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를 실천시 경계해야 할 점

제자도를 실천시 무엇을 경계하여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25:24-30)

 

1달란트를 받은 종은 받은 달란트가 작아서 불평하다가 숨겨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여 원금도 못건지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문책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하여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하늘 나라의 일에 대한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늘나라의 일은 절대로 재물을 늘리고, 권력을 쟁취하며, 부자가 되고, 명예를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부흥전략은 재 검토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부, 권력, 안락한 생활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무인도에 떨어졌습니다. 비행기가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제 돌아갈 수단이 아주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매우 걱정을 하고는 여기 저기 섬을 둘러보면서 살아갈 궁리를 하는데 크리스찬인 다른 한 사람은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걱정을 하지 않는가 물어보았더니 자기가 일주일에 100,000불을 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자신이 일주일에 십만불을 버는 것과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냐고 하였더니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기를 자신이 일주일에 십만불을 번다고 강조하면서 그중 십일조를 만불이나 교회에 한다는 것입니다. 어안이 벙벙한 동료에게 설명하기를 자신이 일주일에 그 많은 돈을 십일조하므로 반드시 자신의 교회 담임목사가 수색을 하여 자신을 찾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이었습니다. 교회가 이런 교인들을 양산하면 그야말로 주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제자도를 실천시 두가지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첫째, 주님을 따르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일은 바로 제자도를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에 시도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실패란 없습니다. 여기1달란트를 받은 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도의 관점에서 악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밖에 평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성공과 실패가 있습니다. 대우 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많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빚을 통하여 무리하게 기업을 확장하다가 그만 전 그룹이 붕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본인은 해외에서 오랜 세월을 도피하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재판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붕괴되기 약 1년 전에 한 그 분의 안 사람되시는 분이 TV에 나와서 한 이야기는 참 시사하는 면이 많습니다. 자기를 본 어느 점쟁이가 자신와 같은 관상은 처음본다고 굉장한 재물을 가지고 있는 상이라고 이야기 하였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 이분은 남편과 함께 해외를 10년 정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게 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제자도의 삶을 실천하다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제자도를 실천하는 도구에 불과하며 주님께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이 전부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이를 주시고 원하지 않으시면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도의 핵심은 이런 주님을 경외하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의 근본적인 이유 역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동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시간, 돈, 명예, 권력, 건강, 재능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만드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달란트로 묘사된 것들은 이런 재료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둘째,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제자도를 실패하게 만듭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께 명을 받아 왕 사울에게 아말렉을 가서 진멸하라고 전달합니다. 사울은 순종하였고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을 두려워 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품질이 좋은 우양을 끌고 와서 소유로 삼았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부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수지 맞는 일이 어디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히 불순종한 것입니다. 엄청난 손실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시기로 결정하시고 다윗을 찾아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일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물을 모아도, 명예와 권력을 잡아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실천이 안된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달란트를 남긴 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도는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삼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가 사는 일상의  삶에서 천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달란트를 남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과 생명의 그리스도

성경봉독: 요한복음 11:25-2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사 약 30세쯤 되셨을 때 비로서 당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되심을 전파를 하셨고, 우리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고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사 다시는 썩지 않을 몸을 가지시고 사도들이 보는데서 대낮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의 11사도이외에 오백여형제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맨 나중에 사도 바울에게까지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부활의 증인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확고한 증언을 하고 계십니다. 한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죄의 삯을 모두 청산하셨다는 사실, 사망을 이기셨다는 사실,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셨다는 사실, 주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 되셨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죄와 상관없이 다시 오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소망을 가지고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하겠습니다.

 

1.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삯을 모두 청산하셨다는 증거입니다 .

2.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겼다는 인류 최초의 기쁜 소식입니다.

