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8. 12. 24 – 28

이제 내일이면 2018년도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성탄절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이 태어나신 그 날에 하늘에 있는 천군천사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에게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그리고 자신들이 늘 경배하던 그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들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그 겸손과 신비를 하늘의 존재들은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날 밤에 한 천사가 베들레헴의 인접 지역에 있는 들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목자들이 밤에 양을 치고 있었는데 그 들에 있는 양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장소에서 기르는 양들과는 달리 그 양들은 성전 제사를 위한 양들로서, 만백성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릴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목자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자 홀연히 천군들이 나타나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 오셨던 것입니다. 기쁜 성탄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찬송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예수님 때문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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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로마서 1:1-7

〈희망의 인문학〉의 서평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미국의 언론인이며 사회비평가인 얼 쇼리스는 지금부터 10여 년 전, 우연한 기회에 교도소를 방문해 한 여죄수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사람들이 왜 가난할까요?”라는 쇼리스의 질문에 비니스 워커라는 이 여인은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정신적 삶이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죠”라고 대답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중산층들이 흔히 접할 수 있는 연주회와 공연, 박물관, 강연과 같은 ‘인문학’을 접하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힘들고, 그렇기 때문에 깊이 있게 사고하는 법, 현명하게 판단하는 법을 몰라 가난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 쇼리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인문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995년 노숙자, 빈민, 죄수 등을 대상으로 정규 대학 수준의 인문학을 가르치는 수업인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최고 수준의 교수진들이 모였고, 딱딱하고 어려운 강의를 피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을 이용해 참여자들과 토론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참여자 31명 중 17명이 끝까지 강의에 참여했고 이 17명은 모두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직에 성공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긍정적으로 바뀌고 언어표현 능력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을 우리가 접하고 성서를 공부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복음은 단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아 중심적인 죄된 길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종들이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선포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여야만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의 구속의 발판을 마련하시고 당신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계획하셨으며, 이를 이루시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다시 사신 목적은 우리로 그리스도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법과 죄로 물든 세상에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참된 상속자를 삼으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구속의 기초를 이룩하시며, 부활을 통하여 재판장과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성령님을 따라 살아감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이 성취되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여야만 하겠습니다.

매일말씀나눔

2018. 12. 17 – 21

선교사 헨리 마틴은 1805년에 영국을 떠나 인도에 갔으나 후에 이란으로 옮겨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었습니다. 케임브리지의 훌륭한 학자였던 그는 힌두어와 페르시아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였는데, 그 두 언어를 사용하는 무슬림들에게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헌신은 어찌나 강렬하고 뜨거웠던지 예수님을 욕하는 말을 들으면 자신을 찌르는 비수로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가 31세의 나이로 요절하기 1년 전쯤에 시라즈에서 누군가 그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왕세자가 전투에서 러시아 그리스도인들을 하도 많이 죽여서 그리스도가 무함마드의 옷자락을 붙들고 중단을 애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무함마드 앞에 무릎을 꿇었다니 그것은 어이없다 못해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 헨리 마틴은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신성을 모독하는 그 말이 내 영혼을 쩔렀다. 예수님이 영광을받지 못하신다면 나는 견딜 수 없다. 그분이 늘 그렇게 욕을 입는다면 그것은 내게 지옥과 같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자신이 느낀 부끄러움과 놀람이 살아 생전에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정도로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삶에 동화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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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에베소서 5:15-16

