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9/13-09/17)

시편46편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4)

이 시의 주제는 피난처와 힘이 되신 주님입니다, 루터는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아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가 585장)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는 여성 합창단(알라못)을 위한 곡으로, 배경은 앗수르 산헤립 왕의 침공과 같은 국가적 위기의 시기입니다. 먼저 시인은 자연 재해라는 환난에서  도움과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1-3). 이어 전쟁의 환난에서 강한 성(城)과 같은 피난처요 능력 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4-7). 끝으로,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얻었지만, 그 승리는 앞으로 도래할 완전한 평화의 맛보기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완전한 평화가 올 것을 믿으나, 그 과정은 하나님의 심판임을 보여줍니다(8-11).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 제국 때문에 국가는 존폐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간절한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은 그 밤에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대를 멸망시킵니다(왕하19:35). 그러므로  4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3절은 파도가 얼마나 크게 일렁이며, 물은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한 시내’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강한 민족들이 으르렁거려 왕국이 흔들리는 엄청난 전쟁의 위협도 주님에 의하여 완전히 통제되며(6), 그런 재앙 역시 목적이 있습니다(7). 그 목적은 피난처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지혜를 우리로 깨닫고 기쁨으로 그분 안에서 내적인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완전한 평화는 심판을 통해 오는데, 그 시기는 ‘새벽, 동틀녘’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5). 그때까지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편46:5)

시편47편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5)

이 시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바라보고 벅찬 감격과 환호를 노래합니다. 그러나 이 시는 노래를 넘어 예언입니다. 실로 본 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완성되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의 구조는 (1) 찬양의 촉구 : 온 땅의 큰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1-2절) (2) 찬양의 내용 : 열국을 복종시키사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주심(3-4절). (3) 찬양의 촉구 : 왕으로 등극하시는 주님(5-7절). (4) 찬양의 내용 : 보좌에 앉으사 뭇 나라를 다스리실 것임(8-9절). 유대인들은 본 시를 나팔절에 낭송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고백하곤 하였으나,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일에 낭송하여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왕 되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초림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는 물리적이 아니라 영적인 승리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문제입니다. 불순종이라는 이 영적 문제 때문에 모든 불행, 사망, 썪음, 자연재해, 전쟁, 미움 등이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순종의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5절은 바로 이것을 노래합니다. 보좌에 오르신 주님은 당신의 영을 보내셔서 불순종의 인간을 바꾸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날 재림하여셔서 심판을 행하시고, 물리적으로도 온 우주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1:9).

잠언14:29절
“좀처럼 성을 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명철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급한 사람은 어리석음만을 드러낸다”(새번역)

본 잠언은 매사에 인내심을 가져야지 조급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도덕질서를 긍정하며, 후자는 어리석게도 도덕적 무례함(오만)을 드러내놓고 범하기 때문입니다. 원어에 ‘참을성 있다’는 단어는 ‘얼굴의 긴장을 풀다’는 의미로 ‘인내의 표정’을 말합니다. 참을성 있는 사람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도 얼굴의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행동합니다. 물론 훈련의 결과입니다. 그는 잠잠히 주님을 신뢰하지, 충동적 반작용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의 행동은 마치 하나님의 행동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많은 반역을 행하였지만, 인내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사셨고, 범죄한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자 재앙을 철회하셨습니다(요나4:2). 이 반면 ‘성미가 급하다’는 말은 사회적 불의를 보고 너무나도 빠르게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여 죄를 짓게된다는 의미입니다. ‘드러낸다’는 말의 원어는 ‘들어 올린다’로 ‘가장 커다랗게 어리석음을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이 ‘어리석음’은 도덕적 오만에서 나옵니다(5:23). 그는 어리석음을 만들어내고 그것의 먹이가 됩니다(14:17). 그 이유는 주님이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급하게 그리고 불경건하게 복수를 꾀하며 그 결과 자신도 해를 받습니다. 주님은 공정한 재판장이십니다.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 디나의 문제를 듣자 충동적으로 보복에 나섰고, 어리석게도 모든 세겜 사람을 학살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창36; 39:5-7).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4:8,새번역).

