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6/14 – 18)

2021/6/14
시편 28편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이시다. 내 마음이 주님을 굳게 의지하였기에, 주님께서 나를 건져 주셨다. 내 마음 다하여 주님을 기뻐하며 나의 노래로 주님께 감사하련다”(7절, 새번역)

다윗은 원수들의 악의로 생명의 위협을 당한 상황에서 간절히 구원을 호소합니다. 만약 주의 도움이 없다면, 그는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1절), 그러나 문제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부당한 치욕으로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3-4절). 의로운 자신은 죄인 처럼 억울하게 죽고, 입으로만 평화를 외치는 악인들은 벌을 피해 간다면 정말 불공평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하셨고 다윗은 찬양과 동시에, 이런 구원이 주의 백성 전체에 미치도록 기도합니다(6-9절). 얼마전 정봉주 전 의원이 출연한 한 시사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2007년 대선 때 BBQ 사건을 말하다가 기소되어  2011년 대법원에서 1년의 확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옥살이 중 250일은 억울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그러면서 계속 자신의 삶을 반추하자 초등학교 3학년 때 저지른 잘못이 떠올랐고, 그후부터 눈물을 그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당한 심문, 고문은 물론 더 나아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는 십자가의 죽음까지 사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이 거룩한 대속의 죽음을 받으사 죄인들이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다윗의 노래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시고 구원이심을 믿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편46:1).


2021/6/15
시편 29편 – 폭풍을 지배하는 왕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신다.”(11절, 새번역)

이 시는 주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다윗의 시입니다. 찬양의 시작은 천상의 존재들이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곳인 하늘에서부터 입니다(1-2절). 이어 그 찬양은 바다에서, 북쪽 레바논에서, 남쪽 가데스 광야에서 일어나는 폭풍과 천둥을 통하여 세상에 드러나는 주님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3-9절). 마지막 부분에서 다윗은 그 영광의 주님은 지상에서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축복하시는 분이심을 발견하며 찬양합니다(10-11절). 이 시에서 우리는 다윗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의 왕이 되었지만, 자신 보다 훨씬 강한 천상의 존재들도 주님께 순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좋은 예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령하여 주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천사 한 명이 순식간에 이스라엘 7만명을 죽이고 이어 예루살렘을 멸하려고 칼을 들고 천지 사이에 선 것을 보고 다윗이 엎드려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천사는 선견자 갓을 통하여 다윗 왕으로 하여금 아라우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쌓도록 명령 하였습니다 (삼하24장/ 역상21장). 한편, 다윗은 바다와 레바논 그리고 광야를 휩쓰는 폭풍 및 천둥 소리 가운데서도 그런 피조물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힘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영광과 능력의 주님은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면 힘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처럼 우리는 순종을 배워야만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잊지 말고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이들아,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라.”(잠3:11).


2021/6/16
잠언 13:19절
“소원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즐겁지만, 미련한 사람은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새번역)

12절에 시작된 단락을 마무리 하는 ‘19절의 주된 가르침은 의인들로 하여금 선한 것을 열망하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자신의 욕망이 성취됨으로 즐거움을 경험하지만, 바보들은 악함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19절 전단은 심리적인 사실을, 19절 후단은 도덕적 사실을 묘사하여, 진정한 심리적인 기쁨을 누리려면 반드시 도덕적 요소를 구비할 것을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성취되었을 때 영혼에 달콤함을 가져다 주는 욕망은 악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보는 자신의 불경건함과 비도덕적인 삶에서 돌이키기를 혐오하기 때문에 이런 즐거운 만족감을 결코 경험하지 못합니다. 실로 어리석은 자들은 악에서 떠나기를 싦어합니다. 그 결과 바보들은 생명보다 사망을(14절), 은혜보다는 멸망을(15절), 보호보다는 드러내는 것을(16절), 치료보다는 재앙을(17절), 사회적 존경보다는 미덕 없는 수치스러운 가난을(18절)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좋은 예가 선지자 발람입니다. 그는 의인과 같이 죽기를 바랐지만, 모압 왕 발락이 주는 재물과 부귀에 대한 욕망이 너무 커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모세에 의해 죽고 맙니다(민23:10, 31:8). 이들은 지혜자의 영감된 가르침을 멸시하기 때문에 생명의 주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만이 참된 만족과 샬롬을 가지게 됩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교정한다면, 인간에 대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행동 역시 변화될 것입니다(3:7; 16:6). “지혜란 야훼께서 주시는 것, 그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로 지식과 슬기를 깨치게 된다.”(잠언2:6, 공동번역)


