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40 – 52절
장막절 중간에 성전에 오르셔서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바로 그리스도로서, 당신을 믿는 자는 구약에 약속된 생명의 강물을 먹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외침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뿌려져 다양한 반응들이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맞는지 여부를 확실히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도 요한은 50년 전을 회고하면서 오늘 본문의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이해될 수 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삼고 살아가면 삶은 매우 의미가 있을 것은 틀림없다고 하여도, 지금도 살아계셔서 만유를 통치하신다고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여러 간증도 하고, 능력도 선보이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분을 만나기 전에 우리의 죄가 씻김을 받고 삶이 거룩하게 변하여야만 합니다. 이를 담당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분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셔서 죄의 문제를 지적하시고, 예수님을 믿어 의를 덧입으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임금 노릇을 하는 마귀는 이미 심판을 받아 쫓겨났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바로 이렇게 내가 변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며, 그렇게 주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묵상(2021/08/23-27)
2021/08/23
시편41편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재난이 닥칠 때에 주님께서 그를 구해 주신다.” (1절, 새번역)
이 시는 죄, 질병, 적의, 소외, 은혜의 주제를 담고 있어, 시편38-40편과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큰 질병 중에 당한 악의와 배반은 왕 다윗에게 고뇌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고치시는 주님은, 죄를 고백하는 다윗을 고쳐주셨고 원수들에게 왕으로서 정의를 행하도록 은혜 내려주셨습니다(10). 이는 다윗이 어느 상황에 처해서나 신실하게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12). 본시의 구조입니다.
1–3 (A1)원리적인 주님의 은총/ 4 (B1) 범죄시 추구되야 할 은혜 / 5–9 (C)미움, 거짓, 수군거림, 배반 / 10 (B2)원수와 관련된 은혜/ 11–12 (A2) 경험된 주님의 은총
한편, 1절의 단어 ‘복-에쉐르’은 시편1:1절에도 등장합니다. 거기서는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주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이 반면 41: 1절에서 복있는 사람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돌보는 사람으로서, 적극적인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흘러나오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게 되고, 완성됩니다. 이렇게 시편의 첫번째 책 총 41편의 시들은 ‘복’으로 시작해서 ‘복’으로 맺고 있습니다. 이 복이 우리 것이 되어야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2021/08/24
시편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본 구절에서 ‘가까운 친구’의 히브리어 원어는 “샬롬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인간에게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은 자신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배신자는 친구는 물론 심지어 형제나, 자녀나, 부모일 경우도 있습니다. 저의 인생에서도 평범한 친구들이었으나, 자신이 조그만한 지위와 권력 그리고 돈이 생기자 그만 목이 뻣뻣하게 나오는 사람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예외가 없었습니다. 마음에는 내심 몹씨 섭섭하고 불쾌하였지만, 만약의 경우 나도 그렇게 될 수도 있는 생각에 두려움도 느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 중 하나이기에, 인간은 악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루시퍼를 천사장 중 하나로 창조하셨지만, 그는 반역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다윗 역시 믿었던 자식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년에 심한 내란을 겪었고, 헷 사람 우리아는 믿었던 왕 다윗으로 인하여 가정이 빼앗겼고, 믿었던 상관 요압은 왕 다윗의 지시를 우선시 하여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었습니다. 이 모든 것 중 백미는 가룟 유다가 은 30량에 주님을 팔아넘긴 사건으로 주님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오늘 본문을 인용하심으로 경고하셨습니다(요13:18). 그러나 유다의 배신을 미리 알고 계셨지만, 주님은 가룟 유다를 열 두 제자 중 하나로 선택하셨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요6:70,71). 즉, 배신당할 수도 있지만, 사랑을 주는 것 역시 철회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어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2021/08/25
잠언 14:20절
“가난한 사람은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지만, 부자에게는 많은 친구가 따른다”(새번역)
