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서울의 오래된 것’이라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YMCA는)1903년 미국인 질레트의 지도로 발족하였는데 신앙운동뿐 아니라 계몽운동과 토론, 체육, 농촌운동 등 민족운동에 앞장섰고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역사 속에 묵직한 페이지를 채워온 모임이다. 창설되던 때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란 이름으로 지금의 서울YMCA 자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당시 황실의 협조와 미국인의 기부로 완공된 3층의 벽돌 건물은 종로의 변화를 알리는 상징적인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패주하던 북한군에 의해 회관이 파괴되면서 지금의 건물이 다시 세워지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고 어려움도 많았다. 그렇게 새로 선 회관은 조금씩 변해가는 종로의 한복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남아 오늘날에 이른다……….. 1908년 만들어진 이전 회관의 모습.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매천 황현은 회관이 완공된 모습을 보자 “그 집의 높기가 산과 같고, 종현의 천주교당(명동성당)과 함께 남가 북에 우뚝 마주서서 장안의 제일 큰 집이 되었다”고 말했다. 완공된 이후 YMCA회관은 일제 강점기에 만남의 광장이었고, 동서 교류의 현장이었으며, 토론과 논단의 장소로 여러 운동의 거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여기서 기부한 미국인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존 워너메이커입니다.
하루는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1838 – 1922)가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1889 – 1893)으로부터 장관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탁월한 경영솜씨를 발휘해 체신부 장관직을 맡아주시오” 워너메이커는 한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주일성수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장관직을 수행하는 일 때문에 주일성수와 교사 일을 못한다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헤리슨 대통령은 주일성수와 주일학교 교사직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제야 그는 체신부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이면 기차를 타고 워싱턴에서 고향 필라델피아로 내려가 주일성수를 하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체신부 장관으로 있었던 4년 동안 베다니 교회에 출석하기 위해 기차로 여행한 거리만 해도 20만킬로미터가 넘는다고 합니다. 한 번은 기자들이 “장관직이 주일학교 교사직만도 못하냐”고 질문했을 때도 그는 주저함 없이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장관직은 몇 년 하다 말 부업이지만 주일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 동안 해야 할 본업입니다.” 워너메이커는 그가 말한 본업인 교사직을 위해 19살부터 생을 마감하는 85살까지 무려 67년이라는 세월을 쉬지 않고 충성스럽게 교사의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단지 학생들만의 교사가 아니라 교사들의 영적 스승으로도 진정한 사표가 되었습니다.(성경이 만든 사람: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 172-173).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말년에 한 연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성경이었습니다. “저는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경교육이 저의 일생에 기본적인 교육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저는 세상적인 공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일학교에서 평생 성경을 공부했고, 그 시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데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성경을 통해 배웠습니다. 또한 성경으로 제 인생의 확고한 삶의 원칙과 기초를 세웠고, 성경의 바탕 위에 저의 인격과 사업을 건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받았던 이 주일학교 교육이 너무나 귀했기에 이 사역을 위하여 제 인생 전부를 투자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구세주 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 주님 안에서 제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지만 저의 힘과 능력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과 동행했을 때, 모든 두려움은 사라졌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23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