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양식과 그리스도 (7-1)-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자들

요한복음 6장 60절 – 71절
계시와 약속이 아무리 크더라도, 몇몇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메시지를 믿음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하면 믿는 자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복음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히4: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을 결부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때의 하나님의 말씀은 “올바르게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님의 오심에 대한 가르침까지 들은 가버나움 회당의 제자들은 더욱 불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세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 충분하고 메시야는 자신들의 능력이 부족한 부분들(예, 식량의 공급, 병의 치유, 로마 제국을 정복)만 채워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주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자들로, 죄사함을 얻게 하기 위해 아들에게로 이끌지 아니하시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에게로 이끌지 아니하시면 그 어떤 누구도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그분에게 가서 죄 사함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모두는 영원토록 함께 교제를 나누며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기도한 자들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신 증거 중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하나님께 반역하지 말고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부께서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섬기시겠습니까? – 요한복음 12:24 – 26절

매일묵상(2021/5/24-28)

2021/5/24
시편 22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윗의 이 기도를 우리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드리셨습니다. 그 만큼 이 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감상할 수 있습니다. 1-21절에서는 시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고통과 죽음의 경험을 노래합니다. 22-31절은 구원받은 찬양과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극적인 전환을 보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고통 가운데 부르짖은 시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인의 구원의 체험을, 우리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에서 경험하였습니다. 1-21절은 버림받은 고통(1절), 무력하게 십자가 상에 달려 있을 때 유대 지도층과 군중들의 비웃는 소리(6-8절). 십자가 상의 목마름의 고통(15절),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힌 장면(16절), 자신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는 장면(18절)은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으며,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22-31절은 부활의 승리를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형제가 되었음을 말합니다(요20:17).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다윗과 주님의 경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고난으로 탄식하는 우리에게도 적용되어 고난이 놀라운 감사와 찬양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지는 축복이며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은 만유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땅 끝에 사는 사람들도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며, 이 세상 모든 민족이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시22:27, 새번역).


2021/5/25
시편23편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6절, 새번역).

이 시는 다윗의 시로서 시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입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 (가) 양과 목자(1-3절)-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 (나)여행자와 동반자(4절)- 인생의 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다) 손님과 연회의 주인(5,6절) – 언제나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각각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상’이라는 대목은 사무엘하17:27-29절을 회상시킵니다. 압살롬에 쫓겨 마하나임으로 피신한 왕 다윗은 군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이때 바르실래를 통해 풍부하게 공급받았고, 결국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적대적인 환경과 원수들이 포진한 비상 사태에도 하나님의 보살핌을 경험한 다윗은 이를 회상하고 감사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고난 속의 노래, 밤의 노래는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경험하여 부르는 신비로운 노래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속에서도 인생의 밤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하시는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하지 마십시요. 한편 6절은 ‘살리로다’라고 통상 번역되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내가 그 집에 돌아갈 것입니다’는 의미입니다. 즉 땅의 ‘길’, ‘골짜기’, ‘위협’이 끝날 때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진정 귀환할 것입니다. 이는 다윗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의 특권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2021/5/26
잠언13: 10절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인다.”(새번역)
8절은 재물과 책망의 주제를 다루고 9절은 이를 발전시켜 의인의 흥왕과 악인의 멸망을 기술합니다. 재물 여부에도 불구하고 의인은 도덕적 책망을 달갑게 받아들여 행복한 운명을 갖게 되는 반면, 이를 거부하는 악인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책망을 받아들이는 여부는 의인과 악인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기 때문에, 10절은 책망의 주제를 더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중요한 사람은 물론 매우 슬기롭기까지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충고나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거만한 바보는 자기 자신이 바르다고 확신하는 것보다 더 좋은 지혜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여 전혀 자신의 의견을 굽힐 줄 모릅니다. 당연히 그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들을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를 책망한다는 것은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고 도리어 격한 논쟁만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 반면 충고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비판을 들을 때 한 번 더 생각하여 잘못된 점이 있다면 교정합니다. 그 결과 그의 행동은 훨씬 좋은 결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그 분야에 밝은 유능한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일을 추진해야만 할 것입니다. SNS가 발달한 요즈음 고객의 평점은 매우 중요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블랙컨슈머들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성공한 가게들은 이들의 의견 또한 무시하지 않고 고려하여 가게 발전의 디딤돌로 삼는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영광을 물려받고, 미련한 사람은 수치를 당할 뿐이다.”(잠3:35, 새번역).


2021/5/27
잠언 13:11절
“공으로 얻은 재산은 날아가지만 애써 모은 재산은 불어난다.”(공동번역).