인터넷에 나오는 예화입니다. 열차에서 사과를 파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열차 통로를 지나며 “사과 팝니다. 사과 하나 사실래요?” 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열차의 끝부분까지 갔지만 사과는 여전히 한 개도 팔지 못하였습니다. 곤경에 처해있는 소년을 본 한 신사가 소년을 옆으로 불러내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기차 앞쪽으로 가더니 그 사과를 냅킨으로 광이 나게 닦은 후, 통로를 지나가며 사과를 먹는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맛있고 신선한지를 애기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소년에게 한 번 더 팔아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사과가 모두 팔렸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사과가 잠재 고객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라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에는 지혜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바로 지혜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세월이 악하기 때문에, 그리고 복음을 모르는 외인들에 대하여는 지혜롭게 처신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귀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지혜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복음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복음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복음이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삶이 바뀌어지려면 우리가 산상수훈에 기록되어 있는 복음의 진수를 실천하면 자연히 바뀌어집니다. 거기는 하나님이 원수된 우리들을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복음의 진수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지혜와 모든 총명이 없이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지혜를 구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역시 제한된 시간만을 가지고 있고, 복음 전도 이외에도 가정, 학교, 직장 등 우리에게 맡겨진 많은 일들이 있어, 이를 위해 삶이 잘 계획되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시간을 아끼라 혹은 모든 기회를 선용하라 혹은 시간을 구속하라(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시간을 재평가하라)는 말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좋은 팁을 소개하겠습니다. 그것은 몰간 박사가 학창 시절부터 실행하였던 방법입니다.

“주님 오늘 당신의 의제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을 한다.

1. 여러분의 계획을 조심스럽게 작성한다. – 종이 위에 7개의 수직선을 긋고 이어 수평선을 하나 하나 그으면서 그 날 할 일들을 조심스럽게 적어내려간다.
2. 현명하게 교란요소를 대처해 나간다 – 계획한 일을 실천해 나가다 보면 그 계획을 교란하는 요소가 등장히는데 그것이 그 날 주어진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
3. 실망하게 되는 일은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4. 열린 문들을 찾아 본다
5. 계획한 일들을 기쁘게 실천해 나간다-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6. 미해결 과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라

매일말씀나눔

2018. 12. 10 – 14

우리는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있고,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이론적 근거를 이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종을 명하시는 분의 독특성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어부 시절의 시몬 베드로가 좋은 예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 뿌옇게 먼동이 틀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호수에서 어부로동업하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밤새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호반에서 맥없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배를 빌려 띄우고 그것을 강단으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신 후에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이르셨습니다. 시몬은 밤새 노력했지만 잡지 못하였다고 항변하였는데 이는 어부로서 아버지에게 배우고 고된 경험으로 다져온 전문 지식으로 그분의 제안에 저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명하신 분은 다른 동료가 아닌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베드로의 순종의 결과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혀 다른 배를 불러야 했고, 결국 두 배 모두 고기의 무게로 가라앉기 직전이 되었습니다(눅5:1-11).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순종이 다른 모든 순종과 어떻게 차이가 나겠습니까? “그(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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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빌립보서 4: 6-10

알 수 없는 불안 – 어떤 분이 월요일 전화를 해 왔습니다. 예전에 어떤 동영상에서 사람의 머리에서 애벌레를 꺼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주 월요일 새벽 자신의 강아지의 겨드랑이에서 애벌레를 꺼내는 꿈을 꾸고는 아침까지 불안이 들어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때 유투뷰에서 누가복음을 대본으로한 성서 영화를 보고는 힘을 얻고 불안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꿈 속에서 꺼낸 애벌레가 바로 두려움이었다고 해석하면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내용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약합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불안이 바로 인간 실존의 본질이라고도 합니다. 우주에는 사람을 위한 아무런 계획이 없고 오직 불안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불안에서 탈출하는 것이 여러분의 관심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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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8. 12. 3 – 7

흔히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위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세 가지 서로 다른 말을 옮긴 것이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은 말 그대로 그분을 위해 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동일한 열망은 우리의 기도만이 아니라 행동에도 감화를 끼치게 됩니다. 조지 허버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주와 더불어 하면 천한 일이란 없습니다. ‘주를 위해’ 그 한마디에 모두 밝고 깨끗해집니다.” 이 말은 어떤 행동이든 ‘그리스도를 위해’ 하면 그 행동의 색조가 선명해지고 밝아진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보다 중요한 것이 의도입니다. 사실 행동의 선하고 악함, 친절하고 잔인함, 아름답고 추함을 결정짓는 것은 배후의 의도 즉 동기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그렇게 평가하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넘어 이면에 숨은 생각과 동기를 보신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는가보다 왜 하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어떤 동기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대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고, 여기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야만 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