잠언14:30절
“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질투를 하면 뼈까지 썩는다”(새번역)

29절은 참을성 있는 사람과 조급해 하는 사람의 성품을 대조하여 누가 명철하고 어리석은지를 보여주지만, 30절에서 이런 성품은 단지 지혜롭고 어리석음의 판단을 넘어 생명과 죽음의 문제까지 이르게 됨을 알려줍니다. 다만 29절은 외적인 신체를 –‘긴장이 없는 얼굴 (= 인내)’과 ‘가쁜 숨’(=조급함)’, 30절은 속사람의 모습 – ‘평안한 마음’과 ‘뼈의 썩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다릅니다. 평온함은 제자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조급해 하는 것은 그를 죽음에 몰아 넣을 것입니다. 특히 질투는 뼈까지 썩게 만들어 결국 파멸과 사망으로 악화되기 마련입니다. 본 잠언의 가르침대로 질투나 분개심은 몸으로 치면 뼈암과 같아서 사람의 생명을 단축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처방은 모든 염려, 적개심과 원수 갚는 것을 심판자이신 주님 손에 맡기고 선을 행하라는 명령입니다(롬12:19-20). 그리고 다윗 처럼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생각하고 주님께만 소망을 두면 어리석은 행동으로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시편39편). 이런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최초의 살인은 질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질투는 동생 아벨이 드린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 자신의 제물은 거절하셨다는 단순한 사건이 발단이었습니다. 이때 가인은 회개하면 되었지만, 질투는 그를 삼켜 죽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녀를 양육시 실력양성 뿐만 아니라, 조용히 빈 곳을 찾아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에도 관심을 가지도록 균형잡힌 지혜가 필요합니다. “좀처럼 성을 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명철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급한 사람은 어리석음만을 드러낸다”(잠언14:29, 새번역)

잠언14:31절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새번역)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사회 윤리의 철학적, 신학적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웃에 대한 질투로 뜨거워진 자(30절)가, 이제는 방어할 능력이 없는 궁핍한 사람을 억압하거나 비방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명성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이란 고대의 일용 근로자로서 밭이나 기타 생계 수단이 없어 타인에게 고용되어 품삯을 받고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이 궁핍한 자들을 억압하고 제대로 품삯을 주지 않으면, 정말 그들을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사람들입니다. 한편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명예롭게 만드는 사람으로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존재는 도움을 받는 사람은 물론 그 이웃들은 감동하고, 은연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인애와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으로서 그런 사람을 본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목격하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하나님께 마땅히 돌아갈 사회적 명성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가 벌받지 않을 수 없고, 역으로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는 자가 상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늦어도 마지막 날 모든 정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궁핍한 사람을 돕고 가난한 자에게 관대함을 보여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잠언은 가난한 자가 다른 가난한 자를 압제하거나 비방하는 경우가 있음을 언급합니다(28:3) “지혜는 명철한 사람의 마음에 머물고, 미련한 사람 마음에는 알려지지 않는다.”(잠14:33,새번역).

세상의 빛과 그리스도(2)

요한복음8:12-20절
AD29년 10월 초 유대인의 명절인 장막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그 빛이다”라고 선언하심으로 장막절이 상징하는 바를 성취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제시하셨습니다. 장막절은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한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로서 여인의 뜰에서 7일 동안 매일 저녁 큰 횃불 4개를 켜놓고 유대 남녀는 노래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뻐한들 이들은 범죄 때문에 이방민족의 지배하에 있었고,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유대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 구원은 로마의 지배로부터 물리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이었습니다. 즉 인류의 불순종의 벌을 담당하고 하나님께 순종의 길을 걷도록 빛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심으로 땅끝까지 구원하실 것을 이사야는 벌써 예언하고 있습니다(사49:6). 그것은 단순히 유대민족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온 세상의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 장막절 후 6개월이 지나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이어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기 위해 10흘 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셨고 성령님은 불순종하는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역사하시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사람들은 새롭게 창조된 인류를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리스도의 속죄가 사실이었음을 믿고 주님께 돌아오고 있으며, 마지막 날 이들은 부활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한 해 포도와 올리브의 열매를 거두는 장막절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일묵상(2021/09/6-10)