7절에서 11절 총 다섯 구절은 부(재산)과 윤리에 관한 소 단락으로, 11절은 그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0절이 8절에 암묵적으로 나오는 충고를 받아들이는 자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 같이, 11절은 9절에서 논한 결론, 즉 의인의 영구한 부와 악인의 일시적인 부의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잠언은 근면 성실하게 모든 재물을 긍정하나 악하게 재물을 얻으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정죄하고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건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획득한 재물이라고 줄여 말할 수 있는데, 영어는 이를 “easy money”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타인을 희생시키는 모든 경우를 말하며, 폭정, 불의, 갈취, 거짓말 그리고 횡재 등이 포함됩니다. 이 반면, 인내, 근면, 사려 깊은 행동, 관대함 그리고 믿음이라는 덕들을 통해 재물을 얻으려면 당연히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10절 후반에 등장하는 ‘애써 모은’(by hand의 의역)이라는 단어는 ‘점차적으로’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천천히, 적게, 꾸준히 손으로 일하여 재물을 축척한다는 의미이지 횡재는 생각도 없습니다. 실상 불의로 얻은 재물이 단명하고 올바르게 획득한 재물이 오래 간다는 말은 악인과 의인이 가지는 성품과 가치의 지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예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재산 분배를 요구하여 쉽게 재물을 획득한 작은 아들은 먼 나라로 이주하여 허랑방탕하다가 전부 탕진하였습니다. 복권에 당첨된 많은 사람들 역시 재물을 어이없게 탕진하는데, 그 주된 이유가 재물의 가치와 관리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22:4, 새번역).

2021/5/28
잠언 13:12절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병들지만, 소원이 이루어지면 생명나무를 얻는다.”(새번역)

12절은 ‘소원이 이루어진다,’ 19절은 ‘소원이 성취된다’라고 하여 8개의 구절(12-19)이 단락을 이루면서,  ‘지혜와 성취, 어리석음과 좌절’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소원이 성취된다는 것은 생명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과실을 먹으려면 지혜자의 교훈에 목말라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모은 잠언은 생명샘입니다. 한편, 12절과 11절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11절은 착실하게 모은 의인의 재물은 불어나지만, 힘안들이고 얻은 재산은 없어진다는 교훈을 전합니다. 12절은 더 나아가 악인의 소망은 결국 이루지지 않아 마음이 병들지만, 의인의 소원은 성취되어 그의 삶의 생명나무가 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개정개역에서는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이 지체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소망없는 외부적 상황은 심신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정신적, 심리적, 영적 에너지가 몸 전체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의인이 가지는 소원성취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은 에너지를 갱신시키고, 용기를 새롭게 하여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합니다. 비록 윤리적인 단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이 요소를 반드시 전제하고 이 잠언을 읽어야만 하며,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실로 세상에서 악인의 형통은 하나님의 저주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데, 이는 그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 (잠언13:14, 새번역).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 (7)-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자들

요한복음 6장 60 – 71절

당신이 참된 양식으로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생을 가진다는 예수님의 강화에 불쾌한 생각을 가지고 웅성거리는 제자들에게 추가 설명을 하신 부분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 제자들은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였기에, 주님은 당신의 승천을 말씀하십니다. 이해하기 어려워도 당신이 이들을 위해 죽고 부활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는 것을 목격한다면, 속죄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당신이 죽을 몸을 가지시고 행하는 이적들은 죄와 사망에 지배를 받는 이 세상에서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죄 용서를 받고 영원한 부활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죄에 대한 대가를 당신이 치루실 것을 믿어야 하는데, 그것을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로 강력한 상징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의 죄의 대가로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사 승천하셔야 하는 것은 모든 불순종하는 것들을 다스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마지막은 사망의 철폐입니다. 당신이 승천하셔야 성령께서 오셔서 당신의 말씀들- 믿는 자에 대한 사면의 선언 -을 가지고 각 사람에게 증언하심으로 제자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체를 글자그대로 그들이 씹어먹는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런 효력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지 않고 그리스도를 먹을 수 없습니다.즉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들이 인간에게 능력으로 도달하게 되는 통로는 “예수의 말씀들을 사용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매일묵상(2021/5/17 – 21)

2021/5/17
시편20편
어떤 이는 전차를 자랑하고, 어떤 이는 기마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합니다.”(7절, 새번역)

