온 손님을 행복하게 해주세요”라는 그 네 살도 안된 아이의 기도는 즉각 응답이 된 셈입니다. 이 깨달음이 오자 목사님은 그 아이가 아직 모르고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다른 면들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목사님은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가을을 맞이하여 우리 역시 한 해를 회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알 것은 하나님은 성공 뿐만 아니라 실패 역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인생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겸허하게 갖고, 모든 일에 지혜롭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허락하신 모든 축복들에 대하여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분의 뜻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삶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는 세탁기를 잘 사용하기 위해 이리저리 공부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세탁기는 먼저 만드신 주인을 알아야 하고, 인생의 작동원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9-21).


2020/10/14
주일학교에서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휴대폰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화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매일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때 한 소년이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전화번호가 필요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화번호라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자격에 관한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구원으로 가는 다섯 개의 단계를 적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함(롬3:23). 둘째, 죄의 결과에 대한 명백한 인식 – 죄의 삯은 사망(롬6:23 전반).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영생을 선물로 준비하셨음을 깨달음(롬6:23후반). 넷째,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영접함(롬10:9). 다섯째, 구원의 결과로서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리게 됨(롬5:1). 이와 관련하여 범브란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애야, 하나님의 전화번호는 다섯자리 숫자란다 – 회개,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믿음, 사랑, 진실, 그리고 외로움.’” 다른 전화번호는 다 이해하겠는데, ‘외로움’이라는 마지막 번호는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죄는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서로 서로를 적대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 자신이 너무나도 고독합니다. 그 외로움 고독 두려움 불안 눌림 등 모든 것이 죄의 결과이고 그 모든 죄의 결과를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전부 청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수 많은 가족이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모든 외로움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갈 곳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오늘 하루도 힘있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2020/10/13
아침 기도에서 어린 도로시가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좋은 아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개도 이런 아침을 좋아할 거예요.” 도리시는 비록 어리지만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훨씬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의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선 공중의 새들과 들판의 짐승들도 먹이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물론 우리들의 필요 역시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선한 사람들 뿐 아니라 악인들 위에도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마음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의 마음 보다 넓을 수 있으며, 넓어야만 합니다. 논어를 보면 공자 나이가 70즈음에 이르렀을 때 고향 친구가 찾아오자 밖으로 나가서 발로 차서 쫓아버린 일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정치에 등용되지는 못하였지만, 지식이 많고, 제자가 3천에 이르며, 그 중 뛰어난 제자들은 각국에 등용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분은 자공이라는 제자가 공자의 중심 사상인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알기 쉽게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무시하는 마음도 들어 있어, 초라한 모습으로 찾아온 친구를 별볼일 없다고 발로 차서 보냈다는 것은 유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유학은 삼라만상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할 개념이 없습니다. 물론 성리학은 나름대로 이기론을 내세워 삼라만상과 자신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보여지지만, 그것조차 비인격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을 주인으로 모셔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인간이 되시사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존재보다 확실한 사실입니다. 당연히 신자들은 청지기로서 우리 자신의 위치는 물론, 삼라만상과의 관계를 잘 이해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들입니다. 이 진리와 믿음에 굳게 서서 사랑 가운데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2020/10/12
신앙 때문에 나디아의 아버지는 구 소련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어느날 소녀는 슬픔에 잠긴 어머니와 같이 들판을 걷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돌아보며 소녀가 사려깊은 말을 하였습니다. “엄마,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이 꽃들을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아빠도 돌봐 주실 거예요.” 소녀는 몇 송이 꽃을 꺽어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빠에게 이 꽃을 갖다 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그 다음날 감옥에 갇힌 아버지에게 전해질 식품 꾸러미를 맡기려고 소녀는 어머니를 따라 경찰서에 갔습니다. 나디아는 근무 중인 경찰관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저씨에게도 아이들이 있어요?” 그녀가 물었습니다. 경찰관은 소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는 최근에 자신의 어린 딸을 묘지에 묻고 왔습니다. 나디아는 자기가 꺾어온 꽃들을 내밀었습니다. “아저씨, 이 꽃들을 우리 아빠에게 전해 주세요. 그렇게 해주시겠죠, 아저씨?” 그 경찰관은 도저히 어린 소녀를 당해 낼 수 없었고, 그 꽃은 나디아의 아버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디아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나디아의 아버지가 옥에 나오는 근본적인 기도는 응답하지를 않으셨는가?” 제가 이후의 이야기를 알지를 못하여 조심스럽습니다만, 수 십년이 지나서 소련의 공산체제는 종식을 고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기도를 하나님은 응답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옥에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신앙을 꿋꿋하게 지켜나갈 수 있었다는 자체가 은총의 산물입니다. 수용소 군도를 쓴 솔체니친이 서방 세계로 망명하였을 때 그 작가는 자유로운 서방세계의 젊은이들 속에서 정신적 공허와 물질만능주의라는 더 큰 절망을 목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 바로 자유의 길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할수록 주님을 따라 가야만 합니다. 오직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5-18).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구약성경의 증거(17)

