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다윗과 같이 적에게 쫒겨 혹은 세상에서 실패하여 들어간 굴 속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귀한 장소입니다. 어느 날 사울은 다윗을 찾으러 군사 3,000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삼상24:3). 이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동굴 뒤쪽에 있었습니다. 부하들은 다윗을 설득하였습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 굴 속에서 불행하고 비참하게 살기를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칼로 사울을 찌르기만 하면 당신의 모든 꿈이 실현됩니다.” 엄청난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이 동굴에서 나갈 수 있어. 더는 숨을 필요가 없어. 더는 실패도 없어 나는 왕이 될 수 있어.’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왕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왕좌에 앉느니, 차라리 굴 속에서 살겠다는 결단이 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실로 다윗의 마지막 목표는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패의 동굴은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먼저 담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1)나는 올바른 꿈을 쫓고 있는가? (2)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소명과 일치하는가? (3) 나는 하나님의 소명을 위해 일하는가, 아니면 성공과 명예가 주된 목표인가? (4)굴 안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께 진실한 것이라면 나는 머물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7-8).

굴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말합니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물론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굴 속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 그가 왕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둘람 굴 속에 들어가 있던 다윗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지금 아는 것은 그 동굴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에게 피난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우리는 굴 속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도 당신을 거기서 꺼내 줄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뿐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동굴이라도 완벽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진정한 피난처를 발견한 것입니다. 때로는 굴 밖으로 나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뿐입니다. 하나님도 굴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우리처럼,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그분은 그 가라앉는 느낌을 다윗보다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그분도 지위, 신분, 친구, 안전한 삶을 상실하셨습니다. 물론 생명의 위험에 처했으며,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분의 시신을 굴에 넣었습니다. 세상적인 측면에서는 철저한 절망이 찾아온 것입니다. 주님의 몸은 굴에서 사흘 간 머물렀지만, 그러나 굴은 영원히 그분을 붙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최고의 역사를 굴 속에서 행하신다는 사실말입니다. 굴은 하나님이 죽은 것들을 부활시키는 장소입니다. 혹 여러분은 지금 굴 속에 있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당신의 아들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능력을 믿고 마음속에 간직해야만 합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9).

지금까지 우리는 비시 1020년 경 사울의 추격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남서쪽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엔게디로 도망을 간 다윗과 그 용사 600명의 이야기를 전제로 우리 삶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엔게디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찾아온 사울을 피하여 어느 동굴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굴이라는 상황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직장일 수 있으며, 실패한 결혼일 수 있고 사랑하는 자녀의 실망스러운 행동일 수 있습니다. 또는 제대로 꽃 피우기도 전에 접어야만 했던 갈망일 수도 있습니다.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 부분에 대한 학습후기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 번 반추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여러분의 부모와 가족은 당신에게 어떤 실패 관리 모델을 보여 주었습니까? 2. 실패에 대해 당신이 가장 흔하게 보이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1) 수치심 (2) 두려움 (3) 더 확고한 의지 (4) 부인 (5) 타인을 비난함 (6) 기타. 이 항목 중 해당되는 것을 선택하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실패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4. 현재 실패의 두려움이 당신을 붙잡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이 질문에 대하여 제가 가지고 있는 중고책에는 “자녀교육” 이라고 파란 볼펜으로 적혀져 있습니다.) 5. 여러분은 “주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는” 일에 얼마나 숙달되었습니까? 또한 이런 믿음을 더 효과적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만 할까요? 오늘 하루 이상의 5가지 질문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답을 적고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2-3).

