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11/22–26)

시편64편
“의인은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주님께로 피할 것이니,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모두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10, 새번역)

인간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계시는가, 혹 계신다 하더라도 정의를 이루어내는 그분의 섭리가 과연 적극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종종 의문을 제기합니다. 만약 선하신 하나님이 진실로 세상을 통치하신다면, 선인과 악인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들 사이에 그토록 심한 운명의 불균형이 있을 수 있는가? 악을 행하는 자들이 상처하나 입지 않고 어떻게 그토록 자주 성공을 할 수 있는가? 이 시는 바로 이런 물음에 답하며,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게합니다. 다윗의 원수들은 혀라는 칼을 날카롭게 갈고, 독을 먹인 화살과 같이 말(words)을 준비 합니다(3). 그리고 몰래 숨어 있다가  갑자기 느닷없이 쏘고서도, 거리낌조차 없었습니다. 다윗은 기가막혔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코웃음치며 묻습니다: “누가 보리요?”(5). 그리고는 성공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바로 그 무기(화살과 혀)가 자신들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도 매우 갑작스럽게! 그래서 그들은 순식간에 쓰러질 것입니다(7). 왜냐하면 인간이 아무리 교활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어디에 겨누어야 하실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웃음 받는 하나님의 섭리는 이미 작동하고 있고, 결국 그들은 사람의 속담거리가 될 것입니다(8,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는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보호합니다. 그래서 환난을 당한 의인이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드리는 기도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피난처에서 찬양의 목소리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10). “주님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시편2:10후단,새번역)

시편65편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4)

이스라엘은 매년 대속죄일(레16장)과 그에 뒤 이은 장막절(레23:39)로 절정을 맞습니다 -죄의 제거와 추수감사 행사. 그러나 이 시는 특별했던 해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 해에는 놀라운 기도 응답을 받았으며(2,5); 죄는 엄연한 현실이었고(3); 하나님은 위엄있는 행동을 하심으로(5),  열국을 진정시키고(7) 열방에 확고한 명성을 확립하셨고(2,5,8); 그 해의 추수는 특별히 풍성하였습니다(9-13). 이 시에서 하나님은 구속자, 창조자, 공급자로서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사무엘하21:1-14에 기록된 3년 기근이 끝나던 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윗 시대에 3년 기근이 발생하였습니다. 주님은 모세율법 속에 이스라엘에게 적당한 때 비가 내릴 것을 약속 (신11:14)하셨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이례적입니다. 당연히 다윗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에게 “사울과 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을 죽여 살인죄를 지은 탓이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원래 400년 전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과 약조하여 살려 주는 대신 주님의 장막을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350년 뒤 사울이 이를 어긴 것입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을 부르니, 그들은 사울에 속한 7사람을 목매달아 죽이도록 요청하였습니다. 다윗이 이들을 내어주자 기도는 응답되어 3년만에 비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본 시는 하나님이 부르신 이스라엘의 축복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축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고후1:20,새번역)

잠언 15:19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두 번째 승자는 정직한 사람으로서, 그는 확 트인 큰 길을 활보할 수 있는 보상을 받습니다. 대조적으로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덤불된 울타리로 막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5:5은 사람이 접근 못하도록 가시로 된 강력한 울타리로 둘러싼 포도원을 언급합니다. 이렇게 가시 울타리의 비유는 통과할 수 없는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가시로 찌르고 고통을 주어 못지나가도록 막는 장애물입니다. 게으른 자 역시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고 장애물을 넘어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의 게으른 성품 때문에 시도도 안합니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러우며 위험해서 도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반해 정직한 사람들은 대로를 걷습니다. 실로 그는 현인의 가르침에 맞추어 살아가려는 성품을 지녔습니다. 한편, ‘대로(highway)’는 여행을 쉽게 하도록 장애물을 제거하고, 잘 닦여져서 손쉽게 왕래할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 반면 준비되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돌이나 기타 장애물에 채여 넘어지는 일이 다반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잠언의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살아가는 자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아무런 장애물을 만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게으른 자’와 ‘정직한 자’를 대조함으로, 잠언은 ‘게으른 자’는 ‘정직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게으른 종을 ‘악한 종’(마25:26)과 ‘무익한 종’(마25:30)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실천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마25:30.새번역)

