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1.22-26

진정한 부부애 진정한 가족애는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한 자리에서만 피어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돈을 잘 벌고 아내의 소원을 다 들어 준다고 할지라도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 부인은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 영적인 갈등이 계속되는 이상 거기에는 진정한 행복이 꽃 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믿는 부인을 통해서 남편이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인이 남편에게 삶에서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의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을 진실로 사랑하고 도와야 합니다. 가정에서 평화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옛날에 갖고 있던 못된 습관들은 십자가에 못 박고 그야말로 남편이 보아도 감탄할 정도로 인격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남편이 부인을 따라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를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막내 며느리 되시는 어느 권사님은 어떻게 하면 시어머니를 전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면서 밤낮 생각하는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시어머니를 내 집에 모시자” 그러나 시어머니께서 두려워서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신주단지를 없애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화를 당해도 제가 당할 터이니 주십시오” 하고는 담대하게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그 뒤 시어머니는 예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는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이렇게 삶에서 그리스도의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벧전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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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닥터 홀이1928년 10월 해주 요양병원을 세우고 진료를 하던 어느날 진찰실에서 환자를 치료하는데 뜻박의 방문객이 찾아 왔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말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처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요양원 설립을 반대했고 닥터 홀의 선교 사업을 해주의 적이라 생각했던 그가 지금 닥터 홀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입니다. “홀 선생님, 우리 아들 때문에 왔습니다.” 시장은 주저하며 말했습니다. “아들 때문에요?” 입술이 타는 듯한 그에게 홀 박사는 결려하듯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결핵에 걸리지 않았나 해서요. 진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제 생각대로 병에 걸렸다면 여기에 입원시켜 치료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무척 어색한 태도로 말했습니다. 시장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엿보였습니다. “데리고 오십시오. 여기에는 이미 자리가 꽉 찼지만 아드님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그 소년은 과연 아버지가 염려한 대로 정말 결핵에 감염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아직 초기 상태여서 치료의 효과는 상당히 빨랐고, 병세는 호전되었기 때문에 집에서 통원할 수 있도록 퇴원시켰습니다. 소년이 집으로 가서 정양하고 있는 동안 닥터 홀은 계속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완치될 때까지 치료해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옛 감정을 잊고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닥터 홀이 마지막 진료를 위해 그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고마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후 시장과 시의원들은 요양원 의사들과 함께 인근 절에서 야유회를 열자고 초청장을 보냈으나 조선인 친구들은 우리를 그처럼 적대시하던 사람들이니 초청을 거절하라고 닥터 홀에게 충고하였습니다. 닥터 홀은 이 초청장을 보낸 의도가 그들의 마음이 달라진 점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보고 초청에 응하니 그들은 동포들에게 지대한 은혜를 베풀어주게 된 요양원의 건립 때 자기가 방해했던 점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한 뒤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시장의 약속은 잘 이행되어 요양원은 길을 내는 허가 등을 받는데 많은 도움을 받아 해주 요양원은 계속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과 같이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배워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다 보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 가운데서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요 네가 남편을 구원 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오 남편된 자요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알 수 있으리요”(고전7:15-16). 15절의 앞 부분의 뜻은 안 믿는 남편이 혹은 아내가 신앙 문제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만 보고 사이가 좋지 않아 별거 중인 믿지 아니하는 남편과 이혼하고 교회다니는 어떤 남자와 결혼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적용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중요한 이야기를 15절 후반부와 16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나눠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예수 믿고 그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행할 때 그 가정에 어떤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를 예의 주시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이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7:14)는 역사가 가정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 믿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가족 모두가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하여 가족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아무리 고통과 갈등이 따른다고 할지라도 가정을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 된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 가족 모두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태19:6).

