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46편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4)
이 시의 주제는 피난처와 힘이 되신 주님입니다, 루터는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아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가 585장)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는 여성 합창단(알라못)을 위한 곡으로, 배경은 앗수르 산헤립 왕의 침공과 같은 국가적 위기의 시기입니다. 먼저 시인은 자연 재해라는 환난에서 도움과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1-3). 이어 전쟁의 환난에서 강한 성(城)과 같은 피난처요 능력 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4-7). 끝으로,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얻었지만, 그 승리는 앞으로 도래할 완전한 평화의 맛보기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완전한 평화가 올 것을 믿으나, 그 과정은 하나님의 심판임을 보여줍니다(8-11).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 제국 때문에 국가는 존폐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간절한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은 그 밤에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대를 멸망시킵니다(왕하19:35). 그러므로 4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3절은 파도가 얼마나 크게 일렁이며, 물은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한 시내’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강한 민족들이 으르렁거려 왕국이 흔들리는 엄청난 전쟁의 위협도 주님에 의하여 완전히 통제되며(6), 그런 재앙 역시 목적이 있습니다(7). 그 목적은 피난처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지혜를 우리로 깨닫고 기쁨으로 그분 안에서 내적인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완전한 평화는 심판을 통해 오는데, 그 시기는 ‘새벽, 동틀녘’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5). 그때까지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편46:5)
시편47편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5)
이 시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바라보고 벅찬 감격과 환호를 노래합니다. 그러나 이 시는 노래를 넘어 예언입니다. 실로 본 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완성되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의 구조는 (1) 찬양의 촉구 : 온 땅의 큰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1-2절) (2) 찬양의 내용 : 열국을 복종시키사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주심(3-4절). (3) 찬양의 촉구 : 왕으로 등극하시는 주님(5-7절). (4) 찬양의 내용 : 보좌에 앉으사 뭇 나라를 다스리실 것임(8-9절). 유대인들은 본 시를 나팔절에 낭송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고백하곤 하였으나,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일에 낭송하여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왕 되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초림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는 물리적이 아니라 영적인 승리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문제입니다. 불순종이라는 이 영적 문제 때문에 모든 불행, 사망, 썪음, 자연재해, 전쟁, 미움 등이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순종의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5절은 바로 이것을 노래합니다. 보좌에 오르신 주님은 당신의 영을 보내셔서 불순종의 인간을 바꾸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날 재림하여셔서 심판을 행하시고, 물리적으로도 온 우주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1:9).
잠언14:29절
“좀처럼 성을 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명철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급한 사람은 어리석음만을 드러낸다”(새번역)
본 잠언은 매사에 인내심을 가져야지 조급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도덕질서를 긍정하며, 후자는 어리석게도 도덕적 무례함(오만)을 드러내놓고 범하기 때문입니다. 원어에 ‘참을성 있다’는 단어는 ‘얼굴의 긴장을 풀다’는 의미로 ‘인내의 표정’을 말합니다. 참을성 있는 사람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도 얼굴의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행동합니다. 물론 훈련의 결과입니다. 그는 잠잠히 주님을 신뢰하지, 충동적 반작용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의 행동은 마치 하나님의 행동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많은 반역을 행하였지만, 인내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사셨고, 범죄한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자 재앙을 철회하셨습니다(요나4:2). 이 반면 ‘성미가 급하다’는 말은 사회적 불의를 보고 너무나도 빠르게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여 죄를 짓게된다는 의미입니다. ‘드러낸다’는 말의 원어는 ‘들어 올린다’로 ‘가장 커다랗게 어리석음을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이 ‘어리석음’은 도덕적 오만에서 나옵니다(5:23). 그는 어리석음을 만들어내고 그것의 먹이가 됩니다(14:17). 그 이유는 주님이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급하게 그리고 불경건하게 복수를 꾀하며 그 결과 자신도 해를 받습니다. 주님은 공정한 재판장이십니다.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 디나의 문제를 듣자 충동적으로 보복에 나섰고, 어리석게도 모든 세겜 사람을 학살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창36; 39:5-7).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4:8,새번역).
잠언14:30절
“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질투를 하면 뼈까지 썩는다”(새번역)
29절은 참을성 있는 사람과 조급해 하는 사람의 성품을 대조하여 누가 명철하고 어리석은지를 보여주지만, 30절에서 이런 성품은 단지 지혜롭고 어리석음의 판단을 넘어 생명과 죽음의 문제까지 이르게 됨을 알려줍니다. 다만 29절은 외적인 신체를 –‘긴장이 없는 얼굴 (= 인내)’과 ‘가쁜 숨’(=조급함)’, 30절은 속사람의 모습 – ‘평안한 마음’과 ‘뼈의 썩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다릅니다. 평온함은 제자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조급해 하는 것은 그를 죽음에 몰아 넣을 것입니다. 특히 질투는 뼈까지 썩게 만들어 결국 파멸과 사망으로 악화되기 마련입니다. 본 잠언의 가르침대로 질투나 분개심은 몸으로 치면 뼈암과 같아서 사람의 생명을 단축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처방은 모든 염려, 적개심과 원수 갚는 것을 심판자이신 주님 손에 맡기고 선을 행하라는 명령입니다(롬12:19-20). 그리고 다윗 처럼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생각하고 주님께만 소망을 두면 어리석은 행동으로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시편39편). 이런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최초의 살인은 질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질투는 동생 아벨이 드린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 자신의 제물은 거절하셨다는 단순한 사건이 발단이었습니다. 이때 가인은 회개하면 되었지만, 질투는 그를 삼켜 죽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녀를 양육시 실력양성 뿐만 아니라, 조용히 빈 곳을 찾아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에도 관심을 가지도록 균형잡힌 지혜가 필요합니다. “좀처럼 성을 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명철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급한 사람은 어리석음만을 드러낸다”(잠언14:29, 새번역)
잠언14:31절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새번역)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사회 윤리의 철학적, 신학적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웃에 대한 질투로 뜨거워진 자(30절)가, 이제는 방어할 능력이 없는 궁핍한 사람을 억압하거나 비방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명성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이란 고대의 일용 근로자로서 밭이나 기타 생계 수단이 없어 타인에게 고용되어 품삯을 받고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이 궁핍한 자들을 억압하고 제대로 품삯을 주지 않으면, 정말 그들을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사람들입니다. 한편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명예롭게 만드는 사람으로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존재는 도움을 받는 사람은 물론 그 이웃들은 감동하고, 은연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인애와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으로서 그런 사람을 본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목격하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하나님께 마땅히 돌아갈 사회적 명성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가 벌받지 않을 수 없고, 역으로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는 자가 상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늦어도 마지막 날 모든 정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궁핍한 사람을 돕고 가난한 자에게 관대함을 보여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잠언은 가난한 자가 다른 가난한 자를 압제하거나 비방하는 경우가 있음을 언급합니다(28:3) “지혜는 명철한 사람의 마음에 머물고, 미련한 사람 마음에는 알려지지 않는다.”(잠14:33,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