2021/9/6
시편44편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22절; 롬8:33절에서 인용)

이 시는 고라 자손의 교훈시이며, 지휘자의 지도로 연주된 민족적 탄원시입니다. 주제는 급박한 위기에서 국가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의 배경으로 앗시리아 산헤립의 재차 침입으로 멸망의 위기에 놓인 유대 히스기야 왕 때로 추정됩니다(BC 701년). 시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A1 (1–3) 과거의 하나님
                 B1 (4–8) 증거- 진실한 믿음
                         C (9–16) 탄식- 비탄스러운 현재
                 B2 (17–22) 증거- 올바른 행동
           A2 (23–26) 미래의 하나님

시편 기자는 먼저 과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확인한 뒤(1-3), 이를 근거로 새로운 믿음의 결단을 내립니다(4-8). 그러나 현실은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고 민족은 멸망 직전에 있음을 탄식합니다(9-16). 그렇다고 유대민족이 불신앙 가운데 행하지는 않았습니다(17-22). 시인은 신속한 구원을 탄원합니다(23-26). 하나님의 길은 신비스럽습니다. 인생에 닥치는 고난은 종종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며, 과거에 하나님 자신이 확립한 방법과 모순된 것처럼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때는 하나님께 달려가 기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히스기야는 이사야와 함께 간절히 기도하였고, 그 응답으로 주의 천사가 내려와 산헤립의 군사는 밤사이에 18만 5천명이 죽었습니다. 앗시리아는 당연히 퇴각하였고 유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8:37)


2021/9/7
시편 45편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4)

이 시는 제왕시로서 왕의 결혼식 축가이지만,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하나님과 이스라엘(신자)의 언약적 삶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왕국 내에서 삶의 질서는 하나님만이 왕이며, 지상에 있는 다윗 왕과 그 후손은 단지 그분의 뜻을 집행하는 신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하나님이 임명한 지상의 통치자에게 바라는 그분의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4절이 대표적). 먼저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A 도입부(1)
             B 왕에게 드리는 헌사(2-5)
                   C 신랑의 영광(6-9)
             B1 신부에게 드리는 헌사(10-15)
 A1 결론(16-17)

히브리서(1:8)는 이 시(특히 6절)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다윗과 그의 후손들이 표상하는 진정한 실체로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다윗의 자손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크리스마스는 위대한 용사요 위대한 왕과 진정한 신랑의 도착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그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시기에 그분의 피로 씻어 하나님의 자녀를 탄생시키고 계십니다(시45:16; 요1:12,13). 그러므로 신약은 결혼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신부인 교회의 결합임을 가르쳐줍니다(엡5:31-32). 이렇게 시편은 역사상 이스라엘 왕의 결혼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하나, 결국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에 귀착하는 다층적 의미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19:7)


2021/9/8
잠언 14:26절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에게는 안전한 요새가 있으니 이것이 그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될 것이다.”(현대인의성경).


