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터예배

요한복음 14:1 – 3

CTS에서 발간한 격월지 2019년 1,2월호를 보면 부산방송 김광득 팀장의 간증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김광득 팀장은 육군에서 소령으로 전역한 분입니다. 과거에는 군복무가 천직이라고 생각할 만큼 육군 장교로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지냈지만, 소령으로 전역하고 응시한 군무관 시험에 계속해서 낙방하자 하나님을 극도로 원망하는 상황까지 내몰렸습니다. 모태신앙인 김광득 씨의 입에서 “하나님 정말 있기는 한 건가!” “이렇게 망하게 하려고 제대 시켰나” “난 이제 마음대로 살아 갈 거야! 하나님은 없어”라는 원망의 말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김광득 씨의 마음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김광득 씨의 입과 머리로는 화가 나 원망하는 가운데,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피할 길을 내어 능히 감당케 할 테니 걱정하지마라”는 확신 넘치는 평안함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김광득 씨는 늘 이때를 생각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넘쳐 가슴이 떨려온다고 합니다. 많은 장애물도 있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자 경력이 없던 김광득 씨는 CTS 공체 PD로 입사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9년 동안 영상 선교사역을 펼쳐오던 중 제작한 ‘바이블 코치’가 2015년도 ‘CTS 전국 최우수프로그램’으로 선정되는 영예도 안았고, 이후 ‘하나님의 경제, 세상의 경제’등이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게 되는 등 CTS에서의 삶에  많은 보람과 은혜가 넘쳤다고 합니다.그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있고, 앞으로도 CTS에 몸담고 사역하는 제작자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모두 충성하고자 결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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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9. 2. 18 – 22

복음 전도를 순전히 감정적인 견지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복음 전도의 평판이 나빠진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적 복음 전도에 충실하려면, 사람들의 감정에는 물론 지성을 통하여 그들의 양심과 의지에도 호소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너무나 분명하게 지성을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거듭해서, 사도들이 전도 집회를 가진 후에 많은 사람들이 “설득되었다”(개역개정은 “권함”, “권면”으로 번역됨. 행17:4; 18:4 등을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도 끝 무렵에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만일 대학교에서 전도 집회를 연다면, 100명이 회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지, 100명이 설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좀더 성경적일 것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의 진리를 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들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논하였으며, 구약 성경에서 복음의 진리를 추론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러한 성경적 논증을 활용하는 데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을 의지하였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논증과 성령님을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됨을 명심하고, 지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겨야만 합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 3:15).

성령님은 성경적 논법을 사용하시며, 바로 이 때문에 바울은 때때로 한 장소에서 오랜 기간 머물렀습니다. 가장 극적인 예는 에베소에서 생긴 일입니다(사도행전 19장). 에베소에 도착한 지 석 달 후에 바울은 회당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두란노 서원(짐작컨대 그곳은 세상의 일반적인 회관이었을 것임)을 빌려 거기서 2년 동안 매일 강의하였습니다. 어떤 사본에 따르면, 바울이 제5시부터 제10시까지, 즉 오전 11시부터 오후4시까지, 매일 5시간 강의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강의는 매일 5시간씩 2년에 걸쳐 행해진 것으로, 만약 바울이 일주일에 하루를 쉬었다면 복음을 논하는 데 3,120시간을 투자한 셈입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장날에 각기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에베소에 올라왔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장을 보러, 어떤 사람은 정치가와 면담하러, 또 어떤 사람은 친척을 만나러 그곳에 왔을 것입니다. 그들이 에베소에 있는 동안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바울의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바울은 매일 5시간씩 강의를 했고, 사람들은 두란노 서원에 들러 회심했으며, 거듭나서 자신의 마을로 돌아갔고 하나님의 말씀은 아시아 전역에 퍼져 나갔습니다(여기서 아시아는 터키 북쪽에 있는 로마의 아시아 주를 말하지 현재의 아시아를 말하는 것이 아님).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19:8-10).