전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였을 때 블레셋이 침공하였습니다. 이때 사무엘은 제사를 드리고 간구하자 하나님은 큰 천둥을 보내어 블레셋 군대를 어지럽히자 결국 이스라엘은 승리하였습니다. 이런 역사를 아는 다윗은 전쟁 전날 밤 기도와 희생 제사를 드리면서 승리를 기원하는 본 시편을 지었습니다. 이 시는 여러 목소리가 들립니다. (1) 제사장과 백성의 기도 : 욍이 조용히 기도할 때 제사장과 백성은 왕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구합니다(1-2절). 이어 왕이 희생 제사를 드릴 때 그들은 그것이 열납되기를 기도하며(3절), 그 결과 왕의 계획이 성공하여 승리를 쟁취하기를 간구합니다(4-5절). (2) 왕의 확신: 이에 대하여 왕은 기도(6절)와 믿음(7,8절)이 승리로 가는 두 가지 길이라는 확신을 노래합니다. (3) 마지막으로 제사장과 백성은 왕이 승리하도록 주님의 응답을 간구하면서 예배를 마칩니다(9절). 전도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9:11,새번역). 이런 변화무쌍한 세상을 배경으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준비한 사람은 결전의 날 반드시 주님의 간섭과 은혜를 간구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본 시편은 이때 좋은 기도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전쟁을 대비하여 군마를 준비해도, 승리는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 (잠21:31, 새번역).


2021/5/18
시편21편 – 전쟁 후 : 승리의 노래
“온갖 좋은 복을 왕에게 내려 주시고, 왕의 머리에 순금 면류관을 씌워 주셨습니다”(3절)

환희에 찬 이 시는 왕의 대관식이나 기념일을 경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20편은 전쟁 전 승리를 위한 기도와 믿음을, 21편은 그 간구와 신뢰가 전쟁에서 응답되었음을 회상하며 노래합니다. 이런 과거와 미래에 대한 언급은 각각 2-7절과 8-12절에 반영되었기에, 본 시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1) 왕과 주님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경험(1-7절) (2) 왕이 누릴 미래의 승리 (8-12) (3) 주님에게만 찬송을 (13절). 한편, 시에 등장하는 전쟁의 이미지는 구약 역사의 중심에 놓여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며 대륙을 잇는 무역로가 통과하는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많은 이방민족들이 함께 살면서 세력확장의 각축지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늘 약소국이었기에 하나님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오면 이런 전쟁의 의미를 영적인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즉 예수께서 왕이자 용사로서 오셨지만, 로마를 쳐부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죄의 본질)과 사망, 그리고 마귀를 정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죄인들의 손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셨고, 승천하심으로 영원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사 지금 이 세상을 배후에서 장악한 마귀의 세력과 싸우고 계십니다. 전쟁의 핵심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 여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전쟁은 혈과 육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전쟁입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계12:17).


2021/5/19
잠언13:7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본 잠언은 그 뜻이 매우 모호하여 다양하게 해석됩니만, 겉모습 때문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이런 면을 알기에 겉모습을 보고서 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잠언은 물질적 부와 영적인 부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그는 물질적으로는 부유하나 영적으로는 가난하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잠언은 세 가지 해석 방향이 있습니다. (1) 탐욕에 대한 책망: 탐욕은 타인을 희생하여 자신을 부하게 만들 수 있지만,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참고: 마16:26). 이 경우 본 잠언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바울에 의해 예증(마19:29; 고후6:10)된 ‘부유한 빈곤 rich poverty’의 역설을 권면합니다. (2) 자기 기만에 대한 경고: 이 경우 “스스로를 부유하다고 생각하나…..,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나 .….”라고 읽혀집니다. 너무나도 눈이 멀어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를 땅 속에 파묻은 종이 그런 유형의 사람입니다. (3) 위선에 대한 정죄: 이 경우 본 잠언은 위선자를 정죄합니다. 가난한 바보가 스스로 부한 체하는 것은 마치 자신의 지혜로 성공한 것처럼 보여 사회적 존경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며, 부유한 바보가 가난한 체하는 것은 인색함을 숨기려는 몸짓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두 거짓말쟁이는 악한 자들로서, 전자는 합당치 못한 명예를 받고, 후자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정적 도움을 거절하여, 주님과 사회 모두에 수치가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엡4:15,현대인의성경).


2021/5/20
잠언 13:8
“사람의 재물이 자기 생명의 속전일 수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

