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11. 26 – 30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섬긴 삶이라면 고 테레사 수녀보다 더 확실한 예는 없을 것입니다. 1910년에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페에서 태어난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는 열두 살 때 수녀로 부름받았다는 확신을 얻고 열일곱 살에 인도로 떠났습니다. 캘커타의 로레토 수녀원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교장이 되었습니다. 수녀원 담장 너머에는 지저분한 모티질 빈민가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이 마음 깊이 걸려서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1948년에 빈자 중의 빈자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수녀원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습니다. 인도인으로 귀화한 그녀는 1950년에 ‘자비의 선교사들’이라는 수도원을 따로 세웠습니다. “흰 사리를 걸친 가냘픈 단신의 여인”, “상시 가동 중인 이 뜨거운 발전기”는 그때부터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헐벗은 자에게 옷가지를, 병든 자에게 약을, 나환자들과 난민들에게 정성 어린 간호를, 버려진 아이들에게 사랑과 교육을 죽어가는 이들에게 품위와 위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25년도 채 못 되어 1,000명 가까운 수녀들과 185명의 수사들이 그녀의 수도회에 들어가 베트남, 예멘, 예루살렘, 호주,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에서 일했습니다. 물론 막대한 기부금의 사용이 지혜롭지 못한 점, 독재자와 금융사기자를 옹호한 적이 있고, 성모 마리아를 예수님과 공동 구원자로 세우려고 시도하는 등 테레사 수녀에 대한 여러 비판적인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받아들인 그녀의 삶은 우리가 본받아야만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

테레사 수녀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캘커타 모원 (母院)의 거실에 걸린 액자에 그녀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모든 수녀는 가난한 사람의 인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일이나 사람이 혐오감을 줄수록 수녀는 그렇게 흉하게 위장하고 계신 우리 주님을 더 큰 믿음과 사랑과 즐거운 헌신으로 섬겨야 합니다.” 데스몬드 도이그는 테레사 수녀에 대한 첫 기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죽어가는 빈자들을 섬기는 집인 카리가트의 니르말 호리데이는 칼리 사원의 그림자에 덮여 있었고, 그녀는 방금 데려온 한 죽어가는 남자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누더기를 벗기자 그는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섬뜩한 산송장이었다.” 그때 테레사 수녀는 어떻게 했던가? 그녀는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벵골 말로 그에게 다정히 말하며 숙련된 손놀림으로 조용히 그를 씻기기 시작했다.” 크리스토 다스라는 젊은 인도인이 그녀를 거들다가 일을 넘겨받았습니다. 다 씻긴 후에 그는 “가난한 이들의 상처를 씻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상처를 씻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도 그것을 테레사 수녀에게 배운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 나는 내 손이 닿는 모든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그분이 ‘나는 고통받고 있다. 나는 목마르다. 나는 헐벗었다. 나는 아프다. 나는 고통받고 있다. 나는 집이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하다. 빵 한 조각을 건넬 때마다 나는 그분을 대접한다.” 테레사 수녀와 달리 예수님은 만유의 주님이셨으나 세상에 계셨을 때 집없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오늘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9:58)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옳습니다. 그분은 우리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실을 하나로 통합해 주는 놀라운 원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과의 바른 관계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 가족 안에서 우리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아닌 그분께 책임을 지고, 우리도 그들이 아닌 그분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우리는 고용주이든 피고용인이든 양심적으로 처신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이 하늘의 상전께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신의 “형제”라 부르셨기에 우리는 그분께 드리고 싶은 똑 같은 관심을 그들에게 베풀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에서 최대 관건은 모든 상황과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Lord of all )이십니다(행10:36).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과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구석에 밀쳐두거나 벽장에 가두어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분을 일요일이나 교회나 성경이나 삶의 종교적인 부분으로 제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매순간 삶의 모든 부분에 그분을 영접해야 하며 그 속에서 그분을 발견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실체가 되게 해달라고 성령님께 아뢰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 “영광을 나타내는”(요16:14) 것이 성령님의 본연의 사역인 까닭입니다. 또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로 내 삶과 일을 그분께 가져가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분의 임재가 서서히 우리 삶 전체에 배어들고, 우리는 아무 때나 그분께 가서 말씀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또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또한 배후에서 그분을 보며 그렇게 그분을 보면서, 그들을 그분을 대하듯 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산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3-14).