우리는 믿지 아니하는 가족들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대립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건전하고 더 아름다운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정을 파괴 하는 독소가 될 수 없고 부부간의 애정을 깨뜨리는 장애물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안 믿는 가족으로 인한 그 눈물 그 고통 그 한숨은 절대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고전 7:14)라고 쓰고 있는데, 예수 믿는 아내 때문에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거룩해진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헬라어 구문을 보면 “거룩하게 되고”라는 말은 완료형 수동태이자 문장 제일 앞에 나와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강조하고자 하는 단어는 문장 앞에 둡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미 거룩하게 되어졌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서두에 쓰고 있습니다. 이어 “아내로 말미암아”는 말이 따라오는데 헬라어를 직역하자면 “아내 안에서 in the wife”가 됩니다. 이 뜻은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 안에서 이미 거룩하게 되어져 있고, 믿지 않는 아내가 믿는 남편에 안에서 이미 거룩하게 되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 뜻은 아내가 믿는다고 혹은 남편이 믿는다고 믿지 않은 남편이나 아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도 아니고, 믿음에 무슨 마법적인 힘이 있어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는 믿는 아내나 남편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거룩하게 되어졌습니다.” 이를 위해 고린도 전서 6:15-17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태19:5-6).

예수 믿는 사람의 거룩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나요? 예수 믿고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구원자 되심과 동시에 그 마음에 성령님이 와서 거하심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는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룩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남편이 예수 믿는 부인 때문에 거룩해진다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성령님이 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은 거룩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고린도 전서 7:14의 말씀에서는 안 믿는 자가 믿는 자 안에서 거룩해 진다고 쓰고 있을까요? 이 거룩은 의식적인 성격을 갖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거룩한 존재였고 그 제사장의 손길이 닿는 것마다 거룩해진다고 여겨졌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고 사도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은 깨끗하여 버릴 것이 없는데 특별히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기도함으로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거룩해지는 의식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가정의 제사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한 가정의 중보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내가 기도해 주는 남편과 자녀는 거룩해져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내가 예수 믿고 남편은 안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이 아내에게만 은혜의 빛을 비춰 주시고 남편에게는 멀리하시지않습니다. 부부를 똑같이 은혜로 감싸 주시고 포근한 날개로 덮어 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아내의 기도로 남편이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전하는 예수의 복음으로 남편이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집안에서 찬송 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그 찬송 소리가 가정을 거룩하게 합니다. 집안에서 기도 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그 기도 소리가 그 가정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집안에서 성경 읽는 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그 성경 읽는 소리가 가정을 거룩하게 합니다. 구 한말 조선 선교사로 파송받아 한국 최초로 평양에 장로회 신학교를 세우신 사무엘 마펫 목사님은 저녁 식사를 마치면 의자 옆이나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짧은 성경 구절을 읽은 후에 기도하시곤 하였는데 이를 들은 그의 셋째 아들 사무엘 휴 마펫은 고백하기를 “아버지의 기도는 단순하고 심오했다. 기도를 받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듯이 아버지는 기도했다. 그 기도가 우리 모두의 삶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던가!” 라면서 기도는 자신들의 가족생활에서 자연스러운 일부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와 말씀은 가족 전부를 하나님 앞에 구분하여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식탁 옆에서 어린아이가 밥 먹기 전에 “아빠는 왜 식하실 때 기도 안 해요?”라고 물으면 아빠는 은근히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어 대답을 잘 못합니다. 이렇게 아이의 기도하는 모습을 아빠가 볼 수 있는 집안 분위기, 그것이 벌써 그 가정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구 중에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그는 자기 식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우리는 흔히 믿는 부인과 안 믿는 남편이 같이 살 때 부인이 안 믿는 남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상 유혹의 물결 앞에서 쉽게 흔들린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이것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승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예수 믿지 아니하는 자가 믿는 식구를 영적으로 이기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믿는 아내를 통해서 그 남편이 거룩해진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진리가 이깁니다. 반드시 이깁니다. 가정에서는 믿는 여러분이 제사장입니다. 남편을 또는 아내를 제단 위에 올려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 기도가 살아있는 한 여러분은 이깁니다. 이런 긍정적인 믿음의 시각에서 아래의 말씀을 읽어야 올바릅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알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상황을 탓 할 필요가 없이 주님께서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해주실 것을 믿고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삶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에서 이렇게 결혼 생활을 영위하여 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16:31).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그리스도