3.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4.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재판장이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매일큐티 (고난주간)

고난주간 (2016.3.21~25)

일요일(3.20)부터 금요일(3.25)까지는 이른바 고난주간입니다. 성경의 사건들을 따라 주님의 행적을 묵상하는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월절 엿새전 토요일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칫상을 받은 주님께 마리아는 향유를 부었습니다(요12:1-8). 이틑날 일요일 아침에 감람산 서쪽 산등성이에 있는 베다니를 떠나 주님은 감람산 벳바게까지 가파른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이윽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고 나귀새끼를 데려오게 하셔서 이를 타고 약 1킬로를 내려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마21:1-11).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부르면서 주님을 영접하였으니 이는 나사로를 살린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증언하였기에 나와서 주님을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요12:17-19).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약 1백만명의 사람들이 세계각지에서 오므로 그 무리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에 가까이 가시자 우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거부한 예루살렘에 닥칠 멸망을 아셨기 때문입니다(눅19:41-44). 날이 저물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 아침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다가 시장하셔서 멀리서 잎사귀있는 무화과 나무를 보고 가셨으나 아무 열매도 얻지 못하시자 그만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을 내쫒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막11:12-19). 

 

이튿날 화요일에 성전을 향하여 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하니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윽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에 거니시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무슨 권위로 가르치시는지 물었고 주님은 침례 요한의 일로 역공을 하시고는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주셨습니다. 이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여부를 가지고 헤롯당원과 바리새인들이 와서 묻는 것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어 사두개인들이 와서 부활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주님은 부활시에는 사람들이 시집장가를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는 답변을 주셨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는 진리를 알려주었습니다(막12:1-27). 

 

화요일에 성전에 계실 때 서기관 중 한 명이 와서는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인지 질문을 하니 주님은 그 유명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막12:29-34). 이 답변 후에 감히 주님께 와서 묻는 사람들이 없자 주님은 역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즐겁게 들었습니다(막12:28-37). 이어 7 화를 말씀하시면서 서기관등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저녁에 성전에 나가사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대하여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시의 징조를 물었고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신 것이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와 있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성전은 이후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목요일: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사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시고는12제자들과 저녁에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하시는 도중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가룟 유다를 포함한 12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뒤 다시 자리에 앉으사 옷을 입으셨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축약판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어 가룟 유다가 밀고 하기 위해 식사자리에서 일어나 나갔고,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다고 공언하였으며 주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 하셨습니다(요 13장). 이 저녁에 주님은 이른바 다락방 강화를 통하여 당신이 죽고 부활하면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는 남은 제자들과 세상에서 당신을 믿을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요14장-17장). 식사를 마친 뒤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1시간 동안 피 땀 흘리시며 하나님께 기도하신 뒤 마음을 정하시고 체포하러 온 로마와 유대관리들에게 잡혀 안나스와 가야바 대제사장에게 차례로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때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밝혔으며 그 때문에 대제사장 가야바가 주도하는 산헤드린 공회에게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밤에 이루어진 불법 재판이었으며 이때가 금요일 아침까지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이 밤새 심문을 받는 동안 베드로는 1 시간 이상을 지켜보는 가운데 3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눅22:54-62). 이 사건과 이사야 53장 6, 7절을 함께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금요일: 아침에 로마 총독 빌라도는 주님을 예루살렘에 와 있는 분봉왕 헤롯에게 보냈고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눅23:6-12). 심문하는 빌라도에게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었습니다(요18:36-37). 그 진리는 세상이 악하여 하나님께 멀리 떠났으며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과 이런 심판에서 세상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군중들의 위세에 눌려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오후 3시 운명하실 즈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양을 잡는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체를 요청하여 자기 묘실에 장례를 지냄으로써 이사야 53장 8절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마27:59-60). 삼일 후 부활하실 때까지 주님은 무덤에 계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으면서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를 부르시는 그리스도

누가 복음  5장 1 – 11절

예수께서는 게넷사레 호수가로 가셔서 몰려드는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열심으로 가르치신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며 주님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열정을 우리는 배워야만 합니다. 교훈을 마친 후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하시니 비록 자신의 고기잡이 전문지식과는 틀리지만 이미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여러 번 이적을 체험한 베드로는 순종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한 뒤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기반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시자 베드로를 포함한 4명의 어부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후에 주님을 따른 4제자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스도가 전 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우리의 가정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도록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1.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그리스도의 열정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2.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능력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SBC 매일큐티

