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 41-44
구약 성경이 자신을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경학도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거절한 이유를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들 상호간에 영광을 구하고 있지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고 있었기에 이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모습은 결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그 대신에 서로 간에 영광을 구하였고,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그 뜻을 행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동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그리스도로서 영접하기를 거절한 이들에게 그들의 욕망 즉, 로마로부터의 독립 등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랍비 아키바가 바르코흐바를 다윗의 별로 지칭하여 로마에 반기를 든 제3차 유대 로마 간의 전쟁입니다(AD132). 이 사건으로 유대인들은 유대 땅에서 추방되어 2천년 동안 유대 땅에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참된 메시야 예수를 거절한 사람들에게 미혹하게 하는 힘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그것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기뻐한 모든 사람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은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만 합니다.
2020/11/27
누군가가 어린 아멜리에게 수수께끼를 물었습니다. “강가에 서 있는 어떤 남자에게 늑대와 양과 양배추가 있는데, 그는 그것들을 배에 실어 강 건너편으로 가져가야만 한다. 단, 그의 배에는 한 번에 한 가지만 싣고 갈 수 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그 셋을 다 강 건너편까지 가져갈 수 있을 것인가?” 사실 뽀족한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늑대를 먼저 싣고 가면 양이 양배추를 먹어버릴 것이고, 양배추를 먼저 싣고 가면 늑대가 양을 먹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양을 먼저 가져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건너갈 때 그는 양배추나 늑대를 가져가야 할 텐데, 어떤 것을 먼저 가져가든 둘 중 하나는 강 건너편에서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 중 몇 명이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보았습니다. 드디어 아멜라가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전도를 통해서 주님의 재림을 앞당겨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늑대와 양이 친구가 될 것이고, 양배추도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니까요”(롬14:17 참조).
아멜라에게 있어서 주님의 재림은 확실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소녀는 그런 전제하에서 삶의 문제를 풀어나갈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어른들은 좀처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난제 중의 난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에 들어오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풀지 못하는 문제들을 주님 손에 맡기고 오늘 하루를 신실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2020/11/26
60대 초반의 어느 분은 부인과의 관계가 매우 안 좋습니다. 결혼 생활 30년을 넘는 기간 동안 사업에 충실하다가 가정과 부인을 소홀히 한 때문입니다. 이러면 비록 직장과 사업에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일생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 중 하나는 각 인생 단계마다 주어지는 과제를 잘 해결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발달 심리학자 에릭슨은 생애주기를 7단계(또는 8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마다 해결해야 할 발달 과제를 제시하였습니다.
- 영아기의 발달 과업은 돌보아주는 사람에 대힌 신뢰와 애정의 형성입니다.
- 유아기는 식사 수면 배변 등의 기본 생활 습관 형성하기
- 아동기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고, 기본적 기능을 익히고, 도덕성의 기초를 형성하기
- 청소년기는 자아 정체성 형성과 신체적, 지적, 도덕적 발달을 이루어 성인 준비하기
- 초기성년기(21-34)는 인생모습이 결정되는 때로서, 청소년기에 형성된 자아정체성이 사회에까지 뻗어 나가 직업과 배우자를 선택하여 본격적인 사회생활 시작하기
- 성년기(35-60)는 정립된 자아정체성을 기초로 책임 있는 시민이 되는 것
- 노년기(60-)는 건강관리와 은퇴에 적응하기- 신체적 노화를 긍정적으로 수용, 죽음을 준비
부활하신 주님 없는 사람들의 삶은 이 세상 뿐입니다. 그래서 삶에 대하여 집착하거나 아니면 인생을 허무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초월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금생과 내생의 통합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각 단계마다 주어지는 과제를 훌륭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3:13).
2020/11/25
러시아에서 하나님에 관한 것을 가르친 부모들에게서 아이들을 강제로 데려다 무신론을 가르치는 기숙 학교에 넣었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인형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되는 때에 ‘기도회 놀이’를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인형의 무릎이 굽혀지지 않아, 인형은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아이들 중 하나가 선생님에게 가서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제게 다른 인형을 주실 수 없어요? 이 인형은 너무 바보같아요.”
“왜 그런말을 하니?”
“누구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는 사람은 바보임에 틀림없으니까요”
그 아이의 말은 공산주의자인 선생에게 믿음의 간증이 되었습니다.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 문제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위 일화에서도 그 어려운 구 소련의 환경에서 주님을 가르치는 부모들은 고난을 각오하고 신앙유산을 물려주려는 결단을 내리신 분들입니다. 당연히 그분들의 삶은 신실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가정에서 아이들을 강제로 차출하는 소련 당국의 처사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입니다만, 하나님은 이 시련을 통하여 오히려 아이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하시고 당신의 존재를 전하신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 특히 주님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17살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렇게 일생을 살아갔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단 1:8-17).