2021/6/17
잠언 13:20절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면 지혜를 얻지만,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해를 입는다.”(새번역)

20-25절까지 6 구절은 13장 마지막 단락으로 ‘지혜로운 아들이 가지는 축복된 미래와 바보들이 당할 해로운 결말’을 대조하면서 선과 악에 관한 주제를 다룹니다. 그 출발인 20절은 자녀들이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지혜로운 자들과 함께 다닐 것을 요청합니다. 여기서 ‘다니다 Walk’는 ‘행위나 생활방식’을 의미합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라는 권고는 현명한 자의 가르침, 격려 그리고 본보기를 가지고 살아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95%가 도덕의 문제이며, 똑 같은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상황을 고려하여 해결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때 만약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 – 교만하거나 탐욕적인 사람, 정욕적인 남녀, 우상숭배자, 쉽게 분노하거나 왜곡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등 -과 사귀고 있다면, 자신 역시 그들의 영향에 노출되어,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정의의 집행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은 큰 해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완전한 모델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신앙 생활이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당연히 지혜를 얻게 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생명과 축복과 화평의 열매로 가득찹니다. 좋은 예로 에녹(창5:22)이나 노아(창6:9)는 각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전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였고, 후자는 방주 예비함을 지시받아 홍수로부터 전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2021/6/18
잠언13:21절
“죄인에게는 재앙이 따르지만, 의인에게는 좋은 보상이 따른다.”(새번역)


이 잠언은 행위와 운명의 관계를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본 잠언은 의인화의 기법을 사용합니다. 즉 ‘재앙’과 ‘좋은 보상’이 행위자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타인에게 주는 그 재앙이 돌아와서 그들을 멸망시키며, 의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그 선은 정당하게 그들에게 보상을 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재앙’은 마치 사냥꾼과 같이 인격화 되어 있습니다. 그 뉘앙스는 피의 복수자가 살인자를 추격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가한 그 해악들이 죄인들을 맹렬히 추격하고 결국 사냥하여 멸망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물론 세상의 역사를 보더라도, 악인들이 자신의 부패하고 부풀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저지른 악한 행위의 결과가 돌아와 그들을 물어 죽인 실례들로 차고 넘칩니다. 비히 850년 경 악한 왕 아합의 왕비 이세벨은 참혹한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군대장관 예후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삼으시고 아합의 가문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때 왕비 이세벨은 자기 시녀들에 의하여 이층에서 던져저 죽었고, 이어 개들이 먹어버림으로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성경과 세상 역사의 차이는 정의의 집행자가 누군인지를 성경은 밝히 드러내고 세상은 모를 뿐입니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 반면 의인이 타인에게 베푼 생명을 주는 혜택들은 돌이켜 같은 은택으로 보상합니다. 이 역시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관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늘 경외하여야 합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하나님의 때와 그리스도

요한복음 7장 1-13절

오늘 본문의 사건은 AD29년 10월 중으로 유대인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이 다가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형제들의 눈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유대로는 가지 아니하시고 갈릴리에서만 전도하시는 형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유월절(3월), 칠칠절(5월) 행사는 이미 건너뛰셨고, 임박한 초막절 역시 참석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본 형제들은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호기있게 당신을 증거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이는 형제들도 형님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이미 2장에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하신 그 말씀을 되풀이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때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를 말하며, 그 때는 6개월 후 유월절로 이미 구약에 정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반드시 그 규정한 때와 규정하신 방식으로 죽으셔야만 백성의 죄를 담당하실 수 있는 것은 물론, 우리가 그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였음을 알 수 있는 가장 큰 표적입니다. 구약은 요나의 사건처럼 죽은 지 사흘 후에 부활셔야 하며, 초실절 행사에서 예표된 날, 즉 유월절 후 첫 번째 돌아오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셔야 하며, 부당한 심문을 받고 채찍질을 당한 뒤, 유월절 양이 잡히는 바로 그 날 죽으셔야만 하셨습니다. 이 4 가지가 전부 충족되는 때는 바로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이때가 이르면 주님은 당신에게 적대적인 예루살렘으로 제자들 앞에 서서 성큼성큼 걸어가실 것입니다(막10:32).

