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양식과 그리스도(5)- 신자의 정체성

요한복음 6장 52 – 59절
어제 오병이어의 기적의 빵과 생선을 먹은 제자들은 가버나움 회당에 앉아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인데, 그 떡은 바로 자신의 살과 피를 의미한다고 하시자 서로 다투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당신의 살이 참된 양식이고, 피가 참된 음료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고 하신 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을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산다고 하심으로, 이른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정식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 가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서 이 부분을 좀 더 명쾌하게 설명하시지만, 기본적으로 이 말씀은 부활 승천 후 보내주실 성령님이 신자들 안에 영원토록 거주하심으로 성취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정체성은 바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만 성령께서 함께 계실 수가 있습니다. 신자에게 오신 성령님은 우리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셔서, 우리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보다 훨씬 더 나은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오는 열매가 이른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요,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입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님은 아들을 생명의 떡으로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매일묵상(2021/04/19 – 23)

2021/04/19
시편 16편 – 영원한 안전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나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5절, 새번역)


16편은 다윗이 지켜주실 것을 탄원하는 시로서 무엇 때문에 다윗이 부르짖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홀( 음부 – 죽은 뒤 가는 장소)로 대표되는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병이나 위험 때문에 다윗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이유를 나열하고 안심합니다. 다윗이 열거하는 증거들은 위태로운 상황에 우리가 직면할 때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만드는 근거가 됩니다: (1)주님만이 그의 산업이요 소득이며 그의 몫을 지켜 주시는 분이다. (2)그분의 성도들은 자신의 즐거움일 뿐만 아니라(성도의 교제), (3)주님이 주시는 유산은 찬란하다. (4)주님은 늘 좋은 생각과 교훈을 주신다. 그러나 다른 신을 따르는 자들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9-11절에 이르면 다윗은 영원한 안전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음을 넘어 생명의 길로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을 모시고 사는 자신의 삶을 늘 기뻐합니다(11). 다윗의 이 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실현되지 않은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 시편(특히 10-11절)이 성취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행2:24-32). 당연히, 주님을 믿는 우리 역시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양자될 때 즉 우리 몸이 부활할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롬8:23-24).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시편16:7).


2021/04/20
신체 일부가 마비된 한 소녀를 모두가 피하였는데, 드디어 소녀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는 소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불평을 그치고, 재미있는 우스개소리를 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마침내 전문적인 개그우먼이 되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그의 국부론에서 분업이야말로 기술진보의 첨병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일을 반복하여 전문적으로 파고들면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길,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고, 그 결과 기계의 발명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에 전념하여 능숙하게 되면, 그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네가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고 말씀하십니다. 벤자민 플랭클린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이 가르침을 받고 다각도로 노력하고 공부한 결과 뛰어난 외교가요 정치가로서 미국의 역사에 존경받는 분으로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세계 최고의 인쇄공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는데, 이는 그가 인쇄업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인쇄업으로 성공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이신론(理神論)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상기 3가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은 노력하면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도록 창조되었습니다만, 불행히도 사람들은 세상의 주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요 지혜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2021/04/21
잠언12:26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되나 악인의 소행은 자신을 미혹하느니라”(개정개역)


“좋은 말(word)”은 한 마디라고 하더라도 좋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실상 그런 은혜의 수단이 없다면, 사람은 미혹되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잠언은 자신이 신뢰할 친구를 선택할 때 매우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 가운데서 살아간다면 생명의 길을 벗어나 사망의 길로 이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인도자가 된다”는 구절에서 “인도자가 된다”는 표현은 숨겨진 것을 찾기 위하여 주의깊고, 부지런히 그리고 철저하게 조사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웃(친밀한 친구)을 위함입니다. 의인의 눈은 넓게 열려져 있어 자신의 친구들이 가지는 고집셈, 속임, 어리석은 수다, 그리고 신뢰할 수 없는 행동들을 보게 됩니다. 그냥 놓아두면 그 친구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허영심과 이기심으로 가득차서 그런 것을 보지 못하며, 그 결과 자신의 친구를 교정해 줄 수 없습니다. 그는 지혜에도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의로운 길로 인도해 주는 좋은 친구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악한 행위를 지혜로운 행위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인은 미혹되어 사망에 이르게됩니다. 한편 이웃의 좋은 인도자로 나오미(룻의 시어머니)를 꼽을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모세 율법에 규정된 고엘(친족구속)제도를 활용하여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 모압 여인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 보내어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줍니다. 그 인도를 따라 간 룻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결국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멀리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선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지만, 악을 꾀하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잠12:2, 새번역).


