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 4

본문 : 누가복음 6: 39-42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과 세상에 관하여, 우리 인간이 처한 비참한 상황에 관하여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맹인으로서 오직 맹인들의 인도만을 받을 뿐이었고 그 결과는 구덩이에 빠졌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은 없다는 무신론과 진화론적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야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런 길을 걷는 자들을 주님은 제자라고 부르시는데 제자는 결코 선생보다 높지 못하지만 충분히 훈련을 받으면 선생과  같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선생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키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여러가지 장치를 우리 삶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한편,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키에 얼마만큼 도달하였는지는 타인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과 섬김의 자세인지 아니면 우리를 높이려는 비판과 정죄의 자세인지 우리 스스로 살펴서 삼가해야만 할 것입니다.

 

1.    그리스도를 따라야만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진리를 알아야만 합니다

 

2.    그리스도를 닮도록 충분한 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형제의 허물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SBC매일큐티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리하도록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벤 패터슨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알버트슨 슈퍼마켓 체인점을 경영하는 회사가 일련의 광고물들을 제작한 적이 있었는데 그 광고물들은 알버트 슈펴마켓의 각 체인점에 고용된 지점장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자기 지점에 대해 갖고 있는 긍지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신선한 야채 진열대에 둘러싸여 서 있던 한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는 ‘이 슈퍼마켓은 알버트슨의 것이죠 하지만 이 농산물 점포는 저의 것입니다’ 라고 즐겁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청지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조 알버트슨 소유의 슈퍼마켓 체인점 중 한 지점을 인수받아 조 알버트슨과 동일한 자격으로 그 점포를 관리할 책임을 부여 받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우리 각 자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들을 위해 맺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재능과 은사를 주셨으며, 시간과 공간의 일부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과 동일한 자격으로 이 모든 것들을 관리할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주의 영광을 위해 창작 활동을 하고, 가정 주부는 주의 영광을 위해 가정을 관리하고, 농부는 주의 영광을 위해 농사를 짓고, 기업가는 주의 영광을 위해 회사를 운영하여야 하며, 학생은 주의 영광을 위해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가진 시간을 관리하여 우리의 인격 전체가 이렇듯 선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청지기의 삶을 보고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가진 존엄성은 우리가 소유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24:1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우리의 시간과 건강, 능력, 경력 및 그 외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의 것이고, 그 외의 것들만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것 역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적 직분을 가진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신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못하리니”(딤전6:7)라는 말씀을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신 빈손으로 떠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엄성이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엄성이 ‘우리가 소유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에 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에게 맡겨진 것으로 무엇을 했는가’에 있습니다. 즉, 우리의 존엄성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적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고든 코스비 목사님이 남부 내륙의 한 작은 침례 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교회에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둔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는 한 달에 겨우 40달러밖에 안되는 보잘것없는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십일조로 한 달에 4달러나 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사 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내질 말 것을 권고하였더니, 그녀는 눈물이 가득 고여 “목사님, 지금 제 인생을 존엄하고 의미있게 해주는 것은 헌금을 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지금 그것을 빼앗으려 하십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코스비 목사님이 만난 그 여인은 자신의 존엄성을 자기가 소유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하는가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신뢰하여 맡기신 작은 부분에서 청지기가 되는 영광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본래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라고 설파하였습니다. 물론 타락 이후에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일을 함으로써 기쁨과 성취감을 맛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누가복음 12:28-32