이 잠언은 ‘악인이 선인(의인) 앞에 엎드린다’는 19절의 가르침에 악인이라도 잠시 동안은 부자가 될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절의 본지는 가난한 자가 당하는 사회적 관계의 빈곤을, 부자가 누리는 사회적 이득과 대조하면서, 인간 본성에 관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재물을 충분히 소유하나 도덕적으로는 빈곤한 부자와 대조적으로,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는 빈곤하나 도덕적으로는 결코 결핍된 존재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가난’과 ‘부’ 말들은 극단적인 물질적 결핍과 유족함얼 뜻하지만, 전자는 역시 사회적 관계, 예를 들면 친구들 -에서도 빈약함을, 이 반면 후자는 가까운 친구들이 많음을 보여줍니다. 더 슬픈 것은, 사람들은 가난한 자의 미덕들에도 불구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내고자 하는데, 이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즉 자신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어야 하지만, 아무 것도 돌려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탐욕스러운 인간 본성의 어두운면을 드러 내면서, 이 잠언은 ‘가난과 부’ 모두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전자는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후자는 잘못된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로서, 주님 안에서 보다는 인간들을 의지해서 삶과 존재의 안정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로써 20절은 주님 안에 있는 우리가 어떤 면에서 독특하고, 좀 열등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접하여야 올바른지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7:12,새번역)
2021/08/26
잠언 14:21절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사람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새번역)
20절을 뒤이어 기록된 21절은 20절의 본지를 잘못 이해하여, 가난한 이웃과 거리를 두려는 부패한 마음을 경계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실로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 죄는 거만의 죄요,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을 모두 지으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입니다. 이 반면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자신의 이웃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로 여기고, 따뜻하게 영접하여 친절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호의에는 불쌍함, 자비심 그리고 관대함 등의 요소가 작동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자발적이지 강요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호의를 가지고 혹은 은혜롭게 대하다’ 는 말은 가난한 자를 돕고, 배고푼 자를 먹이고, 패배와 죽음 등으로 고뇌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고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잠언이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사람입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현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주님으로부터 받을 칭찬에 대한 기대 때문에, 겸손하면서도 무척 즐거워 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이런 행복한 미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잠언은 제자들에게 몰인정하고 거만한 태도를 삼가고, 친절하게 대하여 주님의 인정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이웃을 따뜻하고 품위 있게 대하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물론 항상 그렇듯이 겸손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6:1).
2021/08/27
잠언 14:22절
“악을 꾀하는 사람은 길을 잘못 가는 것이나,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얻는다.”(새번역)
본절의 표제어 ‘선’ 과 ‘악’은19-22절의 단락을 끝맺음 하면서, ‘은혜’와 함께 하나님의 성품(21)에는 인자(kindness)와 진리(faithfulness)가 있음을 교훈합니다(출34:6). 더구나, 22절은 이웃을 경멸하는 자는 그 이웃에게 악을 꾀하는 자로, 호의를 베푸는 자는 선을 계획하는 자로 변화되어감을 지적합니다. 그런 죄인은 구원의 소망 없이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되고, 선인은 도움을 요할 때 사람들, 특히 주님으로부터 인자(친절)하심을 경험합니다. 한편, ‘악을 계획하는 사람’이란 마치 능숙한 장인들과 같이 해악이라는 재료를 외견상 도덕행위와 결부하여 “경멸”이라는 악의 작품을 만드는 자들을 비유합니다. 여기서 “길을 잘못 간다’는 의미는 악을 계획하는 자들이 길을 잃어 버려 방황하다가 죽음을 만나는 운명을, 주님을 경외하여 바른 길로 걸어가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만나는 축복을 묘사합니다. 결론적으로, “악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kindness)를 경험해도 오히려 죽음의 길로 가지만,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아 구원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주님의 많은 친절과 인자를 경험 하였지만 돌이키지 않고 죽음의 길로 갔습니다.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요셉입니다. 그는 고난 가운데서도 보디발, 간수, 관리 및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위해 선을 계획함으로, 그들로부터 인자와 진실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법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빌1:11,새번역).