2021/04/22
잠언10:22
“주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유하게 되는 것인데, 절대로 근심을 곁들여 주시지 않는다.”(새번역)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4)고 선언한 잠언은 그렇게 되는 원인을 본문에서 밝힙니다. 즉 부지런히 일한다고 저절로 부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되도록 재물을 주시는 장본인은 바로 주님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자명한 진리를 적은 것 뿐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만드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공평과 정의라는 법칙을 온 우주의 형성 틀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참된 부(wealth)라는 주님의 축복은 부지런하게 일하여야만 작동합니다. 어리석은 자 보다 게으른 자는 더욱 문제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일해 줄 것을 기대하나 게으르게 일에 임하여 예상하지 못한 손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물을 사용하여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의로움이야말로 부를 영속시키는 직접적 근원이 됩니다. 대표적인 분이 400년 동안 부를 이어 온 경주 최부자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는 궁극적 원인은 바로 만유의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로우며 부지런하게 일하는 모습이 주님의 축복을 받는 지름길이요 하나님의 축복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점은 힘을 들여서 그리고, 격렬하게 노동한다고 하여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축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노동은 야망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며 자신에게 해를 끼칩니다. 그 사람에게 일은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를 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심판 하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님을 경외하여 한 쪽 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딤전6:9, 새번역)


2021/04/23
잠언12:27
“게으른 사람은 사냥한 것도 불에 구우려 하지 않지만, 부지런한 사람은 귀한 재물을 얻는다”(새번역)


이 잠언은 게으른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을 서로 대조하여 지혜의 길을 찾게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점이 본 절에서 불확실하여,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냥한 것”이란 먹기 위해 사냥한 들짐승(노루, 산양 등)을 의미합니다. 다른 모든 일과 같이, 사냥을 위해서도 치밀한 계획, 인내, 기술 그리고 끈질긴 노력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른 사람이 들짐승을 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를 전제로 같은 히브리어 본문을 가지고 두 종류의 번역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스스로 사냥하지 않는다”(개정개역), 다른 하나는 “사냥한 것도 불에 구우려 하지 않는다”(새번역)는 번역입니다. 그러나 식량을 위해 사냥하러 나가지 않던, 사냥은 성공적으로 하였으나 굽지를 않았다면 결국 먹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게으름으로 인하여 자신의 기회를 던져버린다는 의미는 동일합니다.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징계를 싫어하는 고집스러운 사람이 영적으로 굶주리는 것과 같이, 게으른 자도 풍부한 음식을 굽지 않아 육체적으로 굶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반드시 핑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도 성경 구절을 핑계로 기도로만 병을 고치겠다거나, 수혈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나고 있습니다. 이 반면, 부지런한 사람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반은총을 잘 이용하여 야생의 들에 풍성하게 존재하는 귀한 재물인 들짐승들을 잡아 구워먹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일반은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잠언을 잘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지만, 거만한 사람은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잠13:1, 새번역). 

매일큐티(2021/04/12 – 16)

2021/04/12
시편 15편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주님,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1절, 새번역)

본 시편은 시인(다윗)이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열거된 대답은 예배자들이 성소에 들어갈 조건을 물어보면, 제사장은 이에 응답하는 형태를 따서 만든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하나님은 주인이고, 인간은 손님의 위치에서 주고 받는 것입니다. 주인의 조건은 깨끗한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진실된 사람,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 주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는 사람, 약속을 지키는 사람, 고리대를 받지 않는 사람,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쉽지 않은 조건입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다는 말씀처럼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주님의 장막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약속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스파이가 있습니다.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명들을 행하는 여부입니다. 신자는 모두 성령님의 증거를 받아 그리스도를 알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하는 자들입니다. 실로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추악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고 의롭다 선언하신 하나님!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어찌 결심하고 경건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조사하여 철저히 살피셨으나 나에게서 아무런 흠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입으로 범죄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습니다.”(시편17:3, 현대인의성경)