본 잠언은 해석이 둘로 나뉘어집니다. 그 원인은 히브리어 단어 ‘게아라’가 ‘협박’과 ‘책망’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 번역은 둘로 나누어 졌지만, 한글 번역 성경들은 모두 ‘협박’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게아라’를 ‘협박, 위협’의 의미로 본다면, 납치된 상황이 떠오르게 됩니다. 만약 부자가 납치되었거나 협박을 받고 있다면, 부자 자신이나 그 가족이 납치범이 요구하는 금액(속전)을 지불해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은 부의 힘을 보여주는 반면, 그런 재물도 협박을 당하지 않도록 할 힘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가난하게 된다면, 납치될 가능성은 없을 것입니다. 납치하여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재물은 힘이 있지만 그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반면 ‘게아라’를 ‘책망’으로 이해한다면, 부자도 가난한 자도 어떤 죄책을 지고 있는 상황이 전제됩니다. 그런 죄책을 아는 부자는 위협적인 도덕적 책망을 들으면 반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물을 제대로 사용하여 대가를 지불함으로 목숨을 건지지만, 가난한 사람은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책망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NICOT). 여기서 ‘책망’이란 ‘도덕적 비난을 내용으로 하는 분노에 찬 항의’를 표시하며, ‘속(贖)하다ransom’는 목숨을 구하는 대가로 요구되거나 지불될 가격을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 인간 본성에 대한 책망이 담겨있습니다. 이 책망에 반응한 사람이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그(성령님)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2021/5/21
잠언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 기자는 유사한 히브리어 발음을 가진 두 단어 – ‘가난한- 라쉬’(8절)과 ‘사악한-레솨임’(9절) -를 사용하여 두 구절을 서로 연관시키는 동시에, 의미를 영원의 차원까지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8절에 따르면, 사람이 도덕적인 질책을 받아들여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그 재물은 죄책을 진 그를 구원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는 그의 의가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구한 부는 오직 의인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는 올바른 책망에 대하여 기꺼이 반응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간에 도덕적 질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부터 그는 몰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논하고 있는 9절은 확실히 의미가 진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등불의 빛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성공과 행복 그리고 장수 등을 상징하지만, 더 나아가 영원한 생명까지 함축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의 관점에서 현실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위 잠언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삽과 같은 시편 기자가 고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시편73편). 왜냐하면 악인이 죽을 때에도 그 힘이 건강하고, 자녀들도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래할 영원한 심판을 전제로 할 때 이 잠언은 단 한 경우도 예외가 없이 성취될 것입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13:41-43).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6)-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자들(2)

요한복음 6장 60 – 71절

오병이어의 표적을 베푸신 다음 날 가버나움에 제자들과 함께 가셨더니, 기적의 떡과 생선을 먹은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습니다. 이들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주님께 먹으면 결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영생할 수 있는 그 떡을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당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생을 한다는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당신이 쏟을 피와 찢길 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냉소적일 뿐만 아니라, 그 말씀 자체가 불쾌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더욱이 주님은 친히 선포하시기를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우지 못하면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올 수 없다고 하시자, 제자들은 더욱 불쾌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고, 누구는 받지 못한 자들이겠습니까? 받은 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고, 받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받은 자들은 자신의 현실을 냉철하게 계산하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삶의 지침 역시 주 예수의 가르침, “네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는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바로 주님의 말씀에 거함으로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매일묵상(2021/5/10 – 14)

2021/5/10
시편19편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절)

본 시편은 3 종류의 목소리(voice)가 차례로 전면에 등장하여 3가지 주제를 연주함으로써 멋진 대위법( 對位法)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오는 목소리는 창조물의 것(1-6절)으로, 주제는 ‘역설 Paradox’입니다. 온 우주는 아무런 음성도 내지 않지만 피조물의 질서를 통하여 창조주의 영광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목소리(7-10)로서, 주제는 ‘완전perfection’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완전함을 노래합니다. 세 번째는 죄인의 목소리(11-14)로서, 주제는 ‘기도praying’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기도합니다. 먼저 창조물의 웅변(1-6절)을 들어보겠습니다. 온 우주는 공간과 시간과 땅을 통해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 선포합니다. 특히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4절)에서 사용된 ‘소리’는 ‘줄Line’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할당된 지배권 혹은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이 지배권은 날마다 새로이 떠오르고 어마어마한 힘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며 모든 곳을 비추는 ‘해’를 통해(5-6절) 행사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하늘은 언어를 쏟아내지만, ‘언어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주 공간의 모든 별들이 서로 연결하는 줄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것과 같은 기이함입니다. 다만, 창조물의 그런 메시지는 제한되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여, 시편 기자는 ‘말씀의 목소리’(7-10절)를 노래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2021/5/11
시편19편 (완전: 7-10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7절)


모든 창조물이 창조주의 영광을 노래하지만 창조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면 인간은 자연 종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7-10절). 그분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야훼)로서 본 단락에서 7번이나 반복해서 그 이름이 들려집니다. 계시된 그분의 말씀은 ‘율법, 증거, 교훈, 계명, 경외, 법’으로 표현되는 6개의 구별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하나님의 뜻(의지)을 알려주는 동의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토라)’은 계시된 그분의 뜻에 대한 포괄적인 용어이며, ‘증거’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입증된 진리를 나타내고, ‘교훈’은 인생의 세부적 사항에 적용되는 측면을, ‘계명’은 순종의 측면을, ‘경외’는 존경할 가치가 있는 측면을, 마지막 ‘법’은 권위 있는 결정이라는 측면을 각각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된 하나님의 뜻은 모든 부분에서 ‘완전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오염이 없이 순결하며,’ ‘변함없이 영원하고,’ ‘참되고 의로우며,’ ‘귀중하고,’ ‘참된 즐거움으로 가득차서 달콤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참된 생명이 회복되며, 지혜롭게 되며, 마음이 가르침을 받아 기쁘게 되고, 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바라는 놀라운 축복이지만,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하여 시편 기자는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11-14절).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시편19:14).


