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주민과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 복음  4장 23 – 30절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렛 주민의 배척을 받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들을 고향 나사렛에서도 행하여 고향 사람들을 존중해 달라는 주문을 거절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데 너무나 비중을 둔 나머지 그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이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모세 율법만 지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이 만약 그리스도라 하더라도 별다른바 없고 오직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표징을 보고 싶다는 열망만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존중하지 않는 나사렛 주민들을 주님 역시 존중하지 않았고 결국 이들은 구원을 받을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복음이 가지고 있는 거치는 돌에 걸려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상황에서도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가장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1.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일들은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표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존중하지 못한 나사렛 주민들은 주님을 배척하게되고 구원받지 못하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3.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복음의 돌에 걸려넘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SBC 말씀나눔

왜 성경을 믿어야 하는가? (2016/2/22~2/26)

하나님의 은혜와 죄인에 대한 사랑은 창조된 세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계시되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이 필요한 모든 증거는 성경 속에서 충분히 계시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며,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려 주는 그분의 기록된 말씀입니다. 둘 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분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눔으로써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참고 히브리서 1:1-2). 즉, 하나님께서는 옛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알려주셨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구약성경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니 그것이 복음의 말씀이며 신약성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으므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그분의 언약 백성에게 자신을 알려 주셨으며, 특히 자신의 사자인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려 주셨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또는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와 같은 전형적인 문구로 시작하는 그분의 신탁을 정기적으로 전달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도 이러한 선지자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취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말씀들을 성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이에 대한 증거는 가히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예수께서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신 경우들

먼저, 예수님은 삶을 통해 말씀에 순종하셨으며, 사탄의 모든 유혹을 적절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심으로써 물리치셨습니다(마태 4:1-11; 누가 4:1-13). 둘째, 예수님은 성경 말씀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였다는 것과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으셨으며, 성경의 가르침으로 자신의 사명을 조명하여 해석하셨습니다(눅 4:16-21; 요 5:39). 셋째,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로 여기고 인용하셨습니다(막 12:35-37).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인 신약의 저자들 역시 구약 성경에 대해 예수님과 동일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무엇이 있을까요?

 

디모데 후서 3장 16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원어는 God-breathed란 의미로써 이는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셨다의 뜻임)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감이란 단어는 하나님이 저자들에게 호흡을 불어넣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입으로 그들의 말에 호흡을 불어넣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이중 저작설에 대한 극적인 비유로, 그분의 말씀이 자동적으로 저자들의 말이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그들의 말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믿으셨을 뿐만 아니라 신약의 저술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을 선택하고, 부르고, 준비하고, 파송하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선지자들에게 맡겨졌던 것과 유사한 사역을 사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에 나오는 이른바 다락방 강화에서 밝히 말씀하신 것처럼, 사도들에게 주신 그분의 약속은 특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고 부활하여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가시면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성령님은 오셔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사도들에게 생각나게 하여 주실 것과 사도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요14:16; 16:12-13). 이처럼 생각나게 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보완적인 약속들은 복음서와 서신서에 두드러지게 성취되었습니다.

부자청년과 그리스도

오늘 본문은 한 부자 청년이 주님 앞에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한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십계명 중 두 번째 돌판에 적힌 계명들과 이 계명들을 요약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행하라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영생이란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계십니까? 이에 따라 여러가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만약 영생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으로 정의를 내린다면 우리는 생명 나무 과실이나 이른바 진시황이 찾고자 한 불로초만 있으면 됩니다. 굳이 하나님이 필요없고 주님의 죽으심도 필요없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생명나무과실이나 불로초조차 불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부 부활하여 영원히 죽지 아니할  몸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아 자신들이 살았을 때 저지른 죄 때문에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는다는 것만 차이가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된다면 아무도 생명 나무 과실이나 불로초를 찾아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로, 모두 다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면 부자청년이 묻고 주님이 대답한 것처럼 선한 일을 하여 심판받을 여지를 만들지 않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율법 하에 있습니다. 율법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에 규정된 온갖일을 항상 하지 않으면 율법의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은 전형적인 모습이 십자가 위에서 죽어 매달리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런 율법의 저주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십계명을 포함한 도덕적 율법의 잣대를 통과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율법의 행위로는 그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을 통해서는 죄에 대한 지식이 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성경이 영생을 줄 수 있다고 믿고 보물을 찾듯 혹은 영생으로 가는 마법적인 문구나 논리나 예언의 성취를 발견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고 거기서 영생의 방법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헛되이 성경을 읽은 것입니다. 전형적인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젖혀놓고 성경이 규정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정죄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의 법 아래 살지 않으면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그의 은혜 아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영생입니다.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말을 듣고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나니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7-28)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먹고 마신 자마다 영생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리사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먼저 말씀하시고  이를 다 지켰다는 청년에게 소유한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생의 본질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인 삼는 대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계명을 굳게 지키며, 지금도 그렇지만 부활하여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 이것이야말로 영생의 삶의 중핵입니다.

