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6.18 – 22
히브리서 1장 1절의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구약을 통해 자신을 알려주신 그 계시는 형태가 다양했을 뿐 아니라 내용도 부분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점진적인 계시라는 것을 믿습니다. 즉 하나님은 단계별로 조금씩 자신을 계시해 오셨고, 각각의 새로운 단계는 그 이전의 단계들을 기초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그런 드라마의 대단원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알려주시는 계시가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은 이런 완성을 가져오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분에 대하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호칭들과 수식이 그분께 주어지는데, 우주와 관련해서는 ‘만유의 상속자’,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지으셨고’(2절) 지금도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3절) 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 우주가 처음부터 대행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고, 지금도 그분의 능력의 말씀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어느 날 정당한 유업으로 그분께 귀속될 것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2).
하나님과 관련해서 그분은 우선 ‘아들’로 불리웁니다. 그것은 어떤 천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높은 이름이요 그들 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입니다(히1:4). 또한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3절)이십니다. 둘 다 강력한 수사적인 표현으로, 한편으로는 햇빛이라는 외부 세상에서 또 한편으로는 문서와 밀랍과 도장이라는 내부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인간의 단어와 이미지로 표현 가능한 한도 내에서, 두 가지 모두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신비 안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표현에 따르면 아들은 태양에서 계속 비추는 햇빛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 니케아 신경에는 이것이 ‘빛에서 난 빛’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표현에 따르면 아들은 밀랍에 찍힌 도장처럼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이 두가지 표현은 서로 합해져 의미를 보완해줍니다. 즉 햇빛의 이미지는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임을 강조하는 반면, 밀랍에 찍힌 도장의 이미지는 아들이 아버지와 구별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1장 3절에서는 아들이 그 존재에서 영원히 아버지와 하나(‘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인 동시에 그 인격에서는 아버지와 구별된 자(‘그 본체의 형상’)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취하시고(히2:14) 우리처럼 고난과 유혹을 경험하시고(2:10,18)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맛보신(히2:9,14) 분이시지만, 바로 이분이 영광스럽고 유일무이하신 분, 곧 아들, 광채, 아버지의 형상, 창조주, 만물을 붙드시는 분, 만유의 상속자이십니다.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참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이 인간이 되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친숙한 인간의 정황 안에서 그분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도 되시기에 우리는 동시에 그분의 인성 속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본체와 목적을 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는 그분은 우리에게도 같은 권한을 주시며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것은, 그 나라가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을 ‘믿고’ 직접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것을 최고 목표로 ‘구하고’ 그 나라의 성장을 최고선으로 삼아 거기에 우리의 삶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15).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떡과 물고기로 기적을 베푸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분에게서 우리는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을 봅니다. 구약의 권위에 겸손히 복종하시고, 구약의 근본 원리들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시며 구약과 모순되거나 그것을 혼잡하게 하는 인간의 모든 전통을 단호히 거부하시는 그분을 봅니다. 또 우리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존중하시고, 가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린 자들을 먹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그분을 봅니다. 우리는 죽음의 실체 앞에 분개하여 ‘호령’하시고, 귀신들을 명하여 쫓아내시고, 위선자들에게 분노와 경고를 발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결연히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고, 자신에 대해 기록된 고난의 길을 비껴가지 않으시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를 맛보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즉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죽음을 정복하시고 천하의 권세를 주장하시며 제자들을 향해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도록 명하시는 그분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과 성경에 기록된 그분이 행하신 더 많은 일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알아보게 되는데, 이는 그분의 태도와 행동 가르침 그리고 표적들이 하늘 아버지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예수님은 가르치기 위해서만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고, 인간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인간을 구속하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핵심적인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죄와 하나님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루신 구속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두 가지 일에서 모두 대행자이며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히1:3)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빌려왔습니다. 사실 히브리서 나머지 부분에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큰 대제사장’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속죄를 위한 완전한 제물을 드리신 그분은 아론보다 크십니다. 그 제물은 황소도 아니고 염소도 아니고 어린 양도 아니고 바로 그분 자신이었습니다. 구약의 동물 제사는 장차 올 실체, 즉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고 목숨을 버리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히브리서 저자는 희생양이라는 상징을 담대하게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히9:28) 왜냐하면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하기 때문에(히10:4), 예수님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언약의 피를 흘리셨던 것입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수요일터예배
요한복음 3:14-21
에드워드 톰슨은 뉴욕치안판사였지만 법보다 믿음이 사람을 가장 확실하게 변화시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법정에서 만난 메리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당시 메리는 55살의 술주정뱅이 여자였다. 톰슨 판사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 몽롱한 눈으로 법정에 선 메리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술에 취해 온갖 범법행위를 하는 통에 무려 53번이나 재판을 받았고 6번 감옥에 들어갔다. 그리고 54번째 선고를 받기 위해 톰슨 판사 앞에 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메리가 전과 달리 선처를 부탁했다. 메리는 한 노신사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절히 호소하는 메리의 모습에 톰슨 판사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그는 보고 관찰을 선고했다. 단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고 하나님께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메리는 변화되었을까요? 아니면 더 풀어진 모습으로 다시 톰슨 판사 앞에 나타날 것인가? 톰슨 판사는 재판에 임할 때마다 혹시 메리가 다시 잡혀오지는 않았는지, 마음을 졸이며 지켜봤다. 그러는 한편 매주 메리의 보호관찰관과 상담했으며, 메리가 다행히 교회 예배에 계속 출석하고 있으며, 교회 식구들과도 잘 교제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톰슨 판사가 외부 업무를 다녀왔을 때, 법원 직원으로부터 그의 부재 중 업무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메리가 왔었다는 말을 듣자 톰슨 판사는 매우 실망했었지만 메리가 잡혀 온 것이 아니라 뉴욕을 떠나가게 되어 톰슨 판사에게 고맙다며 인사하고 싶어 왔다는 것을 알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메리는 그 노신사와 결혼했고, 메리의 보호관찰관은 메리의 바뀐 모습에 캘리포니아로 이사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법원 직원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메리는 이제 이전의 메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실패했을 때 그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 보면 대개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지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메리처럼 통제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든지 혹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든지 간에 그 문제의 본질에 들어가 보면, 대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거나 또는 삶에서 하나님을 우선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메리는 이전 메리가 아니에요, 결단의 순간 116-118).
