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걸으시는 그리스도

2015.07.29  | 물 위를 걸으시는 그리스도 (마14:22-33)

오늘은 2009년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하던 중 방문한 갈릴리 호수 그 가운데서도 주님과 베드로가 함께 물 위로 걸었다고 알려진 장소에 대하여 사진을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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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갈릴리 호수 위를 배가 떠다니고 있으며 주님께서 물 위를 걸었다고 알려진 곳을 그 배 위에서 제가 직접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시고 저녁이 되어 무리를 흩어 보내시는 사이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그 지역을 떠나 갈릴리 호수 서편으로 가도록 분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떠났고 주님은 무리를 흩어 보내신 뒤 기도하시러 홀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윽고 새벽 3시가 되자 주님은 호수가로 내려오셨습니다. 호수가에는 아무런 배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내 물 위로 한 걸음을 내딛고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 거센 풍랑이 이는 호수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의 배까지 가셨습니다. 바람과 풍랑으로 제자들은 저녁에 떠났지만 밤새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이 때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자 제자들은 유령으로 오인하여 소리를 지르면서 두려워 하자 주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갔습니다. 베드로가 소리를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드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시매 바람이 그치고 배는 저희들이 가려고 한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배에 있던 제자들은 주님 앞에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인생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풍파는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자주 물 속에 빠져들어가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는 늘 상 주님께서 계셔서 우리의 구원의 부르짖음에 손을 내밀어 구원하실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 속에 빠진 베드로가 구원을 받은 것처럼 그리고 거센 풍랑에 곤고를 당한 제자들이 주님이 진정 누구신지 깨달은 것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는 순간 경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가는 삶이 영생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어두움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을 때 여러분 더 많은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려고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를 더 잘 알수록 우리는 그를 저 잘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하십시요. (CTS 방송설교).

mt-hermon-sea-of-galilee이미지 출처:  http://urantia-book.org/
삽화: Rambrant –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 (1633)

 

겟세마네로 향한 밤길을 걷는 제자들과 그리스도

2015.7.26 | 겟세마네로 향한 밤길을 걷는 제자들과 그리스도 (마가복음 14장 27-31절)

오늘 본문은 겟세마네동산으로 가는 약 30분동안의 대화를 기록하였습니다. 유다는 이미 스승을 팔려고 떠났고, 나머지 제자들 역시 주님을 버릴 것을 예고하셨지만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경고를 경시하며 자신을 과시하다가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무력한 그리스도로 잘못 오해하여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가운데 진리를 이야기 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겸손히 당신만 의지하고 살아갈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믿음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고 할 때 비로서 자라가는 것이고 그 믿음의 기초는 우리의 헌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걸려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배워야 합니다.

3. 우리는 믿음에는 지름길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

2015.07.22 | 하나님의 백성의 삶 (창21:22-23)

창세기 21장 22절 이하에 보면 블레셋의 땅에 거주하는 그랄 왕 아비멜렉이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브엘세바에 거주하는 아브라함을 찾아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목적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비멜렉은 연 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직전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 할 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여 들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취하여 들인 그 밤에 하나님께서 현몽하셔서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나도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창세기 20:3-7).

 그 후 아비멜렉은 몇 년동안 지켜보니 아브라함이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을 보고 그를 찾아와서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삶이 되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분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하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릴리아스 호튼 여사에 대하여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1800년대말과 1900년대 초엽에 전염병으로서 콜레라가 만연하였다고 합니다. 어느날 한 조선사람이 지나가다가 릴리아스가 전염병으로 죽은 부랑자를 가슴에 안고 슬퍼하고 있기에 호기심이 나서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합니다. 외국여인이 죽어가는 한국사람을 돕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특히 이 쓸모 없는 부랑자를 말입니까? 그는 너무나 혼돈이 되어서 릴리아스를 따라 그녀의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웃사람들에게 도애체 이 여인이 누구인지 물어 보게 되고 릴리아스가 새로운 종교의 선생과 결혼했으며 왕후의 의사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를 들은 남자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집에서 나오는 선교사를 기다렸다가 따라가서 조그마한 교회로 가서 선교사가 예배를 집례하는 동안 그 사람은 큰 감동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즉시로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동네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너무나 인정머리없는 동네로서 어떤 사람도 가기 싫어한 곳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소식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이들은 친절한 마을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마을이 변화되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언더우드 부부에게 이것에 관해 물었고 그때서야 이 기적의 변화사건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이 행주로 가서 그 마을에 대하여 후속조치를 취했을 때 그는 그 마을의 변화의 진실한 이유는 자신의 아내가 죽은 거지를 그렇게 돌보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http://underwoodmemorialhall.blogspot.kr).

 여러분 날이 이를 것입니다. 즉, 죽은 자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올 것입니다. 아브라함 처럼 릴리아스 호튼 처럼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지 출처:
http://blog.naver.com/iedl/150059861893

최후의 만찬과 그리스도

2015.7.19 | 최후의 만찬과 그리스도 (마가복음 14장 12-26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왔습니다. 양을 잡는 첫 날이 시작할 때인 목요일 저녁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시작하였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1,500년간 계속한 유월절 의식의 참된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유월절 양이신 당신께서 만백성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유다는 이를 모르고 은 30량에 주님을 팔아넘겼지만 주님은 왕으로서 모든 사건을 지배하시면서 끝까지 온유하게 유다를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새언약의 상징으로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를 행하여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기념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1. 주님의 만찬을 통해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증거하는 절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2. 주님의 만찬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3. 주님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새언약의 상징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015. 07. 15 |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히브리서11:11-12)

1999년 7월 17일 자 기독공보를 보면 언더우드 탄생 140년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에 묻혔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유해를 83년만에 양화진 외인묘지로 옮겨 부인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 과 함께 합장한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은 이미 1916년 미국에서 돌아가신 바 되었고 부인은 그 다음해 아들 원한경박사와 자부와 함께 한국으로 되돌아와서 선교사역 및 의료사역을 하다가 1921년 죽어 양화진 외인묘지에 따로 묻힌 바 되었습니다. 릴리아스 호튼 여사는 1851년 태어나 시카고에서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선교부의 요청에 따라 1888년 37의 나이로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와서 제중원에서 일했습니다.