오토버그 목사님은 젊을 때 스위스에서 스키를 탄 경험을 적고 있습니다. 알프스 산맥에서 리프트는 수백 미터 상공으로 상승하였습니다. 사모님은 스키를 잘 탔지만 높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수백 미터나 리프트가 오르자 두 부부는 둘 사이에 있는 금속 막대를 움켜잡고 뱀처럼 거기에 딱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겁이 난 사모님은 목사님에게 “여보,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 남편이고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지만 이 막대기 보이죠? 이건 내 막대예요. 이 막대를 건드렸다가는, 오늘 당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거예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스키 초보인 목사님은 “아래를 내려다 보지 말아요!”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정상까지 올라가는 T자형 스키리프트로 갈아타 산꼭대기에 거의 도달하였을 때 그만 두 분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목사님은 한동안 멍하니 눈 위에 앉아 구조견이 나타나길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십 명의 스키인들이 지나가면서 독일어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미국인인 목사님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은 “Dumkopf!”였으며 그 의미는 “바보”였습니다. 얼마 후 다른 한 부부도 같은 지점에 떨어졌으며, 남편 이름은 한스였습니다. 이분은 영어를 조금 할 수 있어서 가장 가까운 슬로프까지 엉덩이 높이로 쌓인 눈을 헤쳐 나가며 목사님 부부를 안내하고는 유의사항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밑을 보지 마세요. 경사에 놀라고 거리에 압도될 것입니다. 신참들은 내려다보고는 겁에 질려 버리죠. 이렇게 가파른 슬로프에서 앞을 똑바로 보면 말이죠….” 사실 스키를 타고 내려갈 슬로프는 각도가 90도에 가까웠습니다. 목사님은 오싹해졌습니다. 한스는 이어 말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단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밑을 내려다보지 마세요!” 그날 “밑을 내려다보지 말라”는 충고는 목사님 인생의 제 1 수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생의 폭풍을 맞이할 때 우리는 두려움에 가득차 오싹할 것입니다만,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밑을 내려다 보지 마십시요” 오직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시18:1-2).

젊은 시절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던 날 “밑을 내려다보지 말라”는 충고를 가슴에 새기고 오토버그 목사님은 스키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면서 지그재그 회전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를 앞질러 지나간 후, 리프트를 타고 다시 올라가서 또 한 번 앞지르면서 그를 몇 번이나 앞지를 수 있는지 내기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마음에 “아! 아마 나는 지금까지 알프스에서 스키를 탔던 사람들 중 가장 흉한 포즈로 스키를 타고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제대로 한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절대 밑을 내려다 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멋진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랬기에 목사님은 산 아래로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생각의 초점을 예수님께 맞추는 동안, 그는 물 위를 걷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초점은 폭풍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윽고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두려움은 그를 물 위로 걷도록 지탱한 주님에 대한 믿음을 방해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폭풍이 세차게 불어닥치는 갈릴리 호수에서 크게 출렁이는 파도를 밟고 오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이 소망은 베드로를 배 밖으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는 그를 지탱시킨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물 위를 걷다가 몰아닥치는 폭풍과 파도를 보고 두려움이 몰려오자 베드로는 그만 물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베드로가 구세주에게 초점을 맞추었는가, 아니면 폭풍에 초점을 맞추었는가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삶을 살려면 소망, 신뢰, 확신이 꼭 필요합니다. 그것은 시도하는 사람과 포기하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혹은 다른 요소 때문에 그런 것들을 잃으면 우리도 인생의 항해에서 베드로처럼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밑을 내려다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하3:19).