2020/11/24
열여섯 살의 나이에 딸을 가진 어떤 아랍인은 그 딸을 데리고 이스라엘에 있는 아랍 고아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의 어머니는 열네 살의 나이였고, 그만 그 딸을 낳다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아들이었다면 아버지의 가족이 키웠겠지만, 그들에게 딸은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어린 아버지는 딸 무나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방문을 고대하며, “바바(아빠의 뜻), 와”라고 중얼거리며 아빠가 오기를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올 때마다 아이는 그에게 매달려서 가지 말든지, 아니면 자기를 데리고 가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얼마후 아버지는 재혼하였고, 더 이상 딸을 찾아가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의 새 아내는 아이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바바, 와”를 되풀이하며 문간에 앉아 있었습니다. 무나는 어떤 이야기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한 선교사는 아이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전혀 다른 아버지로, 그분의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무나는 다시 행복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다리 위에서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와 사귀게 하시고 친히 죄를 담당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흘만에 부활시키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그분을 통해 우리가 공동 상속인이 되도록 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굳게 붙잡아야만 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2020/11/23
어느 공산 선교회에서 신앙때문에 감옥에 간 형제의 어머니에게 소포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옥에 간 그 그리스도인에게서 선교회로 감사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의 편지입니다.
“나는 우라늄 광산에 끌려 가서 강제 노동을 하다가 큰 바위에 맞았습니다. 그 결과 나는 평생 꼽추가 되었습니다. 나는 굉장히 우울해졌습니다. 나는 어떤 여자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구가 된 나를 그녀가 받아줄 것인가? 누가 나 같은 사람과 결혼해 줄 것인가? 나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 같은 느낌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내 뒤에서 “꼽추! 꼽추!” 하면서 나를 놀렸습니다. 어느 날 어떤 어린 소년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등에 지고 가는 게 뭐예요?’
‘혹이란다’ 또 놀림받을 것을 각오하고 나는 대답하였으나, 그 아이는 사랑어린 눈으로 보면서,
‘아저씨, 난 그걸 믿을 수 없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세요.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혹 따윈 주지 않으세요. 아저씨 등에 있는 건 천사의 날개가 들어 있는 상자예요. 아저씨가 그걸 죽을 때까지 겸손하게 사랑스런 마음으로 지고 다니면, 그 상자가 열리고 날개가 펴져서 아저씨는 그 날개로 아름다운 하늘나라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순간에도 울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여러 가지 상황에 부대끼고 걱정 근심에 쌓일 때 주시는 위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를 돌보시고 마지막 날는우리를 영광으로 영접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갈 곳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창 15:1, 새번역).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 신앙의 목적
2020/11/20
아브라함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 데라의 우상을 전부 부수어 버린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집을 나와, 누가 이 세상을 만들었을까에 대해 생각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는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습니다. “이게 그분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달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지나자 달이 지고 해가 떠올랐습니다. “아하, 이게 그분임이 틀림없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태양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은 어느 집 앞을 지나가다가 흰 모시 옷감들이 정원에 널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같은 길로 돌아오다보니 아까 본 옷감들이 흰색이 아니고 여러 가지 다른 색깔로 변해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이렇게 추측하였습니다.
“틀림없이 집 안에 누군가가 있을 거다. 아마 물감들이는 사람이겠지. 그래서 흰 옷감에 물을 들였겠지. 마찬가지로 나는 하늘에서 어떤 분도 보지 못하지만 하늘의 색깔이 매일 변하는 것은 볼 수 있다.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어른이 계시는게 분명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고 그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뉴톤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연구하여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만유인력이라는 힘의 작용을 알아내고 그 힘의 크기를 계산하는 방정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법칙은 인류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하였습니다. 당연히 그 엄청난 법칙들을 만들어 내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논리적 결론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2020/11/19
아멜리가 아홉 살 때 굉장히 진지한 문제를 가지고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왔습니다.
“할아버지, 우리가 하나님께서 틀렸다는 것을 알 때, 무슨 말을 해도 되나요, 아니면 의심을 꿀꺽 삼키고 가만히 있어야 하나요?”
이에 대하여 목사님은 반문하였습니다.
“다윗이나 욥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될 때 솔직하게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너도 그렇게 할 수 있단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되었니?”