2021/5/12
시편 19편 (기도: 11-14절)
“주님의 종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셔서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지켜 주십시오. 그 때에야 나는 온전하게 되어서, 모든 끔찍한 죄악을 벗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13절, 새번역)

세 번째 목소리로 죄인의 기도를 담고 있는 이번 단락(11-14절)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권에 들어온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주님의 말씀으로 ‘경고를 받아 깨닫게 되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풍성한 상을 받는 진리를 발견합니다(11).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죄를 확신하고 용서를 구할 준비를 합니다(12). 중생한 그에게는 새로운 열망이 쏟아오르게 되는데, ‘온전한 삶’에 대한 열망입니다. 그것은 말씀 자체가 완전함과 같습니다. 특히 생각과 언어 사용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14). 주님도 자신이 한 말씀으로 그분 자신이 알려지는데(7-10),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창조물은 조용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순종의 삶을 계속적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신자의 절망과 열망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14절이 그 해법을 제시합니다. 바로 우리의 반석이시며, 구속자(고엘)이신 주님께 호소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 구속자(고엘)는 룻이 살아갈 모든 것을 대신 담당한 보아스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청산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사 당신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셨습니다. 거룩함은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8:14, 새번역).


2021/5/13
잠언 13:5
“의인은 거짓말하기를 싫어하지만, 악인은 염치도 없이 수치스러운 일을 한다.”(새번역)

본 절은 말과 일을 의와 악이라는 도덕적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술이 좋은 열매를 생산하여 그 결과를 먹는 사람(2절), 사려깊은 언어사용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사람(3절),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여 바라는 모든 것을 넉넉히 얻는 사람(4절)을 5절에서는 의인(義人)이라고 정의합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갈망하여 그분을 삶에서 발견합니다(시42:1-2). 왜냐하면 의인은 거짓 입술을 미워하시나 진실됨을 기뻐하시고, 사람을 귀히 여기시며, 진리로 가장 훌륭하게 섬김받으시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어떤 거짓말도 아주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편, 악인은 썪은 생선처럼 악취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의 허영과 이기심이 사람들의 관계에 독을 풀어 넣고, 사회를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태는 결국 백일 하에 드러나게 되고, 그들은 공공연히 수치를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이 염치도 없이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왕비 이세벨은 거짓 증인 둘을 세운 뒤 의로운 나봇을 돌로 쳐서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자 세상은 두려워 덮었지만, 주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 가문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그후 왕비 이세벨은 수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마7:18-20), 새번역).


2021/5/14
잠언13:6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하게 하느니라”

본 구절은 ‘공의’와 ‘악’을 인격화시켜서 참된 진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공의’를 보호하는 사람으로, ‘악’을 전복시켜 패망하게 하는 사람으로 묘사하여 1-4절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화자(speakers)와 행위자들(지혜로운 아들, 거만한 사람 등)의 운명과 대칭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자기 입을 ‘지키는’ 자”와 6절의 ‘보호하고’는 같은 동사(나차르)라는 것만 보아도 이런 연결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다만 6절은 그 의미를 영원의 차원까지 높이고 있을 뿐입니다.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 즉 비난받을 것이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호합니다. 이들이 내어딛는 발걸음 하나 마다 모두 주님과 그분의 우주적 왕국의 안녕과 복지를 이루는 방향으로 향하져 있습니다. 그러나 ‘악’은 죄인의 길(way)을 뒤집어 엎어버립니다. 여기서 ‘패망하게 한다’는 동사는 ‘살랍’으로 “비틀고 왜곡시켜 윤리에 속한 무언가를 파멸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길(way)이라는 은유는 의와 악이 자신들에 합당한 운명을 구축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오직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신실한 삶만이 그 행하는 자를 보호하지만, 신실하지 못한 거짓말들은 죄인들을 전복시켜 그 결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의인과 악이들 사이에 계셔 지켜보시며 듣고 그 행한 대로 심판하고 계시고, 또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의 전제가 니이체의 철학이나 논어와 맹자의 사상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만유의 주님이야말로 모든 도덕질서의 궁극적 보호자이십니다. “주님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켜 보시지만, 신의가 없는 사람의 말은 뒤엎으신다.”(잠22:12, 새번역).