매일묵상(2021/6/7 – 11)

2021/6/7
시편 26편 – 선한 양심의 호소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새번역)

다윗의 이 시는 완전함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1절)과 끝(11-12절)을 맺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나님의 감찰(2절)과 행동(9,10)을 요청하고 자신의 무죄함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가 나오게 배경은 다윗에게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환경입니다. 믿음 생활에서 선한 양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선한 양심이야말로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데, 이는 우리가 선해야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순결하게 살 때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게도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특징적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문자를 가지고 죽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을 드리시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만유의 주가 되신 바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의 생명을 앗아 가려고 혈안이 되어 음모를 꾸미고,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10절) ‘죄인’에 맞서서 자신의 양심을 걸고 하나님 앞에 결백함을 단언합니다. 이 시에 나타난 단어들을 보면, 적들은 다윗의 생활양식(3절), 사귀는 동료(4,5절), 종교의 현실(6-8절)을 향하여 포문을 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개인적으로나(3절), 사회적으로나(4,5절), 영적으로(6-8절) 깨끗하였습니다. 다윗이 주님 앞에 드렸던 이 기도와 고백을 우리 역시 끊임없이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고후5:10)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2021/6/8
시편 27편 – 기도로 일하는 믿음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3절)

시편 26-28편을 읽으면, 먼저 성전(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26편은 예배자가 성전에 가까이 갈 때 신실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묵상면서 양심을 살피다가 마지막 구절(12절)에서 허락을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27편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성전을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성소요, 비젼의 장소로 여깁니다. 28편에서는 성소에 들어간 시편기자가 공평한 정의를 위해 지성소를 향해 탄원하고 응답을 받습니다. 27편은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1-3절) 주님 안에 있는 확신 – 지지하심
                   ( 4-6절)  안전을 위한 첫번째 기도
                   (7-12절) 안전을 위한 두 번째 기도
(13-14절) 주님 안에 있는 확신 – 응답하심

어떤 분은 중학생 때 어둑해 지는 저녁 시간 동네 길을 걷다가 불량배 셋을 만나 주머니 돈을 전부 털렸다고 합니다. 셋만 둘러싸도 겁이 나는데 시편기자는 군대가 둘러싸도 무섭지 않다고 외칩니다. 뭘 믿고 큰 소리 치는 것일까요?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과 늘 긴밀한 교제를 나누며 동행한 다윗은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들이 엿보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조차 다윗은 안전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믿음과 기도가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시며, 이런 주님의 구원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교제는 영원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편63:3).


2021/6/9
잠언 13:16
“슬기로운 사람은 바로 알고 행동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어리석음만 드러낸다.”(공동번역)

생명과 존경 말고도 우리 마음은 안전을 갈구합니다. 이 잠언은 ‘모든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을 대조 합니다. 여기서 ‘모든’이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라 함은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로서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보호조치를 강구하며 조심스럽고도 사려깊게 말하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오랫 동안 적자가 나는 카메라 산업을 유지하였으나 2017년 카메라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인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침례를 받으신 후 처음 맞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많은 표적들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야로 믿었으나, 주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친히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2:24-25). 한편, 도덕적 행동과 도덕적 결과를 연결시키기를 싫어하는 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과시하되 신경질적으로 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란 도덕적으로 거만한 말과 행동에 대한 환유법입니다. 또한 ‘드러낸다’는 의미는 행상인이 자신의 물건들을 사람들 앞에 펼치는 것을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분노를 당장에 드러낼 정도로 거만한 사람입니다(잠12:16).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세상에 주인이 계심을 알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쓸 데 없는 말 한마디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잠9:10, 새번역).