매일말씀나눔

1957년 인천에서 한국유리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한 고 최태섭 장로님(1910-1998)의 큰 사위되는 김종덕(전 제일은행 전무) 성도의 말입니다. 1960년대 중반 한국유리가 이러저러한 일로 한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최태섭 회장은 무척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화를 내도 모자랄 일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지만 그 힘든 때에도 최장로님은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 한 번 부리지 않고 살아가셨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힘든 시절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곤 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들고 오는 것 중에는 못 들어줄 일도 있었으며, 예의 바르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태섭 장로님은 아무리 언짢은 부탁에도 얼굴 표정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고 일단 성의껏 의견을 들어주셨습니다. 특히 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들이 교회를 짓는다거나 하는 일에 도움을 요청하면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일이라 생각하시고 대부분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이러저러한 장인어른의 모습들을 보면서 큰 사위는 그렇게까지 남을 생각할 수 있는 비결이 무얼까 하는 강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사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그렇게 안으로만 삭여서는 엄청 스트레스를 받아 병에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조차 남을 배려할 수 있는 그런 자세는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큰 사위는 장인어른이 아침 저녁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그 비결의 핵심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최태섭 장로님의 기도는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최태섭 장로님의 전기를 읽은 결론은 그분은 주님을 사랑하셨고, 민족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없이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런 자세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선지자 엘리야는 어느 날 자신이 호렙 산에 있는 한 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전에 그는 어느모로 보나 매우 성공한 선지자였습니다. 850 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워 아합 왕 앞에서 모두 이겨 죽였으며, 3년 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오도록 기도하여 하나님께 그 응답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그것도 여인의 협박에 그만 낙담하고 도망을 쳐서 호렙 산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호렙 산에 있는 한 굴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실패하여 피신한 굴이야말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장소 중 하나입니다. 실패의 무게에 눌릴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그 돌보심의 손길을 깨달게 됩니다. 사실 실패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큰 선물은, 우리가 실패의 굴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신다는 깨달음입니다. 굴 속에서 다윗은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철저히 실패해도 하나님이 나를 똑같이 가치 있게 보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뼈 속 깊이 깨달을 때, 성공이나 실패보다 강한 사랑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사랑의 객관적인 증거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 아들을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너 나아가 주관적으로도 우리는 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부으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 군대와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18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시글락 성에 아말렉 족속들이 침입하여 불태우고, 다윗과 그 부하들의 모든 재물과 가족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때 다윗과 그 부하 600명은 블레셋 전투집결지인 아벡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시글락에 도착하여 그 사정을 알게된 다윗은 부하들의 동요로 매우 급하였으나 에봇을 입고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는 매우 분명한 다윗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행동을 취했고 자신의 공동체를 구조하는 동시에 리더십을 회복하였습니다. 행동은 매우 강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우선 실패 요인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지 못했고, 그 다음에는 변화를 일으킬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주님이 행동하라고 부르시는데도 외부의 도움이나 사람만 기다리고 있는 셈입니다. <아기 곰 푸우>의 친구인 당나귀 ‘이요르’는 언제나 우울합니다. 아예 희망을 갖지 않음으로써 실망의 고통을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다윗도 이런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실패는 오히려 엄청난 동기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고통을 느끼면서, 주님의 뜻을 찾아나선다면 그것은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7-19).”

파커 팔머가 허리케인이라고 불리우는 섬에서 한 주를 보내는 동안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도전에 직면하였습니다. 교관이 지면에서 33미터 높이의 절벽 끝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허리에 매우 가느다란 밧줄을 묶고는 절벽을 현수하강(이중 자일로 암벽을 내려가는 방법)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주저하면서 그냥 내려갔을 때 1미터도 안 되어 바위에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그때 교관은 몸을 절벽과 직각이 되도록 몸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뒤로 눕히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내려가다가 1미터 아래에서 또 바위에 부딪쳤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교관의 충고대로 몸을 젖혀 절벽과 직각을 이루고 내려가니 정말 놀랍게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공중에서 뒤로 누워 기도하며 눈으로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발을 조금씩 움직여서 바위 표면을 하강하기 시작했고 점차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절반쯤 내려가니 두 번째 교관이 밑에서 “파커 그만 멈추고 발 밑에 무엇이 있느지 봐요” 천천히 돌려보니 자신이 바위 표면에 깊이 함몰된 구멍으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내려가면서 그 구멍을 피해기 위해서는 몸을 그내처럼 흔들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는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교관은 매우 길게 늦겨지는 시간 동안 그가 혼자 떨며 거기 매달려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다가 외치기를 “거기서 나올 수 없다면 그 안으로 들어가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파커 팔머는 일생 동안 잊지를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실패의 모습들입니다.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어디선가 획 날아와서 우리를 안전하게 데려갈 헬리콥터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실패했다고 느끼는 영역에서 주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을 내딛어야만 합니다. 물 위를 걷다가 실패한 베드로의 경우처럼 주님은 이미 거기에 와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14:31-32). 

