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10/25 – 29)

잠언15:7절
“지혜로운 사람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지만, 미련한 사람의 마음에는 그러한 생각이 없다.”(새번역)

6절에 등장하는 의인은 7절에서는 지혜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6절은 의인의 집에는 많은 재물이 쌓여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7절에서는, 그것 이외에도 의인은 마음에 지식을 쌓고 그들의 입술 즉, 가르침을 통해 지식을 관대하고도 널리 베푼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실상 지혜자가 행한 후자의 행동은 전자를 이루는 근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공급하는 것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결코 그들로 자기 충족적인 삶을 살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두 측면(재물, 지식)에서, 의인/지혜자는 악인/미련한 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한편, ‘전파하다’는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흩어버리다’로서  보리 추수시 키질을 하여 겨를 흩어버릴 때 사용되었습니다(룻3:20). .그렇게 자유롭고 넓게 퍼뜨림으로써, 지혜자는 지식을 알리는 것입니다. 공자는 호학(好學), 즉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귀족 전유물이었던 교육을 민간에 전파하여, 육포 한 다발만 가지고 오면 누구나 배울 수 있었습니다(3천명의 제자). 그리고 이들에게 6예(六禮)라는 커리큘럼을 통해 당장 활용할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지론은 백성이 먼저 넉넉하게 살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가르쳐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논어 자로편). 타당합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비록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은 물론, 이들의 마음과 입술에서 나오는 생각, 감정 그리고 표현은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합니다. “명철한 사람의 마음은 지식을 찾지만, 미련한 사람의 입은 어리석음을 즐긴다”(잠15:14,새번역).

잠언15:8절
“악한 사람의 제사는 주님께서 역겨워하시지만, 정직한 사람의 기도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새번역)

8절과 9절은 쌍으로서 ‘의인’과 ‘악인’의 주제를 다시 다루면서, 9절은 8절의 신학적 타당성을 제공합니다. 의인의 보물은 주님의 은총을 입었기 때문이고, 악인이 파멸하는 것은 주님이 그들을 거부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에서 ‘제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 비싼 동물을 죽여 기도와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잠언은 본 구절을 ‘제사는 주님께 가증하나 기도는 그분이 기뻐하신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예배나 제사의식 등으로 하나님을 조작하려고 하지, 결코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떠남으로써 그분의 자비를 얻으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다(28:13). 악인은 모든 것을 희생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다만, 오직 하나, 즉 주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그들의 진실한 마음’은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성은 어두워져서, 하나님이 자신의 기준을 낮추어서 그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런 제사의식의 마법을 거절하고, 기도와 제사란 죄인된 인간과 교제를 나누시기 위해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세우신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수단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됨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과 남을 섬기는 열정으로 거룩해져야만 합니다. 모세도, 선지자들도, 시편기자도 그리고 주님도 그렇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의식이 전부 잘못되었다고 버리면 안됩니다.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잠언15:9절
“악한 사람의 길은 주님께서 싫어하시지만, 정의를 따르는 사람은 주님께서 사랑하신다.”(새번역)

9절은 8절의 신학적 근거입니다. 주님이 불경건하고 이기적인 사람(악인)의 제사를 역겨워 하는 이유는 그분이 악인의 생활방식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9a). 그리고 정직한 사람의 기도를 받으시는 것은 그가 정의를 쫓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9b).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수 있느냐의 여부는, 단순히 빈틈없는 예배 의식을 행하고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런 예배 의식과 함께 이웃을 얼마나 열심히 섬기려고 하는가에 있습니다. 예배의식 역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식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중요한 수단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배 시간에 미리 와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만 합니다. 만약 예배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겠다고 나선다면, 이 역시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을 예배의식으로만 표현하지 않습니다. 정의를 따라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의로우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능동적으로, 줄기차게, 심지어 위험을 감수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 힘쓰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입니다. 다니엘은 17세 때 예루살렘에서 잡혀, 친구들과 함께 이방 땅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당면 문제로 우상에게 먼저 드려진 고기 대신, 채소만 먹자는 믿음의 위험한 길로 나타났고, 이들은 지혜롭게 관철시켰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주님은 좋은  건강을 주신 것은 물론, 이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상호작용이며, 신자가 걸어갈 길입니다. “주님은 악인을 멀리하시지만, 의인의 기도는 들어주신다.” (잠15:29, 새번역)

시편56편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찬양합니다.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니, 나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4절, 새번역)