성령님에 대한 약속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7장 37-39절
AD29년 10월 초 장막절이 끝날 때 예수님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당신이 생수의 강의 공급자라는 사실을 외치셨습니다. 그 생수의 강은 다름 아닌 그분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즉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한 대속의 수단을 마련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예수님의 백성들에게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성령께서 강림하셔야만 하겠습니까?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과 계획 때문입니다. 성부께서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께서는 인간이 되셔서 속죄를 이루셔서 구원을 받을 방법을 마련하시고, 성령께서는 확보된 구원을 죄인들에게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최고 목적은 각 사람이 돌이켜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삶입니다. 오늘 장막절 외침 후 약 8개월이 지나 AD30년 5월 경 돌아오는 칠칠절 즉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사 교회를 창설하시고 세상의 죄악됨과 구원의 방법인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악됨에 대하여 깨진 심령을 가진 사람들만 예수 앞에 와서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으며, 성령님의 충만을 받게 됩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떤 충만과 권능의 느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과 주님의 뜻을 행하여 여러 선한 일을 많이 이루지만 정작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는 의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묵상(2021/08/16-20)
2021/08/16
시편40편 – 내용과 구조
“주님을 신뢰하여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복되어라.”(4절, 새번역)
다윗은 38,39편에서 죄와 질병과 원수들의 준동 속에서 주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본 시편에 이르면 주님을 기다린 다윗의 승리의 외침이 울려퍼집니다. 이제 그 기다림은 끝이 났고(1-3), 그의 신뢰는 올바른 행동이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4-5).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다짐하며(6-8) 많은 회중 앞에서 체험한 구원을 증언하기로 약속합니다(9-10).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주님의 도우심(11-13), 원수들에 대한 심판(14-15), 주님의 백성을 돌보시기를 기도합니다(16). 왜냐하면 다윗 자신은 산적한 어려움을 해결하기에는 연약하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심판과 구원을 베풀어 주실 주님을 또 한 번 기다리게 됩니다(17). 이런 다윗의 삶의 패턴은 그대로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의 본질은 기다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유의 주님을 의지하며 충성되게 사는 신자들은 실로 복이 있습니다. 이 시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A1 열매 맺은 기다림(1-3)
B1 과거에 행하신 주님의 행동(4-5)
C 지극히 중요한 마음의 모습들(6-13) – 순종,선포,겸손
.B2 미래에 행하실 주님의 행동(14-16)
. A2 또 기다림(17)
한편, 히브리서는 6-9절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내일 묵상해보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편40:7; 히10:7).
2021/08/17
시편 40: 6-8절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7절)
하나님이 베푸신 큰 은혜를 체험한 다윗의 귀에(5)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도 않고,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도 않는다”(6)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형식적인 제사 즉, 계시된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예배는 헛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성소에 이르러-‘내가 왔나이다’-, 자기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겠다는 각오를 말씀드립니다. ‘두루마리 책’은 모세 율법을 뜻하며, 모세율법은 하나님을 세상의 유일한 왕이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조차 그분의 뜻을 행하는 신하에 불과함을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같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분이 두려워서만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기쁘기 때문에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8) 외친 것입니다. 이는 중생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헌신을 위한 맹세는 할 수 있지만, 이를 신실하게 실천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되실 분은 메시야이외에는 불가능합니다. 이를 근거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0:5-10절에서 시편40:6-8절을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 세상에 들어오실 때 하신 말씀으로 재해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희생 제사 의식이나 율법이 규정한 의 자체가 성취된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인간 구원을 위한 새 언약과 새 제도를 세우실 수 있었습니다(히10:9)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2021/08/18
잠언14:17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어리석은 일을 하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다.”