영화 《불의 전차》에서 영국의 육상 선수 헤럴드 에이브럼즈는 스코틀랜드의 챔피언 에릭 리들과 경주하여 난생 처음으로 패배하고 맙니다. 해럴드는 실패가 너무 고통스러워 다시는 달리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여자 친구 시빌은 말합니다 “해럴드, 말도 안돼요. 가족이 죽은 것도 아니라고요.” 해럴드는 신음합니다. “나는 졌어” “알아요. 나도 거기 있었어요. 정말 놀라운 경기였어요. 최고의 사람이 이겼어요….그가 앞섰고 당신이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요. 그는 정정당당하게 이겼어요.” “그래 알아. 그러나 나는 지기 위해 달리지 않아. 나는 이기기 위해 달려! 이길 수 없다면 달리지 않아!”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시빌은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달리지 않는다면 이길 수도 없어요.” 최선의 경주를 하고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바쳐 전력투구한 후 얻은 승리는 영광스럽습니다.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는 아예 경주를 하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여러분 이제껏 실패가 두려워 피해 온 상황에 직면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미루어 온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한 권의 책을 펼쳐야 합니다. 또한 꿈꾸는 직업을 얻기 위한 시작으로 한 통의 지원서를 쓰시고,  삶에 의미 있는 성장을 일으킬 새로운 기술 습득을 위해 강좌를 수강하십시요. 그러나 우리는 실패를 각오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엎드려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드디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며, 많은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위한 일반적인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 (잠24:16).

믿음 생활의 원동력

성경구절 데살로니가전서 5:18

오늘 본문의 원어는 “ἐν παντὶ εὐχαριστεῖτε 엔 판티 유가리스테이테” 여기서 판티는 모든 것에서, 혹은 모든 상황에서 라고 번역이 될 수 있으며 그래서 개역개정역은 “범사(凡事)에”로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범凡’은 ‘평범할 범’이기도 하지만, ‘모두 범’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범사’는 ‘모든 것에서’ 라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감사(感謝)는 고맙게 여김 혹은 그런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헬라어 ‘유카리스테이테’ 를 번역한 말로, 유카리스테이테는, 좋음을 표시하는 ‘유’와 은혜를 주다는 의미의 ‘카리스테오’ 가 합성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하여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헬라어의 의미이기에, 감사라는 번역한 것은 원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의 뜻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 고마움을 표현하라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반드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드리는 대상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못 이루는 것이 없고 할 수 없는 일이라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일찌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역사하여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 올리사 당신의 우편에 앉히셨으며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에 우리 삶을 놓을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안정과 평화를 얻고 모든 상황에서 감사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매일말씀나눔

2019. 11. 11 – 15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배움의 기회가 됩니다. 실패로 인해 그들은 더 굳건한 끈기, 더 활발한 헌신, 더 담대한 마음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실패로 인해 철저히 패배합니다. 그들은 절망, 수치심, 다시는 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은밀하면서도 단호한 결의를 다집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실패로 인하여 배우고, 자신을 인식하고, 다시 시도하려는 의욕을 가다듬는 사람들은 실패 관리의 달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은 예체능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좌절에 직면할 때 보이는 열정과 인내력 같은 특정한 정서적 자질들’을 가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정서적 자질들이 탁월하게 나타난 성경의 인물은 다윗 왕입니다. 다윗은 이미 소년이었을 때 하프를 연주하는 음악가요, 용사였습니다. 시편의 절반은 다윗이 지은 시이며, 이스라엘 중 노래를 잘 하는 자로 자타가 인정하는 자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을 죽이고 나서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되었고, 이어 왕 사울의 딸 미갈을 맞아들여 부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미움을 받아 부마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무려 10년 간 정처없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 블레셋 도시 가드로 망명하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가드도 안전하지 않아 다시 유대의 한 동굴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곳은 아둘람 굴이었습니다. 실패도 이런 실패는 없습니다. 왕궁에서 바로 어두컴컴한 굴로 떨어졌고, 더구나 사울의 추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왔으며, 전혀 장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견디어 갔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더 나아가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약속들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3-24).