잠언 15:20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잠언15:20-29절은 ‘의로움’과 ‘악함’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언듯 보기에는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10:1)를 반복하는 양 보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아들’을 ‘미련한 자(아담)’로 대체하여, 유산을 이어받는 아들의 지위에서 그 유산으로부터 쫓겨난 사람(아담)의 신분으로 강등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범죄한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것과 같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경멸하는 대상은 ‘지혜와 훈계’(1:7)이나,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잠언1:7에서 미련한 자가 멸시하는 대상은 ‘지혜와 훈계’이나, 본 절은 이를 ‘어머니’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물론 어머니는 부모를 뜻합니다(1:8). 또한 ‘즐겁게 한다’와 ‘업신여긴다’는 어구는 정확히 대조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부모를 기쁘게 하는 아들은 그분들을 멸시하지 않는 반면, 부모를 멸시하는 사람(아담)은 그분들에게 슬픔을 준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미련한 자는 고치기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중요하다는 자만에 빠져, 자신의 경건한 부모보다 똑똑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비극적인 모습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미련한 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표식이며, 절대로 잘못 판단될 수 없습니다. 한편, 지혜로운 아들이 아비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부모를 명예롭게 여기기 때문이요, 미련한 자가 어미를 업신여기게 되는 것은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모 공경을 명하는 제5계명의 존재 의의는 매우 크다 할 수 있습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출20:12,새번역)

잠언 15:21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은 미련함을 즐기지만, 명철한 사람은 길을 바로 걷는다.” (새번역)

21절의 “즐기다”는 말은 부모의 기쁨에서 자신의 기쁨으로 중심이 변했음을 보여줍니다. 미련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거만함은 도덕적 감각이 전혀 없는 자, 즉 거만한 바보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명철한 사람은 길을 바로 만들어 걷습니다. 이렇게 바른 길을 계속 가면 결국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24). ‘미련함을 즐긴다’와 ‘길을 바로 걷는다’라는 표현을 비교해 볼만 합니다.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은 도덕 질서를 위반하기 좋아하여, 무모하게도 마땅히 이행하여야 할 의무와 생명의 길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나 명철한 사람은 앞에 놓여져 있는 기쁨(영생)을 위해 자비와 진리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래서 잠언은 제자들이 통찰력을 가지고 살도록 소리 높여 외침으로써, 제자의 애정(21a)과 행동(21b)이 늘 바른데 머물러 있도록 훈계합니다. 지혜자란 현재는 부모님에게 기쁨을 드리고(20) 미래에는 자신에게 기쁨이 찾아오도록 합니다(21). 그러나 지혜가 결여된 어리석은 자는 부모의 훈계를 무시하고, 언제나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사람의 운명은 그의 생각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특히 복음을 들을 때 분명히 갈라집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죄를 심상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복음의 가르침을 멸시하고 자신의 미련한 삶을 그대로 즐깁니다. 이 반면 명철한 자는 장래 하나님 앞에 설 것을 두려워 하여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 결과 그의 삶은 변화를 받고 주님이 걸어가신 의와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후2:15,새번역)

매일묵상(2021/11/15 – 19)

시편62편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2, 새번역)

우리는 두려워할 것은 많으나 사람은 믿을 바가 못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위협이 밀려 올 때, 도대체 우리가 호소할 곳은 어디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로써 충분합니다. 본 시편에서는 처음부터 이 진리가 진술되고 있으며(1,2), 다시 반복되어 격려합니다(5,6). 더 나아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권면되고(7,8),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밝힙니다(11,12). 이 진리는 절대로 상아탑에서 만든 교리가 아니라, 힘든 세상에서 경험되고 입증된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돌변하여 위협적으로 변할 수 있으며(3, 4), 이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나 관행은 아무런 해결책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 소망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아크’(‘그러나’ -개정개역은 생략됨)가 각 구절의 머리에 총 6번(1, 2, 4, 5, 6, 9절) 등장하여 반전을 노래합니다: 많은 압력이 있지만, ‘그러나’(1) ‘하나님을 의지한다.’ 다른 많은 힘이 있지만,  ‘그러나’(2) ‘오직 그분만 나의 반석이시다.’ 원수가 성공할 수 없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러나’(4) 그들은 꾀를 내는데 열중한다. 그런 모든 꾀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러나’(5) ‘쉼’을 발견한다. 누군가가 다른 힘도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그러나’(6) ‘오직 그분뿐이다.’ 사람의 도움이 얼마나 큰지 지적하더라도, ‘그러나’(9) ‘인간은 단지 입김에 지나지 않아’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권능과 변치 않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분만 신뢰하고 의를 행하여야 합니다. “주는 사랑을 베푸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행한 대로 주는 반드시 갚으실 것입니다.”(시62:12,쉬운성경).