잠언은 계속해서 어리석음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여기 두 종류의 바보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개적으로 성을 내어 타인을 해롭게 하거나(술 취해서 고성방가하는 사람), 그런 분노를 참고 은밀히 계획을 세워 타인을 해치는 사람입니다(암살자). 먼저,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충동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됩니다. 주전자가 끓으면 옆으로 넘치게 되는 것과 같이, 훈련이 안된 그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머리가 분노로 뜨거워 졌을 때 그의 판단력은 흐려져 있고, 그 가운데 내린 결정은 자신은 물론 공동체에게도 파멸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부드러우면서도 지혜 있는 말로 진정시켜야만 합니다(15:1, 29:8). 실상 지혜의 이상적인 모습은 분노 가운데서도 실수하지 않는 침착한 사람입니다. (잠16:32). 대조적으로 냉철하게 계획을 세우는 자는 훈련되어 있고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합니다. 그 결과 그는 통찰력 있게 사태를 분명히 파악하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을 개시합니다. 문제는 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지혜자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지만, 악인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미움을 받기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잘못된 일을 하고, 음모를 꾸미는 자는 비밀리에 우회적으로 범죄를 행합니다. 이들은 모두 타인과 자신들을 해롭게 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들이며, 이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나 공동체에 의하여 버림받게 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2021/08/19
잠언14:18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이 잠언은 두 종류의 사람을 묘사합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슬기로운 사람. 여기서 ‘어리석은 사람’은 히브리어 ‘페티’로서 15절에서는 모든 사람의 말을 다 믿는 ‘어수룩한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별 생각 없이 단순하게 반응하는 사람(simple-minded)입니다. 이런 사람은 속기 쉽기 때문에, ‘어리석다(folly)’라는 불명예를 지울 수 없습니다. ‘어리석음’의 히브리어는 ‘이벨렛’으로 17절에서 화를 잘내는 사람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지만, 도덕적으로 오만하여 다루기 힘든 사람이 행한 결과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기업을 삼다’란 통상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재산과 사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 잠언에서는 풍자적으로 쓰여서, 어리석은 사람의 행위는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한편, 잠언은 슬기로운 사람에 속할 것을 권면합니다. 이는 그들이 지혜자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지식들로 면류관을 쓰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계시된 도덕적 진리들을 마음에 새겨 참된 지식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인생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과 위험을 뚫고 나아가서 드디어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존경을 받는 자들입니다. 캐나다에서 있던 일입니다. 선교사 출신의 한 사람이 검은 모래를 채취하여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그럴듯한 설명서를 가지고 투자를 받았습니다. 마을의 많은 사람이 그런 외형에 속아 투자를 하였지만, 그 중 한 사람은 신중하여 직접 검은 모래를 채취한다는 장소를 가서 보고 사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큰 손실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영광을 물려받고, 미련한 사람은 수치를 당할 뿐이다.”(잠3:35,새번역).
2021/08/20
잠언14:19
“악인은 선한 사람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사람은 의인의 문 앞에 엎드린다.”(새번역)
18절에서 지식으로 면류관을 쓴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개념은 본 구절에서 더욱 발전되어 선한 사람을 마치 왕에게 비유하고, 악인을 그 밑에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양 구절의 주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 때문에 선한 사람(의인)과 연결되어 있고, 지혜의 가르침에 주목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은 악인과 불의한 사람들과 맺어집니다. 잠언 2:20절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와 같이, 악인은 불의한 사람과 같고, 선한 사람은 의인과 같습니다. 본 잠언은 공동체를 섬기는 자가 높아져 다스리고, 자기만 아는 사람은 종처럼 낮아져 그들 앞에 엎드린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침으로, 하나님과 이웃의 이익을 위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은 의인의 문 앞에 엎드린다’는 말은 의인이 심판석에 앉아 정의를 집행함으로써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죄인을 벌한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예가 요셉을 노예로서 애굽에 팔아 넘긴 열 명의 형제가 20년 뒤 높아져 심판석에 앉은 애굽의 총리 요셉 앞에 와서 엎드린 사건입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 잠언의 이 교훈을 언제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밝혀지는 그 마지막 날에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2:10,11절은 잠언의 이 가르침이 완전히 성취되는 날을 선포합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10,11새번역).
매일묵상(2021/08/9-13)
2021/08/02
시편39편 – 총괄
“가슴 속 깊은 데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고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주님께 아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3절,새번역)
이 시는 하나님은 연약하고 덧없는 피조물인 사람을 부지런히 징계하시는 이유를 묻습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시편38편과 비슷합니다: (1)방관자들 앞에 침묵을 지키는 모습(38:12, 13; 39:2), (2) 죄를 징계하시는 주님의 행동(38:1–3; 39:9–11), (3) 오직 주님만이 구원해 줄 수 있다는 소망(38:15, 21, 22; 39:7)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조점은 다릅니다. 시편38편에서 질병은 죄의 문제를 드러냈고, 용서의 필요성을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이 반면 시편39편에서 질병은 인생이 짧고 덧없음을 절실히 알게하는 동시에, 현생에서의 행복한 삶 또한 소중하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인생무상이라는 개념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서, 불멸의 세계가 완전히 계시된 후라도 그런 개념이 남아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 삶은 귀중한 것이며, 인생에서 누리는 기쁨과 사랑들은 결코 대체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매우 근심하였고, 하나님께서 회복시켰을 때 “근심에 근심을 면했다”할 정도로 안도감을 가졌습니다 (빌2:27). 다윗 또한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주님의 징계로 죽게 되었을 때, 결국 만나게 될 것을 알지만 아기가 죽지 않도록 금식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삼하12:22-23). 지금은 자신의 남은 생애가 질병으로 단축될 수 있음을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12, 13).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며,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아, 건전한 지혜와 분별력을 모두 잘 간직하여 너의 시야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잠언3:21, 새번역).