Part 1 (26:00 이후 부터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Part 2

성경구절 요한복음 5:39-40
AD 29년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여 안식일을 위반하였다고 고소를 당할 때, 주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안식일에 일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장차 모든 사람들을 무덤에서 불러내어 심판하실 분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아직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신분을 증거할 5가지 증거들을 제시하시고, 그 네 번째에 구약성경을 제시하셨습니다. 구약성경 중 선지자 이사야는 오실 그리스도의 두 가지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광의 메시야며, 또 하나는 고난받는 메시야입니다. 영광의 메시야는 이사야 9장6절과 7절에, 고난 받는 메시야는 이사야 53장1절 -12절에 가장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특히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을 읽으면 거기에 묘사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고 많이 그리스도인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는 이사야 53장은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지금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둘어싸인 주님은 이사야 53장에 묘사된 모습 그대로 연약한 싹과 같으며, 무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 쉽게 으깨지기 쉽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심은 우리 연약함을 지시고 우리 모두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대신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피투성이로 으깨어지셨습니다. 죄를 진 것은 우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신뢰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2020/10/8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순종의 미덕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단 위에서 이러저리 걷고 있는 그 선생님이 풍기는 분위기는 자신을 얼마나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가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자, 여러분!” 그는 큰 소리로 아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다음, 잠시 뜸을 들이면서 날카로운 눈초리로 아이들을 노려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나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줄 알고 있습니까?” 그는 누군가가 “선생님이 그렇게 불리워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소년이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선생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생님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들의 감정을 꾸밀 줄 모르는데, 특별히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할 때 그러합니다. 다만 벌이 무서워서 거짓말 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모두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점을 보고 비판하는 것은 인간들의 장기입니다. 왜냐하면 남을 무시하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죄된 경향성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점을 보고 그대로 쏟아냈다가는 인간관계는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그런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결점을 보고 “입을 다물 때가 있고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전3:7). 이런 상황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을 지혜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은 덕에 소용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입을 다물고 주님께 이 문제를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언제나 솔직하게 표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았을 때입니다. 그때는 열일을 제쳐두고 반드시 주님 앞에 이 문제를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되고, 인간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인격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2-14).


2020/10/7
어떤 소년이 어머니에게 배가 아프다고 말하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였습니다. “어쩌면 네 위가 비었기 때문일 수도 있단다. 네게 먹을 걸 만들어 주마.” 얼마 후 목사님이 그 집에 심방을 오셨다가 우연히 머리가 아프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소년은 “목사님, 아마 목사님의 머리가 비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머리에 무얼 좀 먹이십시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린이들도 자기들이 배운 것을 다른 상황에 적용할 줄 압니다. 다만, 아직 세상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해서 지혜가 부족하고, 따라서 그 적용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잘못 이해하거나, 적용을 잘못하는 사람을 ‘어리석다’라고 부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말 ‘어리석다’의 어원은 ‘어리다’입니다. 국문학자 홍윤표 박사의 글입니다. “‘슬기롭지 못하고 둔하다’란 뜻을 가진 ‘어리석다’란 단어가 생기기 이전에는 ‘어리다’가 ‘어리석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홇배 이셔도’의 ‘어린 百姓’은 ‘나이 어린 백성’이 아니고 ‘어리석은 백성’이란 뜻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뜻을 가졌던 ‘어리다’는 오늘날 ‘어리석다(愚)’의 뜻은 사라지고 ‘나이가 적다(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어리다’는 원래의 ‘슬기롭지 못하다’는 뜻을 ‘어리석다’에 넘겨주고 자신은 ‘나이가 적다’는 뜻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일에 어리석은 사람, 즉 경험이 적고, 판단력이 미성숙한 사람을 배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이 반면 우리가 어리석어야만 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그것은 악한 일입니다. 죄악은 경험이 적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어른이고 어린이건 가릴 것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지식도 경험할수록 커가는데, 처음에는 하나의 죄된 행동이지만, 다음으로는 습관(죄인)이 되고, 그 다음으로는 아주 인격화(오만방자한 성격)됩니다. 그래서 시편의 첫 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 주님의 뜻인가?’를 알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성경구절이 우리 삶에 나타나도록 기도하고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고전14:20, 새번역).


2020/10/6
영국의 어느 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갇혀 있게 되었을 때, 누구하고 같이 엘리베이터 안에 갇혔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소녀가 대답하였습니다. “엘리베이터 전문가요.” 정답입니다.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죄와 사망의 틀 안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목적지를 향해 어둠 속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기차에 타고 이생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의 문제들만 해도 이미 너무 복잡한데, 거기다가 지구 온난화 문제,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의 문제, 기상이변의 문제, 날로 증가하는 부도덕성, 범죄, 폭력 등이 난무하니 우리는 두려운 나머지 출구를 찾고 있으나 이 지구 상에는 없습니다. 그래 미국의 일론 머스크라는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전문가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인류를 화성으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어김 없이 죄와 사망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 비극의 문제를 해결하실 전문가로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인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전자를 가지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후자를 가지고 우리의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마귀의 가르침을 따르는 세상은 참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 너 자신의 존엄과 목적을 위해 살아가라는 철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은 안 보이는 하나님은 말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만, 보이는 이웃 사랑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낮추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인간은 자신을 낮출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인간은 무능력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승천하신 주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실 전문가로서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살면 비로서 주님을 본받아 우리 자신을 낮출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 삶에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를 맺혀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곁으로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마18:2-4, 새번역).