매일묵상(2021/5/3 – 7)

2021/5/3
시편 18편 – 배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2절, 새번역)

이 시의 배경은 주님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그리고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뒤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린 시입니다. 사무엘하 22장에 실질상 동일한 내용의 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표제를 읽고 시를 감상해 보면 다윗은 상징법을 써서 하나님의 구원을 묘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일생에 주님께서 그룹을 타고 강림하셔서 도와 주신 경우도 없고(10), 여호수아처럼 우박을 보내어 적들을 죽인 경우도 없으며(12), 홍해를 가르신 경험도 다윗은 하지 못하였습니다(15). 다윗이 구원을 받은 것은 다른 수단들입니다: 갑작스러운 블레셋 족속의 침입(삼상23:26이하), 엔게디 광야의 험준한 지형(삼상24:1-3), 쉽게 흔들리는 사울의 양심(삼상24, 26장), 그리고 도주하는 것입니다(삼상27:1). 그러나 구원을 받은 후 돌이켜 보니,  그런 구원은 오직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7-8; 출19:18), 이집트를 심판하시고(9-12; 출9:13)), 홍해를 가르신(15) 바로 그 주님이 배후에서 일하셨기 때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은 블레셋이나 사울을 피하여 아둘람 굴이나 염소바위에 몸을 숨기나 실제로 그의 반석이나 피난처가 되신 분은 오직 주님이셨습니다. 다만 주님은 그의 영광을 숨기시고 하늘 보좌에서 당신의 종을 위해 통치하셨던 것입니다(10-11절). 우리의 일생도 같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25:2).


2021/5/4
시편18편 – 부르짖음과 응답
“나의 찬양을 받으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3절).

시편 18편은 배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나 다른 교훈들이 있습니다. 먼저, 다윗의 절실한 필요와 주님의 구원의 권능 사이에 연관이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궁전에서 일어나는 폭풍 가운데 있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셔서, 황량한 광야의 생활을 하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어야만 하였습니다. 다윗은 10년의 도피 기간 동안 많은 시편을 기록하였고, 왕이 될 자질을 검증받았습니다. 다윗의 시는 많은 경우 탄원시입니다. 다윗은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었고, 여기에 절박한 삶의 경험은 주님의 고난을 노래하기 아주 적절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그가 고난을 극복하고 왕 위에 오르는 것 자체가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잘 예표하는 삶이었습니다. 1-19절의 내용을 보면 구원하시기 위해 기도를 기다리는 주님의 주권적 권능의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은 사망의 줄이 다윗을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미쳤을 때였습니다(4-5). 다윗은 부르짖었고 주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이어 20-45절은 다윗이 이런 과거의 그의 경험으로부터 받은 교훈들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성경의 교훈들을 배우고, 그 교훈들에 담겨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신 성령님의 뜻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약1:5, 새번역).


2021/5/5
시편18편 – 신실한 삶과 주님의 구원
“그 앞에서 나는 흠 없이 살면서 죄짓는 일이 없도록 나 스스로를 지켰다.”(23절, 새번역)

본 시편이 노래하는 주제 중 또 하나는 “신실한 삶과 주님의 구원”입니다. 이 시가 노래하는 방법은 공의로우신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며, 그런 공의가 어떻게 다윗에게 적용되어 그의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진술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원칙은 의로운 자를 보답하신다(20-24)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원칙을 삶에서 절실하게 체험하였습니다. 즉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는 비록 그가 어두움 가운데 있더라도 빛을 빛추어 주셨고, 적군 속을 달려도 주님은 자신을 지켜주셨습니다(25-29).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주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라고 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의로운 길을 능동적으로 걸어가야만 합니다. 이 원칙을 경험한 다윗은주님은 완전하시고, 그 말씀은 순수하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에게 오는 모든 자의 방패가 되신다(30절)고 노래합니다. 한편, 이런 체험이 “흠 없이 살면서 죄짓는 일이 없도록 자신 스스로를 지키도록” 만든 것은 사실이나, 다윗은 이렇게 살도록 힘주시고, 용기를 북돋우어 주신 분 역시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32). 이 고백은 바울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우리 안에 이루시기 위함입니다(롬8:28-29). 이런 삶이 현재 신자들의 삶이며, 영생의 본질입니다. 결국 주님이 피로 사셔서 이 세상에서 훈련하여 의롭게 변화된 백성들만이 남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시18:1, 새번역). 시편 18편 – 영원한 하나님 나라.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그리스도, 메시야)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50절)