시편63편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 입술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3, 새번역)

시의 머리말은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지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사울에 쫓길 때 유다 광야에서 지냈고, 30년 뒤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 다시 유다 광야에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11절에 ‘그 왕’이라는 문구로 볼 때 후자의 경우라고 판단됩니다. 다시 한 번 최악의 환경이 가장 훌륭한 시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때 다윗은 뒤따라 오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다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자신을 다시 성소로 불러주실 것을 믿고 자신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삼하15:25). 이 시는 시인의 강한 믿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1-4) 내가 갈망하는 하나님
(5-8)내가 기뻐하는 하나님
(9-11)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다윗은 황폐한 땅에서 물을 찾는 그 심정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증을 중첩시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갈 수 없는 예루살렘의 성소에서 늘 가졌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떠올리며 그런 주님과의 교제가 어떤 삶보다 더 소중하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환경보다 마음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인정을 받았던 비밀입니다. 그는 쫓기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능력 그리고 보호하심을 신뢰하고 원수들이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라’ 확신합니다(9). 그 확신의 근거는 왕으로서의 은사와 소명에서 나옵니다(11). 만약 다윗이 자신의 왕직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였다면, 그리스도인의 왕직과 소명은 더욱 확고함을 알아야합니다.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1:6).

잠언 15:16
“재산이 적어도 주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재산이 많아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새번역)

16절의 주제어 ‘더 낫다 – 토브’로서, 고난 가운데 즐거워 할 수 있는 근거는 주님을 경외하면서(16) 서로 사랑하는데 있음(17절)을 알려 줍니다. 16절의 교훈은 재산이 아니라 믿음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을 경외한다’와 ‘다투며 산다’는 말은 대조되는 표현으로 누가 주인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다투며 산다’는 말은 ‘맘몬의 노예’가 됐다는 말로써, 이는 다툼의 원인은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15절과 함께 읽으면 다음과 같은 통찰력을 줍니다. “영적인 이득을 가졌으나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이, 경제적 이득을 가졌으나 영적으로 가난한 것보다 낫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재산, 능력, 권력 등을 우상으로 삼는 세상입니다. 당연히 악인이 득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물질적 부요나 출세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든지, 가난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눈 밖에 난 결과라는 공식을 만들지 말고, 그렇게 된 원인을 따져 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넘어 도래할 미래의 세상은 주님의 공정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고, 모든 것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한편, 이 세상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자가 가지는 특권이 있습니다: 주님의 돌보심(교제)과 사랑입니다(잠3:32). 그러므로 경건한 가정은 재산이 적어도, 부유한 악인의 집에는 없는 화목과 사랑 그리고 만족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주인이지, 맘몬이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에는 충만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지혜로운 계산법입니다. “악한 자에게는 고통이 많으나,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한결같은 사랑이 넘친다.” (시32:10,새번역).

잠언 15:17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잠언은 서로 대조적인 두 종류의 식사의 예를 가지고, 즐거운 향연은 사랑에 있지 음식에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채소를 먹는다”의 원어는 ‘여행자가 먹는 채소로 된 식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질과 양에 있어서 가장 소박한 음식을 표현합니다. ‘사랑’이란 말은 그런 식사가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그들과 일행이 되고자하는 따뜻한 마음이 수반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반하여 ‘살진 소’는 최상의 음식을 상징합니다. ‘미움’이란 풍성한 잔치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싫어하여 배제하는 감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편, 16절과 17절을 비교한다면 “재산이 적어도”(16)는 “채소를 먹으며”(17절)로 표현되고, “주님을 경외하며 산다”(16)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17)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다투며 사는 것”(16)은 “서로 미워하는 것”(17)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5절 -17절은 경건한 자의 삶과 그렇지 않은 자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더 나은 삶이겠습니까? 본 잠언은 검소하게 살게 될지언정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사랑’은 마음을 즐겁게 해 주고 가장 부패한 환경에서조차 우정을 강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삶은  최상의 환경이지만 미움이 동반되는 삶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실로 미움은 분개심을 낳고 이런 분개한 마음은 적대적 행동에 불을 당겨 결국 우정은 파탄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적은 소유를 가져서 소박한 음식을 먹게되어도, 서로 사랑하는 삶을 택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재산이 적어도 주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재산이 많아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잠언15:16,새번역)잠언15:18절
“화를 쉽게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성을 더디 내는 사람은 싸움을 그치게 한다.”
(새번역)