2021/04/13
아프리카 로디지아(짐바브웨) 소년(9살)이 범브란트 목사님이 소속 선교회로 보낸 편지입니다.
“ 범브란트 목사님, 우리 어머니가 목사님이 쓰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는 책을 읽어 주셨어요. 저는 공산국가의 감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전해 듣고 울었습니다…….우리는 로디지아에서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여러 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하시는데, 왜 우리나라엔 오시지 않습니까? 많은 로디지아인들이 목사님의 일을 도와 드릴 거예요. 전 목사님의 선교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어 드리겠어요. 한 번에 장군도 되고, 총무도 되고, 교회를 위해 봉사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목사님네 장군들(선교회의 일꾼을 지칭함)도 구세군의 장군들처럼 제복을 입나요? 꼭 알려 주세요. 어린이들을 무시하지 마세요. 그들의 천사들이 매일 예수님의 얼굴을 뵙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총책임자의 책임을 설명한 장문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어머니가 선교회의 총책임자가 되었고, 아홉 살 그 소년은 어머니의 보조원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점령시, “누구든지 제일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사람이 총 사령관과 장관이 될 것이다”라고 공포하니, 그의 조카 요압이 제일 먼저 올라가서 총사령관이 됨은 물론 천하명장으로 이름을 떨칩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욕이 너무 강해 자리 보전을 위해서라면 이종사촌(아마사)을 암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수고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만, 애를 쓰는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쓰라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여기에는 금생과 내생에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마11:12, 현대인의성경).


2021/04/14
5살 어린 아들의 말하였습니다: “엄마, 내가 성탄절 선물로 제일 원하는 게 무언지 아세요?” 어머니는 아이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담배 냄새가 나지 않는 엄마에요. 나는 엄마를 굉장히 사랑해서, 엄마가 오래오래 살길 원해요.”
그렇게 말한 후 아이는 통통한 팔로 어머니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아야만 하였고, 그후로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향한 사랑이 담배 중독의 고통을 이겨낼 힘을 준 것이었습니다. 1945년 나찌로부터 해방된 루마니아는 소련이 통치하였습니다. 당연히 루마니아 그리스도인들은 모조리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범브란트 목사님 부부는 안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분은 자신들도 잡혀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동참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는 마침내 응답되었습니다. 먼저 1948년 목사님은 체포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56년 석방되지만, 석방 후에도 담대하게 지하교회를 다니며 간증하고 설교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감옥의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 체포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 역시 응답되어 1959년 밀고를 받아 들이닥친 경찰에게 잡혀 6년을 복역합니다.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선택하신 것은 고통에는 엄청난 가치가 있음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자랑이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3-5).


2021/04/15
어떤 어머니가 아들에게 사과를 하나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으로 네 동생과 나누어 먹어라.”
“무슨 뜻이예요?”
“네 동생에게 큰 쪽을 주란 말이다.”
그러자 그 아들은 사과를 어머니에게 되돌려 주면서 말했습니다.
“동생에게 줘서 그 아이가 예수님의 방법으로 나와 사과를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어요.”
이 아이의 말은 인간의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만약 사과가 아니라 큰 재산 혹은 권력을 나누는 문제라면 어른들 사이에서 역시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쟁 방지를 위해 합리적 기준이 법률로 제정되어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수고한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일꾼에 관한 비유는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포도원을 가꾸기 원하는 주인은 아침부터 시작하여 여러 번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마지막으로 고용한 일꾼은 오후 4시에 고용되었으나, 품삯은 한 데나리온으로 동일하였습니다. 저녁이 되자 주인은 청지기를 보내어 맨 나중에 온 일꾼부터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불시켰습니다. 당연히 아침에 들어와 더 많은 고생을 한 일꾼들이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은 분명합니다. “친구여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 모두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것이 아니냐? 네 것을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자에게도 같은 품삯을 지불하는 것이 내 뜻이다.” 우리가 살아갈 때 열심히 일하였으나 남이 먼저 승진하거나, 더 많은 돈을 벌거나, 명예를 가질 때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겸허히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 자신을 낮추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나눌 때는 예수님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언16:33).