이 시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가드(골리앗의 고향)로 피신하였지만, 사실상 가택 연금을 당하고 감시 속에 있었습니다(삼상21:10-15). 이중의 위험에 처한 다윗은 이런 절망 속에서도 만유의 주님을 생각하고 용기를 가졌습니다. “내가 두려워 하는 날에(3절)…..두려워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4절).” 이 역설은 이 당시 다윗의 마음을 잘 표현합니다. 이 시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1-4) 위협적인 압력과 약속/ (5-7) 압제자의 열망/ (8-11) 하나님의 돌보심 /(12,13) 구원에 대한 감사. 특히 마지막 부분은 34편을 배경으로 합니다. 가드 왕 앞에서 다윗은 미친체 하여 그 손을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그의 영민함 때문이 아니라, 다윗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신 주님의 응답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 시편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구원해주시면 감사제를 드리겠다는 서원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기에, 불의를 당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선택합니다. 이것이 이념을 신봉하는 자나,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것입니다. 또 하나의 차이는 고난의 길을 걸을 때 그는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기 능력이 아니라,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에 의하여 일어섭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 보다 더 낫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마5:20).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 새번역).

시편57편
“하나님, 나는 내 마음을 정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내가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7절, 새번역)

본 시의 배경은 ‘굴’(아둘람)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 도시 가드로 망명하였다가, 거기서 미친 체하여 목숨을 건진 뒤 아둘람 굴로 도주하였습니다 (삼상22:1). 다윗은 하루 아침에 도망자가 되어 매우 초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는 믿음이 지배합니다. 위험한 현실을 무시하지 않지만, 주님을 신뢰하고 모험을 감수하는 굳은 믿음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굴에 있었지만 그 굴은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보여졌습니다(1). 이 믿음과 확신 때문에 부르짖는 기도(1)로 시작한 이 시는 찬양의 확고한 외침으로 바뀌고(9,10), 기도에 대한 그의 신뢰는 확신으로 발전하며(7,8), 원수들의 운명을 깨닫게 됩니다(6). 그러나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구원이나 원수의 멸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 중에 높임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5,11). 그래서 5절과 11절의 후렴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이 후렴을 통해 다윗은 본 시를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8)는 구절은 위험 중에 누웠던(4) 다윗이, 이제 찬양으로 새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참고로 7-11절은 시편108편 1-5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다윗은 그토록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여 보았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진실하심)’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열매 중 하나입니다. “고생도 나에겐 유익한 일, 그것이 당신 뜻을 알려줍니다”(시편119:71, 공동번역).

매일묵상(2021/10/18 – 22)

시편55편
“저녁에도 아침에도 한낮에도, 내가 탄식하면서 신음할 것이니, 내가 울부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실 것이다”(17, 새번역)

이 시 역시 다윗의 시입니다. 비참한 상황에 처한(1-5) 다윗은 이 모든 고통스러운 상황을 외면하고 달아나려는 마음이 가득차 있었습니다(6-8).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결정함으로써(17) 반대자들과 맞서고(10), 결국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안식을 누립니다(22, 23). 본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외침을 보면,  시편이 정상적인 형편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까지 다룬 책이라는 사실을 우리로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 방황하는 사람은 여기에서 동료를 찾게 됩니다. 또한 신자들은 고통 속에 있는 형제들이 쏟는 부르짖음을 공감하고, 중보기도의 길잡이를 발견하게 됩니다(히13:3). 게다가 배신을 묘사하고 있는 가슴 아픈 구절을 읽을 때(12, 20-21절), 우리는  다윗의 그 체험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갸룟 유다와 유대인들로부터 당하신 배신을 노래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12-15). 이런 통찰은 우리의 인생 중에 당했던 배신의 쓰디 쓴 경험들을 새롭게 해석할 빛을 줍니다. 즉, 그런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좀 더 잘 이해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다윗으로 하여금 주님의 심판을 요청할 모든 이유를 주고 있지만, 그는 주님의 공정한 심판을 신뢰하였고, 기도로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습니다(22). 그러므로 22절은 베드로 전서 5:7절에서 인용되었고, 그 구절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너희의 짐을 주님께 맡겨라. 주님이 너희를 붙들어 주실 것이니, 주님은, 의로운 사람이 망하도록, 영영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시편55:22, 새번역)

시편55편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1절, 쉬운성경)