*순종하라 : 우리가 읽은 말씀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성경 읽기도 그다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배운 것을 거부한다면, 기도하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 역시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견고하게 지어서 어떤 사나운 폭풍도 그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마7:24). 야고보 사도 역시 예수님이 강조하신 바를 반복하면서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독자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약 1:22). 그는 성경 말씀에 불순종하는 독자들은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서 얼굴을 씻거나 머리를 빗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돌아서면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예리하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 삶 가운데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함이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이유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을 항시 잊지말아야만 하겠습니다. 

 

기도

남자든 여자든 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가장 고귀한 자리에 있게 됩니다. 기도하는 것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진정으로 인간다워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를 닮도록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는 그것이 가져다 주는 유익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인정받을 만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은 모든 은혜의 방편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기도 합니다. 존스토트 목사님은 나는 기도에 힘쓰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타당한 지적입니다. 연약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기도할 필요 역시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연약함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자연 그 응답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J.C. 라일 감독은 왜 어떤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보다 훨씬 더 밝고 훨씬 더 거룩한가?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다음과 같은 답을 주고 있습니다. 십중팔구 그 차이는 개인적인 기도 습관의 차이로 생겨난다고 믿습니다. 별로 거룩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별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반면에 대단히 거룩해 보이는 사람들은 대단히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죄짓는 것은 결코 같은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죄를 소멸하거나, 죄가 기도를 막아 버릴 것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자면,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이(성경을 통하여) 먼저 말씀하시고, 우리가(기도를 통하여)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경 읽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주제에 대하여(찬송이나 고백이나 질문을 통해) 하나님께 다시 여쭙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 대화의 순서를 바꾸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한 무례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 스타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성경을 펼쳐 둔 채 읽고 계속 묵상한 후에 한 절 한 절 그 본문을 다시 살펴보고 그 내용과 어울리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언제나 기쁨이 되는데 이것은 올바른 기도일 뿐만 아니라, 읽은 말씀을 일상생활에 실천하는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가능한 한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국의 어떤 중년의 요리사는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과 일종의 비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분께 여러분과 그분만 아는 그런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어요”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녀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친밀감이 그분께 불손한 태도를 취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별다른 형식을 갖추지 않고 구어체로 하나님께 기도하여도 좋지만 과거로부터 전해진 잘 쓰인 기도문을 가지고 그대로 따라 하면서 하나님께 대화를 나누는 것도 필요합니다. 특히 교회에서 드리는 공적인 기도는 미리 기도문을 작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릭워렌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대 성회를 연 적이 있습니다. 기도 순서를 맡은 어느 목사님은 마음에 생각나는대로 기도하고 내려왔는데 그 아들이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는 왜 그렇게 들떠서 기도하셨을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관록있는 다른 목사님은 쪽지에 적은 기도문을 들고 간단 명료하게 기도하고 나니 은혜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공적인 기도를 할 때 특히 새겨들어야 할 대목입니다

II 제자도를 통하여 어떻게 달란트를 남길 수 있을까요?

제자도라는 하나님의 일의 시작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곳에서 출발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도는 오직 그리스도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시고 업적을 재는 잣대이시며 우리 삶의 지표이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우리가 마디마디 힘을 얻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맺는 열매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의 열매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는 의의 열매인 것입니다.  