2021/04/16
잠언12:25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번민이 일지만, 좋은 말 한 마디로도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새번역)
이 잠언은 마음을 즐겁게 하는 언어 사용을 장려합니다. 왜냐하면 근심 때문에 마음이 무겁더라도, 좋은 말 한 마디나, 좋은 소식 하나가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기쁜 마음을 갖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근심이란 삶에 중요한 무엇인가를 상실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심한 정서적 고통입니다. 근심이 마음에 들어 오면 그런 사람은 불안정한 바다와 같이 요동하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근심을 가지게 되면 매사에 합리적으로 사고 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 만큼 근심을 제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에 반하여 좋은 말(a good word)이란 그런 근심을 만들어 내는 위협을 효과적으로 상쇄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근심이 사람을 쫓아내는 반면, 인격적이며 친절하고, 즐거우며 부드럽고, 적절하며 사려깊은 말은 사람을 회복시켜 용기와 소망을 갖게 합니다. 요셉이 아직 이집트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전해 들어 알게 된 야곱의 마음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말(메시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복음의 소식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왕으로 만유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러분의 모든 근심을 주님 손에 올려 놓으셔야 합니다. 이는 주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빌4:6-7, 새번역).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4)-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

요한복음 6장41-51절
하나님의 참된 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권한이자 의무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일이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 아들에게 가는 자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세상과 사망이 최종 권세를 잡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실 일은, 먼저 십자가에 높이 들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들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죄를 대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다”라는 말씀은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심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살을 먹은 우리 즉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한편,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유의 주로 지금 사망을 포함한 모든 불순종하는 것을 복종시키고 계십니다. 죄 문제는 이미 해결하셨고 사망이라는 최후의 원수를 철폐하셨을 때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입니다.

참된 양식과 그리스도(3)

요한복음 6장 35 – 40절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다음날 가버나움으로 당신을 찾아온 무리들에 게 썪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가르치신 후, 당신이야말로 생명의 떡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당신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당신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하심으로 듣는 자들이 자신을 통한 구원을 깨닫기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청중들은 오병이어의 표적이 의미하는도 깨닫지 못하였고, 그 표적을 강해하는 주님의 말씀 역시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시대에 선지자 엘리사에게 와서 나병을 고침 받은 시리아 장군 나아만은 그 기적이 의미하는 바를 잘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다는 증표이었습니다. 그후 나아만 장군은 오직 주님만 섬겼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표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질 구속을 의미합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에 대하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하시면서 “아버지께 배운 자마다 내게 오고 있으며,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 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빵과 밥을 먹어 육체를 살리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삶을 얻는다는 점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죽으나 마지막 부활의 날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다시 살리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매일묵상(2021/4/5 – 4/9)

2021/4/5
시편14편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절)


본 시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바보)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1-3), 그분의 백성을 압제하는 사람(4-6)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늘에서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직간접적으로 경멸하는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절(7절)에 가면 시편 기자의 관점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박해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편, 로마서1:18절 이하에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행태를 자세히 묘사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피조물 중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망각하게 됩니다. 그 결과 다스려야 할 피조물들– 뱀, 물고기, 곤충 등-의 본을 따 만든 우상을 섬기고, 창조주가 제정한 남과 여의 법칙을 무시하여 그들의 정욕대로 더러운 짓을 행하도록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생각은 온갖 죄를 범하도록 유도해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며 자기 정욕대로 살아가는 무신론자들은 한 마디로 지적, 도덕적 자살자들입니다. 또한 교양있는 무신론자들은 그런 무모한 도덕적 타락까지 내려가지는 않으나 남의 행동이 그르다고 판단하면서도 자신도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전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이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음을 감사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2021/4/6
어떤 무신론자의 아들(소년)이 그 부모에게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그분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게 더 안전하겠어요. 그러면 우리를 일단 천국으로 데려갈지 모르잖아요?”
­이 세상은 절대로 인간이 창조한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물론, 빛, 시간, 공간, 물, 공중의 새, 꽃, 나무와 돌 등을 생각해 보면 자명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살다가 예외 없이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런 낯설고 무서운 장소에 살게 된 인간은 고민합니다. 여기서 수 많은 철학과 종교가 태어났습니다. 무신론도 그 중 하나입니다. 무신론은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인간의 자기 주장의 성격이 있습니다. 신을 전제 하지 않고도 인간은 얼마든지 윤리적 존재가 될 수 있고, 인간 한계는 최선을 다하면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인 철학자가 니이체와 그의 초인사상입니다. 불행히도 니이체는 10년 동안 정신병자가 되었고, 결국 그의 의지에 반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네가 틀렸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전제하고 메시지를 전개하며, 그분이 인간의 역사에 깊이 개입하고 계심을 여러 사건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결정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이 증거를 가진 사도들은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였으나,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을 위해 순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은 근거 없이 떠들지 말고 복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행17:31, 새번역).