한때 다윗은 부, 권력, 명성, 친구, 안전, 빛나는 미래를 보장받았지만, 이제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며 아둘람 굴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굴은 우리를 도울 도움, 능력, 지지자들이 마지막으로 찾게 되는 곳입니다. 굴은 우리가 꿈꾸던 대로 되지 않을 때 머물게 되는 곳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혹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굴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을 잃었거나,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꿈꾸던 가정이 무너졌기 때문에, 친구나 배우자, 의지하던 관계가 사라졌기 때문에, 건강을 잃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굴 속에 있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이 나를 놓치신 건가?’라는 의심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잊지는 않으셨을까 나는 여기서 나갈 방도가 없는 것인가 등등의 생각이 우리를 괴롭히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굴은 하나님이 우리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빚으실 수 있는 곳입니다. 때로 삶의 모든 버팀목을 빼앗기고 오직 하나님만 남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때로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고 절망할 때, 하나님은 그 약점을 통해 그분의 능력을 보이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횐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는 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피하여 굴 속으로 전전하며 10년을 보내었으며, 요셉은 노예살이를 거쳐 굴 보다 더한 감옥에서 절망과 싸우면서 최소 3년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남보다 다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도를 행하였다는데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렇게 어려운데도 그들이 당신의 뜻을 행하는지를 매우 궁금해 하셔서 시험을 보내셨습니다. 다윗에게는 그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사해에 인접한 엔게디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은 군사 3천명을 이끌고 엔게디의 들염소 바위로 가던 중 근처 굴에 들어가 뒤를 보고 있는데 바로 그 뒤에 다윗과 그 군대가 숨어 있었습니다. 단 한 번의 창으로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일전에 “내가 네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요, 다윗이 왕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 역시 사울을 죽이자고 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용변을 보고 있는 사울의 뒤로 가만히 다가가서 그 겉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와 부하들이 사울을 해치는 것을 금하고 사울이 안전하게 굴에서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윗 역시 굴에서 나가 자신이 사울을 해칠 수 있었음에도 옷자락만 베고 사울을 보낸 것과 같이 자신에게는 왕 사울을 죽일 의도가 전혀 없음을 외쳐서 알려주었습니다. 물론 사울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감정이었고 또 다시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테스트를 훌륭하게 통과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와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자신의 힘으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사울을 맡기고 계속 사울을 추격을 피해 도망을 다녔습니다. 이런 태도는 피흘림 없이 전 이스라엘을 통일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신앙의 삶은 이처럼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염원하는 삶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눅6:2).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길라 산 길 가에서 진치고 잠이 든 왕 사울을 다시 한 번 살려주고는 견디다 못하여 군사 600명과 함께 블레셋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거기서 시글락을 거주지로 배정받고 1년 6개월의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던 중 블레셋과 사울 왕의 전쟁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편에서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블레셋 방백들의 거절로 다윗과 용사 6백명은 아벡에서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글락은 불탔고 처자들과 모든 재물은 약탈당하였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 600명의 용사는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 지도자인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여 다윗이 몹시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삼상30:6). 여러분은 울 기력도 없이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더구나 지금까지 10년이나 생사고락을 같이한 부하들의 분노를 받아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처한 아주 위급한 상황에 이른 적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상30:6은 아주 큰 영적 인생의 큰 비밀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자원이 사라졌을 때, 모든 지지자와 도움이 사라졌을 때, 철저한 실패를 맛보았을 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은 약탈한 아말렉 족속을 쫓아가 쳐부수고 처자들과 함께 모든 재물을 되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남쪽에서 이런 곤경을 당하고 있을 때 북쪽에서 왕 사울은 블레셋에게 패배하여 그 가문이 몰락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연스럽게 왕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신뢰하여야만 합니다. 주님이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장래와 자녀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굳게 주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11:9).

시편에 보면 불안할 때, 횡행하는 악에 대해 분노할 때, 원통할 때 및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탄식하고 부르짖는 구절들이 매우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다윗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시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실망할 때 그런 마음을 내면 깊이 묻으려고 합니다. 마치 극기하는 것처럼, 자신을 억지로 추스르지만 내면의 진실한 고통은 경험하기를 거부합니다. 사실 실패는 종종 수치심을 동반합니다. 이 감정에 직면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입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셰익스피어 무덤을 가 본적이 있습니다. 그의 시신은 일반적으로 파는 2미터가 아닌 5.5미터의 땅속에 묻혀져 아무도 파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도 가끔 자신의 실패 의식을 그처럼 파묻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학생일 때 자신은 반장 선거에 나가고 싶었지만, 떨어질까 무서워서 출마하지 못한 경험을 가졌습니다. 대학 때도 무슨 위원의 자리에 도전했지만 이루지 못했습니다. 항상 우승하고 싶었던 테니스 결승전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선수와 붙었지만 졌습니다. 더나아가 원하는 직장에 원서를 냈었지만 떨어진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런 실패의 아픔을 너무 예리하게 느꼈기 때문에 마음에 파묻었을 뿐, 거기서 뭔가를 배우지 못하고, 뒷걸음친 것을 후회스러워 하였습니다. 이런 자세는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합니다. 원통하거나 어려움에 닥쳐 낙심될 때, 우리는 먼저 주님 앞에 우리 마음을 토하고 애통의 시로 기도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시 17: 1-3).