영국의 정치학자인 액튼 경은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명언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진경준 검사장의 여러가지 권력형 부조리의 형태를 접한 우리는 왜소하게 느껴집니다. 게임으로 유명한 넥슨이라는 회사의 주식을 무상으로 취득하여2015년 처분 120억원이라는 시세차익을 얻고 계속해서 검사장의 자리를 지키다가 이런 물의가 나타났습니다. 신문에 보면 진검사장은 주식 취득과 관련하여 여러 번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돈으로 주식을 샀다고 했다가, 그 후에는 말을 돌려 처가집 돈으로 구입했다고 하였으나 처가가 그런 돈이 없고 처가에서 흘러나온 정황조차 없자, 나중에는 서울대 86학번 동기인 김정주씨가 대표로 있는 넥슨 회사로부터 빌렸다고 말을 돌렸다.  이 둘 사이의 구체적인 거래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아무리 동창생이라 하더라도 넥슨 사장 김정주씨가 대가없이 그런 돈을 주고 특혜를 주었겠냐하는 것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마 권력의 비호를 받기 위해 계속 “관시”를 맺어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현재 진 검사장이 인정한 주식추득 자금에 대한 뇌물죄는 공소시효가 만료된 상태라고 합니다. 어떤 블로그에서는 “배움의 목적이 권력과 부를 움켜쥐는 수단”인 것 같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 사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그런 문제가 요사이 특히 심합니다. 한국의 대형교회의 여러가지 사건은 제쳐두고 이번에는 일본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요한 동경교회, 즉, 요도바시교회로 잘알려진 교회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중심에 놓인 분은 김규동 선교사님입니다. 신앙간증이 담긴 책 “하나님은 불모지에서 일하신다”를 읽어 보면 미원에 입사하여 4년차 되던 해 일본으로 2년간 연구생으로 파견을 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 기회를 틈타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다고 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부공장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일본 센다이 교회 목사님의 강력한 요청이 있어 일본선교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김규동 선교사님은 3가지를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 중 가장 어려운 제목이 일본에 평신도 선교사 비자를 달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이것까지 일본교회의 도움을 받아 나오게 되자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규동 선교사님은 일본 요도바시교회의 한국부를 맡아 16명의 멤버들과 함께 열심히 신학공부하면서 전도하고 가르치니 그 교회는 일신우일신하여 드디어 일본의 최대 교회로 성장 2014년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수천명이 다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권위주의적인 교회문화를 가지게 되었고 김규동목사님은 우상화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상당히 높은 존경과 권위를 배경으로 성추문이 일어났습니다. 그 원인에는 1998년 일어난 극좌파에 의한 테러로 몸이 많이 상하였기에 맛사지를 여성 사역자로부터 받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것도 미혼의 젊은 여성에게 말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고자 한것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그만 실족을 하고 말았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은 결국 진경준 검사장의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진검사장은 국가를 위해 일하고자 애를 쓴 결과 국가에서 부여한 권력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게 된 것이며. 김목사님은 하나님을 위해 애를 쓴 결과 하나님이 주신 교회 성장과 권위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태도와 주님이 가지고 계신 믿음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 여러분 섬기려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면 절대로 속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하니까 사기의 문제나 권력 남용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믿음을 본받아야합니다. 주님은 창세전과 후를 왔다 갔다 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각에서 육체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본받아 종말의 신앙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모든 가치가 뒤바뀝니다. 여기서 권력을 잡고 웃는 자들은 거기서는 슬피 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권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 것 때문에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여기서 돈을 많이 벌고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은 죽는 날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슬피 울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은 무리인 우리는 두려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영원한 나라를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 3

누가복음 6:37-40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 본문의 전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정죄하지 않고 대신 용서를 주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비를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으며,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우리와 적대적인 사람들, 우리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할때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있되 진리는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같이 우리도 자비로운 자가 되면 친구 뿐만 아니라 원수에게도 관대하게 우리의 것들을 줄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보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칭찬과 보상은 이 세상에서 돌보심으로 나타나다가 마지막 날 부활시에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엄청난 하늘의 유업을 받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았으며, 심판자는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우리는 비판과 정죄가 아니라 사랑 가운데 진리를 이야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우리는 용서를 받은 자들이므로 용서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3.    우리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므로 관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매일큐티: 그리스도인과 일

2016. 7. 18 – 22

오늘 부터는 벤 패터슨의 소책자 “그리스도인과 일”을 가지고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라는 유명한 만화 영화에서는 일곱 난장이들이 일터를 향하여 줄지어 걸어가며 불렀던 노랫말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야호-오, 야호-오, 우리 모두 일하러 가세!” 삽과 곡괭이를 들고 광산으로 향하는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목적 의식에서 우러나온 기쁨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만화가 만들어졌던 당시의 사회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허덕였던 대공황의 막바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일하게 되어 정부의 구호품 없이도 가족을 먹이고 입힐 수 있다는 점을 감사하였고 자랑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런데 벤 패터슨은 위 가사를 변형한 “어휴-우, 어휴-우, 나는 일하러 가네”는 말이 적혀진 스티커가 자동차에 붙여진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삶의 매우 많은 영역에서, 즐거운 일은 힘들고 짜증스러운 일로 바뀌었고, 목적 의식을 가지고 종사했던 일들도 단순한 생계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에게 일이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전자입니까 아니면 후자입니까? 그리고 성경은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겠습니까?