“두 가지 때문이에요.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지 말고 충고를 하셨어야만 해요. 아빠도 명령을 내리거든요. 둘째,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잘못하신 거예요. 우리는 우리를 별로 잘 사랑하지 못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어요. 만약 우리가 우리 이웃을 그런 식으로 사랑하면, 우리 이웃들은 정말 불행할 거예요. 우리는 그들을 더 잘 사랑해야 해요.”
아멜리의 첫 번째 말은 인간의 타락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릴 때, 아니 태어나면서부터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든, 부모님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동등한 인간 사이를 떠나, 하나님께까지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것은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조업자가 물건을 팔 때 넣어두는 설명서에는 반드시 조작법을 기술합니다. 그것은 충고가 아닌 명령으로,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기에 만물이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법칙을 설정하여 놓으셔야만 하셨습니다. 이런 인간의 타락을 전제로 할 때 두 번째 말은 일면 수긍되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의 다음 명령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2020/11/18
복종에 대한 설교를 듣고 난 후 어떤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게 금방 들은 설교의 내용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너도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지? 부모님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걸 말이야!”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목사님 설교의 다른 한 쪽은 못들으신 모양이네요.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복종하세요?”
우리 모두는 우리만의 여과 장치를 가지고 있어서, 설교 뿐만 아니라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을 때에도 우리에게 이익이 되거나 우리 마음에 드는 것만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소위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이라고 합니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견해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 취하는 성향으로,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정보에는 신경을 쓰지 않거나 외면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를 자기중심적 왜곡(myside bias)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유모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펼치는 것이 인생의 낙이라고 하였다. 어느 때부터 신문에서 매일 담배의 유해성을 지적하는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기사가 계속되자 그는 신문을 끊었다.” 확증편향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종차별이나, 낙인효과, 각종 왜곡된 보도들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비평없는 독재국가나 카리스마적 종교에서는 인권이 유린되고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선물로 주신 ‘그 믿음’을 잘 간직하는 동시에 그 믿음이 사랑 가운데 일하도록 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확증편향이 있더라도 그 폐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를 위해 쉬지말고 하나님께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훈계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지식을 사랑하지만, 책망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짐승같이 우둔하다.”(잠12:1).
2020/11/17
뉴욕에 사는 한 소년이 하나님께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다 하시려면 참 바쁘시겠어요. 그래서 여쭈어 보는 건데요, 제가 하나님과 이야기 좀 나누고 싶은데, 언제가 제일 좋은 시간이겠어요? 하나님께서 언제나 듣고 계신단 건 알지만, 하나님께서 뉴욕 쪽으로 귀를 기울이시는 건 언제예요?”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특히 주목하여 기도를 들으시는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좋은 예는 에서입니다. 사냥을 갔다 온 에서는 매우 시장하여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한 그릇의 팥죽과 장자권을 바꾸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에서는 자신의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기 때문에, 겨우 팥죽 한 그릇을 받고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 이런 사건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망령된 에서와 같이 값싼 세상의 것들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세월이 흐른 지금 소돔, 고모라, 가버나움과 벳새다 역시 회개하기에 너무 늦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연히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자기부인할 것은 부인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
2020/11/16
미국에서 발사한 우주 왕복선 중 디스커버리호가 있습니다. 1984년에 초도비행을 시작하여, 국제 우주 정거장 조립 임무와 허블우주망원경을 궤도에 전개하고는 2011년 퇴역, 현재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중입니다. 이 디스커버리호가 불을 내뿜고 발사되는 것을 일단의 아이들이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 소년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새 별을 하나 더 띄우시는구나!”
여러분은 미소를 지으며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겨우 며칠밖에 못 가는 별이란다.”
그러나 실은 하늘의 모든 별들도 시작이 있었고 또 수명 역시 유한합니다. 그것을 증명한 학자가
허블(1889-1953)이라는 미국의 천문학자입니다. 그가 발표한 법칙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으며 그 팽창의 속도는 거리에 비례한다고 하여 우주에 시작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허블의 법칙이외에도 우주 배경복사를 측정한 윌킨슨 마이크로파 비등방성 탐색기(WMAP)에 의해 우주의 나이는 현재 137.72±0.59억년으로 계산되어 있습니다. 이 우주 내에 있는 별들은 모두 소멸시기가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인 태양도 같습니다. 태양의 수명은 약 123억 6500만년이고 핵우주 연대학에 따르면 45억 6720만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처음 창조물들이 변화되도록 창조하셨지만, 앞으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할 것입니다. 인간 역시 죄의 삯으로 죽지만, 신자들은 구속을 이루신 주님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입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벧전3:15, 새번역).