2021/4/7
범브란트 목사님 가족이 함께 지낸적 있는 인디언 가족은 다섯 살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생전 처음 아주 좋은 구두 한 켤레를 선물로 받아 신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다리가 아파 구두를 벗고 있었는데, 이를 본 그 아이는 신고 있던 구두 한 짝을 벗어서 목사님에게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받지 않았더니 묻기를 “목사님 제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니면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자가 아닙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사실 그 아이가 구두 한 짝을 벗어 주게 된 과정은, 식사 도중 “누구든지 두 벌 옷을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주라” 침례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직접 자신의 삶에 적용하였으나 상식에 어긋나서 머리를 갸웃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19세기말 조선에 복음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 신자 몇명이 등 뒤에 X 자로 나무를 만들어 지고 선교사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순수한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결국 주님의 뜻과는 상관 없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이른 아침에 큰소리로 이웃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면, 그것을 오히려 저주로 여길 것이다.”(27:14, 새번역) 혹은 “미련한 사람이 입에 담는 잠언은, 술 취한 사람이 손에 쥐고 있는 가시나무와 같다.”(26:9)고 경계하여 분별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분별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마땅히 이 분별력을 기초로, 그리고 그 분별력을 따라 실행되어야만 합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더 값지고, 네가 갖고 싶어하는 그 어떤 것도 이것과 비교할 수 없다.”(잠3:15, 새번역).


2021/4/8
어느 여성은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청바지가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청바지는 유명 패션 모델 지지하디드가 입은 청바지로서 댓글이 수천개가 달려있었습니다. : “너무 예쁘다! 이거 어느 회사의 것이야? 어디서 살 수 있지? 얼마야? …..” 그러나 너무 비쌌습니다. 이때 이 여성은 유사한 청바지를 저렴하게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2년여 시장 조사 끝에 확신을 얻어 시티은행원 자리를 나와 3명이 패션 스타트업 추시(Choosy)를 만들었습니다(2018년). 그리고 60억원의 투자자금을 모집하자, 알고리즘부터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과 댓글을 분류하고 분석하여 제작할 옷을 선정하였습니다. 그 옷은 고객의 실시간 피드백이 반영된 제품으로서 100달러 이하의 값으로 소량만을 주문받아 제작됩니다. 2018년 7월 서비스가 시작되자 옷마다 금방 완판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도전정신, 창의성, 치밀한 계산을 거쳐 사업에 뛰어든 추시 CEO에 찬사를 보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는 먼저 앉아서 영생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치밀하게 계산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면 세상적으로 잃어버릴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따라야 한다는 결론이 섰을 때, 주저하지 않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생을 얻게 됩니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막10:29-31, 새번역).


2021/4/9
잠언12:24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게으른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새번역).


