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C 매일성경

2016. 9. 26 30

예수님은 먼저 보았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늘 주위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눈은 결코 도움이 필요한 장면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둘 다 강도 만난 자를 보았으나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진실로 보셨습니다. 그는 추한 실재 가운데 있는 인간의 궁핍함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반드시 그를 움직여 마음에 동정심을 일으켰고 그는 동정 어린 섬김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정은 말로만 그친 적은 결코 없었고, 행동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보셨으며, 느끼셨으며, 행동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본받는다면 이웃 사랑의 핵심적인 부분을 실천하게 되고 이 경우 논어를 비롯한 동양의 고전들이 그렇게도 많이 주장하는 인(仁) 사상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동정심에 비롯한 섬김은 요한 일서에서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저술한 요한 일서를 보면 사도는 예수님의 교훈을 잘 배워 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직접 듣고 보아 온 사도 요한은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였습니다. 오늘은 그가 배운 놀라운 구절을 먼저 보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6 18).

 

어제 본 요한 일서 3:16-18은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자기 희생 때문이었다는 놀라운 주장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세상은 결코 사랑의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다. 모두가 사랑의 의미를 알고 있기에 예수님의 가르침 같은 것은 필요없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한 비난 앞에서도 자기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사랑은 이상적인 사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좋고 고상한 것이지만, 모든 사랑은 어느 정도 다른 속셈으로 얼룩져 있으며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뒤섞여 있습니다. 장구한 인류 역사 속에서 오직 한 행동만이 더없이 순수한 사랑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주신 사건입니다. 그는 아무 가치도 없는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모든 것 즉, 그분 자신을 주셨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인 행동입니다.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지금 사도 요한은 골고다에서 비유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미 마가 다락방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만 그분의 섬김의 절정은 바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바로 골고다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말한 우리의 목숨을 버리라는 부르심은 결코 영웅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어떤 사람은 이런 부름을 받기도 합니다). 목숨을 내놓는 것은 당연히 평범한 섬김의 행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려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는 것도 없고 섬기는 것도 없는 곳에는 우리가 아무리 크게 나팔을 불어도 결코 사랑이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가르치시기를 주님과 같이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한데도 이것 보다도 못한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핌합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강력한 논조로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 재물을 가졌으며 그리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필요를 보는 한편, 또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든 자를 보는 한편, 약과 의료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지를 보는 한편,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굶주림을 보는 한편, 식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을 보는 한편,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핵심은 그가 자신이 가진 것과 본 것을 연결할 것인지, 아니면 둘을 명확히 구분할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역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그는 병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으며 병든 자를 보시자 고치셨습니다. 당신을 따라 온 군중들이 주린 것을 알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먹이셨습니다.

믿음은 이치를 따지는 신뢰이다.

성경말씀: 롬 4:17-22

어떤 기자가 유람선을 타고 남양군도를 지나다가 배가 파선을 함으로 많은 사람이 죽는 가운데도 나무조각을 붙잡고 여기저기 떠다니다가  천만다행으로 어느 무인도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햇빛과 비를 피하고 안락하게 자기 위해서는 먼저 집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나뭇가지와 풀등을 가지고 며칠을 수고하여 원시적이나마 집을 지었습니다. 이후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살아갔는데 날로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돌을 집어다가 서로 부딪혀서 불을 일으켰더니 그만 자리에 깔아놓은 나뭇잎에 옮겨 붙어 온 집을 불태웠습니다. 너무나 당황한 이 사람은하나님 너무나도 무심합니다. 얼마나 수고하여 만든 집인데요 하면서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데 멀리서 뚜-우하는 기선의 소리가 들여 왔습니다.구조를 받고 알고보니 이 지역은 무인도라 연기가 날리 없는데 연기가 나서 혹시나 하고 와 보았다고 하였습니다(이민우, 그냥 사랑하거라). 만약 집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평생 무인도에서 살았어야만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어리석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그것은 이치를 따지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나 99세가 되었고 사라는 90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내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줄 것이라는 말씀을 듣었습니다. 그는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도리어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롬4:17-22)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이치를 따졌던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나와 사라는 죽은 것 같아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하지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능히 이 죽은 몸들로부터도 아이를 생산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그 분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약속대로 내년에 아이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는 믿음으로 늙은 사라와 함께 아이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현실을 직시하여 그 상황을 먼저 파악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에 굳건히 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롬4:22).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 3