 여기 두 종은 즉시로 가서 장사하여 각각 100%의 이익을 남겼다고 하였습니다. 천국을 위하여 일하여 달란트를 남기는 방식은 물론 세상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익을 내는 것과는 질적인 면에서 분명 다릅니다.이는 단순히 천국과 세상의 사업과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정부에서 연말에 국민이 낸 혈세를 너무 아까워 되도록이면 사용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보고를 한다면 국민으로부터 질책을 받을 것입니다. 이는 정부의 일과 기업의 일은 본질적으로 틀린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성과 측정은 돈으로 측정되는 것이며, 정부에 대한 기준은 바로 국민의 이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같습니다. 그 이익은 결코 물질로 권력으로 명예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계산되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이익이 측정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바로 이 기준이 세상의 잣대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으로는 많은 이익이 남겨졌다고 잘 한 일이라고 이야기 되어도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는 절대적인 손해를 보았다고 할 수 있고, 세상에서는 파산이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고 이야기 하여도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는 그 만한 이익이 없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경우 이른바 다섯달란트를 하나님께 받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머리와 능력과 기회를 하나님을 섬기는 곳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과부가 생겼습니까?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아가 생겼습니까? 유럽 전역이 전쟁으로 뒤덮여지지 않았습니까? 그 자신이야 프랑스의 영광을 빛냈다고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세상의 기준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그 뛰어난 머리로 상대성 이론을 창출하므로 세계의 과학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사생활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아내에게 아주 인정머리없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1986년경 발견된 그의 편지는 1919년에 보낸 편지로 남편과 함께 외출하는 것도 남편과 집에 함께 앉는 것도 남편의 사랑을 기대하는 것도 생각하지 말라고 선언하고는 남편이 말하면 즉각 대답하고, 남편이 방에서 나가라면 군말없이 즉각 나갈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아내의 확답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를 받은 아내는 자녀들을 데리고 취리히로 가서 다시는 남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고 하며 아인슈타인은 그 해 사촌과 재혼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 아이를 키울 수가 없어 고아원에 맡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잣대로 보면 하나님을 위하여 달란트를 남겼다고 자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주님을 믿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암 말기에 이르시자 누구보다도 열심히 간호하고 여러 병원을 찾은 결과 좋은 의사선생님을 만났고 성공적인 수술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정성어린 노력의 결과 아버지는 쾌유하게 되고 암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자 이 아버지는 딸을 무시하고 딸이 어려움에 빠졌어도 별로 돌아보지 않는 등 이기적인 행동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딸의 입장에서는 배은망덕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그 아버지는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비록 부모였지만 배신감을 많이 느낀 이 딸은 어떤 행동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과 세상의 일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 이 자매는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먼저 떠 올려야 할 것입니다. 부모 공경의 계명도 좋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도 좋습니다. 자기 마음과 틀리지만 주님의 이 가르침을 실행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 열매를 맺는 것이며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 자매에게는 이런 일의 수행이 어려울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께 기도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열매는 그리스도의 열매인 것이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맺는 성령님의 열매인 것입니다. 이 가르침의 실행에는 하늘나라의 상급이 있습니다. 자기가 당한 불공정한 처우는 하나님께서 충분히 갚아 주실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제자도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실현되는 삶이 바로 달란트를 맺는 삶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안전하게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둔 종이 책망과 함께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때 경계하여야 할 요소들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7 Rembrandt Der faule Diener vor seinem Herrn; Federzeichnung; 17,3 x 21,8 cm; um 1652; Paris Museé du Louvre    Religiöse Bilder und Kunstgestaltung im Unterricht Religiöse Bilder und Kunstgestaltung im Unterricht http://www.uni-leipzig.de/~rp/ Prof. Dr. H. Hanisch und Dr. M. Sander-Gaiser am Institut für Religionspädagogik / Universität Leipzig. t

Rembrandt – The Parable of the Talents (1652)

하나님의 나라 복음과 그리스도

누가 복음  4장 38 – 44절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가버나움 회당을 떠나 바로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 중한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셨습니다. 구약 어디를 보아도 중한 열병으로 누워 있던 사람을 모세율법을 통하여 고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과 모세율법의 차이입니다. 복음이 선포될 때는 하나님의 나라도 함께 도래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선포되며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진리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약속입니다. 이런 복음을 통하여 선포되는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으며 우리의 필요 또한 채워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전파는 단순한 말의 선포나 전도지의 배부가 아니라 삶에 영향력을 미치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남은 삶을 살아가야만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선포되는 것이므로 모세 율법과는 다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2.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으며 우리의 필요를 채워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단순한 말의 전파가 아니라 삶에 영향을 미치며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SBC 매일큐티

2016. 3.7 – 11

성경을 읽을 때 필요한 4가지를 제언하여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라, 생각하라, 기억하라, 순종하라입니다. 이를 각자 좀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도하라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일간 신문을 대하듯 되는 대로 무관심하게 읽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존 칼빈이 말한 것처럼 경외심과 겸손한 마음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자세로 성경에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 우리의 지성을 조명해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시면서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눅24:27).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면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존재로 우리에게 데려오기를 기뻐하십니다.