추수감사 주일예배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쓴 첫 번째 편지 중 마지막 부분인 오늘 본문(살전 5:11-18) 역시 제목과는 동떨어지게 들립니다. 그래도 노심초사 끝에 이렇게 제목을 정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 전체의 집필 동기가 예수님 재림의 지연이었음은 잘 아시겠죠? 신약성경 전체의 집필 동기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마고 약속하신 그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던 각 지역의 사람들을 일컬어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러고 보면 재림은 교회와 성경을 있게 한 근거입니다. 물론 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래서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을 목도한 제자들이 주님의 마지막 약속인 재림도 성취될 것이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림이 지연되자 교회의 믿음이 흔들립니다. 이 흔들리는 믿음을 붙잡아 주기 위해 신약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어는 ‘하나님의 뜻’(18절)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11절)에 열심이었던 교인들이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때[크로노스]와 시기[카이로스](살전 5:1)는 전적인 하나님의 뜻[prothesis: purpose, plan](롬 8:28)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will]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랍니다. 이게 가능할까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앙의 경주에 본을 보이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독려하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주마가편이라고 하듯.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을 우리도 이 추수 감사 주일에 다짐합니다.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구약의 증거 (21)
요한복음 5:39-40
요한복음 5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느 명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계실 때 유대인들에게 둘러쌓이셨고, 그분은 자신의 신분과 임무를 주장하시고 그 증거로 5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그 네 번째 증거는 구약성경입니다. 39권의 구약성경 중 선지자 이사야는 비시 700년 경 하나님의 계획을 적은 책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자손과 주의 종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실 속건제물로 드려져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노래하였습니다. 그 내용 중 오늘 볼 증거는 이사야 53장 10절- 12절입니다. 주님은 이 부분에서 선지자가 미리 노래한대로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53장10절-11절에서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신대로 속건제물로 당신의 몸을 드려 우리의 모든 불의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2020/11/06
범브란트 목사님의 손자 알렉스가 여섯 살 때 골고다의 그림을 보고 앉아서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선한 분도 죽였고, 악한 사람들도 죽였어요. 그러나 그건 잘못한 일이예요. 그들은 강도들을 죽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예수님은요? 예,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한 일은 잘한 일이었어요. 그분의 죽음이 우리를 위해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으니까요? 그러나 강도들은 그냥 가두어 놓기만 해야 했어요.”
알렉스의 말은 아이러니합니다. 1988년 마이클 듀카기스와 조지 부시가 미 대선에서 다투고 있었습니다. TV 토론시 사회자가 사형폐지론을 내세운 듀카기스에게 “”당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어도 그 범인의 사형을 반대하겠는가?”라고 질문하니, 듀카기스는 우물쭈물 하다가 “그렇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시는 저렇게 가족애도 없는 냉혹한 사람이 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공격하여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하였고 결국 듀카기스는 패배하였습니다. 추상적인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전혀 다른 각도로 보게됩니다. 죄의 문제는 그 피해를 당한 당사자에게는 이렇게 심각합니다. 그 당사자의 한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주를 만드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당연히 범죄에 대하여는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이 책임을 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알렉스가 의로우신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한다는 말은 옳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희생에 근거하여 살아났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요일1:10, 새번역).
2020/11/05
열살된 소녀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것은 밀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것들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가?”라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에게 무슨 말로 설교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소녀는 들판으로 나가 외쳤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분의 길을 곧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의 머리가 굽어져 있다. 너희들도 똑바로 서야 한다.”
물론 밀들이 머리를 들리가 없습니다. 과학적으로는 밀의 열매가 익어 무거워질 때 줄기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여 숙이게 되는 것은 중력의 법칙상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인생과 연결시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와 같은 격언을 만들어 내기도하며, 또 어떻게 보면 밀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땅이 자기들을 물과 영양분으로 키워준 데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숙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열살된 소녀가 이런 과학적 이치나, 인생의 경험을 잘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그 맥락에서 임의로 떼어나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다스리며, 여러 과학적 법칙이 작용하고 있는 삶에 무조건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잘 알지 못합니다. 겨우 몇 가지 법칙 정도만 천재적인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선을 다해도 실수가 많은 법입니다. 이런 사실을 겸허히 인식하고 마음을 낮추는 자는 세상과 창조주 사이에 위치한 인간 자신의 신분을 깨달 수 있습니다. 복음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2020/11/04
범브란트 목사님과 그분의 아내는 유대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아들 미하이가 다섯 살 되었을 때 그분들은 미하이를 유대인들 예배 장소인 회당으로 데려갔습니다. 왜냐하면 미하이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축제인 ‘심해 토라’(글자 그대로 율법을 즐거워하는’의 뜻임)를 경험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적은 두루마리가 회당 안에 돌려지면 사람들은, 특히 아이들이 그것에 입을 맞추기 위해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 행렬이 가까이 왔을 때 미하이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저도 두루마리에 입을 맞춰야 하나요?” “네 마음에 달렸다.” 목사님은 가기 전에 이미 그에게 그날과 의식의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랍비가 가까이 와서 미하이가 입을 맞출 수 있도록 두루마리를 낮추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입을 맞추진 않겠습니다.” 아기가 말했습니다. 행렬은 멈추고, 놀란 사람들의 수백 개의 눈들이 미하이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미하이는 굉장히 긴장한 목소리로 다시 반복하였습니다. “전, 입 맞추지 않겠습니다.” 예배 후 목사님 친구이기도 한 회당장이 미하이에게 물었습니다.