그녀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매우 가난하고 길은 진흙으로 덮인 한국을 보았지만 선교사로서의 그녀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고 적고 있습니다(상투쟁이와 15년).한국에 와서 그녀는 두가지 일에 바빴습니다. 하나는 낯선 언어를 익히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민비와 나이가 같았고 민비의 주치의였습니다. 서로 간에 친했다고 합니다. 1년 후 8살 연하인 언더우드 목사님과 결혼을 하여 1890년 외아들 원한경을 낳았습니다. 글도 잘쓰셔서 1904년 상투쟁이와 15년이라는 선교일화를 담은 책을 미국에서 출간하였고 1918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 이야기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들은 지금도 아마존에서 구입가능합니다. 한국에서도 킨들로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조선 선교에 발을 디뎠고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여 자신이 가진 의술을 가지고 섬기다가 이 땅에 온지 33년후에 70살인 1921년 조선에서 죽었고 양화진에 묻혀 지금도 우리에게 그녀의 믿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응답되어 그녀의 남편이 세운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은 지금도 한국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그녀의 후손들은 한국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선교란 이런 것임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c7cc5725_underwood이미지 출처: www.boazclub.com

두 종류의 사람과 그리스도

2015.07.12 | 두 종류의 사람과 그리스도 (마 14:1-11절)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문둥이 시몬의 집으로 가서 당신과 나사로를 위한 잔치에 참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겸손과 자비를 본받아야만 합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이런 주님을 사랑하여 귀한 나드 한 근이 되는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으므로 그의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위해 우리 자신의 것을 허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주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이런 행동에 분개하였고 드디어 주님을 은 30량에 팔아넘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의 탐욕과 주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촉발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누구시며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깨달아야 하며 이 주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실 때는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비를 본받아야 합니다.
  • 그리스도를 위해 허비할 줄 알아야 합니다.
  • 그리스도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재림을 대비한 우리의 자세와 그리스도

2015.07.05 | 재림을 대비한 우리의 자세와 그리스도 (마 13:32-37절)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즈음하여 많은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신자들의 영적인 지능테스트를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신실하게 믿고 있는가를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때로는 폭풍우가 몰아닥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지는 없어지더라도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주님의 말씀에 기초를 놓은 우리의 믿음의 삶은 견고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여러가지 근심이 몰아닥치면 이 주님을 생각하고 기도하십시요.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예비를 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가운데 우리는 주님을 영원히 배워가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우리의 믿음 즉, 영적인 지능이 자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종을 본받아야 합니다.
  • 그리스도의 경고를 기억하고 늘 깨어 준비하여야 합니다.
  •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하는 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유산을 흘려보내라

2015.7.1 수요일 | 신앙유산을 흘려보내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출애굽기 3:6)

잘 아는 목사께서 아들이 국내 굴지의 회사 인턴이 되었다고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려운 가운데도 그 청년은 열심히 노력하여 인턴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기뻐해야할 일이지요.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과 배우자를 가지는 것은 믿음 여부와 상관없이 중요한 일이나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신앙 유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자식농사는 50대 후반이 되면 결정납니다.그러나 신앙 유산을 물려주는 것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동참이 있어야만 합니다. 개인적 경건은 성경읽기 기도로 되지만 교회적 경건은 서로간의 교류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유산을 흘려보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참고가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세운 제단의 의미
아브라함은 3 군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세웠다.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여호와께서 나타나 확인한 세겜(창12:6-7)에서  최초로, 곧 이어 남쪽으로 33킬로 떨어진 벧엘 동쪽(창12:8), 롯이 떠난 뒤 헤브론으로 내려와서 제단을 쌓았다(창13:18). 이삭은 브엘세바에서 한 번 제단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자기에게 나타난 여호와를 기리기 위해서이다(창26:24). 한편, 야곱은 70대 중반 헤브론에서 밧단 아람으로 도피할 때 벧엘에서 나타난 하나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돌에 기름을 부었고(창28:18-19), 20여년이 지나 밧단 아람으로부터 돌아와서 아브라함을 본받아 세겜에 제단을(창33:20) 그리고 다시 벧엘에 이르러 제단을 쌓았다(창35:6-7). 세겜, 베델, 헤브론, 브엘세바는 가나안 땅의 주요 능선도로의 거점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 후손들이 목축을 하러 이동할 때는 이 능선도로를 따라 이동할 것이고 그 경우 정기적으로 이 제단에 와서 여호와께서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하신 가나안 땅을 상속하고 강대한 나라가 되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늘상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성서에 쓰여진 하나님의 약속들을 묵상하듯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자신의 후손들이 제단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되새기도록 한 것이다.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24-25 참조).

marc-chagall-sacrifice-of-isaac-figure-1삽화: Marc Chagall – The Sacrifice of Isaac (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