시편 55편에서 주목할 표현은 ‘숨지 마소서’입니다. 신명기22장1-4절에서는 같은 원어를 3번이나 반복합니다. 번역은 ‘못 본 체하지 말라’고 의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은 길 잃은 이웃의 소나 양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반드시 끌어다가 그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또 당신들은 그 이웃이 가까이에 있지 않거나,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해도, 그 짐승을 당신들의 집에 끌어다 두었다가, 그 주인이 찾을 때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나귀도 그렇게 하고, 옷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 밖에도 이웃이 잃은 것이 무엇이든지, 당신들이 발견하거든 그렇게 하고, 못 본 체하지 마십시오. 이웃의 나귀나 소가 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반드시 그 이웃을 도와 그것을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새번역)

신명기의 이 명령은 우리가 불편하게 될지라도, 이웃이 곤경에  빠졌을 때 ‘숨지 말고’ 혹은 ‘못 본 체하지 말고’ 반드시 도와주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이 계명을 하나님께 적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윗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배신으로 인해 위협적인 상황이 닥쳐오자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성품에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이유 중 하나는 그분의 성품과 같은 성품을, 그분의 취향과 같은 취향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에게서 났음을 알 것입니다.”(요일2:29, 새번역)

잠언15: 5절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아버지의 훈계를 업신여기지만, 명철한 사람은 아버지의 책망을 간직한다.”(새번역)

15장 5-19절의 단락은 교육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 가르침에 대한 태도의 결과(5-12)  (2) 환경보다 마음가짐의 중요성(13-19). 첫 번째 단락의 시작인 5절은 슬기로운 아들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전자는 훈계를 받아들이지만 후자는 거부합니다. 이하 6 개의 절에서 이들 사이의 특질과 운명을 알려주는 3쌍의 잠언이 등장합니다: 의인의 재물과 악인의 파멸(6-7), 도덕적 삶과 하나님과의 관계(8-9), 하나님의 전지하심 그리고 생명과 사망(10-11).  마지막으로 12 절에서 ‘책망, 견책’의 말과 함께 첫 번째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특히, 5절은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분류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부모의 훈계를 받아들이도록 동기유인을 제공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살지 않을 수 있다는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늘 주님께 기도해야만 합니다. 실로 둘째 아들과 법적 다툼까지 벌였던,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 회장은 ‘골프와 자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고충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보는 안목은 대개 정확합니다. 고 이병철 회장의 예가 있습니다. 장남은 별 성과가 없었고, 차남은 참지 못하고 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삼남 이건희는 인내를 가지고 부친을 설득하여 반도체 사업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결국 삼남에게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님의 올바른 책망을 듣고 행동을 고쳐나가야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6:2,3).  

잠언15:6절
“의인의 집에는 많은 재물이 쌓이나, 악인의 소득은 고통을 가져 온다.”(새번역)

본 구절은 의롭게 살고 악하게 살지 말 것을 가르치기 위해, 전자가 벌어들인 재물은 유익이 되고, 후자가 벌어들인 소득은 오히려 손실이 된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잠언은 의인에 대하여는 ‘집’이란 말을 사용하여, 의인이 정직하고 부지런히 일하여, 농산물을 생산하여 저장하고, 벌어들인 재물을 쌓아두며, 귀한 보물을 보관할 수 있는 커다란 재산 창고를 연상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 재산 창고는 의인에게 필수적인데, 그것은 부를 자랑하기 위해서나, 자기 혼자만 호의호식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한편, 후단에 나오는 ‘소득 혹은 수입’은 추수한 곡식을 의미합니다만, 여기서는 좀 더 확장하여 악인이 죄된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산출물, 이식, 혹은 재물을 뜻합니다. 잠언 기자는 악인이 이익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오히려 재난(고통)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번 대장동 사건의 핵심인물 중 하나인 남옥 변호사는 입국하자마자 체포되었습니다. 원래 10/19일 자진출두를 약속받았지만, 검찰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전격 체포하였습니다. 노영희 변호사는 검찰은 범죄 수사를 위해서는 자주 약속을 파기하기 때문에 검찰과 경찰의 말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노 변호사에 따르면,  변호사가 큰 돈을 벌려고 시행사나 개발사업과 관련되어 일을 하면, 90%는 교도소로 가고, 5%는 중도 포기하고, 2%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남아 있고, 1-2%정도만이 성공을 한다고 합니다. 남옥 변호사는 성공했다고 판단하였으나, 실제로는 그 소득이 파멸로 가는 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옳은길을 저버리는 사람은 엄한 징계를 받고, 책망을 싫어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잠15:10, 새번역).