마음과 환경의 관계를 다루는 단락(13-19)에서 첫 번째 부분(13-17)은 마음이 환경보다 중요하다는 주제를 다루나, 두 번째 부분(18-19)은 마음과 환경 중 어느 것이 이기는가에 초점을 둡니다. 환경을 이긴 첫 승자는 ‘사랑을 하는 자’이며(18), 그 보답은 평화입니다. 이것은 ‘미워하는 자’가 갖는 분노와 그 결과인 다툼과 대비됩니다. 18절의 ‘다툼’은 17절의 ‘미움’이 발전된 것입니다. ‘화를 쉽게 내는 사람’은 끓는 분개심을 통제 못하고 어리석게 행동함으로써 논쟁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성을 더디 내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때문에 분쟁을 잠재웁니다. ‘성을 더디 내는 사람’은 지혜자와 동일한 말로 가능한 빠르게 논쟁이나 다툼을 잠재워 ‘조용함’을 만들어 냅니다. 그 결과 상식이 승리하고 악행은 그칩니다. 그래서 교부 제롬은 “참는 자는 이미 휘저어 일어난 분쟁들을 잠재운다”라고 분명히 언급하였습니다. 인내하는 자는 분노하는 자보다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후자가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여 일으킨 혼란스런 상황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승리자로서 찬사를 받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드다나 갈릴리인 유다의 반란 사건을 들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어떤 것도 실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지혜로운 권고로 산헤드린 공회는 분노를 그치고 사도들을 풀어주었습니다(행5:17-42).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고전13:4, 새번역).

매일묵상(11/08 – 12)

시편60편
“활을 쏘는 자들에게서 피하여 도망치도록, 깃발을 세워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시오. (셀라)”(4,새번역).

사무엘하7장에서 다윗의 집을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사무엘하 8장에서 그 약속을 실현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서쪽의 블레셋과 동쪽의 모압을 정복하고 북쪽으로 유브라데 강까지 진격하여 소바 및 아람 군대와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러자 사해 남쪽으로부터 에돔이 침공하였습니다. 다윗은 큰 위기감을 느꼈습니다(삼하8:13). 이것이 본 시편의 배경입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심판에 대한 탄식(1-3), 구원에 대한 부르짖음(4-5), 하나님의 약속의 회상(5-8), 승리의 외침(9-12).   

에돔의 침공은 하나님의 분노요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다’’라고 표현될 만큼 다윗에게 큰 동요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게 펄럭이는 깃발이 하나 있었는데(4), 그것은 기도의 깃발이었습니다(5). 이미 하나님은 땅과 백성과 현재 원수들에 관해 약속을 하셨습니다(5-8).  그러나 그 약속의 성취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였습니다. 기도는 그 유일한 답입니다(11). 이것이 오늘 시편의 메시지입니다. 어떤 위기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진리 안에서 행하면서(4,12) 기도의 깃발을 펄럭여야 승리합니다. 실로 고대 이스라엘에게 전쟁은 언제나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늘 강한 이웃 국가들에 의하여 둘러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승리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할 경우였으며, 오늘날의 영적전쟁도 같습니다. “사람의 도움이 헛되니, 어서 우리를 도우셔서, 원수들을 물리쳐 주십시오.”(시60:11, 새번역).


시편 61편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5절)

본 시편은 기도로 시작되어 찬양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많은 시가 이 유형을 취하는데, 성경적 순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도가 하나님에 대한 확신(신뢰)을 낳으며, 그 확신은 찬양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이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행동하심으로 응답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가장 큰 은혜의 수단 중 하나입니다. 이 시의 구조입니다 :

       A     보호를 위한 기도(1–2) / B  확신의 표현 (3–5)
       A′    보호를 위한 기도( 6–7)/ B′  확신의 표현( 8)

