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가운데 얻는 지혜와 안전

조선일보 5월 15일자 기사입니다.

“정치 계산따라 脫원전한 벨기에, 만성 전력난”

“”에너지 전환 정책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팩트와 숫자’를 바탕으로 치열한 토론 끝에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 없이 정치적으로 탈(脫)원전을 결정했던 벨기에는 에너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14일 ALC ‘에너지정책과 민주주의 원칙’ 세션에서 연설한 이브 르테름 전 벨기에 총리가 각국의 에너지 정책을 설명하며 한 말이다. 그는 “신재생에너지는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기엔 발전 효율이 낮기 때문에 원전의 필요성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션 후 인터뷰에서는 “탈원전을 추진 중인 한국 정부가 벨기에 같은 상황에 놓이는 것을 경계하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이 벨기에처럼 원전을 대체할 에너지 생산 계획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대규모 전력 부족 사태를 겪을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다.….. 그는 “재생에너지 확대는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방향이지만, 어쩔 수 없이 원전을 써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대기오염의 주범인 석탄과 천연가스를 무한정 뗄 수 없다면 대안은 원전뿐”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탈원전에 대해서는 “부디 객관적인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확실한 대안을 마련해 둔 다음, 탈원전에 착수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배우고, 평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누구의 경험도 배우지 않는다.” 라는 경귀가 있습니다. 우리 대한 민국은 마땅히 벨기에가 20년 동안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원전의 정책을 결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현명한 국가가 될 수 있고, 그 국민은 지혜로운 국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이 지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아가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 자연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까지 설정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혜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까지 지키면서 삶을 영위하고, 진로를 개척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거나,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들은 모두 패가하는 형제(잠18:8-9)라고 잠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세상의 지혜나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나 모두 같습니다. 그러면 이 양자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위태로울 때, 환난을 당할 때 아주 안전한 망대가 있습니다. 그 망대는 주님이십니다. 어려움을 당하여 그것을 타개하여 나갈 지혜가 부족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때 당황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 다니거나, 절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믿음에 굳게 서서 담대하게 주님께 바로 달려가는 지혜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또 구하는 자들에게 풍부한 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그리고 그 가장 어려울 때가 주님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할 때 대적이 능히 당할 수도 없는 지혜를 주시겠다는 특별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핍박과 박해를 당할 때 여러분은 먼저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기 훌륭하게 약속을 지키신 주님을 증거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루마니아에서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1959년 1월 재차 체포되어 두 번째 감옥에 갇힌 지 4년이 지난1963년의 일입니다. 목사님은 이때 병이 악화되어 병감에 이송되었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다 모이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모든 죄수들은 큰 마당에 모였습니다.거기서 한 시간 동안 서서 몇몇 죄수들의 연극을 구경하였습니다. 그 연극은 기독교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으로, 사령관 주위에 앉아 있는 장교들이 손뼉을 치거나 웃을 때마다 관중들도 따라하였습니다. 연극이 끝나자 사령관 알렉산드레스쿠는 거칠고 큰 목소리로 연극에 대해 가부간의 논평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올라가서 종교를 비판하는 표어들을 외워댔으며, 그들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올 때, 몇 사람은 범브란트 목사님을 껴안고 “이것이 끝날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을 정도로 분위기는 엄중하였습니다. 사령관은 드디어 목사님의 이름을 불렀고, 목사님은 10여년 전에 열렸던 종교 회의에서 아내가 자신에게 “가서, 예수님의 얼굴에서 이 수치를 씻어 주세요”라고 하던 말이 기억되었습니다. 그때도 목사님은 연단에 올라가 체포를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목사님의 얼굴은 많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수백의 눈동자들은 모두 목사님에게 집중하여 “저 사람도 공산주의를 찬양할 것인가?”하고 묻는 듯 하였습니다.알렉산드레스쿠 중령이 “빨리 말해!”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지금 주일 아침입니다. 우리 아내들과 가족들이 교회나 집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신 이 연극을 보았습니다.”  죄수들의 눈에서는 가족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이 고였습니다. “ 여기 계신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쁘게 말씀하셨는데, 여러분들이 그분을 나쁘게 말할 무슨 건덕지가 있습니까? 예수님 역시 무산층으로 목수였습니다. 여러분은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벌써 몇 백 년 전에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유층들을 비난하셨는데, 예수님도 돈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회초리로 쫓아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공산주의를 원한다면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모든 소유를 같이 나누어 쓰는 공동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여러분들이 가난한 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미 성처녀 마리아가 부른 성모가에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부자보다 높이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모든 좋은 것이 다 기독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모든 무산층이 단결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무산층 중에서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고,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이고,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들인데 우리가 서로를 조롱한다면 우리들은 단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옳지 않습니다.” 이어 목사님은 죄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을 재생시키는 데는 기독교가 가장 이상적인 종교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서문을 인용한 다음, 누구든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에 대해 죄를 지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알렉산드레스쿠스 중령은 의자에서 몸을 이리 저리 움직이고 구두발로 땅을 차기는 했어도, 목사님의 말을 중단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죄수들 역시 조용했으며, 감동을 받고 있음을 알아채자 목사님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도 잊고,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에 대해 공공연히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시험이 없는 학교나, 만들어 낸 물건을 자세히 검사 하지 않는 공장이 있다는 소리를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과 우리 동료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뒤 중령을 바라보며 “알렉산드레스쿠 중령님 당신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는 목사님의 말을 듣고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랑을 가르치셨으며, 영원한 삶을 주시는가에 대해 언급하고는 말을 마치자,죄수들에게서 갑자기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저항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죄로 목사님은 병감이라고 하는 성역에서 쫓겨나, 다시 신부들의 감방으로 옮겨졌을 뿐 아무런 해도 당하지 않았습니다.(리챠드 범브란트, 하나님의 지하운동(하), 162-65)