매일묵상(2021/10/11- 15)

시편 52편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잎이 무성한 올리브 나무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의지하련다.”(8, 새번역)

본 시에는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에게 와서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있다’고 말하던 때” 라는 표제어가 있습니다. 그 배경은 삼상21-22장입니다. 도엑은 왕 사울의 목자장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놉 땅으로 갔고 제사장 아히멜렉으로부터 음식 등에 도움을 받고 바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때 거기에 있었던 도엑은 왕 사울에게 고자질하여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주었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도엑에게 명하여  제사장 아히멜렉 등 85명과 놉의 백성들을 죽였습니다.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은 다윗에게 도망가서 사건의 전모를 알려주었습니다. 이 참혹한 사건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을 알고 다윗은 분노하였습니다. 이 시에서 ‘포악한 자’는 도엑입니다. 도엑은 정당한 벌을 받을 악인의 상징이며, 다윗은 결국 높아지게 될 의인을 대표합니다. 시편 기자는  ‘뿌리째 뽑힌 나무와 쓰러진 장막’,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무성한 올리브 나무’와 같은 그림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이 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 시의 구조입니다.      

    A      악인의 어리석음(1–4)
       B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 (5)
       B′      지혜의 원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함 (6–7)
    A′      의인의 축복 (8–9)

그러나 우리가 굳게 붙잡을 것은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 같이 변함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며,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렵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 앞에서, 선하신 주님의 이름을 우러러 기리렵니다”(시편52:9)

시편53편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구나.”(1절, 새번역)

본 시편이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1-3), 그분의 백성을 압제하는 사람(4)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늘에서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직간접적으로 경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을 처리하실 것이기에 두려움은 불필요합니다(5). 마지막 절(6절)은 땅에 눈을 돌려 박해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 시는 시편 14편과 동일한 내용으로, 표현조차 비슷합니다. 다만 5절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14:5은 주님이 의인 중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을 때, 두려움이 원수들을 사로잡았다고 노래하나,  53:5은 오히려 원수들을 직면한 주님의 백성들 책망합니다. 이는 그들이 불필요한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 하였다”는 것은 바로 의인들의 불필요한 두려움을 책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수의 뼈를 흩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 두 시편은 같은 상황이나 서로 반대되는 측면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위험에 처할 때, 적들은 두려워 할 모든 이유를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려워 하지 않을 모든 이유가 있습니다. 한편, 본 시편은 52편(포악한 도엑의 행위)과 54편(십에서의 사건) 사이에 있습니다. 모두 다윗이 도망할 때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어리석게 행동한 나발을 암시합니다(삼하25장).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벧전5:7,새번역)

시편54편
“하나님, 주님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님의 권세로 나의 정당함을 변호하여 주십시오.”(1절, 새번역)

본 시의 배경은 유대 족속 십(Ziph) 사람들이 다윗의 은신처를 두 번이나 사울 왕에게 은밀히 고해바친 사건(삼상23:19, 26:1)입니다.  시편 52편은 에돔인 도엑의 고자질로 인한 아비멜렉의 가문의 몰락이 그 배경입니다. 도엑은 이방인이기에, 다윗은 놀라지 않았습니다(삼상22:22,23). 그러나 지금은 동족 유대지파 사람들의 배반이었습니다. 다윗은 비통하였습니다. 본 시에서 다윗은 이런 위험하고 환멸적인 상황을 극복해 나갈 비단주머니 3개를 보여줍니다: 첫째가 기도요(1,2), 둘째가 진리에 대한 회상이며(3,5), 셋째가 미래에 대한 헌신(6,7) 입니다.  다윗은 먼저, 주의 이름으로 즉, 계시된 공의로운 성품과 일치하게, 주님께서 반역자로서 억울하게 취급되는 이 위협적인 상황에서 구출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의인의 기도는 담대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적들은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무법자들이지만, 자신은 의로운 주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정의로운 주님의 심판을 기대합니다(3-5절). 끝으로, 다윗은 구원하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로서, 낙헌제(=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를 드립니다. 그 낙헌제는 조건이 없는 자발적인 감사의 제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통해 죄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술로는 늘 찬미의 제사를, 삶에서는 선행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시편1:1,2절, 새번역).