Hoffman-ChristAndTheRichYoungRulerHeinrich Hofmann – Christ and the Young Rich Ruler (1889)

나사렛 회당과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4장 16-22절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사 이사야 61장 1-2절을 읽으시고 설교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이 구절은 예수님의 사명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천국을 세우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 포로 잡힌 자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시기 위해,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맹인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 참된 구원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죽으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한편 나사렛 회당의 사람들은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만 알았기에 배척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이런 잘못된 인식은 없지만 입술의 고백만 있고 순종이 없는 신앙생활을 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말씀에 걸려 넘어지지 말아야만 합니다.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SBC 매일큐티 –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 성경읽기 (2016.2.15~2.19)

2.15 –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꾸준히 우리의 신앙이 발전하기 바란다면,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건의 시간(Quit Time)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은 은혜의 방편 중 최소한 두 가지를 행하게 합니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물론 모두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시간이 언제인지를 결정해야 하지만, 이상적으로는 하나님과 거룩한 교감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할 일이자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머지않아 이것을 습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청년들이 이러한 습관을 기르는 것은 특히 중요합니다. 1943년 윌리엄 템풀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 그리스도께 제일 먼저 충성을 바쳐야만 한다. 다른 어떤 것도 매일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대신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위한 시간을 만들라. 그리고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도록 굳건히 지키라 는 말로 경건의 시간을 확보하도록 권고하고 있는데 이는 특히 우리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2.16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경건의 시간과 관련하여 우리 나라 교회는 새벽기도라는 이름으로 오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벽기도에 나가면 통상 찬송하고, 성경읽고, 설교가 있고, 그리고 통성 기도를 한 뒤 집에 돌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벽기도는 여러가지의 은혜의 방편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름과 시간을 갖던 경건의 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50년 이상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방법으로 매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나 자신이 직접 증거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편, 프랭크 개벨라인은 롱아일랜드에 있는 스토니브룩 학교에서 41년 동안 교장을 역임하신 분인데 그의 80번 째 생신을 맞아서 다음 세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분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유지하십시오 내 삶을 돌아보니, 내 인생과 사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60여년 동안 매일 지속했던 성경과의 만남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을 만나는 조용한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2.17 – 경건의 시간의 필요성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조용한 시간을 갖고자 한다면 어떻게 균형있게 이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요? 성경읽기와 기도, 이 두가지가 순서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어린 사무엘처럼 우리도 그분께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9-10) 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던 베다니의 마리아를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눅10:39). 다음으로, 우리는 그분께 하고 싶은 말을 아룁니다. 특히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후에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진자의 운동과 같습니다. 그분과의 대화는 쌍방 간의 대화로, 이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심지어 우정)는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을 통해 이런 사랑이 우리 삶 가운데 깊어져 가는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하게 되고 그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18 – 성경읽기
은혜의 방편의 첫 번째는 아무래도 성경입니다. 성경을 떠올리면 두 가지 질문이 우리 앞을 가로막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혹은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로 믿어야 하는가이고, 두 번째는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입니다. 먼저 왜 성경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을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통상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란 근본적으로 합리적인 개념입니다. 그 말은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과 목적은 그분이 베일을 벗기고 친히 보여 주시지 않는 한, 그렇게 하실 때까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고 유한한 지성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성을 어떻게 꿰뚫어 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히 우리를 초월해 계셔서 우리가 결코 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2.19 – 성경읽기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하여 하나님이 직접 표현하신 대목이 이사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하나님의 생각과 그분의 길이,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높다면, 우리는 그분이 솔선해서 그것을 보여 주시지 않는 이상 결코 그분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 표현하신 첫 번째 사건은 천지창조입니다. 즉, 창조된 우주 속에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영광에 대한 계시일 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은혜, 죄인에 대한 분에 넘치는 사랑은 창조 세계에 계시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무엇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롭고 자비하신 성품들을 계시하였을까요?

수요일터예배

수요일터예배 – 중생의 과정과 모습 (마태복음 5ㅣ17-20)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건들로 변화되는 것이며, 구체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자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여기서 발견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애를 쓰고 기도하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 당신 사이에 놓여있는 율법의 정죄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외치는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을 포함한 도덕적 질서는 당신이 천지를 창조하신 바로 그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한 획이 떨어지느니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있습니다. 예전에 바티칸에서 성서를 간행하였는데 “Do not commit adultery 간음하지 말라” 라고 써야 할 것을 그만 “not”를 빼먹고 인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당연히 급히 전량을 회수하여 소각하였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율법에서 한 획이 떨어지면 율법의 명령이 바뀌므로 간행하였던 성경 전부를 회수하여 소각한 것과 같이 창조된 천지를 바꾸시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요구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형상으로 보내사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으로 육신 속에 있는 죄를 정죄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의 삯을 다 청산하셔서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키셨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의롭다하심을 모든 자에게 보여주셨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역시 의롭다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지고 죽으셨다는 소식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을 바꾼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았지만 자신이 하나님께 반역하였으나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을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 중심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가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본질입니다. 물론 후에 우리가 부활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만, 그러나 본질은 어디까지나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중생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율법을 두시고, 우리의 생각 속에 당신의 법들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래서 진정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빌트인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이런 사람들 즉, 중생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중생한 사람들은 성경 구절을 암기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새겨져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그 뜻을 이루고자 오늘 우리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만나게 되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건들로 변화되는 것이며, 구체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자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여기서 발견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애를 쓰고 기도하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IMG_8873 일러스트: 신예현 – 아침 Q.T. (2016)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시는 그리스도