2020/10/5
한 무신론자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어린이에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네가 말하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를 나에게 보여 주면 네게 일 파운드를 주겠다.”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나에겐 오십 펜스짜리 하나밖에 없지만 선생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을 보여 준다면 이 동전을 선생님께 드리겠습니다.” 이 어린이는 매우 현명한 아이입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대중을 향하여 강연하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자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나님을 향해 쏟아 내었습니다. 한 동안 하나님을 모욕하더니니 그치고는 청중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도 하나님이 조용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욕을 한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그때 청중 가운데 한 노신사가 일어나더니 강단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강연을 하는 그 철학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버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 강연장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철학자의 일생에 아무런 징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버림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악에 대하여 징벌을 받아도 그 때문에 회개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정말 행운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마지막 날 그분의 심판대 앞에 우리 모두가 선다는 생각은 이처럼 세상에서의 행복과 불행의 개념을 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보여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자신을 세상의 주인으로 간주하고 있는 반역자들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공의로운 하나님이 그를 벌하시는 것 이외에 어떤 일이 남아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우리 모든 죄악의 결과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역사적인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구약의 증거(16)

Part 1 (32:47 이후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Part 2

성경구절: 요한복음 5장 39-40절
AD 29년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여 안식일을 위반하였다고 고소를 당할 때, 주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안식일에 일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장차 모든 사람들을 무덤에서 불러내어 심판하실 분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아직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신분을 증거할 5가지 증거들을 제시하시고, 그 네 번째에 구약성경을 제시하셨습니다. 구약성경 중 선지자 이사야는 오실 그리스도의 두 가지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광의 메시야며, 또 하나는 고난받는 메시야입니다. 영광의 메시야는 이사야 9장6절과 7절에, 고난 받는 메시야는 이사야 53장1절 -12절에 가장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특히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을 읽으면 거기에 묘사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고 많이 그리스도인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는 이사야 53장은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지금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둘어싸인 주님은 이사야 53장에 묘사된 모습 그대로 연약한 싹과 같으며, 무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 쉽게 으깨지기 쉽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심은 우리 연약함을 지시고 우리 모두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병자가 외면 당하는 것과 같이 외면 당하셨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인정과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2020/9/29
어린 알렉스에게 물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그림을 그리라면 어떻게 그리겠니?” “두 사람이 키스하고 있는 걸 그리지요.” “죽음은 어떻게 그리겠니?” “관 속에 사람이 누워 있고, 관 위엔 빨간 십자가가 놓여 있는 걸 그리지요. 십자가는 우리를 구해줘요.” “삶은 어떻게 그리겠니?” “사람과 해를 그리겠어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이들의 말 뿐만 아니라, 그들의 그림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돌려보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삶에 대하여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에 대한 우리의 답을 적기 전에,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장면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때는 목요일 저녁 식사 중으로, 주님께서 체포되시기 불과 5시간 전이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서 12명의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셨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지금 당신을 팔려고 대제사장들에게서 은 30량을 받고 밀고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주님은 마지막까지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어주시면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발을 다 씻겨주신 뒤, 주님은 다시 옷을 입으시고 자리에 앉으사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을 체험한 열한 명의 제자들은 다음 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어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만난 뒤 모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만유의 주님께서 자신들을 섬기려고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삶을 생각하면 섬기는 삶으로 요약되고, 그 대표적인 표상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들 각 자의 삶을 관찰하시고는 어떤 그림을 우리에게 그려주시겠습니까? 오늘 마음에 곰곰히 생각하시면서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면서 주님의 영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막10:45).   


2020/9/28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성경을 많이 읽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최종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동기가 아주 훌륭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표준전과입니다. 이 땅에는 좋은 것도 많지만,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명들(하나님 공경, 부모공경 등)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할 날을 정하셨습니다. 이때 죄가 드러나면 죄의 삯을 치루어야만 하는데, 우리는 그럴 능력도 가진 것도 없는 영적으로 파산한 자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자신이 그 대가를 치룰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수단으로서, 이사야의 표현에 따르면 ‘주님의 팔’로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통해서 온 우주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 모두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영생불사의 몸으로 부활하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의 방법을 적어 놓은 성경의 주제는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문장으로 요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짜 네가 나를 주님으로 영접하였는가?”를 판단하시는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 날은 이른바 최후의 심판의 날입니다. 당연히 그날에는 입술의 고백을 뒷받침할 행위들을 보시고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통교리는 그에 합당한 삶으로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반면 정통교리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주님의 뜻을 준행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신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열망의 실천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마25:3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