누가복음 7장 29-35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은 침례 요한이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에도 주님이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침례 요한에게는 귀신이 들렸다고 하고, 먹고 마시며 사람들과 사귀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주님에게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된 경건하지 않은 사람으로 치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 옳은지는 그 자녀(행위)들에 의해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아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시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시지 않고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고 우리 삶의 모범으로 삼아 의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야만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3.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오늘부터는 존 스타트 목사님의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소책자를 가지고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예언하셨으며 실제로 거짓 그리스도가 역사상 많이 등장하였습니다. 그 종교적 사기꾼들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다라는 등 형편없는 말을 하고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그리스도를 좌절한 슈퍼스타나 서커스의 어릿광대 등으로 묘사하는 풍자도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에 대한 많은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우리는 거침없이 네 주님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일부 사람들은 심판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랑의 그리스도만을 따르고, 위로의 그리스도이지만 결코 도전을 주는 그리스도는 부인합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음화에 대한 명령에는 무척 주의를 기울이지만, 가난한 자, 병든 자, 굶주린 자 그리고 억눌린 자들을 돌보라는 부르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은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그리고 또 믿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사역을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라는 말로 집약시켰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묘사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셨고,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모든 환경 속에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셨습니다. 한편, 마태는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9:35)라고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중 사역의 균형 잡힌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서는 복음 전파와 섬김의 행동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조화가 이루어진 삶을 살고 있는지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인 섬김에 많은 에너지를 쏟으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셨으며,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으며,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심지어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등 노예들이나 하는 비천한 봉사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이런 물질적인 봉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복음 전도에만 집중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는 말과 행동은 하나였으며 그의 행동은 그가 선포하고 묘사한 천국의 모습을 나태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 역시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본받는다면 복음 전파에 큰 진보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다니시며 하신 선한 행동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사탄의 지배가 몰락하는 증거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 동기는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종종 동정이 예수님의 속성이라고 기술합니다. 동정은 예수님의 섬김 이면에 있는 최고의 동기였습니다. 주님은 인간적 필요를 보시고 깊이 감동하셨으며, 불쌍히 여기셨고, 그래서 행동하셨습니다. 이렇게 행동하신 거의 모든 경우에서 주님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육체적 조건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육체적인 회복이 필요한 사람을 주변에서 보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에서 병든 어머니를 둔 딸로 하여금 어머니의 육체적 필요를 돌보는데는 눈을 감기우고 오직 어머니의 신앙과 영적인 상태만을 위해 기도하도록 만들어라는 계책을 삼촌 마귀가 조카 마귀에게 주는 대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주변 이웃이 처한 육체적, 환경적 상황에 대하여 우리는 그 중요성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사 고치신 개인과 무리에 대한 성경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자기를 고쳐 달라고 간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0-41)고 말씀하자 그 문둥병자는 즉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인 성 근처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외아들인 한 젊은이의 장례 행렬과 마주쳤을 때도 그들을 깊이 위로하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3-14) 하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서 말을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실 때도 그 동기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우리는 이렇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보신 주님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수요예배