그러므로 사람이 복음을 들으면 바뀔 수 밖에 없는 것은 복음은 예수 그리스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거룩한 도덕법을 지킬 수가 없어 모든 사람은 범죄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절망에 빠진 인류를 불쌍히 여겨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게 하신 사랑의 이야기가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들으면 어떻게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기 때문이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기 때문이라”(요3:14-17).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와 그리스도
매일말씀나눔
2018. 6. 11 – 15
희열이나 고통, 아름다움이나 경이로움, 선이나 사랑의 순간에 곁으로 지나가시는 그분을 잠깐 보기만 해도 우리는 충만한 초월적 실체에 전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잠깐 보는 것 자체가 바로 일종의 중보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2-23)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하늘과 땅의 영광을 통해, 자연의 오묘한 솜씨를 통해, 고결함과 타락성이 공존하는 인간의 복잡한 상황을 통해,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의 갖가지 반응을 통해 하나님을 선포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중보가 우리를 만족시켜주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가리켜 보이는 높이와 깊이는 우리가 오를 수도 없고 잴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좀 더 구체적이고 인격적이며 동시에 좀 더 인간적인 중보가 필요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없이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짐작한 실체가 아무리 깊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무한한 타자이신 까닭입니다. 이 타자가 인격적으로 우리 가운데 한 번 오신 적이 있는데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실제로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을 때였습니다. 오직 그때에만 인간은 인간의 형체를 입은 참된 ‘영광’, 인격적 존재 본연의 광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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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믿음을 위한 과부의 비유와 그리스도
예수믿는 신자의 가치관
마가복음 12:28-34
김형석 교수님이 CGNTV에서 간증한 내용입니다. 어느날 중고등학교 교감이 교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교수님으로부터 기념강의를 듣기로 하여 교장회의에서 결정을 하고 교섭하러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스케줄을 보니 어느 그룹에 그날 오후에 강연이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못가겠다고 하니 제자가 아주 실망한 표정이었습니다. 너무 실망한 표적이었기에 마음이 아파서 조금 기다려보아라 내가 연락한 뒤 알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그룹의 인사부장에게 사정이 이러한데 허락해주면 내가 대구에 갔다가 오겠다고 하니 인사부장이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옛날이어서 아침에 일찍 갔다가 서울에 도착해 보니 저녁이 되어 어두컴컴하였습니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타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정말 인생을 잘못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돈을 목적으로 일을 했는데 한평생을 다 그렇게 살면 돈 때문에 내 인생을 다 바치고 만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가? 돈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무슨 일이 더 소중한가 일의 가치를 찾아서 일을 해야겠다.” 그 다음부터 돈 보다는 일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래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돈이 더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짧게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길게 보니 일이 소중하기 때문에 일하니 수입도 늘어났던 것입니다. 그래 삶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80세 즈음 되니 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여러가지 경제적인 수입을 주었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냐? 나를 위해서는 적게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많이 베푸는 사림이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부자는 누구냐? 돈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고 많이 주는 사람이다. 많은 재산을 줄줄 아는 사람이 영광스럽게 사는 사람이다. 하늘나라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간증입니다.
오늘 본문에 어느 서기관이 어느 계명이 크냐고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주님은 첫째는 전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서기관은 주님의 이런 가르침에 동의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제사보다 더 낫다고 대답하니 주님은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사랑은 결국 주는 것이고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그 재물과 능력을 빼앗아 자신의 가치를 늘리는 쪽으로 살아가는 에로스적인 삶의 방식에서 무엇이든지 주는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방식으로 삶을 전환하여야만 합니다. 그러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통지를 확장시키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님의 마음에 각인을 시켜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2)
매일말씀나눔
주님은 유대교의 기성 체제를 주저하지 않고 날카롭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하였기 때문만 아니라 자신들의 전통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보고 바로 순종하기 위해 수 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들(장로들의 유전)을 과감하게 버리셨습니다 (막 7:1-13). 또한 주님은 사회적 인습을 폐지하는 데도 거침없으셨으며, 일반적으로 멸시를 받던 계층들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허용되지 않던 여인들과의 공적인 대화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이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원하지 않는 아이는 버려도 되는 하찮은 존재였고, 제자들 역시 성가신 존재로 생각한 어린아이였지만,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사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분은 몸을 파는 여자들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을 그냥 두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바리새인들이 기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돌을 던진 나병환자를 만지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여러 방식으로 인간의 관습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그분의 마음과 양심을 매어 두셨습니다. 주님은 성경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적이면서도 다른 것들을 성경적으로 철저하게 비평하는 데 있어서는 급진적으로 되심으로 보수와 진보를 독특하게 결합시키셨습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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