2021/08/03
시편39편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11절)
이 시는 4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3절 항의 / 4-6절 이 덧없는 인생 / 7-11절 엄중한 징계/ 12,13절 작은 간구. 오늘은 4-11절을 중심으로 묵상하겠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복잡하였지만, 그의 첫 기도는 인생의 본질을 깨닫도록 요청합니다(4). 그는 자신이 겪는 질병의 고통을 주님이 주시는 징벌로 받아 들이면서, 주님이 보시는 것처럼 자신도 볼 수 있기 위해 기도드립니다(4-6). 특히 ‘헛되다’다로 번역된 ‘헤벨 hebel’은 ‘입김’ 내지 ‘수증기’로서, 3번이나 사용되었고, 이를 통해 다윗이 배운 바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허사뿐이다’(5), ‘헛된 일로 소란하며’(6),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11절)(전도서의 주제임). 그런데 세 번째 단락(7-11)에 이르면 다윗은 욥을 괴롭힌 역설을 겪게 됩니다. 이들은 지상의 삶에도 최선을 다하지만,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한하고 덧없는 존재들에게 조그마한 잘못을 가지고 너무나도 심한 처우를 하시는 것 같아 탄식합니다. 그러나 모든 역설들과 같이 이것도 발굴되지 않은 보화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됨과 영원을 위해 지음받았다는 사실입니다(롬8:11-24). 좀이 아름다운 옷을 먹는 것과 같이 인간이 잘못하여 교만할 때 그 영화를 치심으로, 우리를 좀 더 완전하게 하여 영원을 함께 살아가시려는 주님의 거룩한 뜻입니다(물론 악인에게는 심판을 의미함). 이 주제는 우리가 씨름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그러므로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7절,새번역).
2021/08/04
잠언14:14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고, 선한 사람도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는다.” (새번역)
이 잠언은 ‘레브 – 마음’라는 단어를 통해 13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3절에서는 현재 보이는 겉모습들은 기만적이고, 참된 실체는 결론에 가서 드러남을 말하지만, 본 구절은 그 결론을 따른 마지막 보응을 논하고 있습니다. 슬픔과 기쁨을 따르는 현재의 아픔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믿음으로 살면서, 결국에는 주님께서 선을 행한 자를 상주시고, 악을 행한 자를 벌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겉모습이 어떻든, 행위와 운명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길-way’이라는 비유로 예증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본 잠언은 마음이 변하여 악을 행하는 비뚤어진 사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선한 길을 선택한 후에, 신자는 인내하며 무조건 그 길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신실하지 못한 자들은 처음에는 사회나 이웃을 위해 선한 행동을 하고 살지만, 나중에는 그 길에서 이탈하여 자신만을 위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이전에 무슨 선한 행위를 하였든지 간에 그들의 신실치 못한 행동에 대하여는 완전한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한 자가 행한 선한 행위들 역시 그에 합당한 보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예레18:7-10). 이렇게 본 잠언은 비뚤어진(혹은 반역적인/왜곡된) 사람을 선한 사람과 대조합니다. 실로 악인은 자신이 기대한 만큼이 아니라 완전한 벌을, 의인 역시 완전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고백한 사람은 믿음으로 의롬다 하심을 받습니다만, 그 믿음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신실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25:46).