늦게 하나님을 믿게 된 아버지가 다른 지방에 사는 세 아들을 불러 주일마다 교회에 나갈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주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이 지난 후 아버지는 세 아들을 다시 불러 모아서 교회 나간 후 무엇이 달라졌는가는 물었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삶이 보다 경건해졌고 사업도 잘된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은 보이질 않고 대신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요즘 마을의 장애인들과 노인들을 돌보느라고 도저히 올 수가 없었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버지는 세 아들 중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 받은 아들은 셋째 아들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가장 큰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목숨을 다하여 전심으로 사랑하여야만 하고 이웃은 우리 자신과 같은 정도로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의 근본이라고 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계명을 지킴으로 비로서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수요일터예배

마태복음 11:7-15

이번에 한국에 상영된 “사도 바울”이라는 영화는 이미 미국에서는 4월경에 상영된 영화입니다. 내용은 사도 바울께서 네로 황제 말기인 AD 67년경 마지막으로 로마의 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벌어진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의원 누가는 열심히 바울을 간호하기 위해 감옥을 드나들고 있었고, 바울의 동료였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로마의 구석진 곳에서 도피중인 그리스도인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네로가 불지른 로마시 화재의 책임을 지고 잡혀 화형을 당하는 무시무시한 상황이었습니다. 로마의 박해를 받자 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의견대립이 일어났습니다. 한쪽은 무력투쟁을 하자는 편이고, 다른 편은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로 이주를 하자는 편이었습니다. 무력투쟁을 하자는 청년들은 무리를 지어 경비병을 죽이고 로마 감옥으로 쳐들어가 사도 바울을 구해주려고 하였으나 바울은 그들의 길이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 예수의 가르침과 틀리다면서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는 감옥에서 나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런 살벌한 순간에 로마 감옥을 관리하고 있던 로마 장군은 딸이 죽을 병에 들어 유명한 의원은 전부 초빙하여 진료를 받았지만 끝내는 치료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그의 부인은 망연자실하여 집에 모시고 있던 우상에게 제물을 바쳐 딸을 회복시키려는 절망적인 몸부림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장군이 사도 바울을 면담하는 중에 바울은 그 장군의 딸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누가를 위대한 의원이라고 추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던 로마 장군은 딸의 병을 도저히 고칠 수 없자 누가를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누가는 가자마다 장군의 딸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진단을 할 수 있었고 칼로 몸에 차오르는 피를 뽑아내 살려냈습니다. 그 와중에 로마당국의 수배를 받고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및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숨어서 집단 생활하는 곳을 장군에게 알려주고 필요한 약재를 직접 받아가지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원수의 딸을 살려내기 위해 자신의 동료들이 은거한 장소를 노출시킨 누가 및 그런 장군을 받아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에 이 장군은 감격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제에 의해 화재의 주모자로 이미 사형판결을 받은 바울을 구하여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 감옥에 있는 동안 바울은 계속해서 매를 맞는 등 고난을 당하였고, 그렇게 고난을 당할 때마다 자기가 그 옛날 박해하여 죽이던 그리스도인들 형제 자매의 얼굴이 환상 가운데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그 마음에 간직하고 로마 병사들의 손에 참수를 당하여 순교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나고 있습니다. 크게 볼 거리는 없지만 사도 바울의 일관된 믿음의 삶과 그를 도우는 의원 누가의 충실함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을 위해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말씀나눔

2018. 11.19 – 23

새뮤얼 채드윅이 구두를 닦는 일을 시작으로 가장 단순한 일들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하듯 하는 버릇이 들은 것과 마찬가지로 방을 치울 때도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 집에 오실 것처럼, 그분께 깔끔한 방을 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1834-1892) 목사님에 관한 실화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는 정식 교인이 되려고 신청하면 그 교회 목사를 비롯한 모든 집사 및 장로와 인터뷰를 가져야 했습니다. 이때 런던의 어느 커다란 집에서 하녀로 일하던 십대 소녀가 교인이 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그녀가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소?” 잔뜩 긴장해 있던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는 먼지를 장판 밑으로 슬쩍 쓸어 넣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곧바로 “더 이상의 질문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소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모두들 교제의 악수를 나누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방문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 사시는 것처럼, 편지를 쓸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읽으실 것처럼, 환자를 간호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병상에 계신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준비할 때도 우리는 마치 내가 부엌의 마르다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음식을 드실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3-24).