2021/5/6
다윗은 자신의 나라와 왕위가 영원히 계속된다는 확신 가운데 시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 확신은 자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견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보낸 신탁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2-16). 다윗은 이 말씀을 근거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가문은 400년 정도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여(비시586), 결코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나단의 신탁과 이를 근거한 본 시편의 확신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다윗 왕은 단지 죽음을 이기신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입니다. 50절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는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의 번역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다윗 보다 훨씬 위대한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왕 다윗에 대한 소망은 다윗의 씨(후손)인 주 예수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의 부활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사망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의 가장 큰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막10:48, 새번역)- 맹인 거지 바디매오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6) –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자들

요한복음 6장 60-71절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만 영생을 가진다고 선포하시자 이를 들은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불쾌하였기 때문입니다.우리도 오늘날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때 복음이 우리 감정을 건드리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임하셨다”는 메시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입니다. 회개하여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장 마음에 “내가 비록 의인은 아니나 그렇다고 큰 죄인도 아닌데…. 복음이 왜 필요하지?” 이것을 깨닫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 산을 넘지 못하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여도, 그것은 예수님의 힘을 빌려 세상에서 잘 살고, 민족이 독립을 하고, 가정에 평화를 얻으며, 병이 고침을 받으며, 마음에 평화를 얻으려고, 삶에 지침이 되는 좋은 말씀을 들고 죽어서 천국에 가려고, 등등으로 복음이 재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평화를 얻고, 가정에 화평이 있고, 바르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부자들, 지식인들은 예수가 필요 없습니다. 여기 제자들 역시 다른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제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들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의 인생의 지침이 되고, 성령께서 그 말씀이 삶 가운데 열매를 맺도록 힘주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살아 있는 생명의 종교로서 불교와 타 종교, 그리고 철학과의 차이입니다.

매일묵상(2021/04/26 – 30)

2021/04/26
시편17편
“주님, 이 세상에서 받을 몫을 다 받고 사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몸소 구해 주십시오. 그들은 주님께서 쌓아 두신 재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남은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그래도 남아서 자식의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줍니다”(14절, 새번역)

이 다윗의 시는 ‘들으소서’(1절), ‘기울이소서’(6절), ‘일어나소서’(13절)의 세개의 호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호소(1-5절)는 다윗의 의로움을 변론하며, 두 번째 호소(6-12절)는 무자비한 원수로부터 절박한 구원의 필요를 알리며, 세 번째 호소(13-14절)는 하나님의 행동을 요청합니다. 결론(15절)으로 주님의 얼굴을 뵈올 것을 믿으며 의롭게 살아가고자 다짐합니다. 사무엘상 23:25절 이하가 이 시의 배경으로 생각됩니다.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 숨어 있을 때 사울은 군사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은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면 산 저쪽으로 피신할 정도로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포위되어 잡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기치 않은 블레셋 군대의 침입으로 사울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사해 북쪽 오아시스 엔게디로 피신합니다. 이렇게 다윗이 계속 피신한 이유는 사울이 왕으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윗의 이 기도는 응답을 받지만, 자신의 말처럼 의롭게 주님을 뵐 수 있는지 여부는 시험대에 오릅니다. 그 시험은 엔게디 동굴에서 일어납니다. 다윗은 다시 자신을 죽이러 왔다가 일을 보러 동굴에 들어온 사울 왕을 살려줍니다. 다윗은 주님의 시험에서 합격하였습니다. “나는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습니다. 깨어나서 주님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시편17:15, 새번역)


2021/04/27
잠언12:28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본 절은15절부터 시작되는 12장 후반부를 결론 내리는 장엄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생명과 사망은 영원한 심판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영원한 교류를 가지게 됩니다. 의학적인 죽음, 즉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주님과의 관계를 끊어 내지 못합니다. 잠언14:32은 이렇게 말합니다. “재난이 오면 악인은 쓰러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어도 희망이 있다.”(현대인의성경). 잠언 14:32절과 본 구절을 비교한다면, 잠언의 ‘지혜’는 금생의 삶을 돌파하여 죽음을 넘는 삶을 말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공의로운 길에 In the path of righteousness”라는 말은 인간 실존이 걸어가야만 하는 윤리적인 영역 즉,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친절하게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그의 생활방식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의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만, 그로 인한 결과들까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결과들을 산출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도덕질서를 유지하여서 우리들이 행하는 ‘의’가 풍성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영역에 머무르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한 마디로 의의 댓가(wages)는 주님 앞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를 행한다 하여도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경건한 의’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나오는 어떠한 ‘의’ 보다 탁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길에 있는 자들을 받아들이셔서 당신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고 계십니다. 다만 지금은 그 맛만을 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충만함을 경험할 것입니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잠언10:16).