지성을 적절하게 활용하면, 우리의 증거는 강화될 수 있습니다. 앞에서의 세 가지 논거는 우리의 지성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지성의 영역에서도 주님이십니까? 이를 위해 우리의 영적 순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과 주는 단순히 그들이 현실 세계에 증거해야 하는 어떤 호칭이 아닙니다. “나는 너희들의 선생이며 너희는 나의 제자들이다. 나는 너희들의 주이며 너희는 나의 종들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생이시라면 우리는 그에게 의견 차이를 주장할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라면 우리는 그에게 불복종할 자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성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켰습니까? 여러분 여전히 그분에게 의견 차이를 주장할 자유를 취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지성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복종시키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권위로 구약을 인준하셨고, 또 사도들을 지명함으로써 신약을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복종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인 것을 확실히 드러내는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우리가 지적으로 회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로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지성을 예수님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키지 않았다면, 지적으로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한편, 감정에 관해서도 같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 통합된 그리스도인은 반지성적이지도, 반감정적이지도 않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인간을 합리적인 피조물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피조물로 만드셨다는 것 역시 인정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사고할 수 있는 지성을 주셨으며, 인간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깊은 감정도 주셨습니다. 지성의 올바른 활용을 강조하고 반지성주의를 거부한다고 해서, 메마르고 무미건조하며 냉랭한, 비인간적인 지성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추호도 그러한 지성주의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남자답게 처신하라는 철학을 가진 영국 공립학교에서 자라나 감정을 억제하도록 교육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립학교에 다닐 동안 회심하였고 그 뒤 신약성경을 읽었을 때, 예수님이 두 번이나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 속에 순전한 감정이 차지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감상주의적인 것도 인위적인 것도 아닌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3-35).

성경적 신앙은 지적이면서 동시에 감정적인, 즉 우리의 인간성 양쪽 부분을 모두 충족시키는 신앙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과 마찬가지로 감정 역시 타락하였습니다. 우리는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전적 부패 교리를 믿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전적 부패를 부인하는 이유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는 모든 죄인이 악할 대로 악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믿는 사람 그 누구도 이렇게 배운 적이 없으며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악할 대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 부패가 의미하는 바가 아닙니다. 부패의 전체성은 부패성의 정도를 언급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패성의 범위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 박사는 이를 잘 정리하였습니다. 그는“전적 부패란 모든 사람이 악할 대로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선해야 할 만큼 선한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타락이 우리의 모든 부분, 우리의 지성, 우리의 감정, 우리의 양심, 우리의 성,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성의 모든 부분은 타락으로 인해 비뚤어지고 왜곡되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지성이나 감정을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켜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10:4-5).

복음과 인문학

누가복음 19:1 – 10

“희망의 인문학” 책의 저자인 얼 쇼리스는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어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청년들과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1995년 10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처음으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였습니다. 이들에게는 거짓말과 고백, 범죄, 임신이 다반사였으며 언제나 외로움이 붙어 다닌 자들이었습니다. 얼 박사는 이들의 가능성을 보고 그 점을 역설하였고 그들에게 희망을 팔았습니다. 실로 가난에 대처하기 위한 연방정부 지침서 같은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입주형 쉼터, 사회복지 관련 기관, 무료진료소, 임시 집단거처, 최저 임금 일자리, 마약중독 치료프로그램, 푸드 뱅크 시설이 있지만 이 기관들이 가난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시인하고 인정할 때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그들을 끄집어낼 정치적 대책이 전혀 없을 때 비로소 가난해지는 것임을 얼 박사는 깨달았습니다. 클레멘트 코스의 학생 선발 기준을 세울 때 바로 이 점을 중시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도 거의 없었고, 그런 삶을 누릴 공간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파에 떠밀려 워낙 심하게 치이며 살다 보니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그들이 14세기 때 이탈리아 그림을 알아야 할 이유나, 논리학을 배울 이유,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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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나눔

2019.2.11 – 15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 – 1630)는 우주를 연구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의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이에게는 더욱 합당한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을 쫓아 하나님의 생각을 사고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은 바로 생각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 의사소통되는 것은 우리의 지성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읽는 것입니다. 과학적 조사와 성경 연구 모두에서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의 생각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창조주를 부인하는 것이며, 또 우리의 합리성의 중요한 일부인 인간성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지성의 적절한 활용이야말로 창조주를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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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터예배