이 잠언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오는 은택을 보도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주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존경과 두려움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온 천지를 창조하신 만유의 주님으로서 화와 복의 궁극적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늘 주님의 보호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런데 후단은 더 나아가, 주께서 보호하신다는 약속이 자녀들에게까지 미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주님을 두려워한다면, 어떤 것도 혹은 어떤 사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물론 그의 자녀들에게도 만유보다 크신 주님이 그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피난처’란 단어는 ‘자연, 제도, 혹은 사회에서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피난처에 대한 언급은 시편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특히 시편25편). 또한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와 ‘그의 자녀’들을 ‘안전한 요새’ 및 ‘피난처’와 관련하여 그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의 자녀가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며 살 때 그들에게 안전한 요새가 있으며, 그들의 부모는 거기에서 피난처를 발견한다.” 본 잠언의 취지는 그대로 신약의 구원관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지진과 기적을 경험하고 두려워 하여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할 때 사도 바울께서 그 구원이 가족까지 미침을 말한 것입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16:31).


2021/9/9
잠언14:27절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

‘주님을 경외하라’는 주제는 26절에 이어 계속됩니다. 특히 이 잠언은 13:14절,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과 비교하면,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이 ‘주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결국 ‘지혜자의 가르침’이나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나 ‘주님의 계명’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생명의 샘….. 죽음의 그물’이라는 비유를 계속 사용함으로써, 제자들이 경외심을 갖고 주님의 계명과 지혜자의 가르침을 숙고하라는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권면을 듣고 행하면 풍성한 삶(27a)을 누리고, 그들과 다른 이들을 죽음에서 건지는 길(27b)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어렸을 때 삼촌 부부를 따라 런던에 있는 햄프톤 법원의 유명한 미로에 구경을 갔다가 도저히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해 벤치에 앉았습니다. 이미 경험이 있는 삼촌은 근처의 벨을 눌러 안내원의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곧 안내원이 나타나서 “길을 잃었습니까? 나를 따라오십시요!”하고는, 앞장 서서 나갔습니다. 그를 따른 일행은 곧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 미로보다도 너무나 복잡하고 곳곳에 죽음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라 가면, 다시 말하면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지혜로운 사람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모든 죽음의 함정을 피하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물론, 생명의 샘을 마실 것입니다. ”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2021/9/10
잠언14:28절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지만, 백성이 적은 것은 통치자의 몰락이다.”(새번역)

모든 사람 위에서 통치하는 왕은 특히 주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는 왕국의 제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하고 정의를 실천해야만 합니다. 이런 것들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그 중심을 이룹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의 판단은 한 방향으로 쏠리게 되어 신하나 백성의 지지는 줄어들고, 결국 사회적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중국의 전국 시대를 보면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백성은 몰래 그 나라를 떠나 좀 더 나은 국가를 찾아 갔고, 그 나라의 국력은 쇠퇴하여 몰락하였습니다. 여기서 ‘왕’이란 리더의 한 모형입니다. 사실 이 잠언은 제자가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 신뢰받는 지도자로 우뚝서야지, 백성이 떠나는 종류의 리더가 되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유능한 왕은 믿음직하면서도 인자하며(20:28), 정의롭고(16:10), 공정하고(16:12), 참되고(16:13), 마음이 청결하고 은혜로우며(22:11), 분별력이 있고(25:2), 헤아리지 못하게 하는 지혜(25:3), 악인들을 심판하고(20:8), 술에 취하지 않는 건전한 마음(31:4) 같은 자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왕은 당당하게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지만(30:31), 르호보암이 배운 것 같이 백성의 지지를 잃어버리면 좌초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도 셀 수 없는 거룩한 성도들이 하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장면은 분명 그분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계7:9,10). 그러나 본 잠언은 주님의 면전에서는 사람의 숫자는 가치가 없다는 성서의 가르침과 균형을 이뤄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시33:16)