17세기 초의 시인이자 목사인 조지 허버트는 아주 멋스럽게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모든 것을 하라는 뜻을 찬송가로 나타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여, 범사에 주를 보게 하시고, 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를 위해 하게 하소서/ 유리를 보는 자의 눈 유리에 머물 수도 있으나 원한다면 그 너머로 천국을 볼 수 있습니다/ 범사에 주와 더불어 하면 천한 일이란 없습니다. ‘주를 위해’ 그 한마디에 모두 밝고 깨끗해집니다./ 그 말씀대로 사는 종에게 허드렛일도 신성해지고 주 말씀을 위해서라면 청소도 즐거워집니다./ 무엇이든 금으로 바꾸는 신기한 돌이 여기 있으니 하나님이 손대시는 것마다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이 찬송시를 묵상하시면서 오늘 하루 주님을 섬기듯이 모든 것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편 1-2).

가정과 직장은 우리들 대부분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정과 일터보다 더 넓은 책임을 주십니다. 우리 중에 사회와 전혀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아가 어려움에 처한 바깥세상에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은 섬김이며, 지금까지 살펴본 동일한 원리가 우리 섬김의 길잡이가 되고 그 품위를 높여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 특히 양과 염소를 가르는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의 이야기를 통해 그분이 묘사한 최후의 심판을 살펴보면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느날 ‘인자가’ 친히 천사들을 대동하고 영광 중에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왕과 심판자로 앉으실 것이고, 모든 민족들이 그분 앞에 모일 것입니다. 세계 역사의 모든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집결될 것입니다. 그들의 부활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가정되어 있습니다. 그때 그분은 마치 목자가 뒤섞인 가축 떼에서 양과 염소를 가르는 것처럼 사람들을 서로 갈라 의인들은 자신의 오른 편에 두고 불의한 자들은 왼편에 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들을 향해서는 ‘나아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라고 부르시고, 불의한 자들에게는 ‘떠나’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명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슨 근거로 그런 결론을 내리시겠습니까? 제대로된 교리를 고백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닙니다.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2:14).

마태복음 25장 31-46절의 본문이 근본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심판자가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근거로 심판을 행하시는데, 그것은 그분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또는 가장 비천한) 자”를 향한 그들의 행동(또는 행동하지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의인들은 그분이 배고플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원이나 옥에 있을 때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분이 설명하신 대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불의한 자들도 그리스도께서 배고프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모습을 보았으나 어려움에 처한 그분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가장 비천한 형제 하나를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행한 일이 아니라 행하지 않은 일, 즉 태만과 괘씸한 무관심 때문에 심판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란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어려움 속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에 대해 그것은 너무나 좁은 범위이기 때문에 “고통받는 모든 인간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건 그 판단은 주님 손에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인정받는다고(이신칭의:엡2:8-9))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데 어째서 마지막 날 심판 때에는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보고 의인 여부를 판단하신 뒤 영벌과 영생의 근거를 삼으시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오늘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2:18).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르치는 바는 이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이 얻는 ‘칭의 – 의롭다고 칭하심을 받음’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나 ‘심판’은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냐를 가늠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내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이 공적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마음속에 은밀히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선행을 통해 저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약2:18,20)이라고 말했습니다. 심판 날은 공적인 사건이므로 반드시 공적인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긍휼의 행위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친히 누차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컨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행위를 근거로 삼는 것은 믿음의 진실성을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입술의 고백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행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믿음과 사랑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14:23-24).