전도 여왕 박인숙 권사의 간증입니다. 자신은 시댁의 막내 아들과 결혼하여 분가하고는 그럭저럭 살고 있던 중 어느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전도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저기 이 사람 저 사람 전도를 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어머니만은 전도를 하여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도 하면 시어머니는 “너나 잘 믿어라”면서 완강하게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신을 바꾸면 자신의 가정에 불행이 닥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어떻게 하면 시어머니를 구원받게 할까 생각하다가 연세가 88살 되신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모실 때 제일 문제는 시어머니께서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는 신주상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신주까지 자신의 집에 가지고 올 수는 없어 태워버리기로 결심하고 시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 제 집으로 가시지요? 그리고 저 신주상자는 제게 주십시요 화를 당해도 며느리인 제가 당합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염려하셨어도 큰 아들은 병으로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시어머니께서는 아들들이 아니라 며느리가 화를 당한다니 신주상자를 그냥 주었습니다. 사실 시집오면서 박권사는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하여 늘 궁금하였습니다. 받아서 그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는 치마 저고리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주인은 바로 시어미니가 시집오기 전에 살다가 죽었던 남편의 전처의 옷가지였습니다. 시어머니는 처녀였지만 양가 어른들의 약조에 의하여 그만 후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처가 자신이 낳은 아들들을 해고지 할까봐 두려워 신주상자에 모시고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박인숙 권사는 담대한 마음으로 화장실에 가서 불에 태워버렸더니 너무나 마음이 시원하였습니다. 그러자 시어미니는 “이제 내 신주를 네가 불태웠으니 예수를 믿는 도리 밖에 없구나” 하시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불행이나 죽음등을 두려워 하면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와 저주를 전부 떠 앉고 죽으심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무력화시키시고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일생에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들을 놓아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모든 면에서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한 일에 자비하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을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말씀읽기

2018.1.8 – 12

사랑의 대화가 있는 곳에는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잠언은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16:24)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한 말’은 ‘즐거운 말’ 혹은 ‘친절한 말’로 번역이 될 수 있는 단어로 ‘주어진 상황과 때에 맞는 적합한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서로간에 다툼이 있어 대화가 단절된 그런 상황과 때에 적합한 말은 관계의 회복을 위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을 한 상대방이 찾아와서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말이나, 다투던 남편과 아내가 잘못을 서로 인정하고 주님 안에서 용서하며 위로하는 말을 나눈다던지, 남을 용서하며 사랑으로 덮어 주기 위해서 눈물로 대화를 나누는 그 말이 선한 말입니다. 그런 선한 말은 너무나 귀한 것이어서 꿀송이 같다고 했습니다. 뼈가 썩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한 말을 듣는 그 순간, 그 뼈의 모든 상처가 아무는 것입니다. 이만큼 사랑의 대화는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부모 형제 사이를 한번 검토해 보길 바랍니다. 부부 사이도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사랑이 넘치는 대화 대신 대화가 단절되어 있고, 오해가 쌓이고, 마음속에 원통함이 있다면 이 말씀으로 마음의 병을 고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가정에 대화의 꽃을 활짝 피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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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의 우선순위

마태복음 6:24-34

교육에 관한 TED 프로그램에 “Time Management”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올라와 있습니다. 이것은 독자들이 좀 더 효과적으로 시간관리를 하는 방법에 관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동영상은 먼저 컴퓨터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언급합니다. 컴퓨터가 여러가지 일을 하라고 명령을 받으면 정작 중요한 일은 뒷전이고 무엇을 먼저하여야만 하는지에 관하여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아챈 프로그래머는 가장 중요한 것들에 관하여 우선순위를 정해주고 나머지는 랜덤으로 컴퓨터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명령을 주니 컴퓨터가 제대로 중요한 일에 시간을 소비하여 작업을 효율적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컨설턴트는 큰 사업을 운영하는 회장에게 “어떻게 삶을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는가?”에 관하여 상담을 받고 잠자기 전에 다음날 할 일 여섯가지를 우선순위를 매겨 계획을 세우라고 답변을 주고는 수만 달러를 상담료로 받았습니다. 이같이 우리 인생도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생에 가치관이 없으면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없어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주인은 세상의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세상의 일들 즉, 먹는 일, 마시는 문제, 옷입는 문제등은 우리의 염려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염려대상이고 우리는 먼저 주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심으로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여기에 맞추어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를 실행할 좋은 프로그램을 짜서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달성되도록 모든 것을 계획하고 노력하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