2021/04/28
잠언13:1
“지혜로운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지만, 거만한 사람은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새번역)

잠언13장은 4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6절) 언어와 윤리, (7-11절) 재물과 윤리, (12-19절) 지혜와 어리석음이 낳는 삶의 결과, (20-25절)영원한 삶의 조망. 13장 1절은 이 모든 것을 이끄는 도입부분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혜로 만든 곳이기 때문에, 자녀들이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하여 아버지는 지대한 관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지혜로운 아들과 거만한(mocker) 사람을 대조하여 그 특징을 묘사함으로 순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자는 아버지가 타이르는 말을 주의 깊게 듣지만, 후자는 도덕적 꾸지람과 교육 과정을 경멸합니다. ‘꾸지람 rebuke’의 히브리어는 “도덕적으로 분개하여 항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언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하고 가르치는 대행자들을 ‘지혜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부모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절은 거만한 자들은 범죄하지만 도덕적 훈계를 받기 거절한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실상 지혜로운 사람이 받은 한 마디의 도덕적 책망은 미련한 자가 받는 매 100대 보다 더욱 효과적입니다(잠17:10). 주님께서 거만하며 남을 조롱하는 자들을 통조림(?)으로 만드시는 것을 본다면 순진하여 속기 쉬운 자들 역시 정신차릴 것입니다(잠19:25). 우리 주님을 그리고 있는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은 지혜로운 아들의 모델이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반역한 죄인들이 사는 고통스러운 징계의 학교인 세상에 내려오셔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


2021/04/29
잠언13:2
“선한 사람은 자기가 한 말로 복을 누리고 살지만 악한 사람은 폭력을 일삼는다.”(현대인성경)
From the fruit of his mouth a man eats what is good, but the desire of the treacherous is for violence. (ESV)

2절은 ‘먹는다 eat’는 단어를 사용하여. 1절의 ‘듣는다’에서 3절의 ‘말하다’라는 문장으로 부드럽게 이전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과 공동체에 충성스럽게 말하는 자는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산출하나, 불충한 자들은 이와 반대입니다. “사람이 좋은 것들을 먹는다”는 문장은 믿음성 있게 말하는 자가 공동체에 바람직하고 도움이 되는 혜택을 만들어낸다는 것으로 일종의 환유법(미국 대통령 대신 ‘백악관’을 사용함)입니다. 그리고 진실되고 신뢰있는 말을 듣는 자들은 영적으로 바르게 양육됩니다. 따라서 2절은 1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1절에 등장하는 부모의 가르침을 듣고 자라나는 아들딸들은 하나님과 공동체에 정말 마음에 드는 열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자녀가 가르침에 순종한다면, 그들은 좋은 것(복록)을 넉넉하게 얻을 것입니다. 이 반면, 반역자는 거짓되거나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자녀들과 이웃의 권리를 침해하고 약탈합니다. 이 같은 자들(거만한 자가 포함)은 엄히 꾸지람을 들어야만 합니다(1절). 그러나 이들이 행한 강포는 부메랑이 되어 그들 자신에게 돌아오기 마련인데, 결국 그들에게 “멸망이 찾아옵니다”(3절). 이렇게 불충한 자는 친절이나 좋은 교훈과 관련하여 어떤 욕망도 없고, 충성스러운 자는 강포를 행할 아무런 욕망이 없다는 진실을 통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행위는 그 어떤 것이든 따르지 말아라.” (잠3:31,새번역).


2021/04/30
잠언13:3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입을 함부로 여는 사람은 자신을 파멸시킨다.” (새번역)

3절의 표제어는 ‘입mouth’입니다. 2절에서 ‘입’은 좋은 말을 내어 열매를 맺으라고 격려하지만, 여기서는 나쁜 말을 억제하도록 권고합니다. 또, ‘생명’의 히브리어는 ‘네페쉬’로 그 어근은 ‘목 neck’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의미는 ‘욕망’에서 ‘생명’으로 흘러갑니다. 만약 입을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좋은 것들을 먹습니다(2절). 만약 입을 적절하게 통제한다면 사람의 생명을 보전합니다(3절). 이제 언어가 먹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생사의 문제로 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폭언은 결국 ‘공포와 파멸’을 낳기 때문입니다(3절). 물론 부적절한 언어의 사용에는 성급하고 수다스러운 자기 중심적인 말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 문맥에서 경고하는 것은 폭력적인 언어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입을…여는”이라는 단어입니다. “열다 open”의 원어는 “파사크’인데 에스겔서에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열방의 신들에게 분향하는 모습을 거리에서 음행하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정욕 때문에 음행을 하여 파멸하듯이, 말하고 싶은 욕망이 격랑과 같이 몰려와 절제하지 못하고 입을 함부로 열게 되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만한 자들은 거의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분수를 모르고 폭언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 백성이 와서 부역 경감을 청원하자, 불순종하는 자는 “전갈로 징치하겠다”는 포학한 말을 하여 나라의 2/3를 상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약3:5,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