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C 매일 큐티

2015. 12. 28 ~ 31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고르반 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 뜻은 드렸다 즉, 하나님께 드렸다 혹은 바쳤다 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 법률은 개개인이 자신의 재산에 하나님께 드린 것임 이란 표시를 하여 일상적인 용도에서 구분하여 하나님께 바친 헌물의 성격을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행하는 것은 심각한 결정이었고 거의 번복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르반 맹세를 위반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중대한 결과를 맞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책망하셨는데 이는 아들이 자신의 재물을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렸다고 선언함으로써 더 이상 그의 부모님이 그 재산에서 혜택을 보지 못하도록 배제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동은 실질상 제 5계명을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들에게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도다라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의 해석이나 전통을 이용하여 실질상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고 있는지 여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5계명은 오직 자녀가 부모에 대한 의무를 규정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부모도 자녀들에게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거나 격노케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 해야만 하는데 이는 자녀들이 낙심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골3:21). 이러한 의무의 상호적인 속성은 부모의 행동에 확실한 점검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5계명의 범위는 부모의 차원을 넘어서 선생님, 목회자, 고용주와 우리 보다 높은 권위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소위 우리의 손윗사람들을 포괄합니다. 이런 가르침이 오늘날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여겨질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를 사랑하시며, 따라서 분명한 위계질서를 세우시고(특히 가족과 국가에), 자기 백성들이 그것을 깨닫기 바라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인간 존재와 인간의 제도에 자신의 권력을 위임하실 때, 그들은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할 자유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권력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나 제도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남용한다면, 그것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 곧 우리의 의무입니다. 사도들의 표현한 대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워 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극적인 교육방법을 보여 주는 좋은 실례일 뿐만 아니라 대조를 통해 양자를 비교하는 히브리식 표현법의 좋은 예입니다. 당연히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한 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한 분이 어떻게 다음에는 부모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문제의 열쇠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병행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태 10:37)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로 2015년도가  끝났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고 2016년도에 주실 은혜를 소망하면서 우리의 이웃들을 돌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르엘 평야에서 시스라 군대의 패배

하솔의 가나안 왕 야빈에게 20년동안 학대를 받은 후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와 바락의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납달리와 스불론의 백성 일만명을 이끌고 이스르엘 평야 북동쪽 끝에 있는 다볼산(588미터)으로 집결하도록 지시하였다. 바락이 군대를 이끌고 다볼산으로 간 것은 보병만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군대가 철병거 900대를 가진 하솔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대적하기에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볼산의 비탈길과 나무들로 인하여 철병거를 운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스라는 그 철병거들을 하로셋에서부터 기손강으로 모았다(삿4:7,13). 병거들은 압도적인 속도와 이동발사대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 고대세계에서는 전차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스르엘 평야에서 이 철병거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염려스러운 대상이었다. 이스르엘 평야는 북으로는 나사렛 산지로부터 남으로는 갈멜산지에 이르는 넓은 평야이다. 그러므로 철병거를 가진 가나안 군대들이 싸우기에 아주 좋은 지형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락에게 다볼산을 내려가서 평야에 있는 적군을 쳐부수라는 명령을 주셨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이는 매우 우수꽝스러운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고지의 유리함을 버리고 평야의 약점을 취하라고 요청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시스라의 마음 속에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도록 하는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신뢰하도록 부르고 계신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을 박차고 내려왔을 때 시스라의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패배하였다. 어찌된 것일까? 가나안 철병거들이 힘차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스르엘 평지를 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예기치 않은 폭우를 내리셔서(사5:4, 21) 기손강을 넘쳐흐르게 하시고 이스르엘 평지를 물로 범람하게 하신 것이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시스라와 그 군대들은 신속히 철병거를 버리고 걸어서 도망가기 시작하였다(사4:15). 왜냐하면 그들의 철병거는 갑자기 내린 폭우와 이로 인한 진흙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바락의 군사들은 시스라의 본거지인 하로셋에 이르러 시스라의 군대를 전부 몰살시켰다(사4:17).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인 바락과 드보라를 사용하시어 승리를 도저히 예견하기 어려운 때 인간이 예기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승리하게 한 것이다. 이는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68-69 참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와 그리스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와  그리스도 (누가복음 3장 1-6절)