 

성경은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확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일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복이며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복을 주셨고, 그런 후에 일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28을 보면, 먼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런 후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생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을 두시고 계획하신 대로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창2:15) 하셨습니다. 이처럼, 일은 하나님의 낙원에서도 중요한 위치, 곧 중심부를 차지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성경이 일을 하나님의 저주 또는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죄악과 형벌이 나타나기 전에,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셨던 선물이자 복이었으며 타락 후에 형벌로 주셨던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일은 인간됨을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일을 한다는 것은 아주 거룩한 것이라는 놀라운 주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신 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 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일하신 것처럼 일을 하도록 지음받았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결국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직접 하늘과 땅, 산과 호수, 숲과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만드셨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들 또한 하나님처럼 일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감동한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이 우주 가운데 일을 하는 사람의 모습만큼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것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일을 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을 창조주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과 맺는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바로 청지기입니다.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듯하지만 오늘날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할 만한 단어가 달리 없기 때문에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청지기란 어떤 한 사람의 모든 부와 재산을 위탁받아, 그 소유주가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것을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부를 경우 우리가 관리하도록 위탁받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전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눔을 통해 하나님과 삶에 대한 길을 찾는 [Book Talk]
‘청년, 길을 찾는다’ 시리즈
두 번째 편 : <그리스도인과 일>, 벤 패터슨 저/ivp.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마태복음 5장 3절

어떤 사람을 회사의 대표이사로 선출하였습니다. 대표이사는 회사를 대신하여 지출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당연히 회사의 발전을 위하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대표이사가 수표발행의 권한을 남용하여 자신의 부인의 자동차로 폭스바겐을 사주었다면 어떤 일이 발생되겠습니까? 상법이나 민법은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대표권 남용에  관한 규정을 두어 폭스바겐 회사와의 거래를 무효로 할 것이나 아니면 유효한 상태로 두고 주주가 대표이사에게 손해배상과 책임을 묻게 할 것인가의 여부에 초점이 두어져 다루고 있습니다. 정답은 거래 상대방이 악의 즉, 대표권 남용의 사실을 알고도 거래를 하였다면 폭스바겐을 판매한 것을 회사가 취소할 수 있도록 하고, 선의 즉, 그런 사실을 모르고 거래를 하였다면 판매사실을 취소하지 못하도록 하여 당사자와 거래의 안전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 반면 형법에서 초점을 두는 것은 그 행위가 업무상 배임죄를 형성하느냐의 여부이며 그 요건은 형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업무상 배임죄를 형성하면 감옥에 가서 그 자유를 박탈하는 형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태와 사건을 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오는 사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건을 보내시고는 어디에 초점을 두고 계시는지 파악을 해야 우리가 그런 테스트를 통과해 나갈 수 있은 것입니다.

20년 전에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장로장립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화원을 운영하던  이집사님은 장로에 떨어지고 자신이 어릴 때 교회로 인도하였던 권집사님이 장로로 피택이 되었습니다. 이집사님은 여러 번 교회를 위하여 애를 썼고 예배를 위해 화분도 갔다가 놓는등 노력을 하였지만 교회에서 그렇게 결정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집사님은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소문에 들으면 장로로 자신이 피택되지 못하고 자신이 인도하였던 권집사님이 피택된 것을 승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반면 김제 금산교회는 자기 집안의 하인이 먼저 장로가 되었지만 교회가 분열되기는 커녕 더욱 아름다운 선례를 남겼습니다.  김제 금산교회와 조덕삼 장로님 이야기입니다.” 조덕삼 장로님은 데이트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자신의 집을 교회로 내 놓고 자신 부부와 가족 및 일꾼 전부 교회로 나가 주님을 믿었습니다.그 중에는 마부 이자익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자 1906년 마부 이자익과 함께 침례를 받고 집사로 임명이됩니다. 더 부흥하자 마침내 교회에서 장로를 뽑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인들의 투표 결과 부자이고 교회 터를 제공하고 아주 헌신적이며 나이가 15살 많은 조덕삼 집사가 아니라 그 하인인 이자익 집사가 장로로 뽑혔습니다. 교회가 갈라질 지경에 놓였을 때 조덕삼 집사는 발언권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당시 장로는 설교 및 교회 모든 일을 관장하였기에 대단히 중요한 자리였고 이제 조덕삼 집사는 이자익 장로의 밑에서 교회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조덕삼 장로는 주님의 길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이자익 장로가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도록 뒷바라지 하고 신학교를 졸업하자 담임 목사로 초빙을 하여 금산교회를 시무하게 하였습니다. 이자익 목사님은 한국 장로교에 최초로 총회장을 3번 역임하는 등 아주 훌륭한 목회자였지만 조덕삼 장로님의 일화는 빼놓을 수 없는 백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낮추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거기서 또 한 번 자신을 낮추사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주님을 본받아야만 합니다.심령이 가난하게 살고 자신을 낮추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 2