2021/6/10
잠언13:17
“못된 전령은 사람을 재앙에 빠지게 하지만, 충직한 사신은 재앙을 물리치는 일을 한다..”(새번역)

본 잠언은 악한 전령(사신)의 성품과 그가 초래하는 불행한 결과를 양심적인 전령(사신)과 그가 공동체에 가져오는 치료효과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15절(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을 함께 고려한다면, ‘못된 전령 bad messenger’은 ‘사악한 자’와 상응하여 반역적이고 신뢰성이 없어 자신을 고용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전령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전령들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아 쓰고, 말하는 분야를 포함하여 여러 방면에서 높은 수준의 역량을 갖춘 사람들로서, 외교사절, 군인, 왕실의 대변인, 총독, 정보요원, 물건운송, 후견인, 그리고 왕실의 첩자와 같은 많은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령이라는 전문적인 수행원은 용기와 담대함을 갖춘 자여야만 하고 군사전략과 전술에 관한 공부까지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이런 훈련과 또 그들의 수행하는 임무의 중대성에 비추어, 국가는 그들에게 예외적으로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특권적인 대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진 문헌에 나타난 매우 희귀한 관료들의 이름 가운데 이들의 이름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임진왜란 직전 1590년 3월에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부사 김성일(동인)은 도요토미의 침략야욕을 감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사 황윤길(서인)과 정반대로 왜군의 침입은 절대로 없을 것으로 보고 하여 조선을 재앙에 빠뜨린 사람입니다. 그렇게 거짓 보고를 한 이유는 당파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돌이켜 진주성을 수비하다가 병사하였지만 역사는 그의 죄책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20:16).


2021/6/11
잠언 13:18
“타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난과 수치가 따르고 책망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존경을 받는다.”(현대인의성경).

본 잠언은 13절과 매치를 이루면서, 13절에서 18절에 이르는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양 구절은 보상과 벌은 행위의 교정여부에 의존함을 알려줍니다. 특히 본 잠언은 책망을 듣고도 행위를 교정하지 않는 자는 부끄러운 가난에 이르지만, 행위를 교정하는 자는 박수를 받고, 존경과 재물을 넘치도록 받는다고 말하면서(3:16; 8:18) 두 종류의 사람 사이에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책망을 듣지 않는 사람은 ‘가난과 수치’ 즉, ‘수치스러운 가난’을 갖게 됩니다. 대조적으로 책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여기서 존경은 사회적 명예 뿐만 아니라, 부를 수반함으로 사회에서 중요하게 대우를 받는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22:4). 한편, 빈곤을 가져오는 많은 요인이 있습니다 : 게으름(10:4), 쾌락과 사치를 사랑함(21:17; 28:19), 일하는 대신 수다를 떠는 경향(14:23), 통상의 악함(13:25), 그리고 줄 것을 안 주는 비열함(11:24). 그러나 본 잠언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 즉, 그것은 말과 노새와 같이(시32:9), 잘못된 요소들을 교정하라고 타이를 때 듣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실패로 인한 가난은 불명예를 가져옵니다만, 불의를 거절함으로 찾아오는 가난 – 미덕을 가진 가난(17:1; 19:1) – 은 불명예롭지는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훈계를 백안시 하는 자들은 가난과 수치로 징계를 받지만, 타인으로부터 오는 그런 징계에 순종하는 자들은 오히려 존경을 받게 됩니다. “지혜와 깨달음을 가진 자는 행복하다 그것이 은이나 금보다 더 가치 있고 유익하기 때문이다.”(잠언3:13,14, 새번역).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7장 1-13
요한복음 7장부터 10장 21절까지는 초막절에 일어나 예수님의 강화와 표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 율법은 1 년에 3 번은 이스라엘 모든 남자가 반드시 하나님 앞에 보이도록 규정하고 있으며(출34:23), 그 3번은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살해 의사 때문에 칠칠절이 있었지만, 주님은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6장 사건이 일어난 후, 7개월이 흘러 초막절이 다가왔습니다. 때는 AD 29년 10월 경으로 6개월 지나면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부활 승천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을 전제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보기에 자신의 큰 형님이 갈릴리에서만 돌아다니고 유대로 가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에 좋지 않게 생각하여 유대에 가서 큰 이적들을 행하여 떨어진 추종자들을 모으라는 권고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7개월 전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그 다음날 가버나움 회당에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기적의 의미를 강화하자 불쾌하게 여긴 제자들 중 많은 사람이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는 것이지, 추종자를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목적이 틀리기 때문에 육신의 형제들의 권고를 들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의 태도를 본받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만 합니다. 이런 사람이 나타날 때 비로소 세상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 (8)-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자들