디도서 3: 4 - 8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도덕경의 한 대목이 실려 있습니다.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고/ 자신을 아는 자는 현명하다 남을 이기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는 도(道)가 있어야 한다 많은 물질을 가진 자는 부유하지만/ 자신이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도(道)와 하나가 된 사람이다.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이 오래가고/ 죽어도 잊히지 않는 자가 오래 사는 것이다. 조던 피터슨 작가는 “내가 지금 가진 것이 하찮다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내가 가진 것의 목록을 작성해 보아라… 내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가진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것을 하찮게 여길 정도로 교만하기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라고 하고는, 이런 내용을 자신에게 상담을 온 젊은 청년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그 청년은 가족의 품을 떠난 적이 없고, 고향을 벗어난 적도 없다. 하지만 토론토까지 달려와 조던 피터슨의 강연을 듣고 조던 피터슨의 집에 와서 만났습니다. 그는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살면서 불안감에 시달렸다. 조던 피터슨과 만났을 때도처음에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조던 피터슨과 만난 이후 달라지기로 결심했다. 식당에서 접시닦는 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 세상에 분노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 어떤 기회든 겸손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회를 통해 새로운 지혜를 얻을 구 있다고 믿었다. 지금 그는 독립해서 살고 있다. 게다가 많지는 않지만 돈도 조금 모았다. 직접 땀을 흘려 번 돈이었다. 부모의 그늘에 있었으면 누리지 못할 삶이었다. 이제 그는 세상에 뛰어들어 역경에 맞서고 갈등을 극복하며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다(501-502pg). 심리학에서도 이렇게 이야기 하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보다 확실한 기초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인생 역시 죄와 사망으로 버려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으며, 우리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실 수 있으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를 의롭다 칭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며,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에 대하여 굳센 믿음을 가지고 누구든지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항상 예비하여야만 합니다. 그런 삶의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항상 선한 일에 열심인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매일말씀나눔

2019. 2. 7-8

예전이나 지금이나 복음주의 기독교계에 생겨난 심상치 않은 동향들 중 하나는 반(反)지성주의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하고도 심상치 않은 조짐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런 예화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호주 멜버른 대학 출신의 한 학생이 스웨덴에서 개최된 수련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수련회장에서 그는 조국에 학생 소요가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 학생은 당황하여 손을 쥐어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주에 돌아가야 하는데,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일어난 걸까?” 이 학생은 지식 없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조국에 돌아가 소요에 가담해야 한다고 결정하기 전에 소요의 전모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어야만 합니다. 성찰 없이 행동에 헌신하는 것은 광신주의이며, 헌신 없는 성찰은 모든 행동을 마비시키고 맙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성찰과 헌신 둘 다이지, 성찰 없는 헌신이나 헌신 없는 성찰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20에 나오는 말씀을 우리는 잘 묵상해야만 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같은 구절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을 금하는 동시에 어린아이가 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입니다. 악, 사악함 등에 대해서는 갓난아이처럼 무지하고 순결하고 미숙해야만 하나, 지성과 사고의 영역에서는 어른이 되어야만 합니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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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믿음을 갖자

고린도후서 12:5 – 10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종신 고용제와 연공 서열식 승진을 도입한 일본 경영의 귀재로 알려진 분입니다. 그는 1894년에 태어나 5살 때까지는 유복하게 살았으나, 그 후 가세가 기울어 매우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9살에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하여 17세까지 자전거 점포에서 일한 뒤 오스카 전등 회사에 입사하여 1엔을 월급으로 받았고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으나 대저택의 배선공사, 해수욕장과 극장의 조명등의 대형공사를 맡아서 하였습니다. 그 뒤 검사원이 되었으며, 전기기구 발명에 힘을 쏟아 결국 마쓰시타라는 회사를 일구어냈고, 1979년에는 자신의 재산 70억엔을 들여 정경숙이라는 정치 엘리트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는데 이 기관은 2000년대에 이르러 수십명의 의원, 장관, 지자체장 등을 배출하였습니다. 물론 그의 회사가 일제시대 징용과 관련하여 많은 피해를 우리 민족에게 주고, 전시물자 조달에 큰 역할을 하였던 전범기업이라는 오명도 갖고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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