“너 아까 왜 그렇게 했느냐?”
“랍비님, 하나님께선 저희에게 어머니를 주신 건 입맞추라고 주신 거고, 율법을 주신 건 그것을 읽고 복종하라고 주신 거지, 입 맞추라고 주신 건 아닙니다.”
희랍 정교회에서도 굉장히 호사스럽게 장정한 복음서를 돌려서 교인들에게 입을 맞추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읽는 사람은 매우 적고, 더구나 복음서를 실천하는 사람은 더 적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2020/11/03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 만드는 사람이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는 나무로 만든 작은 우상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장에 가서 팔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년 아브라함은 우상을 사러온 고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습니다.
“제가 보니 할아버진 연세가 꽤 많으시군요. 60-70세는 되어 보시는군요. 그러니 우리 아버지가 만든 이 신이 할아버지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어요?”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도 팔지 못하였으며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에게 매 맞고는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은 이 신들의 실재를 시험해 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데라의 집에 있는 사당에 여러 신들이 모셔져 있었고, 그 한 가운데에는 제일 높은 신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제일 높은 신 앞에 좋은 음식을 놓고 지켜보았습니다. 몇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도끼를 들어 제일 높은 신 이외의 모든 신상들을 부수고, 도끼를 제일 높은 신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외출했던 아버지 데라는 산산조각이 난 신상들을 보고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제가 신들에게 음식을 갖다 드렸더니 신들이 서로 먹겠다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제일 큰 신이 작은 신들을 다 죽여버렸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그것들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한단 말이야!”
“그렇다면 그것들은 신이 아니죠”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하고 재빨리 마지막 우상을 부수어 버렸다고 합니다. 인간이 어리석게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참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2020/11/02
아브라함이 데라의 우상을 부수어 버린 것과 같은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시13세기경 미디안의 압제로 심히 고통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자를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구원자로서 기드온을 택하여 여호와의 사자를 보냈습니다(삿6장).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아버지 요아스가 섬기는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상을 찍고, 그 찍은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종 열 사람을 데리고 밤에 이를 행하자, 다음날 이를 안 성읍 사람들은 요아스에게 갔습니다. 그러자 요아스는 오히려 기드온을 옹호하여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이치입니다. 고대야 자연과학이 발달하지 않아서 모든 것을 신의 작용으로 오해하였지만,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바알 숭배를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맹신이 지나쳐 참된 하나님마저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좌측으로 치우친 것이죠! 원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모습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드신 모든 것들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완전히 설명하시고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미디안을 쳐 구원하신 것과 같이, 죄와 사망이라는 벌을 받고 마귀의 종이 된 인류를 구원하시 위해 더 큰 기드온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구약의 증거(20)
요한복음 5장 39-40절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를 관리하고 다스릴 청지기로서 인간을 만드셨지만, 그 인간은 하나님처럼되고자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타락이 있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는 중대한 왜곡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인류가 서로 돕고 살도록 계획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지금도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은 물론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고집한데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벽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인간은 많은 죄를 하나님과 이웃에게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고 이 심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은 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29년경 예루살렘 성전에 계실 때 유대인들에게 둘어쌓이자, 당신 자신을 변호하시고 그 증거로 5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그 네 번째 증거는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 중 선지자 이사야는 비시 700년 경에, 하나님의 아들이 주의 종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속건제물과 같이 드려지고 부활하실 것을 노래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오늘 볼 이사야 53장 10절 11절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53장에서 노래한대로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53장10절-11절에서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신대로 속건제물로 당신의 몸을 드려 우리의 모든 불의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