세상의 빛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8장 12-20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기 6개월 전 가을에 유대인의 명절 중 하나인 장막절 축제가 열렸습니다. 이 축제는 약 1480년 전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머무를 때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축제였습니다. 이 축제의 행사 중 하나로 여인의 뜰에 큰 횃불을 4개를 켜놓고 매일 저녁 남녀가 춤과 노래로 구원의 즐거움을 나누었습니다. 횃불이 켜진 어느 저녁으로 판단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오는 13개의 나팔모양 헌금함 앞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은 인도하셨던 사실을 회상시키면서, 당신이 바로 불기둥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유대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출애굽 당시 애굽 지역에서 시내 광야로 지역만 이동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분은 세상의 빛으로서 어두움의 근본인 마귀들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인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와 사망로부터 구원하여 생명의 나라로 옮기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시려는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본받아 살면서 섬기는 삶으로 세상을 마치게 됩니다(요12:24-26). 그럼으로써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가지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매일묵상(2021/8/30 – 9/3)

2021/8/30
시편42편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절)

시편 제2권은 총 31편(42-72편)의 시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성전 찬양대인 고라 자손들(42-49), 성가대장 아삽, 다윗, 솔로몬, 기타 무명의 시인들입니다. 먼저 42편과 43편을 보면, 이 두 시는 사실상 잘 짜여진 하나의 시입니다. 시인은 팔레스틴 북단으로 사로잡혀 갔으며(42:6), 포로에서 풀려 하나님의 전에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 성가대원입니다. 그는 이런 열망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소망 속에 탄원의 기도로 표현합니다. 시의 구성입니다:
           42:1-5 잃어버린 과거/ 6-11 고난 많은 현재/ 43:1-5 기대되는 미래
시인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아 헤매는 사슴과 같이 큰 시련을 당해 도움을 위해 하나님을 찾았지만(42:1-2), 응답은 신속히 오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며 조롱하였고, 시인은 매우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격려하면서,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11). 신자의 믿음과 인내가 여기 있습니다. 신자는 영원을 위한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늘 주님께 마음을 둡니다. 그러나 정작 힘든 고난 속에 있으면 흔들리기 쉽습니다. 본 시편기자는 이런 두 측면을 깊이 체험하고 있으며, 그것이 모든 신자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의 과부와 재판장 비유에서 주님은 신속한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고난에 처할 때 우리 마음은 이 약속에 닻을 내려야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2021/8/31
시편43편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

비록 고난의 폭풍은 잦아들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점점 커지고 있는 모습이 42편 내내 나타났습니다. 43편은 그 과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정도까지 시편기자는 낙담하였습니다(2,5).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태도는 긍정적인 기도로 대체됩니다. 먼저 시편기자는 “나를 변호하여 주십시오”(1)라고 호소함으로 좀더 현실적인 간구를 드립니다. 그리고 밀어닥친 어두움과 불안정한 삶은 긍정적인 요청, 즉 빛과 진리(예, 하나님의 신실하심)를 간구함으로 쫓겨나간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3). 하나님의 빛과 진리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곳으로부터 성전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 주십사 하는 간접적인 호소가 3절에서 드러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빛과 진리가 주어진다면, 시인은 비록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팔레스틴 북쪽 극단에 포로로 있지만, 주님의 거룩한 산과 제단의 그 축복을 경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3,4). 그리고 이미 42:5, 11에 등장하고 세 번째 43:5에서 나타나는 후렴은 시편기자가 가지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국에 있건 포로로 잡혔건 간에, 그는 ‘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도움이 아니라 그분의 ‘구원’ 때문입니다(5). 하나님은 그의 ‘구원자’라는 믿음 때문에 외적 상황은 변한 것이 없지만 시편기자는 승리를 바라보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드리는 밤의 노래는 이런 소망에서 나옵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괴로워하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시43:5,새번역).