본문 :누가복음 6:32-36

주님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명령을 실천할 때 이를 행함으로 사람들로부터 자신에게 돌아올 대가 혹은 칭찬이나 명예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칭찬과 보상을 열망하고 행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런 칭찬과 보상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나타나지만 그 완전한 모습은 부활시에 받을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칭찬을 바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칭찬만을 받으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생각으로 충만합니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받을 생각없이 빌려주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하나님의 행동은 창조의 세계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성품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원수된 우리 죄인들을 위한 화목제물로 보내신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에게까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자비로워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칭찬만을 바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뜻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SBC매일큐티

2016/7/11~7/15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백성을 섬기기 위해 깨어졌을 때, 우리는 우리의 깨어짐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는 겸손과 낮아지심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의 희생적인 내어 주심에 대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분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일이 잘 안풀리자 그를 버렸고 한 명은 팔아넘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주님의 운명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종이 상전보다 클 수 없으며 우리의 주인이 멸시받고 거부당한 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자 할 때 우리의 노력이 거부당하거나 생각대로 잘 안 되면 크게 실망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수고를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망하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부당한 모세는 애굽에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나오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섬기려고 하던 바로 그 백성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자신이 애굽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났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들을 치면서 40년을 보낸 모세를 하나님은 시내산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가운데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듭 거듭 사양하다가 드디어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라고 물러섰습니다. 사람을 죽이면서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모세는 그들에게 거절당한 사실과 40년 동안 광야에서 늙은 사실 때문에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상황을 당하면 마음 속으로 “주님, 나는 이런 죄인들을 위해 죽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더 감사할 줄 알고 더 능력 있는 사람 말입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제게 성취감을 줄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습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처럼 가서 섬겨야만 합니다.

우리 주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늘 보좌를 박차시고 내려와 종의 형체를 입으셨으며, 또 한 번 자신을 낮추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님을 높이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 위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섬김의 모습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전부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 자가 행한 모든 것을 그 앞에 고백할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본을 따라 인내하면서 섬긴 자들에게는 큰 칭찬이 주어질 것이며 말로만 주님을 부르고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은 자들은 바깥 어두운데 던져져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배우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깨어지는 삶을 배우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성공담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명성과 성공적인 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신실한 신자들의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그럴 때,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영광의 소망,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케파 셈팡기 목사님은 1971년 한스 로크마커 여사의 도움을 받아 우간다에 고아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에 가서 고아를 데려오는 일은 항상 낙심되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이분이 차를 몰고 떠날 때면 다른 열 명의 고아들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목사님의 차를 쫓아오곤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마음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왜 다른 아이들은 내버려두고 한 명의 고아만 데려와야 합니까? 주님은 그 아이들을 모두 구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깊은 좌절 속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무력함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다는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주위의 필요는 분명 우리가 가진 자원보다 훨씬 큽니다. 우리는 이럴 때 우리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봉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겸손함을 배우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행복 기준선을 높이기

행복 기준선을 높여 영원의 삶에 맞추어야 합니다 (전5:10-12) 