잠언 15:3절
“주님의 눈은 어느 곳에서든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모두 지켜 보신다.
.”(새번역)
이 구절은 ‘좋다, 선하다 – (토브)’라는 어근으로 2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좋은 혹은 선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수사법)은 선한 윤리와 관련되어서, 잠언이 전제하는 도덕질서의 신학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이 잠언의 앞 부분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뒷 부분은 모든 사람에 대한 그분의 도덕적 평가를 말합니다. “주님의 눈”(개정개역은 ‘여호와의 눈’)은 그분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어느 곳에서든지’라는 말은 ‘서울’ 혹은 ‘인천’과 같은 장소적 표현이지만, ‘선과 악’에 연결되어 모든 인류를 지칭하는 잠언적인 수사학입니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세상에 편재하시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의 놀라운 속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인간은 다릅니다. 후단에 등장하는 ‘지켜 보신다’는 말은 ‘높은 전망대에서 감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주의깊게 모든 것을 감시하고 살펴보는 파숫꾼과 같이 우리의 삶을 샅샅이 꿰고 계시며, 상황에 따라 그에 적절한 행동을 취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보여지지는 않으시나 보지 못하는 분이 아니신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시험하여 통찰력 있게 꿰뚫어 보시고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을 복주시고, 악한 사람은 벌을 주심으로써 역사를 주관하시고, 당신의 도덕질서를 확보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르칩니다: “그분의 눈이 보지 못하여 축복이나 벌을 받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선행이나 잘못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경외하여 선행, 특히 따뜻한 말을 건네시기를 바랍니다. ” 따뜻한 말은 생명나무와 같지만, 가시돋힌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 (잠15:4).

잠언 15:4절
“따뜻한 말(혀)은 생명나무와 같지만, 가시돋힌 말(혀)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
.”(새번역)

본문은 ‘말’과 관련된 단락을 끝맺음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2절에 이어 다시, ‘혀’(말로 의역됨)가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잠언기자는 ‘혀’의 힘에 주목하면서, 언어사용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 잠언은 제자들이 기억하기 쉽게 대조법을 사용합니다: ‘따뜻한 말’과 ‘가시돋힌 말’/ ‘생명나무’와 ‘마음을 상하게 함.’ 특히, ‘생명나무’라는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그 나무는 에덴 동산에 있었고 사람이 먹으면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따뜻한 혀’는 생명나무입니다. 그 ‘혀’에서 나오는 말은 생명을 주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언어가 아니라, 치유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모든 관계가 깨어진 세상을 낙원으로 회복시키도록 제자들의 ‘식욕’을 돋우고 있습니다. 이 반면 가시돋힌 말을 쏟아내는 패역한 ‘혀’는 아담에게 사망을 가져온 선악의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 ‘혀’에서 나오는 말은 저주를 담아 죽음을 선사합니다. 따뜻한 말은 선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에 반하여 가시돋힌 말은 인간이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도덕질서를 포함하여 진리를 왜곡하거나, 전복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혀는, 악한 자들의 혀에서 나오는 죽음의 과실을 먹고 상처받은 심령을 치유하는 양약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 가운데 보이지 않게 존재하시면서,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한 사람인지를 관심을 가지고 평가하십니다(3절).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잘 들어라. 심판 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이다”(마12:36, 공동번역).

매일묵상(2022/10/04 – 08)

시편50편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니,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에게, 내가 나의 구원을 보여 주겠다”(23절)

본 시의 배경은 온 ‘세상(1)’이 하나님 앞에 소환되는 심판의 날입니다. 특히 언약 백성 (4, 5)이  하나님의 심판 (6) 앞으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 종류입니다: 종교 의식을 사랑하지만 감사와 순종과 기도를 를 무시하는 사람들 (8)과 율법을 암송하지만 지키지 않는 사람들 (17-21). 이 시는 이들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돌이켜 감사와 바른 행동을 요구하며 끝을 맺습니다(22,23). 중심 단락(7~21)은 희생과 피의 의식(4~6)이 율법 낭독(vs 7, 8)을 수반하는 출애굽기 24장 3~8절의 언약식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편은  개개인의 자기성찰을 위한 틀을 제공함으로써 언약을 갱신하는 축제에 매우 적합합니다. 한편, 본 시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게 합니다(마25:31-46). 주님이 다시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 그 앞으로 모든 민족을 불러모아 이른바 양과 염소로 상징되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정통 교리를 고백하는 신자들입니다. 양으로 상징되는 사람들(‘의인’으로 기록됨)에게는 영생을 염소로 상징되는 사람들에게는 영벌을 선언하며 그 이유로 당신에게 선행을 하였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놀라나 주님은 ‘여기 있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한 명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배와 사랑의 실천 모두 잘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3:14)

시편51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찢겨진 심령입니다. 오, 하나님, 주님은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17절,새번역).