2021/08/05
잠언14:15
“어수룩한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믿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행동을 삼간다.” (새번역)
본 잠언은 두 개의 기능을 합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걷고(1-7) 보이는 대로 걷지말라(8-15)는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또 하나는 지적-영적 성품을 대조하면서 교훈을 주는 단락(16-32)을 도입합니다. 이를 위해 ‘길’이라는 비유에 ‘걸음’이라는 비유를 더함으로 본 잠언은 제자를 잘못 이끌게 되는 어수룩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어수룩한 사람은 바보들의 일종으로 이들은 쉽게 속아넘어가지만, 신중한 사람은 드러난 겉모습을 믿지 않고 그 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는 자신의 걸음마다 성찰함으로써 자신이 가는 길이 참된 경건과 윤리에 일치하는지 여부를 항상 점검하면서, 삶을 테스트 합니다. 물론 ‘걸음(step)’은 ‘길(way)’의 동의어로서 생활방식을 의미합니다. 잠언은 청년들로 하여금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타인의 말을 듣도록 권면하는 동시에, 자신의 판단이 부주의한 ‘어수룩한 사람’에 속하는지 혹은 주의깊게 행동하는 ‘슬기로운 사람’ 에게 속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 왜냐하면 남의 말을 쉽게 믿는 어수룩한 사람은 자신의 생활방식에 주의를 기울지 않지만, 인간의 의견을 신뢰하지 않는 슬기로운 사람은 혹시나 자신이 가는 그 길이 거짓된 걸음은 아닐까 하면서 경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주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메시지를 신뢰합니다(요나3:4;출4:1-3). 슬기로운 사람은 늘 이렇게 밝은 빛 가운데로 걷기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3:21, 새번역).
2021/08/06
잠언14:16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잠언은 젊은 청년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고집불통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설득 합니다. 그 방법은 전자를 ‘지혜로운 자’, 후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다”의 히브리어 동사는 ‘야르’로서 ‘경외, 염려, 사망에 대한 두려움’ 등 많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두려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햐면 잠언 도처에서 이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주님을 두려워(경외) 한다’ 혹은 ‘계명을 두려워 한다’는 뜻을 전달하는데 사용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잠1:7). 그러므로 여기 지혜 있는 사람은 당연히 악을 피하려고 애를 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방자하여 악을 행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믿고 조심할 줄을 모릅니다. ‘방자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바르’이며, 그 뜻은 ‘분노하다’입니다. 즉 바보가 주님이나 그분을 두려워 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여 말을 듣지 않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보의 눈에는 악을 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울 뿐만 아니라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틀렸습니다. 이는 하늘의 CCTV를 못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이 잠언이 드러내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자신만만해 하지 않고 늘 조심하지만, 자만심에 찬 바보는 악에서 돌이키는 것을 싫어 한다(잠13:19)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늘 주님을 경외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감으로써 네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표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빌2:12, 새번역)
표적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7:31-36절
장막절 중간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신 예수님을 보고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주민들이나 유대 당국자들과 달리 분류되는 군중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적과 믿음의 관계는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표적을 보고 믿음을 가져 예수를 따르는 부류, 표적을 보고 믿으나 예수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부류, 표적을 보고 오히려 적대적인 마음을 가지는 부류, 표적이 믿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류 등입니다. 그러나 표적을 통한 믿음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표적 자체 보다는 표적이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의 참된 영적인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표적들마다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요한복음 5장에서 보여주신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건전하게 하신 표적을 생각해 보자면, 이 사건은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하던 치유를 행하사 안식을 주심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요 안식일의 주인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표적들과 이에 따른 강화를 듣고도 적대시 하는 마음을 오히려 굳히자, 이들을 버리시고 떠나실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떠나심은 바로 오늘 설교를 들은 바로 그 유대인들에 잡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승천하심으로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 시간은 불과 6개월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을 떠나신다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서로 자문자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의 영적인 상태는 사람이 다녀서 반질반질하고 굳은 길가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은 싹 틀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과 그리스도