매일말씀나눔

우리는 모두 신뢰와 두려움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을 것입니다. 신뢰와 두려움은 인간의 마음을 점령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 왔으며, 결국 둘 중 하나가 이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반추해 보면 우리를 배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잡아 두는 것은 두려움이라는 요소가 가장 크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이란 무엇이겠습나까? 두려움은 위험이 가까이 있으니 그것에 대비해 뭔가 해야 한다는 내면적인 경고입니다. 이것은 행동을 유발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는 동기를 부여할 정도로 충분한 불쾌감을 야기합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도망가도록 혹은 싸우도록 준비시킵니다. 그 결과 상황에 따라 우리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삶에 파괴자의 역할을 합니다. 특히 두려움의 특별한 형태는 걱정으로 나타납니다. 걱정은 여장을 풀고 장기 숙박을 하는 두려움입니다. 걱정은 결코 스스로 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쫓아내야만 합니다. 미국 생리학 협회는 수많은 연구 결과를 모아 요약하다가 한 가지 모순을 발견하였습니다. 높은 자존감을 가질 만한 수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 중 매우 많은 사람들이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성취합니다. 재능이 있고, 남에게 호감을 주고, 좋은 환경을 가졌지만 자존감의 문제와 씨름합니다. 많은 것을 성취하고 분명히 성공한 사람조차 종종 자기 회의와 열등감에 빠지고 맙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 결과는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의 태도에 따라 자존감이 결정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정면 대응하는가, 아니면 피하고 겁내고 도망가 숨는가의 여부에 따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어렵고 힘든 상황이 올 때 정면 대응하는 사람은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내가 어려운 일을 했어. 도전을 감당했어.” 하며 밀려오는 기쁨을 경험합니다.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망을 가 숨는 사람은 비록 결과는 좋을지라도 그 내면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실 나는 겁먹고 꽁무니를 뺐어. 어려운 일을 하지 않고 쉬운 길을 택했어.” 회피는 내면의 자신감과 자존감을 손상시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진실한 칭찬을 받더라도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면에서 이미 자신의 가치를 절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진실을 안다면 나를 칭찬하지 않을 거요. 당신은 내가 보여 준 모습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전을 받아들인 사람은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신하고 성장합니다. 만약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구는 불한당(?)이 있다면 그 사람과 대면하십시오. 어렵거나 재미없을 것 같아서 두려워하고 미룬 업무에 손을 대시기 바랍니다. 평소 비위를 맞추거나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기에 급급했을 사람에게 당당히 여러분의 진정한 의견을 말하십시오. 당신이 미뤄 온 어려운 결정의 책임을 떠맡으십시오. 또 당신이 회피해 온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 바랍니다. 당신이 숨기려 한 죄나 인격의 흠을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인정하면서, 변화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간구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내면은 더 강해 질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

만약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산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잠재성을 결코 실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장은 항상 위기를 수반하고 위기는 항상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친구 중 한 명에 관해 안타까운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그 친구는 분명 재능이 있는 예술가요 탁월한 작가였지만 자신을 소모시키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능력과는 상관도 없는 일이고, 그 또한 전혀 그 일에 애정이 없었습니다. 그저 출퇴근 기록부만 찍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계속 거기에 머무르고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새로운 것을 시도했는데 잘되지 않는다면? 필요한 만큼 돈을 충분히 벌 수 없다면? 사람들이 그를 어리석다고 생각하면? 알고 보니 그 재능도 별 대수롭지 않다고 변명된다면? 더 나아가 그는 성공마저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될 것이라는 철통 같은 보장을 손에 넣을 때까지, 모든 위험 요소가 제거될 때까지, 그는 있던 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마침내 정체될 것이라고 판단되었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그 친구는 결국 그렇게 일하다가 은퇴하여, 여생 동안 최대한 편한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일을 결코 하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실 때 계획하신 존재가 결코 되지 못할 것입니다. 두려움의 대가로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대가로 치러야 합니다. 그것은 너무 비싼 값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제대로 된 믿음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한편 두려움은 우리의 기쁨을 파괴합니다. 두려움을 넘어서야 환희를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굴복하면 기쁨이 소멸됩니다. 늘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좋고 상상력이 풍부한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면서 살면 그 두려움은 지금 나의 삶을 빼앗아 갈 힘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진정으로 신뢰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아들이 열 살되었을 때를 적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열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패러세일링에 갔습니다. 보트를 운전하는 사람은 120, 180, 240 미터까지 올려 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 위로 얼마나 높이 날고 싶으세요?” 그가 물었습니다. 가격이 비싸서 목사님은 120미터 높이로 조종해 달라고 하였지만, 아들은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아들이 두려움에서 자유롭기를 원해서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아들은 몇 분 동안 생각하더니 결정을 내렸습니다. “ 240미터까지 올라가겠어요. 처음에는 무섭겠지만 비행 시간은 몇 분밖에 안될 것이고 그 경험은 영원히 제 것이니까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때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한 경험은 영원할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것을 잘 증거하여 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창39:20-22).