시는 60편과 같이, 다윗 왕이 겪었던 어떤 위기 상황을 전제합니다. 아마도 압살롬의 반역으로, 요단 강 넘어로 급히 도망친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윗의 왕위는 위태로왔으나, 주님 안에서 피난처를 발견하고 도움의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그런 상황을 넘어, 피신처를 찾는 우리에게도 아름다운 소식을 말합니다. 다윗은 주님 안에서 피난처, 따듯한 사랑, 환영의 체험을 고백하며, 죄, 많은 고난, 그리고 사망으로 얼룩진 소망 없는 세상에 영원히 통치하시는 왕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비밀 중의 비밀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행하실 수밖에 없는 심판을 친히 담당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영원한 피난처요,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눅1:31-33). 그러므로 이 시편을 기록한 다윗은 죽었지만, 후에 주어질 영원한 기업의 확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잠언15:13절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13-19절의 단락은 환경 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마음은 환경을 극복한다(13-17). 둘째, 환경을 극복하는 자들(노하기를 더디하는 자, 정직한 자)과 패배하는 자들(분노하는 자, 게으른 자)이 갖는 마음의 성향(18-19)은 차이가 있다. 이같이 마음(속사람)은 사람의 얼굴과 정신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얼굴을 빛나게 한다”는 의미는 직역하면 “좋게 만들다”이고, ‘상하게 한다”는 ‘채찍에 맞아 깨지다’에서 나온 말로 마음의 우울함을 잘 표현합니다. 사람의 속마음은 외부에 나타난 활기찬 모습, 진정한 미소나 굳은 표정 등으로 알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순조롭거나 아니면 불리한 환경에 매일 직면하게 되기 때문에, 그를 둘러싼 환경 보다도 마음의 반응은 훨씬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즐거움은 건강이나 재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괴로운(궁핍한) 환경에 직면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하는데서 생깁니다. 이를 위한 결정적인 도움은 ‘현자의 지식’으로부터 얻어집니다. 실로 꿈(사건)보다 올바른 해몽(설명)이 중요합니다. 창세기 41장에서, 애굽 왕 바로가 꿈을 두 번 겹쳐 꾸고 근심할 때, 요셉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올바르게 해설하여 줌으로 바로와 그 신하들의 마음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현자의 말을 거부하고 자신의 어리석은 의견을 고집함으로써, 근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가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만 그 가치를 깨닫고 순종합니다. “명철한 사람의 마음은 지식을 찾지만, 미련한 사람의 입은 어리석음을 즐긴다” (잠15:14,새번역)

잠언15:14절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13절과 연결하여, 14절은 마음의 기쁨과 괴로움의 근원을 추적하여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명철(明哲)한, 즉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 마음은 그와 정반대되는 욕구와 언어를 가진 바보들과 뚜렷이 구분되어집니다. ‘명철한’의 원어는 ‘나본’이며 ‘분별력’ 혹은 ‘ 통찰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명철한 자는 자신의 의견만 주장하지 않고, 무엇이 바른 정보이며 지식인지를 분별합니다. 한편, ‘미련한 자의 입’이란 ‘마음’의 다른 표현이고, ‘즐긴다’의 원어는 ‘라아’로서, ‘’(가축이 풀을) 뜯어 먹다’는 의미입니다. 농업과 목축이 주업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축이 입으로 풀을 뜯어 먹으면서 즐기는 모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풀은 가축만 먹지 사람은 먹지 않습니다. 미련한 자는 마치 가축과 같아서, 미련한 것들을 먹으며 즐거워 하는데, 명철한 자는 그런 행동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미련한 자가 왜 미련한 것들을 추구할까요? 그 이유는 자신을 높이고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부각시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나 이웃 보다 자신이 더 굉장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도덕적으로 오만한 자는 주님이 세우신 도덕질서를 무시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들을 즐기고 있으니 솔로몬이 탄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입’으로부터 언어가 나옵니다. 바보는 거만하기 때문에 현자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스럽게 쏟아냄으로써 스스로를 만족시킨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잠언22:4,새번역).