매일말씀나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뒤 갈릴리 바다 위로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은 폭풍 속에서 여간 곤란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 폭풍은 예수님이 새벽 3시경 격랑을 치는 물결을 밟고 오셔서 배에 오른 뒤에야 비로서 잔잔해졌고, 제자들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배에 오르시기 전에 바람을 잔잔하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림을 배워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같습니다. 만약 물 위를 걷는 능력을 받으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주님이 폭풍을 사라지게 하실 때까지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믿음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보여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약점을 완전히 노출시키며 맡기는 것입니다. 존 오트버그 목사님은 매우 설교와 강의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소명이었고 기쁨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던 35년 전 어느 주일 아침에 설교를 시작한 지 10분쯤 되었을 때 설교 도중 기절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그후 1년이 지나 다시 그 교회에서 설교했을 때 10분이 지나 또 다시 기절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긴장을 풀라고 조언을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하는 것이 두려워졌기에, 그 두려움을 없애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했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이사야40:30-31을 기억하고 그 주일에 다시 설교를 하였고 끝까지 설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후 목사님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약간 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기절할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이따금 섬광처럼 지나갈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고 그런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곤 하였습니다.이런 태도는 적어도 목사님에게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연습이었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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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등경 위의 등불이 되는 방법)

누가복음 8:16

연합뉴스(2019.6.17)입니다. “경찰과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06년 20대 중반이었던 A(현39살) 씨는 강도상해 혐의로 경찰 수배를 받던 중 우연히 로또에 당첨됐다. 당첨금은 무려 19억원. 세금을 제외하고 14억원가량 수령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확천금도 A 씨 인생을 바꾸지 못했다. 로또 당첨금으로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해 강도상해 혐의를 벌금형으로 마무리한 뒤 본격적으로 당첨금을 쓰기 시작했다. A 씨는 처음에는 당첨금을 가족들에게 쓰며 새 인생을 사는 듯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강원랜드 등 도박장과 유흥시설을 드나들며 8개월 만에 돈을 모두 탕진했다. 로또 당첨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절도범으로 전락해 금은방에서 절도 행각을 벌이다 구속됐다. 1년을 복역하고 2008년 4월 초 출소했다. 출소 후에도 로또 복권을 계속 샀지만, 행운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A 씨는 2008년 4월 중순부터 9월까지 또 금은방을 털다 경찰에 붙잡혔다. 2010년 계속되는 절도 행각으로 또 지명수배된 A 씨는 2014년에는 휴대전화를 상습적으로 훔쳐 장물업자에게 팔아넘기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A 씨는 135차례에 걸쳐 무려 1억 3천만원 상당 휴대전화기를 훔쳤다. 경찰에 붙잡힌 A 씨 지갑에는 로또 복권과 스포츠토토 등 복권 10여장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15년 3년 형을 선고받고 2018년 복역한 A 씨는 또다시 조직폭력배 행세를 하며 영세 업주들 돈을 뜯어냈고 주점에서 절도까지 벌이다 올해 또다시 구속됐다. 경찰 관계자는 “A씨가 ‘생활고에 시달려서 범행했다’고 진술했다”며 “로또 당첨이 인생을 올바르게 사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는데 순식간에 돈을 탕진하고 다시 좀도둑으로 돌아간 A 씨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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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오랫동안 위기 관리를 연구한 철학자 래리 로던은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 현대인들은 위기 정체 상태에 빠져 고통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위기 관리에 대한 그의 글을 열아홉 가지 원칙으로 요약했는데, 첫 번째 원칙은 “모든 것에는 위험이 따른다”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안전은 없습니다. 집에만 머무르면서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면 안전할 것 같습니까? 미국에서만 해도 50만명이 침대에서 떨어져 응급실로 실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수년 전에 연세드신 제 이모께서 밤에 침대에서 떨어지신 적이 있습니다. 이모부께서 오래 전에 돌아가셔서 혼자 살고 계셨기 때문에 간신히 외지에 살고 있던 아들와 연락이 닿아 응급실에 가보니 다리의 뼈가 세 동강이 나셨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오랫 동안 치료를 받으셨고, 지금도 그 휴유증 때문에 고생하고 계십니다. 또 열심히 창문을 가리다가, 실수로 자기 집 창문의 블라인드 줄에 목이 졸리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습니다(미국에서만 매년 10명이라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타석에 선다면 삼진 아웃을 당할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타자도 세 번 중 두 번은 실패합니다. 그러나 타석에 서지 않는다면 홈런을 치는 영광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배 밖으로 나오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배 안에도 위험은 있습니다. 밖이 두렵다고 계속 배 안에 머물러 있다면, 그 배가 무엇이든지 당신은 죽을만큼 지루함과 지겨움을 맛볼 것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냄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기적을 체험하였지만 막상 목표로 하였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시니 그만 주저 않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삶 역시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님의 칭찬과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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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누가복음 4:16-21

