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26 – 30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섬긴 삶이라면 고 테레사 수녀보다 더 확실한 예는 없을 것입니다. 1910년에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페에서 태어난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는 열두 살 때 수녀로 부름받았다는 확신을 얻고 열일곱 살에 인도로 떠났습니다. 캘커타의 로레토 수녀원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교장이 되었습니다. 수녀원 담장 너머에는 지저분한 모티질 빈민가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이 마음 깊이 걸려서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1948년에 빈자 중의 빈자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수녀원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습니다. 인도인으로 귀화한 그녀는 1950년에 ‘자비의 선교사들’이라는 수도원을 따로 세웠습니다. “흰 사리를 걸친 가냘픈 단신의 여인”, “상시 가동 중인 이 뜨거운 발전기”는 그때부터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헐벗은 자에게 옷가지를, 병든 자에게 약을, 나환자들과 난민들에게 정성 어린 간호를, 버려진 아이들에게 사랑과 교육을 죽어가는 이들에게 품위와 위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25년도 채 못 되어 1,000명 가까운 수녀들과 185명의 수사들이 그녀의 수도회에 들어가 베트남, 예멘, 예루살렘, 호주,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에서 일했습니다. 물론 막대한 기부금의 사용이 지혜롭지 못한 점, 독재자와 금융사기자를 옹호한 적이 있고, 성모 마리아를 예수님과 공동 구원자로 세우려고 시도하는 등 테레사 수녀에 대한 여러 비판적인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받아들인 그녀의 삶은 우리가 본받아야만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
테레사 수녀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캘커타 모원 (母院)의 거실에 걸린 액자에 그녀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모든 수녀는 가난한 사람의 인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일이나 사람이 혐오감을 줄수록 수녀는 그렇게 흉하게 위장하고 계신 우리 주님을 더 큰 믿음과 사랑과 즐거운 헌신으로 섬겨야 합니다.” 데스몬드 도이그는 테레사 수녀에 대한 첫 기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죽어가는 빈자들을 섬기는 집인 카리가트의 니르말 호리데이는 칼리 사원의 그림자에 덮여 있었고, 그녀는 방금 데려온 한 죽어가는 남자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누더기를 벗기자 그는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섬뜩한 산송장이었다.” 그때 테레사 수녀는 어떻게 했던가? 그녀는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벵골 말로 그에게 다정히 말하며 숙련된 손놀림으로 조용히 그를 씻기기 시작했다.” 크리스토 다스라는 젊은 인도인이 그녀를 거들다가 일을 넘겨받았습니다. 다 씻긴 후에 그는 “가난한 이들의 상처를 씻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상처를 씻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도 그것을 테레사 수녀에게 배운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 나는 내 손이 닿는 모든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그분이 ‘나는 고통받고 있다. 나는 목마르다. 나는 헐벗었다. 나는 아프다. 나는 고통받고 있다. 나는 집이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하다. 빵 한 조각을 건넬 때마다 나는 그분을 대접한다.” 테레사 수녀와 달리 예수님은 만유의 주님이셨으나 세상에 계셨을 때 집없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오늘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9:58)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옳습니다. 그분은 우리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실을 하나로 통합해 주는 놀라운 원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과의 바른 관계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 가족 안에서 우리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아닌 그분께 책임을 지고, 우리도 그들이 아닌 그분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우리는 고용주이든 피고용인이든 양심적으로 처신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이 하늘의 상전께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신의 “형제”라 부르셨기에 우리는 그분께 드리고 싶은 똑 같은 관심을 그들에게 베풀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에서 최대 관건은 모든 상황과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Lord of all )이십니다(행10:36).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과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구석에 밀쳐두거나 벽장에 가두어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분을 일요일이나 교회나 성경이나 삶의 종교적인 부분으로 제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매순간 삶의 모든 부분에 그분을 영접해야 하며 그 속에서 그분을 발견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실체가 되게 해달라고 성령님께 아뢰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 “영광을 나타내는”(요16:14) 것이 성령님의 본연의 사역인 까닭입니다. 또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로 내 삶과 일을 그분께 가져가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분의 임재가 서서히 우리 삶 전체에 배어들고, 우리는 아무 때나 그분께 가서 말씀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집니다. 또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또한 배후에서 그분을 보며 그렇게 그분을 보면서, 그들을 그분을 대하듯 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산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3-14).
늦게 하나님을 믿게 된 아버지가 다른 지방에 사는 세 아들을 불러 주일마다 교회에 나갈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주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이 지난 후 아버지는 세 아들을 다시 불러 모아서 교회 나간 후 무엇이 달라졌는가는 물었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삶이 보다 경건해졌고 사업도 잘된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은 보이질 않고 대신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요즘 마을의 장애인들과 노인들을 돌보느라고 도저히 올 수가 없었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버지는 세 아들 중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 받은 아들은 셋째 아들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가장 큰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목숨을 다하여 전심으로 사랑하여야만 하고 이웃은 우리 자신과 같은 정도로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의 근본이라고 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계명을 지킴으로 비로서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