오늘 본문은 침례 요한과 예수님이 활동하신 시기가 티베리우스 가이사가 로마황제가 된 때, 헤롯 안티파스와 헤롯 빌립이 각각 갈릴리, 베레아와 이두래, 드라고닛을 다스리고,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된 시기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당시 역시 많은 어려움이 세상에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와 문제가 많은 세상 가운데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그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심으로써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례 요한을 보내어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것과 같이 요단 강에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외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침례 요한의 외침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길을 위한 준비로써, 구원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 사함을 위한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구원을 완성하신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은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죄와 문제로 가득찬 세상에서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2.     사함을 얻는 회개의 침례를 통해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3.    주 예수의 복음을 믿는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SBC 매일큐티

2015.12.21 25

제4계명 안식일 지켜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 (1)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허락된 일과 금지된 일을 소소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상술하기 위해 하나님의 선한 법을 사소한 규정들로 덮어씌우는 바람에 오히려 그 법을 훼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떤 규정들을 고의로 깨뜨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규정들이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의 제자들이 허기져서 곡식의 이삭들을 잘라 먹었을 때, 서기관들은 이것이 추수에 해당하는 행위이므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법을 어겼다고 비난한 반면, 주님은 오히려 그들 격려하셨습니다.이를 통하여 주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근본 원칙을 천명하셨습니다(막2:23-28). 그러나 오늘날도 이스라엘의 근본주의자들은 안식일에 엘리베이터도 누르지 못하고 에어컨도 켜거나 끄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 지켜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 (2)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체의 행위를 금지할 것을 강요하는 안식일주의자는 아니셨습니다. 예수님도 일주일 중에서 하루는 안식과 경배를 드리도록 되어 있는 성경의 원리를 확실히 받아들이셨고,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일들은 이러한 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또한 안식일에 할 수도 있고 또 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컨데 종교적인 일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하는 일, 마태복음 12:5)이라든가, 자선행위 (병자를 치유하는 일, 마태복음 12:9-10) 그리고 필수 불가결한 일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는 일, 마태복음 12:11)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오늘날 성직자, 의사, 농부에게 적용하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제4계명 안식일을 지켜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3)

그렇다면 우리는 일주일 중 어떤 날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지켜야 하겠습니까? 안식일은 일곱 번째 날이었으며, 지금도 제7일 안식교인들은 그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제4계명의 신학적인 근거가 천지창조의 안식에서 출애굽의 안식으로 의미가 발전되었다는 것을 먼저 유념해야 합니다. 즉, 안식의 근거인 천지창조 후 하나님이 쉬신7번째 날(토요일)은 애굽을 탈출한 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4계명의 핵심은 날짜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1-6일 리듬에 있는 것입니다. 더나아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출애굽한 날입니다. 사망의 포로에서 영원한 생명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근거를 주신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하고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로 흑암의 권세에서 탈출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런 의미있는 날을 선택하여 계속해서 예배의 날로 지켜졌다는 증거는 명백합니다(행20:7; 고전16:1-2).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

5계명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규정한 것에 포함되느냐 아니면 이웃에 대한 의무의 규정에 포함되느냐에 대하여 다툼이 있습니다. 그것은 5계명이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성격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성장하며 부모님의 사랑을 통하여 그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가는 동시에 부모님을 공경함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규정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규정할 때 양쪽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 공경하라 라는 국어사전의 의미는 공손히 받들어 모셔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한 히브리어 원어는 카베드 כַּבֵּד 로서 존경하다, 중히 여기다, 명예롭게 하다등으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5계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부모님께 합당한 존경과 명예를 드릴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5 계명은 부모님께 그 분들이 받을 합당한 권위를 드려라고 의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부모님은 높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고 돌보심을 받아야 하고 존경받아야만 합니다.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2) 

그런데 5계명은 십계명 중 유일하게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은 가나안 땅입니다. 그러므로 5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모님을 공경하면 가나안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또한 약속의 땅 가나안 에서도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이와 동시에 5계명의 전반부는 우리도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후반부의 약속이 적용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 이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엡 6:2-3)는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5계명을 이방인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은 단순히 이라고 해석함으로서 5계명을 모든 민족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축복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십계명을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성탄절과 십자가