 

*기도하라 :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시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성령님을 통하여 하시는 작업을 로체스터의 감독이었던 크리스토퍼 카바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입니다. 복음서는 초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입니다. 구약 성경은 거룩한 주인공을 부각시켜 주고, 초상화를 가리키는 전체적인 배치에 꼭 필요한 배경입니다. 서신서는 주인공의 의상과 액세서리 역할을 하면서 그 인물을 설명해 주고 묘사해 줍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성경을 읽기를 통하여 그 초상화를 하나의 위대한 작품으로 감상하는 동안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인공이 살아나오는 것입니다! 엠마오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문자로 기록된 화폭으로부터 앞으로 걸어 나오셔서 친히 우리의 성경교사가 되셔서 성경 전체에서 그분에 관한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해석해 주시는 것입니다.

 

*생각하라 : 우리는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생각해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의 조명을 의지하는 것과 우리 자신의 연구를 조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약간의 비용을 투자해야만 합니다. 성경에 작은 주석을 덧붙인 각종 스터디바이블(오픈, 굿뉴스등)을 구입하여 읽으면 성경본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성구 사전도 구체적인 본문이나 구절을 찾는 데 편리합니다. NBC (New Bible Commentary  IVP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음)와 같은 신뢰할 만한 단권 주석과 성경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절 단위로 수록한 IVP 성경 배경 주석 역시 매우 유용하여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생각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생각하라 : 여러 성경관련 주석이나 성구사전들은 어디까지나 보조 자료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의무는 말씀을 읽고 또 읽고 계속해서 읽고, 그 말씀을 붙들고 해석하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기초가 상실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에 구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존 스타트 목사님은 두 가지 질문이 유용하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1)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가? 다시 말해서 그 말씀의 본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2)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즉, 그 말씀을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답하기 위해서는 이미 배운 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들(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라, 본문의 원래의 의미를 찾아라, 본문의 보편적인 의미를 찾아라)이 제대로 적용되야만 합니다. 

 

*기억하라 :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기억 상실이야말로 이스라엘이 몰락한 원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교훈들을 계속해서 잊어버렸습니다. 기억을 위한 한 가지 자극제는 바로 기록입니다. 날마다 혹은 주제별로 혹은 성경의 권별로 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구체적인 진리들을 노트에 기록하면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수시로 그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고 기억을 되새김질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특별히 감동을 준 구절들을 암송하는 것입니다. 요절 노트를 만들어서 계속 복습할 수 있습니다. 한 주일에 한 구절씩 암송한다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점점 쌓일 것입니다.

제자도를 위해 주신 달란트는 무엇일까요?

