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논쟁과 그리스도 – 심판과 구원

안식일 논쟁과 그리스도 – 심판과 구원 (요한복음 5: 19-24)

유대인의 어느 명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를 이적으로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이적을 도외시하고 분이 나서 주님께 온 유대인들은 왜 구태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따졌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안식일에 일하실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인 당신 역시 안식일에 일하고 있다는 논지로 대답하시자, 유대인들은 더욱 주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아버지께서 안식일에 하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이 하는 것이며, 실상 아버지께서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와 같이 하고 있다는 취지로 변론을 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아버지께서 아들인 자신을 사랑하시기에, 자신이 행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이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진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실상 아들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자신이 아버지와 독립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가장 큰 소원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그 근거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며, 역시 그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여 이런 변론을 하시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불순종이라는 원죄를 치유하시는 일환이라고 판단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아버지께 그렇게 순종하셨는데 하물며 일개 피조물인 인간이야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여야만 하겠습니까? 이런 순종하시는 아들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더 큰 권위를 주심으로써 반대자들을 놀라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부활의 권능과 영원한 심판을 행하시는 심판자로서의 권능입니다. 심판을 행하시기 전 주님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구원을 받아 심판에 이르지 않게 됩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 하나님은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이 진리의 말씀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은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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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10절) 라고 사도는 탄식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한편으로는 생명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망을 초래할 수 있을까요?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망이 율법의 허물인 것일까요?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은 단호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죄악 된 우리의 본성은 나쁜 목적을 위해 선한 것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율법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 되고 죄악 자체를 비난해야 합니다. 실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죄를 범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체포된 후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뒤 형을 선고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는 그가 자신의 범법행위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감옥에 가둔 법을 비난하고픈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정죄한 것은 법이지만 법을 어긴 것은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율법 그 자체를 악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를 폭로하고, 그것을 유발시키며, 그것을 정죄할 뿐입니다. 우리의 죄와 사망에 대한 책임을 율법에 돌려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율법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율법 폐기론자들의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부패성이 문제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인해 율법 자체만으로는 우리를 구원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려는 독립성, 즉 죄된 마음이 내주하고 있기에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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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하시는 그리스도 – 안식일 논쟁

변론하시는 그리스도 – 안식일 논쟁 (요한복음 5장 15-18)

유대인의 어느 명절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주님은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장로들의 구전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물건 이동도 금하였고, 긴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병을 고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당국자들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이중으로 안식일을 범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이를 따지는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오히려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선포하시면서 안식일 논쟁을 촉발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도 하나님만은 안식일에도 우주를 보존하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도 사람이 태어나고, 죽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기 때문에 나도 일하고 있다”라고 선포하시자 유대인들은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고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고 있는 주님을 신성모독으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 자리는 일반적인 장소가 아니라 바로 성전뜰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변론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가야만 합니다. 한편, 주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모든 이적의 의미들은 전부 인간을 구원하는 표적들입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을 정복하지 못하고 이적만 행한다면 인간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죽어 심판의 자리로 나가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는 주님도 아니고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후 2년이 지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대권을 가지신 만유의 주님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저자이며, 영원히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런 주님을 신뢰하고 한 주간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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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종된 것은 ‘영의 새로운 것’을 위한 것이지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로마서 7장 6절에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죽어서 그 제약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공동번역)라는 메시지를 기록한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같은 메시지를 고린도 후서 3:6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 율법과 복음 사이의 철저한 대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새로운 계약을 이행하게 하셨을 따름입니다. 이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3:6, 공동번역). 옛 언약은 문자, 곧 우리 밖에 있는 돌판에 새긴 외적인 계약입니다. 새로운 계약 즉 새 언약은 복음, 곧 성령님에 의해 우리 마음에서 맺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속에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마음의 할례요,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방법이요, 현재 우리의 새로운 종의 신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지금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는 율법은 우리를 구속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들을 완전히 충족시키심으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이 반면, 우리의 새로운 삶에서 우리는 여전히 종의 신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종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남편이시며, 우리 또한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순종이 구원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지위에서 나오는 감사가 율법에 대한 복종의 원인입니다.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만, 복음은 “살아났으니 이것을 행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동기가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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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로마서4:25)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2천년 전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시다가, 은 30량에 유대지도층에 팔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입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를 증거하는 것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지고 죽었다가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고, 신약성경은 그 일을 예수께서 행하심으로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라는 대명제는 바로 신구약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사망을 철폐하시고 썩지 아니하실 것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망은 죄의 삯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주님이 십자가를 통한 속죄사역이 완성되었음과 이제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복된 소식을 선포한 사건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키심으로 온 세상의 심판자가 누구이심을 명백히 알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하여 점점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할 때는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사망이 영원히 철폐될 때입니다. 그때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김이 어디에 있느냐,”하고 노래할 것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부활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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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2020년의 부활절은 4월12일입니다. 부활절을 이렇게 결정하게 된 계기는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기서 결정된 것이 춘분(3월21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후에 오는 일요일로 정했습니다. 2020년 3월 21일이 지나고 첫 만월은 4월 7일경(음력3월15일)이며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이 4월12일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020년의 경우 4월 5일(일요일)부터 4월 11일(토요일)까지를 고난주간으로 부릅니다. 금년의 고난주간도 성경의 사건들을 따라 주님의 행적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요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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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오늘부터는 로마서 제7장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7장에서 제시되는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특권은 율법(모세율법을 의미- 다수학자)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타락한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15장에 묘사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사도들과 장로들의 결의로 구원의 방법으로서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말입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경우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규범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고 이를 지키도록 허용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도 제사법은 지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제사법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시민법적 규정의 모세 율법 역시 로마의 지배하에서 로마법에 충돌된다면 제대로 적용되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만 십계명(안식일 규정 제외)으로 대변되는 도덕법은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히 적용되나 그것이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소위 세 번째 기능입니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교회들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이들을 다 포함하여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구원사에 있어서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만이 받은 여러 가지 특권 가운데 하나였음이 분명합니다(롬9:4). 그러므로 모세 율법을 가볍게 여기거나 모세 율법으로부터 해방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증오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율법을 폐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생각되어 심히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대한 바울 자신의 견해는 어떠했을까요? 그는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14, 15절). 바울이 이러한 주장이 그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혁명적으로 들렸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율법(도덕법)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여전히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로마서 7장은 이런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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