주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자

마가복음 10:28-31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펴낸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라는 책을 보면 민영환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1906년 7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양기훈의 ‘혈죽도’가 ’‘혈죽기’와 함게 게재됐다. 을사조약의 폐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장했던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의 자결 후, 혈흔이 묻은 옷가지 아래에서는 네 줄기의 푸른 대나무가 솟아나 당시 이 녹죽을 보기 위한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민영환의 순국이 불러일으킨 항일의식과 대나무가 갖는 곧은 충절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이 대나무는 혈죽이라 명명됐고, 양기훈이 이를 묘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혈죽도’는 목판화 각판을 붙여 『대한매일신보』 제4면에 전면 인쇄됐으며 “충절을 애모하시는 독자들은 이 대나무 판화를 감상하며 칭송할 것이다” 라고 그림의 경위를 밝혀 놓았다. 그리고 현채(1856-1925)가 1907년 저술되고 1909년 일제에 의해 폐간된 초등학교 아동용 교과서 “유년필독”의 제3권에는 “민영환 혈죽도”가 혈죽, 민영환 유상과 함께 수록됐으며 “놀랍고도 신기하다. 우리 민충정. 어리석고 불쌍하다. 우리 국민들”이라는 글이 덧붙여졌습니다. 충정공 민영환은 오직 대한제국 혹은 조선만이 그의 인생의 전부여서 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없자 목숨을 버림으로 민족의 혼을 깨우쳤고, 여기에 조선의 땅이 부응을 하였는지 푸른 대나무가 솟아났습니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 살아도 영생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영생을 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살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이 질문을 던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가족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 산다는 답을 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안녕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매우 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마지막 고난 주간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정화시키고 백성들을 가르치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함께 와서 주님께 묻기를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나도 한 가지를 묻겠다.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냐?” 라고 하자 이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만약 “하늘로부터다” 라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질타를 받을 것이요(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으로부터다 라고 하면 백성이 침례 요한을 선지자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렵다 그러니 슬쩍 이를 묻어두고 “어디로서인지 모른다”라고 하자고 합의를 한 뒤 주님께 와서 “어디로서인지 모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 등은 전혀 진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이해관계만이 중요하였고, 자신들의 입장이 수치와 해를 당한다고 여겨지자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들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이나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서는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영생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영생을 얻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이 적용되는 경우로써, 주님과 복음 혹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자신의 집, 형제, 자매, 부모, 자녀, 전토 등에 위험이 가해지는 어려운 경우를 당할 때입니다. 이때 과감하게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혹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기 위하여 이런 것들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영생을 상속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매일말씀나눔

2018. 11.12 – 16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음식과 날자의 문제에서 바울은 ‘연약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견해를 잘못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채식가가 아니었고 우상의 고기를 먹지 못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이교의 제사가 고기를 더럽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거리낌 없이 오히려 감사하며 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같은 장 후반부(13-23절)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연약한’ 그리스도인 앞에서 일부러 고기를 삼가는 것이 옳습니다. 행여 연약한 형제를 양심에 거리끼는 일로 유도하여 죄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제한합니다. 성경이 성결한 양심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양심이란 무오하지 않으며 교육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양심에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과는 별도로,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양심을 침해해서는 안됩니다. 설령 다른 사람의 양심이 잘못되어 있을 때라도 마찬가지입니다(물론 우상 앞에 드린 고기를 먹는다는 것과 같은 사소한 문제들일 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14: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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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마태복음 1:18 -25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보내실 때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어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인간이 되시는 과정을 오늘 본문에서 설명을 하여주고 있습니다. 즉 성령님의 능력으로 마리아에게 수태되셔서 인간이 되시는 과정에서 정혼한 약혼자 요셉의 도움이 필요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잉태를 안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할 때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고 아들을 날 터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라 왜냐하면 그분이야 말로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들로부터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하시자, 요셉은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려와서 아들을 낳고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아기로 세상에 들어오셔서 십자가의 수난을 견디시고 드디어 만백성의 구주가 되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분에게 순종하는 자들만 죄로부터 건짐을 받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사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이 명령에 순종하여 네팔의 척박한 땅에 복음을 전하고자 결심한 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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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가장 흥미진진한 전기와 자서전은 단순히 주인공의 사연만 들려주는 책이 아니라 그의 비밀을 밝혀주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책의 주인공이 실은 악당이나 은근한 술꾼이었다는 식으로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을 폭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삶의 방향과 동력, 헌신의 대상과 동기가 밝히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정말 흥미로운 점은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가입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 또는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가? 물론 삶의 목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목적을 찾다가 실패하여 실존적인 비관론에 빠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기질적으로 방랑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삶이라는 바다에서 플랑크톤처럼 그저 바람과 물결에 휩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마치 사나운 귀신에 쫓기듯 뭔가에 쫓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채울 수 없는 욕심 특히 재물욕, 권력욕이나 명예욕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진정 인간다운 인간의 한 표지는 고결한 목표를 이타적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업체나 기업에서 ‘관리’ 기술을 개발한 사람들은 그 동일한 원리를 사생활에도 적용하여 각자 자기만의 목표를 수립하도록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 건강의 한 조건이 아닐까 합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은 삶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삶의 목표는 무엇으로 설정했으며, 그것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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