“그는 각각 그 능력을 따라, 하나에게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라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측면에서 볼 때 다섯탈란트를 받은 사람으로 정치가로서는 징기스칸, 시이저, 나폴레옹등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고, 기업가로서는 록펠로나 빌게이츠, 스티브 잡스, 학자로서는 뉴턴이나 아인슈타인등등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전에 SKT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그 사장이 신문에 인터뷰하기를 “나는 두 탈란트를 받은 사람이다. 다섯 탈란트라면 빌게이츠와 같이 세상을 바꾸고 주도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지만 나는 이 사람들에 의하여 창출된 것을 따라가는 정도의 사람이다”라고 한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의 경우 다섯탈란트라면 어느 정도의 일을 하여야 그렇다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신학적으로는 마틴 루터나, 칼빈 정도는 되어야 하고, 목회적으로는 존 웨슬레나, 조지 화이트필드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조지 화이트필드는 한 번 즉석 설교에 수천명이나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과연 그러하며, 존 웨슬레는 감리교를 시작하신 분으로 그럴만 하다고 생각되고 루터나 칼빈은 그 영향력이 말할 것도 없이 다섯탈란트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영향력을 평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달란트를 재면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은 외적인 것이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내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그 목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영광을 많이 드러냈는가?” 의 측면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평생 소아마비를 앓게 된 휴유증으로 한 쪽 다리를 절면서 살고, 맡겨진 일이라고는 가정을 돌보고 자기가 운영하는 소규모 사업체를 돌보는 정도라고 하여도 이 분에게 주신 탈란트는 다섯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이 분은 다섯 탈란트를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적으로 주님의 뜻을 중심으로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우리는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의 전형적인 예가 바로 욥입니다. 욥이야 말로 다섯탈란트를 받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욥은 매우 정직하게 살았으나 보이지 않는 세계 즉, 하나님과 사탄과의 내기로 인하여 전재산이 없어졌고,, 10명의 아들 딸들은 전부 하루 아침에 집이 무너져 죽었고, 갑자기 전신에 악창이 났습니다. 아내 역시 욥을 버렸습니다. 이에 집에서 쫒겨났고 재에 앉아 몸을 긁을 수 밖에 없는 철저히 패망한 사람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였습니다. 이런 자세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사탄은 패배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욥과 대화를 나누시고  곤경을 돌이키게 하셨고 나중에는 갑절이나 복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할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흔한 부자 중의 하나로 생각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또한 순교자의 삶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박해의 시대에 태어나서 숨죽이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핍박자들에게 잡혔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그리스도의 길을 충성스럽게 견디어 갔던 것입니다. 전도한 것도 별로 없습니다. 돌아다니면서 교회를 세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알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천사들의 세계에서는 주님께서 얼마나 영광을 받으셨는지 모릅니다. 제가 CBS의 새롭게 하소서의 간증 프로그램에서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자신이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게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여러 병원에 가도 안되고 절망하던 중에 전도관 박태선 장로가 기적을 행한다고 하여 거기에 참석하고 여러 사람이 병을 고친 것을 목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영 비 성경적이라 이런 사람이라면 아무리 내 다리를 낫게 하여준다고 해도 싫다라고 생각하고는 거기서 나와 버렸다고 합니다. 사회자는 “허 대단한 영분별력이십니다”라고 감탄을 한 것이 생각납니다.그 후 이 자매님은 평생 다리를 절면서 살았습니다. 다리 대신 그리스도를 선택한 분이죠! 그리스도의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달란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한 실패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달란트를 맡은 종들 중 하나였다면 주인은 예수님을 부르셔서 야단을 치셨을 것입니다. “아니 내가 네게 기적을 행할 달란트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묻어두고 너 자신이 죽도록 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오래 살았어야지?”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조롱과 천대를 받으실 때도 무한히 참았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류의 대속과 새로운 생명인 부활을 소망하시면서 십자가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 아담의 후손들은 반드시 십자가라는 길을 거쳐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자기 부정의 길을 가지 않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이런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의 백성을 낳고 기르는일, 즉, 제자도가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먼저 제자가 되고 다음으로 제자를 만드는 것 이것이 주님의 일이며 그 나머지는(부자, 돈, 지위, 지식등) 이를 위한 재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재능을 가지고 있던 어떤 일을 성취하였던간에 제자도를 이루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시작도 안된 것이며 따라서 달란트를 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가버나움 회당과 그리스도

 누가 복음  4장 31 – 37절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셔서 놀라운 권위로 가르치시며, 회당 내의 어떤 사람에게 붙어있던 귀신을 쫒으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이렇게 자신의 권위로서 가르치시며 쫒겨나간 귀신이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부른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만 합니다. 그는 우주의 주인이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처럼 인간이 되사 희생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함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삶에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가 그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행하고 살 때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나타내시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만인들이 알게 하여주실 것입니다.

1.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그리스도의 사명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