잠언15:15
“고난받는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다 불행한 날이지만, 마음이 즐거운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잔칫날이다.”(새번역)

본 구절은 계속해서 마음이란 주제를 다루면서(13-14절), 물질적 번영 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16-17절). 13절은 기쁨과 근심이 속사람에 영향을 미쳐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외부에 드러남을 말하지만, 15절은 더 나아가 사람의 전 존재에 대한 영향을 지적합니다. 어떻게 보면 건강하고 부요하지만 마음에 고통이 있는 자라도 즐거운 마음을 가짐으로 그런 환경을 능히 이길 수 있음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즐거운 사람’을 구약에서 살펴 보면, 거의 모든 경우에 먹고 마시며 풍요로 인해 즐거워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추수로 즐거워 하는 보아스(룻3:7)) 그러나 사무엘상 1장은 풍요로웠지만 행복하지 못한 두 여인, 엘리멜렉의 아내 한나와 브닌나를 말합니다. 한나는 남편에게 사랑 받았지만 자식이 없어 괴로워했고,  자식을 가진 브닌나는 남편의 사랑이 없어 불행하였습니다. 브닌나는  한나를 늘 격동시켰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한나는 다투지 않고 주님께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그후 한나는 서원한 대로 어린 사무엘을 수소 두 마리와 함께 하나님의 일꾼으로 드렸습니다(삼상1장). 주님의 응답 그것은 경제적 풍요가 있으나 마음이 고통스러웠던 한나가 행복해지는 비결이었습니다. 풍요하지만 남 모르는 걱정 근심이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풍성한 응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약5:13, 새번역)  

매일묵상(2021/11/01 – 05)

시편58편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11절)

이 시는 통치를 위임받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문제를 심오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당시 통치자들에게 나타난 악의 스캔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교훈을 줍니다. 다윗이 부르짖는 이 외침을 듣는 우리 안에는 자연히 올바른 인격이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본 시를 읽는 사람들은 축복 받았습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1-5) 악한 통치자들의 행동과 성품, (6-9) 악인들에 대한 심판의 기도, (10-11) 악인의 몰락과 의인의 기쁨. 시편51편과 비교하면, 다윗과 이들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역시 권력을 잘못 사용하여,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악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난 죄인임을 고백합니다(51:5).  그러나 다윗은 회개와 동시에 주님의 용서를 간구하고, 돌이켜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본 시에 등장하는 통치자들 역시 태에서부터 죄의 경향으로 물들었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은 당연한데(3-5), 이들은 다윗처럼 회개하지 않고 자신들의 길을 계속 가다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권력의 남용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이스라엘 왕정 460년의 역사는 권력남용의 역사요, 하나님께 불순종한 역사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느 역사가는 ‘신은 제일 미워하는 자들에게 권력을 주신다’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 그 만큼 권력은 다루기가 심히 어렵고, 그 피해는 모든 백성들의 삶에 미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딤전2:2,새번역).

시편59편
“나의 힘이신 주님, 주님은, 내가 피할 요새이시니, 내가 주님만을 바라봅니다.”(9절, 새번역)

골리앗을 죽인 다윗은 사울 왕의 군대장관이자 사위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여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그날 밤 다윗은 아내 미갈의 도움을 받아 창문으로 도망을 쳤습니다(삼상19:11이하). 이것이 이 시의 배경입니다.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부분(1-10)은 구원을 위한 기도로 시작하여 온 세상의 심판으로 넓혀가며 신뢰를 표현합니다. 둘째 부분(11-17)은 심판을 위한 기도로 시작하여 계시가 온 세상으로  넓혀져 가도록 간구하며 신뢰와 찬양으로 끝을 맺습니다. 본 시편에서 “나의 잘못…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내가 허물이 없으나….”(3,4)라는 다윗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상모략으로 위태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반복적으로 심판자이신 하나님 안에서 제일 안전하다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힘이요, 피할 견고한 요새입니다(9). 그러므로 다윗 자신을 목표로 삼은 개들은 여전히 배회하고 있었지만(14,15), 하나님은 그에게 한 노래를 주셨습니다: ‘나는 노래하며…찬송한다’(17)는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은 아침에 ‘주의 인자’를 노래하였으나, 주님은 밤에 노래하셨습니다. 한 밤 중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때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셨습니다. 소위 밤의 노래, 고난 중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높이사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되게 하셨으나, 다윗보다 더 큰 다윗인 우리 주님은 부활 승천하심으로 모든 것의 왕이 되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잠언15:10절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이 잠언은 책망을 듣고 잘못된 행위를 고치는 태도가 지혜의 중요한 부분임을 말합니다. 올바른 견책에 대하여 방어기재를 발동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본 잠언은 그 결국이 사망이라고 선언합니다. 즉, 사망은 정당한 책망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 돌아갈 궁극적 결과이며, 신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이는 영원한 심판이요 죽음입니다. 그 영원한 죽음이란 하나님 없이 고통스럽게 영원한 불속에서 지낼 악인의 운명(마25:41)을 말합니다. 그렇게 볼 때 본 잠언은  ‘부모의 훈계를 경멸하는 어리석은 자’(5절a)가 받을 벌이 어떤 것임을 보여줍니다. 바로 영원한 죽음으로, 모든 벌 중 가장 중한 것입니다. 또한 본 잠언은 9절의 뜻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의 길은 주님께서 싫어하시지만, ..”(9a). 배도자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임재를 상실당하며, 사망으로 향하여 가는데 불가역적입니다. 죽음에 이르를 때 그는 기도할 것이나, 쓸모 없을 것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왕위가 더 중요하였기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왕위에 도전한다고 생각되면, 가차없이 제거하였습니다(제사장 아비멜렉 가문의 85명의 죽음). 그는 블레셋과 마지막 전쟁시 크게 두려워 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나, 하나님은 전혀 응답하지 않았고 절망에 빠진 사울은 모세율법이 금지한 신접한 여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 다음날 사울과 그 세 아들은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의’의 길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망이 도무지 없다고 잠언은 장엄하게 선언합니다. 우리는 이 길로 가야만 합니다.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잠언12:28).