이 시는 유명한 다윗의 참회시로서 사무엘하11, 12장이 배경입니다. 의로운 왕 다윗은  밧세바를 불러 간음죄를 저지르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남편 우리야(헷 족속임)를 죽이도록 사령관 요압에게 지시합니다.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후 일년 이나 다윗은 위선 속에서 살아갔으나 어느날 선지자 나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다윗은 즉시 자백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삼하12:13) 이때 나단은 하나님의 용서를 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히4:12-13).  우리가 특히 생각할 점은 모세 율법은 살인죄와 간음죄를 용서할 규정을 두지 않고 있기에, 제사와 번제는 오직 용서를 받은 후 감사와 헌신의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죄의 용서는 용서의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만 가능하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날 억울하게 가정을 빼앗기고 살해당한 이방인 우리야는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호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공의롭게 답변하셔야만 합니다. 다윗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택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사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마1:21). 한편, 16-19절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회개하여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되며,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자신의 삶의 근거로 삼고 예배를 통해 그분을 기쁘시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24:47).

잠언14:35절
“슬기로운 신하는 왕의 총애를 받지만,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신하는 왕의 분노를 산다”(새번역)

통찰력은 현명한 자의 자질이며 수치는 어리석은 자가 선택한 결과입니다. 왕(의로운 왕임)이 슬기로운 신하를 총애한다는 말은 그 신하의 통찰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통찰력 있는 사람은 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를 풀려고 할 때 도움이 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어리석게 행동하여 수치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 신하는 그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는데, 이는 왕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은커녕 오히려 심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왕을 한 조직체의 리더로, 신하를 구성원으로 바꾸어 생각한다면, 이 잠언은 지금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말년에 사독과 아비아달 두 명이 통일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반란 시, 두 사람은 일치하게 다윗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차기 왕을 보는 안목에서 두 사람은 달랐습니다. 사독은 솔로몬을,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지지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파직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사독을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그 후손은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까지 천 년 간 제사장직을 수행하였습니다. 한 번의 판단이 천 년 간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잠언을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가장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자이며,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슬기로운 자들입니다. 그 결과는 천 년이 아니라, 영원까지 미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잠언 15:1절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새번역)

본 잠언은 전절(14:35)의 의미를 보충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관리들이 부드러운 대답을 함으로 왕의 분노를 가라앉히도록 가르치고, 다른 한편으로 왕은 무능한 관리에 대하여 분노하더라도, 거친 말을 삼가서 파괴적인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 잠언은 이렇게 상반되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독자들이 감정을 통제하여 부드럽고 온유한 반응을 보여야지 거칠거나 면박을 주는 독한 말을 사용하면 안되겠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이를 위해 절제라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절제는 폭발할 경우 사회적 관계를 깨뜨리는 어리석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절제가 있어야 비로서 부드러운 언어가 나올 수 있고, 부드러운 말은 상처입고 멍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올리브 기름과도 같습니다. 이 반면 톡 쏘는 말, 거친 말은 불에 쏟는 기름도 같으며, 대개 교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쉽사리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600명의 군사들과 피신생활을 할 때 부자 나발에게 필요한 식량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거칠고 교만한 말로 거절하여 다윗의 분노를 격발하였습니다. 격분한 다윗은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안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은 급히 포도주와 식량을 준비하고 다윗을 마중나가 엎드려 절하며 지혜롭고 부드러운 말로 보복적 학살을 만류하였습니다. 그녀의 지혜있는 말에 다윗은 설득당하여 돌아갔습니다. 한편 나발은 아무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해 즐거워하였으나, 이튿날 보고를 듣자 낙담하여 돌처럼 굳어졌고 결국 얼마 후에 죽었습니다(삼상25장). “지혜로운 사람의 혀는 좋은 지식을 베풀지만, 미련한 사람의 입은 어리석은 말만 쏟아낸다.”(잠언15:2, 새번역).