오토버그 목사님의 딸이 어릴 때 별명은 ‘메이메이’였습니다. 그녀가 매우 어릴 적에 툭하면 하는 말은 “메이메이 혼자 할 거야!”였다고 합니다. 걸음마를 떼려 하다가 넘어져서 부모가 다가와 도와주려 하면, 그 아이는 손을 흘들며 “메이메이 혼자 할 거야”라고 말하였고, 조금 더 자라서 자기의 작은 자전거를 타다가 부딪쳐 넘어졌을 때, 부모가 도와주려 하면 “메이메이 혼자 할 거야”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실패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두 살짜리 아이는 걸으려다가 넘어져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같으니! 나는 너무 어리석고 서툴렀어. 난 걸을 수 없나 봐. 내가 넘어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시 그런 창피한 경험을 하느니 평생 기어다니겠어.” 아이는 걸을 때까지 불안정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참아 냅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은 넘어지는 것을 더욱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분야에서 걷기를 배우느니 차라리 움직이길 거부합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사셨다고 공식적인 기록이 있는 분은 122살에 돌아가신 프랑스의 잔 루이즈 칼망(1875-1997) 할머니이십니다. 그러나 이분은 100살이 될 때 펜싱을 비로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물 위로 걷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그의 믿음만큼 불안하였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더욱 신뢰하는 모험을 하기 위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려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패하였다고 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먼저 구해주고 온유하게 문제를 짚어 주셨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런 구원과 가벼운 책망은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와,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사랑 속에는 진리와 배려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14: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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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요셉처럼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수 읽을 수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상태를 얼굴에 드러냅니다. 친구, 가족, 이웃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는지 주목하고 함께 염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야만 합니다. 역설적입니다만, 자기 몰두는 자기 파괴와 외로움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동료 죄수들에 대한 배려를 질문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그들은 심란한 꿈을 꾸었다고 요셉에게 설명합니다. 요셉은 도움을 줄 순간을 포착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데 내게 고하소서.” 술 맡은 관원이 포도 나무와 포도 송이에 관한 꿈을 이야기 하자 요셉은 사흘 안에 전직을 회복할 것을 알려 줍니다. 이에 반해 떡 굽는 관원의 꿈 이야기를 듣자 요셉은 사흘 안에 사형 집행 당해 죽을 것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술 맡은 관원에게 자신의 석방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의 말처럼 사흘이 지나 석방이 됬지만 이내 요셉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요셉은 실망을 씹으면서 2년을 더 감옥에서 지내게 됩니다. 도대체 요셉의 고난은 언제 끝날 것으로 생각됩니까?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와 같이 어두움 가운데 하염없는 인내는 우리의 완전을 이룩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보다 훨씬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7-19).  