전도서 11: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어느 자매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는 공부를 더 하려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민되는 것은 유학을 갔다가 오면 한국에서 교수로서 가르치거나 연구원에 종사할 자리가 없을 것 같아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 자매는 미리 자리를 준비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기도원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환상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 자신을 붙들어 주는 장면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자매가 유학을 갔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유학을 갔다 와서 과연 주님께서 자리를 준비하셨는지는 더더구나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들은 것은 여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고, 심지어는 점집에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불확실한 것은 불확실한 그대로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만이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확실성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불확실성을 감사드릴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되고 감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때 이 세상은 불확실하나 하나님의 손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다고 믿어야만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는 공자도 하늘과 천명을 믿고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송나라 대부인 환퇴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시점에도 태연하셨는데 제자들이 그럴 수 있는 이유를 물으니 “하늘이 내게 덕을 주셨는데 환퇴가 어찌하겠는가?” 하셨던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신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염려를 전부 주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아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뢰로 살되 지혜를 다하여 주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받아 하나님의 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 (2)

성경본문: 누가복음 7장 24 – 28

주님은 침례 요한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으나 곧 이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도 그보다는 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명과 특권의 관점에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구약의 끝인 침례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그 분의 길을 예비할 특권과 사명을 가졌으며 이 이상의 큰 특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가 도래하기 시작하자 가장 작은 자라도 종의 형체로 오셔서 섬기시다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내주 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침례 요한보다 훨씬 큰 특권입니다. 이와 같이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평가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부활 승천하시면서 성령님을 교회에 보내주셔서 당신이 시작한 하늘 나라를 세워갈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여야 합니다.    

 

1.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그를 전파하여야 합니다.

매일큐티

2016. 9.12-13

그리스도인의 종으로서 부름받은 우리는 그 소명에 따라 직업 안에서 순종하는 마음을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24에서 다음과 같은 권고로 그의 말을 맺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직업(직업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우리가 속한 사회적 위치일 수도 있음) 속에서 가져야 할 궁극적인 책임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하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조직의 틀 속에서 갖게 되는 인간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종들아 모든 일에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2-23)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종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상전을 섬김으로써 하늘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뜻이 여기에는 담겨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에 대한 정신입니다.

 

베토벤은 한밤중에 갑자기 누군가 옆집 문을 연이어서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그 사람은 네 번 두드리고는 잠깐 멈추고, 또 네 번 두드리고는 잠깐 멈추고 그리고 다시 네 번을 두드렸습니다. 그날 밤 베토벤은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네 번의 두드림이 그의 풍부한 음악적 재능 속에서 네 박자의 멜로디로 변해서 계속 들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그 유명한 5번 교향곡 운명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곡에는 네 박자 멜로디들이, 같으면서도 항상 새로운 다양성을 띠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소명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소명은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고 매순간 강한 두드림으로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항상 동일하면서도 항상 새롭게 우리 삶을 두드립니다. 우리가 일을 하는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척도는 직업을 통해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는 소명 의식과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기꺼이 자족하고 순종하려는 마음입니다.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 (1)

성경구절: 누가복음 7장 18-23

 

내용

침례 요한은 옥에 갇혀서 그리스도의 일들을 보고 받고는 제자 둘을 보내어 주님의 정체성을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이 질문은 예수께서 과연 성경에 약속된 그 메시야인가 여부에 대한 것입니다. 이 당시 주님은 많은 병자들을 기적으로 고치고 계셨기에 그들에게 보고 들은 바를 요한에게 보고하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이것은 오시리라는 하나님이 오시면 이런 일이 발생된다는 이사야 35장의 말씀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침례 요한의 경우처럼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하심에 접하는 길 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다 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 심판시 주님께 그 믿음을 부인당할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 하여야 합니다.   