2021/9/1
잠언14:23절
“모든 수고에는 이득이 있는 법이지만, 말이 많으면 가난해질 뿐이다.”(새번역)


이 잠언은 열심히 일한 경우와 수다스럽기만 하는 경우의 결과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은 “선을 계획하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들은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흘린 땀 때문에 비용을 제하고도 이득이 남는 자들입니다. 이어 대조적으로 말만 많고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놀랍게도 삶이 피폐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득’이란 히브리어 원어는 ‘몰타르’이며, 이는 ‘넘쳐 흐르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말이 많으면’의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입술의 말들’로서, 입술만 수고하여 나오는 ‘말(word)’이란 의미입니다. 확실히 몇몇 잠언은 말을 많이 하지 말 것을 권면하면서 수다스러움을 책망하고 있으나,  이 반면 많은 구절에서 ‘말(word)’은 힘이 있다고 교훈하고 있기 때문에(예, 14:25), 어느 잠언을 적용할지는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이렇게 잠언의 가르침을 선택하여 적재적소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혜라고 하며, 선택의 기준은 주님을 높이고,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지 여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헛된 수고는 입술만 움직여서 나오는 빈 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썩어질 세상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물질적으로 유복할 수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가난해질 것이며, 마지막 날 주님과 결산시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게 다루는 법을 배워가야만 합니다. 이 과정은 믿음의 삶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7).


2021/9/2
잠언14:24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

18절에서 언급된 면류관은 본절에서 다시 등장함으로, 우리는 도덕적 행위가 반영된 지혜로운 처신의 결과를 배웁니다. 본절은 20절에서 시작된 부와 빈곤의 주제를 계속 다루면서, 23절에서 근면성실하게 일하여 얻은 이익(재물)을 면류관이라고까지 높여줍니다. 이렇게 양 구절을 함께 보면, 게으른 수다장이는 미련한 자들을, 근면한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면류관이라 함은 하나님이 보여주는 호의의 표지입니다(4:9;12:4). 지혜로운 자에게 하나님은 재물을 주심으로 그들이 중요한 사회적 신분, 품위, 권한을 갖게 하는 한편, 위협에 대처할 수 있게 능력을 주십니다. 물론 주님의 제자들은 부를 신뢰하지 말아야 하고(10:15; 11:28), 악한 행동에 의해서도 재물은 획득될 수 있지만, 주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지혜롭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재물을 주심으로 보답하심 역시 사실입니다(3:16; 22:4). 그러므로 한 쪽에 치우친 해석으로 큰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이란 도덕적 진리에 둔감한 사람들이 가지는 도덕적 오만함으로 이것은 정말 다루기 힘듭니다. 그들이 행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타인의 마음과 삶에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은 물론, 부메랑과 같이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어리석은 자’라는 불명예를 소유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지혜의 왕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오만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을 취하여 10지파를 잃어버리고 겨우 유다지파 하나만을 소유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잠언14:18)


2021/9/3
잠언 14:25절
“증인이 진실을 말하면 남의 생명을 건지지만, 증인이 위증을 하면 배신자가 된다”(새번역)

14:25-32절은 마지막 단락으로, 생명 혹은 사망의 문제를 다룹니다. 25절은 그 첫번 째로 법정에 선 정직한 증인과 거짓 증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본절과 5절은 비슷하지만, 본절은 증인의 성품 보다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진실한 증인은 용감하게 양심을 따라 말하여 속이지 않지만, 위증자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무죄한 자가 벌받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율법은 두 명 혹은 세 명의 증인의 증언이 있어야 비로서 유죄를 인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5).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위증 사례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나봇이 자신의 포도원을 넘기기를 거부하자 왕 아합은 몸져 누웠습니다. 이를 본 왕비 이세벨은 나봇이 사는 성읍의 장로들에게 왕명으로 거짓 증인을 둘을 세워 나봇을 처지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장로들은 그대로 행하여 나봇의 일가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어 아합 가문의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왕상21장). 그 심판은 약 20년 뒤 군대장관 예후의 반란으로 아합의 손자 때에 집행되었습니다(왕하9-10장). 거짓이 증인과 결부되면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데, 하물며 거짓 예언과 가르침은 그 폐해가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과 사도들은 이런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현재 대한민국에도 많은 거짓 예언자, 거짓 선생들이 나와 있습니다. 마땅히 분별이라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에게서 났는가를 시험하여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일4:1,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