잠언 15:2절
“지혜로운 사람의 혀는 좋은 지식을 베풀지만, 미련한 사람의 입은 어리석은 말만 쏟아낸다
.”(새번역)

본 절은 1절의 주제인 좋은 ‘대답’ 대 나쁜 ‘말’의 도구가 ‘혀’와 ‘입’이며, 원천은 인격임을 언급합니다. 인격은 ‘지혜롭다’ 혹은 ‘미련하다’고 분류되는 개인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지혜자는 ‘지식’을 아름답게 치장(혹은 매력적으로 만들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탈쿰역은 ‘지식을 즐겁게 하다’로 번역합니다. 그들은 사랑과 건전한 생각 안에서 혀를 사용하기에, 그들의 마음에 이미 내면화된 도덕질서에 대한 ‘지식’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도덕질서에 내재된 원인과 결과를 깊이 통찰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구원하고자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친절하고, 민감하게, 그리고 온유하게 말하게 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련한 자는 절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열정적으로 쏟아내어, 인격의 거만함을 드러내고 결국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말게 됩니다. ‘갑’과 ‘을’은 한 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갑’이 사이비 교리를 듣고 혹하여 ‘병’을 열심히 따라 다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중단하겠다는 마음을 ‘을’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미 그런 경험을 한 ‘을’은 “그만 둘 때, 분명 ‘병’이 당신에게 포학한 말을 할 것이나 겁먹지 말아라”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갑’이 그만두겠다고 하니, 아니나 다를까 ‘병’은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미 ‘을’의 말을 들은 그는 ‘아, 이단과 사이비에 속한 사람들의 인격은 다 이렇구나’ 하고 냉큼 그만두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늘 주님을 경외하여 경건한 언어사용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눈은 어느 곳에서든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모두 지켜 보신다.” (잠언15:3,새번역)

매일묵상 (2021/09/27-10/1)

시편48편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

시편46편, 47편, 48편은 모두 구원받은 후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46편은 위협이 제거되었다는 것에, 47편은 복종된 이방민족들도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리고 48편은 심히 위태로웠던 시온 성(=예루살렘 성)의 안전한 보존에 각각 초점을 두었다는 점입니다(12, 13). 본 시편의 구조입니다:
    A      우리 하나님은 위대한 왕 (1–3)
        B      그 위대한 왕의 능력과 구원( 4–11)
    A′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 (12–14)
이 시의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유대 왕 히스기야 시대(BC 700)의 앗시리아 침공과 하룻 밤 사이에 전멸된 앗시리아 군대를 떠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앗시리아 제국 수십만 명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으나,  화살 하나 쏘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단 한 명의 천사에게  전멸 당하여 퇴각하였습니다. 그때 시온 성은 돌 하나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되었고(11-13), 주님의 명성은 땅 끝까지 퍼졌습니다(10). 그러나 이 시온 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한 표상일 뿐입니다(히12:22). 왜냐하면 시온 성은 유대 백성의 불순종으로 멸망 당한 지 2천년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과거 시온 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하는 진정한 시온 성에 이미 들어 간 우리들을 ‘죽을 때까지”는 물론 영원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심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시편49편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사망이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우리의 인도자로 신뢰할 수 있는가의 질문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본 시편 15절은 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구약 성도들은 죽음 이후의 소망이 없었다고 주장되나(근거: 시편6:5 등), 이런 구절들은 시편 기자의 특별한 경험 아니면,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하에 죽어간다고 – 올바른 생각이건 아니건 간에 – 생각한 사람의 말입니다. 본 시편은 분명하게 사망의 두 측면을 말합니다: 소망 없는 죽음(13,14)과 소망으로 가득찬 죽음(15). 존귀에 처하지만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 인간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죽거나(12,20), 아니면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붙잡아 소망 가운데 죽거나(15,20) 양자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죽음(스올)은 영원한 심판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본 시편 1-4절에서 시편 기자가 풀어보라고 던진 우주의 수수께끼의 답이며, 요한복음5장28-29절에서 상론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는 인간의 죄악은 너무나 중해서 그 죄를 속할 수 없습니다(6-8). 더구나 부를 자랑하는 자들은  자신의 부에 취하여 속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9-11). 성도 여러분 부족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도착되어진 것들에 만족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늘 돌보아 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신 아버지께 항상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의 말을 기뻐하며 따르는 자들의 운명이다.”(시편49:12,13, 새번역).