어떤 부부가 같이 이민가기 직전인데 이재철 목사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부부를 함께 만났다고 합니다. 그 중 부인은 외국으로 도망을 가 행복하게 살려고 거액의 공금을 횡령한 상태이며 어떻게 행동하였으면 좋은지를 상담한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살면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니 자수하기를 권유하였고 자매는 수사기관에 자수하여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해외로 이민을 갔다고 합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그 책에서 자신은 그 자매가 하나님의 뜻대로 지금 살고 있을 것을 확신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자매는 행복하기 위한 조건으로 돈을 절대시 하였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획득하고는 그것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님을 발견한 것이며 목사님의 상담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불법으로 부자가 되기보다는 정직하게 사는 가난한 자가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이란 복된 좋은 운수 또는 우리가 생활에 만족하여 기쁨을 느끼는 상태라고 국어 사전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 뜻에는 행복은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달성되지 못하는 우연이 개재되어 만족하게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에서도 같은 의미로 행복이 쓰여 있고 독일어도 같다고 합니다. 영어에서 행복은 hapiness 인데 여기서 hap이라는 어원은 happen에서 왔고 다 알다시피 happen 이라면 우연히 발생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정의하는 행복의 의미와 같이 행복은 우리의 능력 이외의 요소에 의존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만 달성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행복은 무엇인가?의 강의에서 샤하르 교수는 행복의 기준선을 높이면 행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행복기준선을 높이는 학설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타고난 것이며 욕구를 강도와 중요성에 따라 5단계로 분류한 아브라함 매슬로(Abraham H. Maslow)의 이론이다. 하위단계에서 상위단계로 계층적으로 배열되어 하위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그 다음 단계의 욕구가 발생한다. 욕구는 행동을 일으키는 동기요인이며, 인간의 욕구는 낮은 단계에서부터 그 충족도에 따라 높은 단계로 성장해 간다. 이것이 욕구 5단계설이다. 1단계 욕구는 생리적 욕구로 먹고 자는 등 최하위 단계의 욕구이다. 2단계 욕구는 안전에 대한 욕구로 추위·질병·위험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욕구이다. 3단계 욕구는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로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애정을 주고받는 욕구이다. 4단계 욕구는 자기존중의 욕구로 소속단체의 구성원으로 명예나 권력을 누리려는 욕구이다. 5단계 욕구는 자아실현의 욕구로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발휘해 자기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하려는 최고수준의 욕구이다”(사회복지학사전, 2009. 8. 15.,).

그러나 이렇게 행복기준선을 높여가다가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도달하였다고 하여 인생에게 참된 만족이 있을까요? 솔로몬에 따르면 거기서도 허무한 상태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 기준선을 높여가되 영원의 차원에 맞추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영원의 차원에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발견될 수도 접근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행복 기준선을 하나님께 두고 그 말씀에 맞추어 사신 분이 있습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17살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거기서 귀족자제로 뽑혀서 특별한 대우를 받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왕의 진미를 먹는 것은 좋으나 그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진 뒤 배급된다는 사실에 신앙적인 갈등이 온 것입니다. 다니엘은 먹고 자는 생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음식을 거절하면 왕명을 거절하게 되어 큰 벌을 받을 수도 있고 쫓겨나서 공부를 하지 못함으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매슬로가 말하는 욕구 5단계를 전부 박탈당하여 일생을 비참하게 살 수도 있는 위험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길을 갔습니다. 다만 자신들을 담당하는 감독관에게 열흘 동안 채식만 먹은 뒤 다른 소년들과 얼굴을 비교하여 좋은대로 조치를 취하라는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채소만 먹은 이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윤택한 것을 보고 채식을 주어 먹게 하였으며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지혜를 주었습니다. 이 지혜를 통하여 다니엘은 사자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이방 나라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

누가복음 6:27-31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은 세상에서 결코 볼 수 없는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런 심판의 전제하에서 해석하고 적용하여야만 합니다. 핍박의 상황에서는 물론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신체, 생명, 자유, 명예 그리고 물질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런 경우 주님은 참고 사적으로는 보복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물론 국가 차원에서야 엄정한 법집행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 너희들 스스로 보복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하나님의 법집행의 대리인들이고 원수 갚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만 달려 있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우리는 완전한 보상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복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선대하고 섬김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법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만 우리는 천국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였다는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은 원수까지 사랑하여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관대하여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황금률을 실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