(클레멘트코스의 철학)
다 아는 바와 같이 ‘클레멘트코스’는 미국의 얼 쇼리스 박사의 제안과 노력으로 탄생하였으며, 그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가난을 벗어나게 하여 주려는 것이었고, 그 방법은 인문학을 공부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문학을 공부하면 그들이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사회를 보는 생각을 변화시키게 되고 그 결과 주체성 있는 사람으로서 서게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비로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새로운 눈이 뜨게 되어 연구하고 생각함으로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가지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고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풍토 속에서 살아가며, 매사에 생각없이 단순 반응만을 반복합니다. 마치 외부자극에 조건반사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클레멘트코스의 사례)
따라서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인문학은 틀에 박힌 사고에 갇힌 지루한 일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인문학을 통해서 우리는 남들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과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법, 시를 음미하는 법, 교향곡을 즐기는 법을 새롭게 배웁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미술작품이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상황이 열 가지 라면 그 작품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열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배우는 것은 시작하는 일을 배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시를 읽는 것 위대한 미술작품을 보는 것 자체가 모두 시작하는 일이며 새로워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새롭게 시작하기’를 사업이나 학문을 하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시작하도록 가르칩니다. 지유로워지기, 우리가 맞닥드리는 일상을 새롭게 생각해 보기, 과거에 짓눌리지 않기, 되풀이하지 않기, 전통을 억압이 아닌 혁신의 동력으로 이해하기 같은 것들을 시작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 인문학입니다. 이런 태도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정치적인 삶을 페리클레스식으로, 즉 사람들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삶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밤하늘의 별만큼 수많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들 사이에 한없는 자유가 가능하게 하는 이 세상을 진실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시작하기’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이 가야 할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이 세상을 개혁하고 또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1995년경 장소와 교수진과 교과과정까지 준비가 다 끝났을 때 얼 쇼리스 박사는 본격적으로 학생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약물중독자 재활센터를 찾았습니다. 이 센터는 뉴욕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지역인 사우스 브롱크스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에서 코카인 중독증을 치료하던 여자 두 명을 설득했습니다. 그중 한 명인 카르멘은 교도소에서 10년을 보냈으며, 버나데트라는 다른 한 명은 거리의 성매매 여성이자 약물중독자였습니다. 몇몇 곳에서는 학생을 단 한 명도 모집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는 인문학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직업을 구해 주겠다거나, 돈을 벌게 해 주겠다거나, 혹은 대학 학점을 주겠다는 등의 약속 대신 인문학을 가르쳐 주고 수업에 쓸 책 몇 권을 주겠다는 약속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더 도어’라는 곳에 갔을 때 (그곳은 끼니를 해결하려고 도시 전역에서 몰려든 열여섯 살에서 스물 한 살까지의 젊은이들에게 저녁식사를 무료로 제공한 곳임), 실무진의 도움으로 그중 몇 명을 모아 작은 방에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얼 쇼리스 박사는 “저는 여러분을 록펠러만큼 부자로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하자 록펠러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눈치였기에 다시 “빌 게이츠만큼이요”하고 덧붙였습니다. 이 말에 다들 웃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표정들이 진지해졌습니다. 그리고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만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1) 미술, 문학, 역사, 철학, 논리학 같은 것들로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2)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위대한 사상들을 접할 것이며 (3) 생각하는 법도 배울 것입니다. (4) 그 결과 여러분의 삶은 이런 것들로 풍성해져서 세상의 귀한 보배들을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기관과 다른 몇 군데 기관을 통해 31명의 학생을 모집했습니다. 그중 몇 명은 전과자였고, 몇 명은 노숙인이었으며, 외국인 학생들도 네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클레멘트코스는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학생들의 단순한 반응(reaction)에서 반성적 사고(reflection)의 단계로, 무력(force)을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단계에서 협상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단계로 발전하였습니다. 졸업 후 학생들의 진로가 많은 경우 바뀌었습니다. 클레멘트코스에 와서 공부할 당시 노숙인을 위한 쉼터에서 살았던 한 친구는 강한 스페인어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를 쓰는데다 읽기 장애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드대학에 진학해서 철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고 합니다. 첫해에 코스를 수료한 학생 두 명은 치과의사가 됐습니다. 또한 다른 한 명은 간호사가 됐습니다. 10년을 교도소에서 보냈던 한 여성은 쇼리스 박사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마약중독자 재활센터’에서 상담실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있었던 서맨사는 쇼리스 박사 부인의 충고에 따라 ‘패선기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또 첫해 수료생 가운데 또 다른 한 명은 영문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2006년에 벌써 전세계에서 4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이 코스를 졸업하였습니다.(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 거리의 인문학, 38-56)