성탄절과 십자가의 사건이외에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반항적인 죄된 마음을 씻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감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어디에서 설교하건 초월적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깊숙이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죄와 반역을 하고 있다는 뿌리 깊은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 갑자기 천둥이 치면 혹시 내 죄값으로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은 죄의식을 억누르거나 부인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이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때 이를 받아들여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한 자들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가 이틀이 남은 오늘 우리가 이 날을 기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한 사실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래로 사망과 사탄의 종이 되도록 이끈 죄의 권세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다고 예언한 구절들이 구약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주님 오시기 700년 전에 주신 이사야 9장 6-7의 말씀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기를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모사라 기묘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하실 것임이라. 그의 정사와 평강의 더 함이 무궁하며. 또한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뱀에게 선언하시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그는(여자의 후손은 :그리스도- 단수) 너의(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사탄)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조그만 유대 고을 베들레헴에 오시었습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죄가 초래한 우주적인 벌과 결과들, 즉 영원한 죽음을 처리하시고 당신의 희생적이고, 대속적이며, 모든 것을 충족하는 죽으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주실 작정이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진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요람도 없습니다. 빈 무덤에 남은 포개진 옷들이 없이는 배내옷도 없는 것입니다. 전쟁과 갈등 그리고 테러로 얼룩진 세상을 위해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의심과 낙담으로 꽉 들어찬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전략가이십니다. 사망에 직면하여 두려워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직면하기에는 힘이 부족한 자들을 위하여는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세상은 점점 곤란해지고 무질서해져 갈 것이지만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아기는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통치하고 계시며 신자들은 기뻐할 것이고 불신자들은 떨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첫 강림은 그리스도의 두 번째 강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그는 이번에는 유다의 사자로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거절하는 모든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오직 그땐 크리스마스의 이야기가 완성될 것입니다. 모든 종족, 언어, 민족 가운데서 나온 백성들이 그의 발 밑에서 경배할 것입니다(2015 BGEA 프랭크 빌리그래엄).

성전에서의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2장 40 – 52절

오늘 본문에서 12살 되던 해에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유월절 축제에 참가를 하였습니다. 유월절 축제는 비시 1446년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자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초태생을 죽이실 때 오직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만 사망을 면할 수 있었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실상 이 유월절 어린양은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에 들어오사 죄의 대가로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0년을 어린 시절과 가족의 부양을 위한 평범한 삶을 보내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의 삶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중요한 순간들이며 이런 일상의 삶을 영위할 때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주셨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으로 삼 면적인 관계를 가지고 사셨습니다.

SBC 카톡말씀 나눔

2015/12/7-11

제2계명

둘째, 우상 숭배자는 영으로(즉, 하나님은 영이시며 따라서 영적인 경배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외형적이고 가시적이며 만져 볼 수 있는 대상에 몰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조차 형식주의에 치우치는 경향과 심지어 노골적인 외식에 빠져들기도 하였습니다. 주전 7 -8 세기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공허한 종교성을 가차 없이 비난했으며, 예수님도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비판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막7:6). 그러므로 예식, 순례 행진, 드라마, 각종 의식, 무릎을 꿇거나 두 팔을 올리는 등,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외형적인 형식을 사용하든지 간에, 영과 진리로라는 이중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우상 숭배라는 죄목을 벗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두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묘사하십니다. 이 말에 혼란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질투는 라이벌에 대한 분노이며,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라이벌이 상대편 자리에 있을 권리를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다른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분만을 섬기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6:24)고 하신 말씀은 물질문명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은 우리에게는 세상살이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돌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야 돈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마6:25-34). 