잠언14:32절
“악한 사람은 자기의 악행 때문에 넘어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음이 닥쳐도 피할 길이 있다.”(새번역)

본구절은 15절에서 시작된 단락의 결론입니다.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사람과 반 사회적 행동을 하는 사람 간에는 전혀 다른 운명이 찾아오며, 이는 주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공동체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이웃에게 선을 행하거나 최소한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이웃을 모해하거나, 까닭 없이 다투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3:29-31). 만약 이를 위배하여 악을 행하면 이웃을 해하게 되는 것은 물론 그 해가 자신에게까지 미치고, 결국 그 사람은 넘어져 파멸됩니다. 왜냐하면 유리그릇이 단단히 고정된 선반 위에 놓여졌을 때는 안전하였지만, 고정시킨 나사가 풀려진다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에게는 평강도 피난처도 없습니다. 이 반면, 의인은 죽음에 이르러도 피난처가 있습니다. 그 피난처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주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그는 죽으면 에덴 동산(낙원의 상징)에 간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전형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범죄자와 같이 처형을 받는 수모와 고난을 겪었지만, 당신의 영혼을 피난처이신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시는 것은 물론, 함께 못박힌 한 강도에게 그가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악이나 선에 대한 보상 모두 죽음을 넘어 영원까지 영향을 미치며, 이를 심판하실 분은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이 지혜의 출발점입니다 (행17:31). “바른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하지만,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멸한다” (잠14:2,새번역).

잠언14:33절
“지혜는 슬기로운 사람의 마음에는 간직되지만, 심지어 어리석은 사람 중에서도 알려진다”(쉬운성경)

33절 후단의 번역은 여러 가지이나 쉬운성경이 문맥과 잘 어울려서 그것을 채택하였습니다. 여기서 “슬기로운 사람”은 분별력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덕질서를 깨달은 현자의 가르침을 믿기 때문에, 상황과 그 결과를 꿰뚫어 보고 통찰한 바를 수행합니다. 지혜는 내적 자질로서 마음에 머무릅니다. ‘머물고 – 누아’는 최종적 승리, 구원의 색조를 띠면서 특정 장소에 평화롭게 정착한 삶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들은 마음에서부터 지혜롭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마음으로 결말을 보고 시작하기에 승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성문광장에 있는 수 많은 바보들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들은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표현은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지만, 아무런 흥미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지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추구하기에 아름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종종 지혜를 여성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편, “간직된다”는 것은 지혜가  마음에 들어가 정착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보들은 거만하며 고집스럽기 때문에 지혜를 듣고 보지만 그것을 간직하여 삶의 지침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잠언은 지혜를 깨달은 현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을 넘어 자신의 교훈이 젊은이들의 마음에  최종적으로 정착하고 그들의 삶을 지배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권면은 지혜의 정수인 복음에서도 참되어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간직한 자들로 정의되는 것입니다.“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         
잠언14:34절
“정의는 나라를 높이지만, 죄는 민족을 욕되게 한다”(새번역)

이 잠언은 지혜(33절)를 윤리와 동일시 하고 개인에서 국가차원으로 높여 적용합니다. 또한 교차대구(chiastic)라는 구조를 사용하여, 지혜를 따라 살아야만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국가라도 하나님의 도덕 기준에 맞게 살아가야만 하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함으로 이웃 국가나, 공동체 자체를 해롭게 하면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고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요사이 중국이 행하는 행태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인당 소득 1만달러와 국가 GDP가 미국의 70%에 이르게 되자, 교만하여 중국의 힘을 과시하고, 중국의 야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변국가 중 중국을 좋아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 결과는 잠언의 말대로입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중국 민족 자체를 욕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길은 개인이나 국가 모두에게 참된 것입니다. 실로 국가 흥망성쇠의 궁극적 요인은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 힘이 아니라 그 민족의 경건과 윤리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역사를 잘 보면 죄된 민족은 조약을 깨뜨리고, 자신을 과대포장하고, 속임수를 베풀고, 약자를 억압하는 깡패와 같은 짓을 하였습니다. 또한 안으로는 사법적 정의를 파괴하여 범죄자와 게으름뱅이들이 보답을 받고 선량한 시민들은 과중한 세금부담을 지고 두려워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국가의 백년대계는 교육에 있지만, 그 이전에 주님을 두려워 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할 수 없는 교회의 사명입니다.”나 주가 선고한다. 가사가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사로잡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다가, 에돔에 넘겨 주었기 때문이다.”(암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