 

 

 

1.    침례 요한의 질문은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    침례 요한의 확신은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하심에서 얻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    침례 요한에 대한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을 본받되 그리스도께 실족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일 (큐티)

2016. 9. 5 9

 벤 페터슨은 어느 여름 포틀랜드에서 온 내과 의사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의사는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 자랐으며 시카고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벤 페터슨은 그에게 왜 하필이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틀랜드를 근무지로 선택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의사는 서북부 태평양의 아름다움 때문이라든지, 그곳의 생활 수준 때문이라든지 또는 그곳이 자기 아내의 고향이기 때문이라든지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의사가 시카고에 있을 때 어떤 한 젊은 신학생을 만났는데 그 신학생은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포틀랜드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애기를 들은 후 그 의사는 자기도 그 일에 동참하기를 원했고 포틀랜드를 의사로서의 첫 근무지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 의사는 소명이 직업을 주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 사람마다 처한 환경과 소명이 틀리지만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또 우리의 경우에 소명이 직업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직업이 소명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통상 가치를 판단하는 관점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께 헌신하느냐보다는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업이느로서는 실패했지만 소명을 수행하는 삶에서는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삶속에서 중요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직업을 위해 결코 가족을 희생하지 않으며, 비도덕적이고 부정직한 일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직업에서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소명을 행하는 삶에서는 성공할 것입니다.

 

소명이 우리 삶 가운데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은, 우리가 가진 여러 가지 직업들의 성공과 실패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평가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16세기 청교도였던 윌리엄 퍼킨즈는 소명에 관해서 주목할 만한 논문을 썼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에서 성곻하도록 허락도 하시는데 그 성공은 복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의 시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을 허락하심으로 무엇을 시험하신다는 말일까요? 바로 우리의 소명에 대한 순수성입니다. 소명보다는 직업을 추구하면서 자기 둥지에 더 많은 깃털을 모아들이려는 새처럼 이기적인 목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순종하는가? 우리가 성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보면 우리의 소명 의식을 점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공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면, 우리가 일 속에서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을 할 때 많은 번영과 이익, 명예등이 우리에게 주어지곤 합니다. 물론 소명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모든 번영과 이익 그리고 명예등이 다 쓸모없는 것이므로 포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일을 잘한 대가로서 이 세상에서 얻는 모든 기쁨이나 보상을 누리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점입니다. 또한 이것은 소명을 성공에 대한 모든 세상적인 척도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소명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소명과 관련하여 생각할 중요한 점은 자족입니다. 우리가 소명을 가지고 그 소명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보기 시작하면 우리들이 현재 가진 직업 안에서 자족할 마음을 가꾸어 나갈 것을 강하게 요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라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쓰셨는데 이때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을 때였습니다.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도 사도는 언제나 하나의 일관된 생각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형편없다고 해서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협상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중생과 계명

오늘은 중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중생이란 거듭난다는 의미로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나옵니다. 주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공적인 의미에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처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을 정화 시키고 많은 표적들을 행하심으로 당신이 오시리라고 예언된 그 메시야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는 믿지 않으셨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 니고데모라 하는 산헤드린 멤버 중 하나가 비밀리에 주님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 니고데모는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라고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란 육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어떤 구성분자가 새롭게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관이 새롭게 바뀌어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와 영생을 가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세율법으로 대표되는 구약성경을 가지고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해결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율법을 통하여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상 매년 드리는 황소와 양들의 피로는 우리의 죄를 없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히10:3-4). 그러므로 구약 성경이 가르키는 것은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의 죄와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희생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이 일을 행하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구원의 방법이 구약이 아니라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이 바뀔려면 자신이 죄인 것에 대한 회개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는 동시에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생각을 성령님께서 새겨주십니다 (예레미야 31:31-34; 히브리서10:16-18). 그것은 마치 법들을 서판에 새겨 공포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가치관 내지 생각들은 육신의 일들이 아니라 영의 일들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이전에는 알지 못하고 오직 먹고 마시고 본능대로 살고, 사람들 사이에 명예와 권력을 다투는 삶에서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영원한 심판이 있음을 알게 되자 우리 죄 값을 치룬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그 특색은 영원한 소망을 품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육신의 좋지 않은 행실들을 죽여가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 중생이자 거듭남의 뜻이고 그렇게 거듭난 사람들은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굳은 마음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속죄는 이렇게 중생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8-15).고 하심으로 중생의 문제 다음에 바로 예수님의 속죄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사랑과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사랑없는 믿음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있는 사실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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