요한복음 6장61-71
오늘 본문에서 잠시만 존재하는 육신을 만족하게 하는 일시적, 썩을 양식을 떠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양식을 먹으라고 가르치시며 어제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당신의 진정한 뜻을 밝히시자, 군중들은 육신을 충족시키지 못한 예수 필요 없다고 떠나고, 끝까지 듣던 제자들은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등, 하늘로 올라가신다는 등의 가르침에 그만 불쾌하여 떠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의 배를 만족시키기 위해 빵을 생산하는 빵 공장을 차리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차리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녀들을 생산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다만, 그 대상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도하여 온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영접하여 피로 그 죄를 씻으시고, 그들에게 당신과의 교제가 그 핵심인 영생을 주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매일묵상(2021/5/31 – 6/4)

2021/5/31
시편24편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그 거룩한 곳에 들어설 수 있느냐?”(3절, 새번역)

시의 배경으로 100년 간 기럇여아림에 있던 언약궤를 다윗이 예루살렘 성에 안치시킨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삼하6장). 시는 질문합니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주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으며(3-5절), 주님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우리 가운데 오시는가?(7-10절)” 그리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오직 거룩해야만 들어갈 수 있으며(4절), 그분은 주권과 영광과 권능과 구속의 권리를 가지고 오신다(7-9절)” 이는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주제로서 시를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창조 –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야훼)으로서(1-2절), 3절 이하 질문의 전제를 이룹니다. (2) 거룩 – ‘거룩’이란 특징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주님의 장막에 들어갈 자격을 논한 시편15편을 깨끗한 손, 청결한 마음, 참된 신앙, 진실된 말 4가지로 압축합니다(4절). (3) 승리 – ‘고대의 문들’에 대한 도전은 왕과 용사로서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벌이는 전투의 외침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전쟁들과 애굽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묘사하나, 복음의 관점에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죄악에서 구원하러 인간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권력과 싸우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과 싸우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그것이 모든 죄의 근원이고 모든 불행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절)


2021/6/1
시편 25편 – 곤고한 날을 위한 ABC
“겸손한 사람을 공의로 인도하시며, 겸비한 사람에게는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9절, 새번역)

25편은 히브리어의 알파벹 22개의 순서대로(두 군데서 불규칙함)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각 구절의 첫 음절에는 히브리어 자음의 순서인 ‘‎אֵֶ֥ 알레프’, ‘‎גַּ֣ 기멜’ ‘‎דְּ 달레트’…. 연속  등장합니다. 내용은 원수들의 공격으로 인한 눌림, 주님의 인도에 대한 간청, 그리고 죄의식 때문에 발생되는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번갈아 나타납니다. 어조는 차분하고, 시인이 가지는 주님에 대한 신뢰는 참을성 있는 기다림으로 표현됩니다. 이를 감안한 시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1. 개인적인 간구(1-21절)
      (1-5절) 신뢰, 소망, 기도
             (6-10절) 용서를 위한 기도와 인도(죄인들)
             (11-14절) 용서를 위한 기도와 인도(경건한 자들)   
      (15-21절) 신뢰, 소망, 기도

2. 이스라엘을 위한 간구(22절)

한편, 이 시는 히브리어 알파벹 중 하나(b-베트)는 모호하게, 또 하나(q-코프)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알파벹 시 형태는 아닙니다. 또한 개인적인 신뢰, 소망, 기도가 드려지다 22절에 이르러 갑자기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시편 기자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인생은 생로병사와 같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패턴이 있으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등장하여 흐름을 깬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변함 없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전7:14, 새번역)