그러나 인문학을 통한 자유와 변화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바꾸지를 못합니다. 인문학을 통해 힘과 자유를 얻어 정상적인 직업을 갖게 되고 시민으로 살아가다가 남보다 월등한 힘이 생기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도록 이끌어 갑니다. 이것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복음을 통해 변화되는 사람들은 변화의 폭도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남에게 줄 것을 가지기 위해 자신의 두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자유입니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입니다. 또한 인문학으로만 죄의 문제 역시 해결할 수 없으며, 더구나 인간의 삶에는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만 되지 않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고난과 사망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그 문제를 해결하신 분입니다. 인문학은 또한 영생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일말씀나눔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오는 사람에게 불쑥 말을 건넸습니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마태는 왜 이렇게 세세하게 기록했으며, 베드로는 왜 곧장 물속으로 뛰어들지 않았을까요?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부활 후에 갈릴리 해변에 나타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자 배에서 곧장 뛰어내려 약 90미터를 헤엄쳐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모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순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하나님에게서 오는 진정한 소명과 자신의 어리석은 충동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용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혜와 분별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자체에 찬사를 보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것은 번지 점프를 하고,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재미로 물 위를 걷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극한적 스포츠가 아닌, 극한적 제자 훈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배 밖으로 나오기 전에, 예수님이 그것을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시는지 확인했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분명한 응답을 요청한 것입니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우리는 바른 믿음과 맹목적인 신앙을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른 믿음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분별한 뒤, 비록 두려움과 위험이 놓여져 있지만 주님의 뜻이라는 확신 가운데 순종하여 가는 것을 말합니다. 전형적인 분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지대로 고향 하란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고 순종하여 떠난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9-12).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노련한 뱃사람들이었습니다. 폭풍이 얼마나 거셌으면 경험많은 이들이 배의 전복을 막으려 안간힘을 썼을까요?  집채만한 파도, 거센 바람, 칠흑 같은 어둠…. 물결이 잔잔하고 태양이 밝게 빛나며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라도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파도와 바람이 휘몰아치는 새벽 3시라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잠시 베드로가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지나가고 계십니다. 일생일대의 모험으로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하지만 너무나 무섭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물입니까 배입니까? 배는 안전하고 여러분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안락합니다. 반면 물은 무섭습니다. 배 밖에서는 폭풍이 일고 있으며, 파도는 높고 바람은 거셉니다. 만일 배 밖으로 나간다면 물에 빠져 죽을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100여년 전에 아펜젤라 선교사 역시 수영선수 출신이었지만 파도치는 목포 앞바다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한국 여학생을 건지러 들어갔다가 학생만 구하고 자신은 물에 빠져 순직하였습니다. 이를 듣고 제자 이승만은 감옥에서 땅을 치며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배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절대로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자연의 법칙입니다. 