잠언15:11절
“’
스올과 아바돈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리요”

10절의 끝은 ‘죽을 것이다”이며, 11절의 ‘스올과 아바돈’으로 연결됩니다. ‘스올’은 ‘죽은 자가 가는 곳’을 말하며, ‘아바돈’은 죽은 뒤 심판을 받아 가는 파멸의 장소를 의미하는데, 모두 무덤에 대한 단어입니다. 죽은 자의 영역까지도 주님의 감시하에 있으며,  ‘배도자’(10절)를 거기로 보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정의로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하신 능력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땅속 깊이 있는 죽은 자들의 장소까지 감찰하시는데 하물며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투명하게 드러나겠습니까? 여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조사, 감찰하시는 ‘도덕의 통치자’ 이신 하나님은 개개인의 행동을 지배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테스트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그분이 던지시는 질문에 답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8-10절). 유다 왕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들자 그는 심히 통곡하며 간구하였고, 주님은 이적을 보여주시면서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더 해주셨습니다. 그러자 바벨론 왕이 사신을 보내어 유대 땅에 나타난 이적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습니다”(역하32:31). 그러나 히스기야는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무기고, 보물창고 등을 보여주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였습니다. 이사야는 보내심을 받아 120년 후 유대 자손이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을 예언합니다(사39:1-8).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 받았을 때 주님께 영광을 돌릴 줄 알아야만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라는 것은 지혜가 주는 훈계이다. 겸손하면 영광이 따른다.” (잠15:33,새번역)

잠언15:12절
“거만한 사람은 자기를 책망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며, 지혜 있는 사람을 찾아가지도 않는다.”
(새번역)

본 말씀은 5-12절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아버지의 훈계를 경멸하는 어리석은 자가 여기서는 거만한 사람으로 변해 버립니다. 10절에서 생명의 길을 버린 ‘배도자’는 이 잠언에서 지혜 있는 사람을 피하는 거만한 사람이라고 규정됩니다. 지혜자는 구원의 지식을 값없이, 광범위하게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15:7) 거만한 자가 실패를 하여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물론, 오만하게도 현자가 주는 지식을 피해 버림으로써, 사망의 어두운 길에 계속 머무르고 있습니다.  잠언의 이 말씀은 결국 제자들로 하여금 현자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사람을 ‘거만한 자’와 ‘지혜자’자로 분류하고, 이들을 서로 대조함으로써 제자들이 자신의 길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본 잠언은 ‘마음’에 관련된 새 단락(13-19절)을 도입합니다. 만약 누군가 교정 받기를 마음에 싫어하여, 현자와 사귀지 않는다고 하면, 그의 마음은 자아도취, 자기 사랑, 아첨이나 사소한 것에 마음을 주지 하나님이나, 진리나 의와 같은 중요한 문제를 피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싫어한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이 그들의 행사가 악하여, 하나님의 심판하에 놓여 있다고  책망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중 예수님께 배우고자 찾아 온 사람은 극소수였으며, 그 중 한 사람이 니고데모였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그들의 멸망을 예언하셨고, 부활 승천 후, 40년이 지나자 예루살렘은 로마에게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잠언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