요셉은 술 맡은 관원이 감옥에서 나간 뒤 기억함을 받지 못하고 2년이나 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종종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마 요셉 역시 그런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겪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눈여겨 보시는 중요한 대목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여부입니다. 요셉의 경우 하나님은 아직 할 일을 마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최고의 날들, 즉 이집트의 국무 총리, 리더로서의 영향력, 아버지와의 재회, 형들과의 화해는 고난의 폭풍 후에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셉은 그런 것들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통상 신자들이 괴로워 하는 주된 이유는 그들의 앞날이 창창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체 안’의 삶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 있는 것은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환경이나 타인이 나의 인격을 또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나의 삶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시기하는 형들도, 어리석은 아버지도,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도, 잘 잊어버리는 술 관원이나 거만한 파라오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원한 누림을 가질 것이고, 현 생애에서는 어느 상황에 우리가 처해 있든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항상 믿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는 나쁜 소식이 결말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사실과 전혀 다름은 요셉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여러분의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 손에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책임지시고 하나 하나 풀어가시는 것을 목격할 것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성경에 가장 자주 나오는 명령은 무엇일까요? “더 많이 사랑하라”는 아닙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핵심일 수 있지만, 가장 자주 하신 명령은 아닙니다. “교만하지 말라”나 “겸손하라”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어떤 명령보다 자주 등장하는 하나의 명령, 하나님이 가장 빈번히 반복하시는 지시는 이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놀라지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나를 신뢰하라, 두려워 말라 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사실 두려움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의 목록에 들어 있지도 않습니다. 두려워하기 때문에 교회의 징계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다른 어떤 말씀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그렇게 많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감정적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려는 유혹을 받는 첫 번째 이유가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이 배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 명령은 항상 필요합니다. 로이드 오길비는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구절이 총 366번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1년에 365일에서 윤년까지 위한 개수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범브린트 목사님 역시 “두려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꼭 366번 성경에 나오는 것을 투옥 초기에 발견하고 그 힘으로 15년 간의 루마니아 감옥 생활을 견디었습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만, 거의 모든 경우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으로 요청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시고 자신의 우편에 앉히신 위대한 능력입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9).

두려움과 신뢰 간의 싸움을 잘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세 살난 여자 아이가 수영장 가에 서 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수영장 안에서 팔을 활짝 펴고 말합니다. “애야, 펄쩍 뛰어. 겁내지마. 아빠가 있잖니. 아빠가 잡아 줄게. 어서 뛰어들어.” 그 순간 아이는 갈등합니다. 마음 한쪽에서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외칩니다. 물은 깊고 차갑고 위험합니다. 전에 이런 일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수영도 전혀 할 줄 모릅니다. 뭔가 잘못된다면 어쩌나?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이 밀려들어 옵니다. 그러나 아빠가 물속에 계십니다. 아빠는 그녀보다 크고 강하며 믿음직하였습니다. 아빠는 자신 있어 보입니다. 신뢰는 말합니다. “뛰어들어!” 두려움은 말합니다 “안돼!” 그러나 평생 수영장 가에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결정해야만 합니다. 결정하려면 두려움이나 자신감 이상이 필요합니다. 아이의 내면에는 작은 의지의 조각이 있고, 그것으로 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만일 아이가 뛰어내리기로 결정한다면 자신을 붙잡아 주는 아빠의 능력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번에도 또 뛰어내릴 가능성이 커질 것입니다. 물이 덜 무서워질 것입니다. 반면 뛰어내리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아빠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기회를 잃고 맙니다. 다음번에도 더욱더 안전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두려움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만, 저는 신뢰가 두려움보다 더 크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2-33절에 적혀 있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이야기에서 두려움(무서움)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각 한 번씩 등장하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역시 주어집니다. 각 경우를 생각해 보면서 두려움의 본질을 파헤쳐 보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마태복음 14장 22-33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두려움은 두 번 등장합니다. 먼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그들이 폭풍속에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오해한데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풍랑에 괴로움을 당하는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데일 브루너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용기를 내거라! 내가 있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단지 자신을 알리시는 것(It’s me)이 아니다. ‘스스로 계신(I AM)’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계시인 것이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너를 사랑하였은즉,” 또 다른 두려움은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든 후에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칠흙같이 어두운 밤 풍랑이 거세게 이는 바다 위로 뛰어들어 걷기 시작하였을 때 한동안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람을 인식하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려움이 엄습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 상황의 주관자시라는 확신을 잃었습니다. 베드로는 물속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물속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걱정과 염려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그렇게 자주 말씀하시는 이유는, 두려움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를 가장 빨리 침몰시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훼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 바로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12:3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