또한 두 번째 계명은 하나님을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우리 각자에게 지우신다는 사실은 성경 후반부에 가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예, 에스겔18: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계명은 영구적이고 중대한 한 가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악의 사회적인 속성 때문에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만 국한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는 종종 부모가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해 고난을 받습니다. 이런 결과는 신체적으로(유전된 질병등), 사회적으로 (술과 도박으로 인한 가난), 정신적으로(불행한 가정에서의 긴장과 분쟁), 그리고 도적적으로 (자녀가 배우는 부모등의 악습) 자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제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망령되게의 국어사전의 뜻은 정신이 흐려 정상을 벗어나서의 뜻이나 원어의 의미는 헛되이 in vain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경우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이는 모두 세 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명백한 경우는 나쁜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그분이 친히 알려주신 칭호들(, 하나님, 전능자, 그리스도, 예수등)을 가르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그 칭호들을 덧붙이는 말로 사용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맹세 같은 데 사용하는 것은 그분을 경시하는 명백한 증거이며 그분을 경배하려는 열망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영어에서 사용하는 gosh, gee 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단축해서 표현하는 변조된 용어들을 사용하지도 기억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제3계명에서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우리는 약속이나 맹세를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나서 그 약속을 깨뜨린다면, 그것은 곧 거짓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존경심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 당시의 일부 사람들은 맹세할 때 올바른 방식을 사용하는 것에 몰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는 없지만, 하늘에 두고’ 나 그 밖에 땅에 두고 혹은 그 밖의 것을 두고 맹세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논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마5:33-37). 주님은 이에 대하여 무슨 명령을 하셨습니까? 그저 간단하게 혹은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주의해야할 대목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바알 숭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뒤, 광야에서 기적으로 돌보시고,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을 경우 받는 위험들이 무엇이며,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과 국가로 삼으신 목적과 이유를 알려주셨다. 그러나 사사기에서 바로 이들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가나안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기 시작하였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였는가?이에 대한 한 가지 중요한 단서가 바로 가나안 땅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특성과 기후 때문이었다. 고대 가나안 땅에는 곡식 즉, 밀과 보리의 추수만큼 중요한 식량원은 없는 것이었다. 풍성한 추수를 하기 위해 충분한 물의 공급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늘상 비가 내리거나 이집트와 같은 거대한 나일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씨를 뿌릴 때와 곡식이 익을 때 즈음에 알맞은 비가 내려야만 그 해의 곡물을 거둘 수가 있었다. 적당한 비가 없다면 목초지도 시들어가고, 우물이나 저수지도 바짝 마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밀과 보리는 추수하기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아주 잘 알려졌지만 최근에 정복자로서 이민하여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비로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하는 가나안식 농업을 체득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가나안식 농업을 배우는 동안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을 경배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가나안 신학에 따르면 사람들의 일상은 신들의 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천둥, 사망, 가뭄 그리고 전쟁조차 신들 행동때문에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신학에 등장하는 신들은 비도덕하고 능력은 있지만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이 욕망을 인간들이 조작할 수 있다면 신들의 능력을 빌어 가뭄이나 전쟁등 인간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조작의 방법으로 각종 음란한 행위등이 포함되어 가나안 백성 전체를 타락시킨 것이었다.

가나안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농업에서 성공하려면 단순히 때를 따라 씨를 뿌리고 가꾸는 행동뿐만 아니라 바알 숭배와 관련된 가증스러운 행동들을 하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매우 증오스러운 문화에 보내셨다는 것을 알고 이런 문화들을 철저히 파괴하고 궤멸시키도록 명령하셨고(신11:10-15), 더 나아가 가나안 땅은 농업의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시고 풍성한 추수를 위하여 가나안의 신들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만을 신뢰할 것을 경고하셨다(신11:10-15).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성한 추수를 담보한다는 명목하에 바알 숭배를 음란하듯이 시행하였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예측할 수 없는 기후에 직면하여 오직 여호와만을 신뢰하였다면 주변의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충분히 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하나님의 백성에게 인내를 요구하기는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비라는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신뢰하는 쪽을 택하였던 것이다. 시편 4편은 이런 가나안 땅의 특색을 전제로 역경에 처한 시인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시인 것이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66-67 참조).

신예현 – 약속의 밭 lifeisyea.com

구원과 그리스도

구원과 그리스도 (누가복음 2장 22-39절)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 들어가서 모세 율법을 따라 3가지를 준행했습니다.이때 성령님의 인도로 시므온이 와서 이 아기는 “만민 앞에서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으로서 언급하여 예수님 구원 사역을 예언하고 나아가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흥하게 하기 위한 표적으로 세움받았으며,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들을 드러나게 하실 것으로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시므온의 말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돌이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심판의 돌이되고, 각 사람들의 생각이 드러나게 하는 시험하는 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이미 믿은 우리는 이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남은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돌이 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의 돌이 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시험하는 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