요한복음7:25-30절
매일묵상(2021/8/2 – 6)
2021/8/2
시편 38편
“주님, 주님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님의 진노로 나를 벌하지 말아 주십시오”(1절 새번역)
이 시는 다윗의 세 번째 참회시로서 죄 때문에 발생한 영육 간의 고통에서 구원을 부르짖는 시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2절 내리막길/ 13-22절 오르막길. 시에서 언급된 고통은 다양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죄짐, 고약한 질병으로 인한 부서질 것 같은 육체적인 아픔, 친구들로부터의 소외, 그를 파멸시키려는 원수의 움직임 등이 더해짐으로 그의 고뇌는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처음과 마지막 두 절은 본 시의 주제와 놀라움을 요약하여 알려줍니다. 그것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분과 구원해 주실 분이 같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의 범죄 때문에, 주님은 분노하였고 진노하셨으며(1), 그분이 심판의 화살이 날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2). 그러나 그가 가까이 가서 도움과 구원을 호소할 대상 역시 같은 주님이셨습니다(22). 왜냐하면 오직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그런 주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가 가져올 결과들을 여실히 드러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할 시가 지어진다면, 바로 이 시가 그렇습니다. 죄는 주님을 분노하게 만들고, 죄인에게 부담을 주어 무겁게 하며, 행복을 상처 투성이로 바꾸어 버립니다. 또한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게 하고 마음의 평정을 빼앗아 갑니다(1-8). 더 나아가 죄 때문에 친구들은 우리를 떠나가며, 우리는 고독하고 슬퍼질 뿐만 아니라 원수는 기회를 잡아 준동하기 시작합니다(9-12). 죄를 지은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13,14). 그러나 죄는 기도의 문을 닫지도 못하고, 우리가 회개의 자리로 가는 것을 막지도 못합니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편38:22)
2021/8/3
시편38:1-12절 내리막길
“내 죄의 벌이 나를 짓누르니, 이 무거운 짐을 내가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4절, 새번역)
다윗은 죄의 짐을 지고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주님은 죄 때문에 그의 대적이 되셨습니다 (1-3).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2)라는 표현대로 질병, 고통, 버림받음, 적대와 주님의 질책이 모두 다윗에게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결과 다윗의 육신은 심한 고통 가운데 놓여져 있고, 몸도 마음도 힘이 없고(5-10) 친구도 없습니다(11). 원수들은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12). 특히 5-8절은 고통스러운 육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질병이 죄에 대한 벌로서 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몇몇 경우는 그렇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C.S, 루이스) 입니다. 따라서 질병의 시간은 곧 성찰의 시간입니다. 본 시편의 경우, 죄와 질병이 서로 관련되어 있고, 그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증상들이 번갈아 . 그런데 주님의 징계로 인한 질병 때문에, 다윗이 곤경에 처하자, 친구들은 그를 버리고, 원수들의 위협이 다가왔습니다. 11절은 이에 대한 생생한 필치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이 내 상처를 바라보곤 비켜섭니다. 가족들마저 나를 멀리합니다”(새번역). 환난을 당한 사람에게는 긴 말 하지 않아도 따뜻한 손으로 꽉 붙들어 주는 동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잔칫집에는 가지 않아도 초상집에는 꼭 가 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31절 이하의 신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은 의미가 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였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들은 영벌에 처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2021/8/4
시편 38:13-22절- 오르막길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2절)
앞 부분(1-12)은 개인적인 육체적 고통과 죄의 짐에 눌린 심적 고통에서 친구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원수들에 의한 생명까지 위협을 느끼는 상황을 말하였습니다. 본 단락에서 다윗은 절망 대신 침묵으로 일관하며, 마음을 다지고 새롭게 도약할 준비를 합니다(13-14). 이를 위해 적들의 외침에 귀를 닫고 마음을 오로지 구원하실 주님을 향해 돌립니다(15-16). 물론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태도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신뢰성 있는 자세(15), 자신이 범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겸허한 마음(18), 그리고 신속한 구원을 부르짖는 외침(22)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구원을 받기까지 자신의 모든 고난 및 죄에 대한 용서를 주님께 부르짖으면서 점점 더 올라가고 있습니다. 명시적인 기도는 16절에 드디어 나타납니다: “내가 재난에 빠져 있을 때에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새번역). 그리고 다윗은 절박하여 주님을 붙잡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왜냐하면 질병과 죄짐에 눌려 곧 멸망당할 것과 같이 연약한 자신을 원수들이 비웃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다윗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도 휘청거리고 있었습니다(17-20). 그의 기도를 듣고 구원하실 그 주님은 430년 전 애굽인들의 압제하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바로 그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도성인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죄는 물론 질병이나 원수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은 없습니다. 복음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1:2).
2021/8/5
잠언 14:12절
“사람의 눈에는 바른길 같이 보이나,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 있다.”(새번역).