물 위를 걷고 싶다면 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배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믿음의 삶이며, 믿음의 삶은 지혜와 총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려면 반드시 배 밖으로 나와야만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배는 무엇입니까? 배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안전과 안락을 약속하는 모든 것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배는 우리가 유혹받을 때, 인생에 폭풍이 일 때 의지하고 싶은 모든 것입니다. 타고 있으면 너무 편해서, 물 위에 계신 예수님께 가지 못한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모든 것입니다. 배는 극한적인 제자 훈련의 모험으로 가려는 우리를 붙잡는 모든 것입니다. 이 경우 여러분의 배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여러분이 두려움을 느낄 때 그 두려움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려 할 때, 가장 버리기 두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철수에게 그것은 직업입니다. 35년 동안 건축 일을 했던 그는 지금 50대 후반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을 사역자로 부르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헌금과 봉사로 내면의 부름을 잠재우려 했지만 소명을 놓쳐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너무 늦어 버린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영희에게 배는 관계입니다. 그녀가 몇 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는 별로 좋은 연인이 아닙니다. 그는 절대로 먼저 애정 표현을 하지 않고, 미래를 이야기하기 꺼려하며 가능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진심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 두렵습니다.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녀의 배는 매우 불안정하지만 그녀는 떠나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현철의 배는 은밀한 사생활입니다. 그는 포르노 중독자이지만 그다지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출장 가서 성인 영화를 보는 것이 대부분이고 가끔은 인터넷을 즐깁니다. 아직은 누구도 자신이 그러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제 모습을 인정하기 두렵고, 남의 도움을 받는 것도 두렵습니다. 그를 죽이고 있는 은밀한 사생활이 바로 그의 배입니다. 여러분의 배는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여러분의 배는 성공이 아닙니까? 성경에 나오는 젊은 부자 관원이 그랬습니다. 부자 관원이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여야만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먼저 십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부자 관원은 그런 정도는 어릴 때부터 항상 지켜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큰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재물이라는 배 밖으로 나오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의 배는 너무나 좋고 사치스러운 요트였습니다. 그는 그 배를 잘 조종할 수 있었고 좋아했기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삶에서 무엇이 여러분의 발목을 붙들고, 온전하게 하나님만 신뢰하고 나아가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까? 두려움은 여러분의 배가 무엇인지 가르쳐 줄 것입니다. 그 배를 떠나는 것은 가장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주일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에 여러 가지 즐거운 유희가 기다리기도 하고, 수익성 있는 돈벌이가 생기기도 하며, 자녀들에게 꼭 필요한 학원의 강의가 개설될 수도 있으며, 좋은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기도 하며, 여행을 가는데 걸리적 거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 위를 걷고 싶다면 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이미 주님이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아는 어느 청년은 올해 노무사 2차 시험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꼭 필요한 학원 강의가 주일에 개설되었지만 교회에서 청년부의 리더로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강의를 듣도록 선택을 내렸습니다. 저는 이 청년이 올해 주님의 도움을 받아 합격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경험에는 하나님이 축복하시기 전에 미리 테스트를 하시는 경우가 무척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11:5).