성경봉독: 누가복음 4장 14-15절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돌아오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과 아울러 그의 권위있는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와 마귀의 세력에 갇혀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해방하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권능을 행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는 성령님의 권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세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에게 전파된 복음에 굳게 서서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아야만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권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워야만 합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와 그리스도

성경봉독: 마태복음 24 15-24절

오늘 본문에서 주인은 종들의 재능을 평가하여 각기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오랜 후에 돌아와서 회계를 하니 두 사람은 부지런히 일하여 갑절을 남겼으나 한 사람은 준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고는 게으르게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두 사람은 칭찬을 받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하였으나 1달란트를 땅 속에 파 묻어둔 사람은 책망을 받고 바깥 어두운데 내쫒겼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그 핵심이 그리스도를 쫒는 제자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평가되는 재능은 세상의 기준과 틀립니다. 하늘 나라의 기준은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 표준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상징되는 자기부정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일인 제자도를 실천하다가 실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유일한 실패는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소간 어려워도 주님께 기도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가시기를 바랍니다.

 

1.      제자도를 위해 주신 달란트는 무엇일까요?.

2.     제자도를 통하여 어떻게 달란트를 남길 수 있을까요?.

3.     제자도를 실천시 무엇을 경계하여야 할까요?

SBC매일큐티

2016.2.1~2.5

10계명 & 주님께 순종하는 삶

2016.2.1 – 10계명
탐욕의 해독제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무수한 고난과 궁핍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삶을 살아가는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우리는 본향을 찾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만족해야 할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바로 여기에 제10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탐욕이라 불리는, 사납게 날뛰고 파괴적인 욕망에 대한 해독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검소함과 관용과 자족의 조화입니다. 

 

2016.2.2 – 주님께 순종하는 삶
십계명은 우리에게 대단히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절대적이고 영적이며 지속적이고 규칙적이며 순종의 예배를 드릴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우리 이웃의 삶과 가정, 재산, 그리고 명예를 지키는 데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이들 계명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이 바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요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첫 번째 목적이었습니다. 왜 그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겠습니까?

 

2016.2.3 – 주님께 순종하는 삶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이를 통하여 우리의 죄성을 폭로하고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함으로써, 죄인인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시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십계명을 통해 나타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속죄제, 속건제, 번제 그리고 대속죄일 등과 같은 제도를 두었습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상징하는 것이지 죄를 없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방법등을 통하여 율법은 우리를 유일한 구원자이며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율법이 칭의를 위하여 우리를 그리스도께 보내고 나면, 그리스도께서는 성화를 위하여 다시 우리를 십계명이 중심이된 율법에게로 돌려보내십니다. 그때 오직 성령님만이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겨서 우리로 하여금 그 율법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히8:10). 

 

2016.2.4 – 주님께 순종하는 삶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값으로는 따질 수 없는 은사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성령님이 우리에게 충만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날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그분께 성품을 다시 열어 드려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케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는 특별한 통로를 직접 세우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통로를 일컬어 은혜의 방편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성경 읽기, 기도, 예배, 교제 및 성만찬이 포함됩니다. 청교도들이 은혜의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것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존스토트 목사님이 라일 감독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고통없이는 소득이 없기 때문입니다. 

 

2016.2.5 – 주님께 순종하는 삶
우리의 신체적인 건강을 빗대어 은혜의 방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건강을 지키고 질병의 감염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행병이 돌고 세균에 감염되었을 때 부랴부랴 의약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것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식사와 수면 및 운동 습관을 훈련함으로써 면역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에 맞서 싸우고 경건을 더욱 개발하는 진짜 비결은, 유혹이 닥치는 순간에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유혹에 빠졌을 경우에 주님께 구원을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평소에 성령님 안에서 훈련된 삶을 살아감으로써 영적인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과 그리스도

누가복음 4장 1-13절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근본적인 죄는 불신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광야에서 무려 40일 동안 굶주리면서 들짐승과 함께 있는 예수님을 여러가지로 시험하다가 드디어 40일이 되는 날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목적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타락시킨 것처럼 주님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핵심은 불신이었습니다. 3가지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네 마음대로 살라는 마귀의 주문을 거절하고 순종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순종의 길이냐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으므로써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황을 이용할 뿐 만 아니라 성경까지 왜곡하여 그 근거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적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고 우리가 방심한 때를 타서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 안에서 늘 상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