2021/6/2
잠언13:14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


‘가르침(토라)’과 ‘계명(미스바)’는 유사 개념으로 함께 등장하나(3:1), 여기서는 14절과 13절에 각각 등장하여 두 구절을 연결시킵니다. 또한 ‘주님을 두려워 한다’는 말은 ‘지혜자의 가르침’이라는 어구로 대체되었습니다. 이것은 ‘지혜자의 가르침’과 ‘계명을 두려워 하는 자들’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13절과 함께 고찰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는 자가 치뤄야 할 그 빚은 죽음(14절)이고, 그분의 말씀을 늘 경외하는 자가 받을 보상은 생명(14절)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잠언을 종합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죽음에서 구원하는 풍성한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지혜자의 가르침’은 무서운 함정들이 숨겨져 있는 여행길 옆의 땅에서 솟아오르는 ‘생명의 샘’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자녀들이나 속기 쉬운 자들은 현명해 질 필요가 있는데, 그 방법은 주님을 경외하여 악으로부터 돌아 서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샘’은 잠언이 주는 영감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가지는 풍성한 삶(생명)을 의미하며, ‘죽음의 그물’은 남을 잘 믿는 자들이나 둔한 바보들을 사로잡아 죽이려는 많은 악의 대행자들 -못된 언어, 못된 행위, 악한 남자들과 여자들 -을 의미합니다. 지혜자의 가르침은 단순한 문체와 탁월한 도덕성 때문에 사람들을 이끌어 생명의 진리를 마시게 합니다. 주의할 점은 인생의 여정에 생명의 샘은 오직 하나이지만, 죽음의 덫은 많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모든 죄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두려워할 줄 알아서 악을 피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자신만만 해서 조심할 줄을 모른다.”(잠언14:16, 새번역)


2021/6/3
잠언13:15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15절에서 ‘지혜’라는 단어는 판단력, 통찰력을 뜻하는 ‘세켈’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지혜 good sense’는 ‘좋은 판단력’을 뜻하기에, 뛰어난 식견이나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이른바 ‘양식(良識)’ 있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16:22절(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에서는 지혜(명철)를 생명의 샘에 비유하면서 13:15절에 나오는 ‘지혜-세켈’와 14절의 ‘생명의 샘’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지혜자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며 그 가르침에 주의하여 그 샘의 물을 마시는 사람은 훌륭한 도덕적 인식과 이에 따른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공동체로부터 호의를 받게 됩니다. 그 반면 하나님과 공동체에 대하여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사악한 행위를 하는 반역자들은 그 길이 험난하고 결국은 멸망을 받게 됩니다. 양식 있는 사람들의 대표는 요셉, 사무엘, 다윗, 그리고 다니엘을 들 수 있는데, 이분들은 모두 그들의 뛰어난 판단력과 선한 행동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 주님의 섬기는 삶은 본 잠언의 온전한 성취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 줄 수 있는 은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을 가진 모든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받을 수 있다는 은혜를 전달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기도할 때 받는 문제 해결 능력입니다.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었을 때 주님의 응답과 돌보심 그리고 항해 경험으로 체득된 지혜로 폭풍 속에 난파될 배로부터 276명 전원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섬기기 위해 기도하십시요.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랴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


2021/6/4
잠언 13:16
“슬기로운 사람은 바로 알고 행동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어리석음만 드러낸다.”(공동번역)


생명과 존경 말고도 우리 마음은 안전을 갈구합니다. 이 잠언은 ‘모든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을 대조 합니다. 여기서 ‘모든’이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라 함은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로서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보호조치를 강구하며 조심스럽고도 사려깊게 말하는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오랫 동안 적자가 나는 카메라 산업을 유지하였으나 2017년 카메라 사업을 접었습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인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침례를 받으신 후 처음 맞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많은 표적들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야로 믿었으나, 주님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친히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2:24-25). 한편, 도덕적 행동과 도덕적 결과를 연결시키기를 싫어하는 미련한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과시하되 신경질적으로 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란 도덕적으로 거만한 말과 행동에 대한 환유법입니다. 또한 ‘드러낸다’는 의미는 행상인이 자신의 물건들을 사람들 앞에 펼치는 것을 말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분노를 당장에 드러낼 정도로 거만한 사람입니다(잠12:16).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세상에 주인이 계심을 알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쓸 데 없는 말 한마디도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잠9:10,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