물 위를 걷고 싶다면 배 밖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뱃전으로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뱃전을 꼭 붙잡고 한 발을 조심스럽게 물 위로 내밀었습니다. 그 다음 다른 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신앙심을 발휘하여 뱃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것입니다. 그러자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물 위를 걸었습니다! 한동안 오직 베드로와 예수님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환희의 빛을 발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바람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현실을 깨달은 베드로는 불안해졌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폭풍은 아까부터 불고 있었기 때문에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달라진 것은 주님에게서 바람으로 옮겨간 베드로의 눈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람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소망으로 가득 차서 새로운 모험을 시도해 보려고 할 때, 처음에는 믿음으로 충만하나, 곧 현실이 닥쳐옵니다. 실패, 역경, 예기치 못한 장애물들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람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은 사나운 폭풍이 부는 곳입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건만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여전히 놀라고 두려워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바람이 무서워 배 안에 있다고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는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인생의 진실과 믿음의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4:27).

순종과 섭리

창세기 22: 9- 14

어거스틴의 저서 “고백록”에는 어거스틴이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수사학을 가르치려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당시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빠져 어머니 모니카에게 심한 근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모니카는 주야로 아들의 회심을 위해 주님께 간구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이미 20대 초반에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열린 시가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카르타고 총독으로부터 직접 월계관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카르타고에서 이름을 날렸을 것입니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가서 수사학을 가르칠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주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로마로 가기 결심한 것은 더 좋은 보수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정보에 솔깃하여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에 대한 고려 역시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로 가게 된 주된, 아니 유일한 동기는 로마에서는 학생들이 좀 더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하고, 좀 더 엄격한 규율 가운데서 질서가 잘 잡혀 있어서 가르치기에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르타고에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교실을 들락날락하거나, 남의 교실에 함부로 불쑥 난입하기도 하고, 선생의 허락 없이도 자기가 등록하지 않은 수업에 들어가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카르타고는 관습에 의하여 그런 행동들을 보호해 주고 있었기에 어거스틴은 매우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사실 어거스틴은 학생 때에도 그렇게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정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로마에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다고 장담하였기 때문에, 로마에 가기로 결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면 이는 어거스틴을 회심시키기 위해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은 로마에 가서 수사학 교사를 하다가 밀라노 시의 수사학 교수로 공채된 후 거기서 암브로우스 주교를 만나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하게 되는 결정적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고백록은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과부가 된 어머니 모니카는 작은 아들이 떠나는 것을 몹시 슬퍼하셔서 항구까지 따라 나오셨스며, 어거스틴을 꽉 붙으시고서는,다시 집에 돌아가든지, 아니면 자기도 함께 가겠다고 애원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혼자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셨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어머니를 어렵사리 설득해서, 타고 갈 배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던 키르리아누스 기념 성당에서 그날 밤을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 성당에서 울며 기도하시는 사이에, 어거스틴은 그곳을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모니카가 밤새 기도하였던 내용은 아들이 배를 타고 로마로 가지 못하게 해 주시라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가장 깊이 보시고 헤아리시는 분이셔서, 모니카가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모니카가 아들을 위해 지금까지 늘 눈물로 간구해 오셨던 바로 그것을 들어주시기 위하여, 그 밤에 기도하신 것은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순풍이 불어서 어거스틴은 배를 타고 해안을 떠나가는데 그날 아침 모니카는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 가운데 바로 그 해안에 서서, 하소연과 탄식으로 주님의 귀를 가득 채웠지만, 주님은 어머니의 기도를 끝내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주님은 한편으로는 어거스틴의 욕망을 끝장내시기 위해, 욕망에 이끌려 로마로 가는 것을 허락하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아들에 대하여 육정으로 매달리신 부분에 대해서는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으로 어머니를 징계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어거스틴이 모니카를 떠나게 하심으로, 장차 모니카를 위해 더 큰 즐거움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니카는 이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리 내어 부르짖으며 통곡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자신을 속이고 모질게 대한 것에 대하여 어거스틴을 나무라신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셔서, 다시 아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주님께 계속해서 드리셨으며 그것은 드디어 수 년 후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어거스틴 고백록, 박문재역148-52).

오늘 본문에서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종들과 함께 사흘 길을 걸어가 드디어 모리아 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번제할 나무를 이삭의 등에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삭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그러자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동행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일러주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이삭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이 하는 행동을 저지하였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 보니 한 숫양 뒤에 있는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 대신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여호와 이레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섭리 가운데 준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를 믿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