본 구절은 “보이는 대로 살지말라”는 교훈을 말하는 단락(8-15절)의 중심 부분에 놓여져 있고, 그 이유를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앞 부분의 ‘바른-야살’은 ‘길’과 결합하여 올바른 행위로 판단되어 성공으로 가는 윤리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잠언에서 윤리적인 행동은 올바를 뿐만 아니라 성공으로 이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올바르다고 생각한 그의 길은 많은 행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가 판단하고 취한 그 행동들은 사실상 왜곡되었으며 죄된 것들이었습니다(2:13). 왜냐하면 그 마지막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 여정의 대단원이 죽음이라면, 자신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길이 실패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안전한지 그리고 그 마지막의 운명이 어떤지는 항상 보여지는 것과 같지는 않습니다(마7:13,14). 우리는 ‘기만적인 길’은 명백히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표시된 길만큼이나 확실히 사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물론 이런 일이 발생되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인간의 제한적이고 불투명한 인식과 주님이 창조하신 현실 그 자체 사이에 갈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집이 멸망당하는 이유는 인간 인식론, 즉 인간의 시각에 접근할 수 있는 상대적 진리라는 허술한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된 그 길을 알고 계십니다. 진리는 유한한 인간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그 바른 길을 계시하셔야만 하고, 신자는 믿음으로 그 계시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3:7). 이 잠언은 또 한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16:25).
2021/8/6
잠언14:13
“웃어도 마음이 아플 때가 있고, 즐거워도 끝에 가서 슬플 때가 있다.”(새번역)
13절에서 잠언 기자는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즐거워 보이는 모습은 마음의 아픔을 위장하는 행태일 수 있으며, 결국에는 감추고 있던 슬픔이 분명하게 나타날 것임을 말하여 12절과 같이 피상적인 판단을 유보하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생은 불편함을 참을 수 없어 부르짖는 아이의 울음으로 시작되어, 죽음이라는 슬픔으로 마치게 됩니다. 그 사이에 웃음은 마음의 고통으로 엷어지고(14:13a), 결국 슬픔이 기쁨을 뒤따라옵니다(13b절). 인간은 죽기 때문에 기쁨은 반드시 슬픔으로 귀결됩니다. 파티는 늘 끝나고, 사랑의 행동들은 그쳐지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은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27:1, 새번역)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색조는 잠언의 주된 주제 즉, “의인을 위해 기다리는 것은 ‘기쁨, 생명 그리고 소망’이지만, 악인은 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에 비추어 해석되어야만 합니다(10:28)/ 24:19. 20). 인간의 존재를 이렇게 묘사하는 이유는 죽음을 넘어 계속될 하나님과의 관계에 구원과 참된 가정(true home)이 있음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3:1-12).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실로 현재 경험하는 기쁨은 덧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성숙해져가면서, 지금 권면하는 잠언의 지혜가 완전히 빛을 내게되는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아가는 신자들의 소망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롬6:23,새번역).
율법의 성취와 그리스도(2)
요한복음 7:18-24절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의 시작은 안식일 계명의 준수 여부였습니다. 주님은 여러 경우에 안식일이라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불치의 질병들을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기 위해 200페이지나 되는 책이 만들어져 있으며,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집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숨만 쉬면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선을 포함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 문자적으로 계명을 지켰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 계명의 더 중한 바 정의와 자비와 믿음을 저버림으로 오히려 율법을 어겼다는데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에 저촉되는지 여부는 모세율법 자체에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율법을 해설하여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한 미쉬나에는 저촉되는 것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바로 미쉬나에 따른 규정을 예수님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여 왔는바, 할례를 행하는 것 자체가 미쉬나에서 금지하는 여러 규정들을 위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할례가 안식일 규정 위에 있다고 해석하여 유대인들은 할례를 안식일에도 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행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겠다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한편, 안식일 계명의 본 취지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38년 동안이나 불치의 병으로 누워 있는 사람은 아무리 경건하여도 그런 안식을 못 누린다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 돌보아 주셔야 한다는 언약의 취지는 무색해 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심으로 이 사람의 병을 치유하여 안식을 누리게 함으로, 할례의 언약은 물론 안식일 계명의 본 취지를 성취하셨습니다. 또한 이는 영생에 대한 좋은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