본 잠언은 부지런한 사람은 다스리게 되나, 게으른 사람은 힘에 겨운 일을 하게 되는 운명을 대조함으로서 부지런함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들로서 독립성과 힘을 갖게 되어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자들로서 결국 강제로 노동에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일을 피하는 손은 결국 가장 힘든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독립성을 잃고 고된 일을 하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맡아 부지런히 완수하여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다. 이 잠언은 솔로몬의 것입니다. 솔로몬은 통치 말기에 여로보암을 주목하여 감독자로 삼았습니다. 이는 그가 매우 능력 있고, 부지런한 젊은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아히야를 보내어 솔로몬의 범죄 때문에 여로보암에게 10지파를 떼어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 도피한 여로보암은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 10지파를 대표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대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르호보암이 강제노동을 경감해 줄 의도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동조하는 10지파를 데리고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웠습니다. 이 반면 통치에 어리석고 게을렀던 르호보암은 두 지파만 거느린 약소국 유대 왕국의 왕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솔로몬 자신이 쓴 잠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사례입니다. “게으른 사람아, 개미에게 가서, 그들이 사는 것을 살펴보고 지혜를 얻어라.개미는 우두머리도 없고 지휘관도 없고 통치자도 없지만, 여름 동안 양식을 마련하고, 추수 때에 먹이를 모아 둔다.”(잠6:6-8, 새번역). 

부활하신 그리스도

베드로전서 2:4-10
“기독교의 역사”를 지은 알리스터 맥그라스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의 시기부터 약 400년까지를 초기 교회로 규정짓고, 초기 교회가 전 세계에 퍼지며 부흥발전한 이유를 분석한 것이 있습니다. 발전의 중심 축에는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셔서 남녀노소 인종을 불문하고 그들 모두의 죄를 위해 죽고 영원한 몸을 가지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사건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런 복음은 듣는 사람들, 특히 사회에서 소외된 여자와 노예들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복음을 믿어 갖는 부활신앙 때문에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순교에 직면해서도 당당한 태도를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가 선포하는 가장 중요한 소식이며, 신자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진리입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부활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1500년 전 레위기(23:9-14)에 규정한 초실절(初實節, Feast of Firstfruits)이라는 절기를 통해 예표하고 있습니다. 초실절은 유월절 후 첫 번째 도래하는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그해에 처음으로 추수한 보리 이삭 한 단을 제단에 드리는 제도로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제 추수를 할 것임을 고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초실절 보리 이삭 한 단을 드리는 바로 그 시간에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날이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이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반석이지만,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영원한 심판자가 누구인지를 선포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삶을 실천해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매일묵상(2021/3/29 – 4/2)

2021/3/29
2021년 고난주간은 3월28일 시작되어 4월 3일 토요일에 끝납니다. 오늘은 두 번째 날입니다. 시편118편을 묵상하겠습니다.

시편118편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22-23절)


출애굽의 목적은 노예 해방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구속에 있습니다. 본 시편은 이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행진하여 성전 문들에 이르고(19), 그 문들을 통과하여 제단으로 가고 있습니다(27). 이 과정에서 순례자들과 지도자 사이에서는 구원의 체험을 노래하는 찬송과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1-18). 그러나 19절을 넘어가면 어조가 바뀝니다. 순례자들은 주님께 가서 경배하고자 의의 문들을 열라고 외치는데, 문지기는 이 문은 주님께 속한 것이니 의인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20). 시편기자는 이미 주님의 능력으로 원수들로부터 구원받은 사실을 고백하며 감사 드립니다(21). 옛 이스라엘에서 집을 지을 때 필요 없다고 버린 돌이 다른 경우에는 오히려 집 모퉁이의 머릿돌과 같이 요긴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그렇습니다. 바로의 노예가 된 민족이 선택되어 구속받음으로 인간 구원 역사에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속받은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분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게 모두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되셨으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이를 듣고 보는 자마다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 이외에 누가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이 하나님은 주님으로 인하여 바로 우리 아버지가 되심을 감사드려야만 합니다.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지만, 나는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그들을 물리쳤다.”(시편118:10, 새번역).


2021/3/30
오늘은 고난 주간 중 세 번째 날(화요일)입니다. 화요일 아침 성전을 향하여 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하니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믿음과 기도를 통하여 어떤 불가능한 난제도 다 이루어지고 해결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신구약 성경의 공통된 주제이며, 많은 실례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대표적인 이적은 엘리야의 기도를 통하여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제물을 사르고, 죽었던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경우이며, 신약에는 소경이 눈을 뜨고, 베드로가 죽어 있는 다비다라는 여제자를 다시 살린 경우입니다. 또한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른바 ‘응답되지 않는 기도’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조화시키기 어렵습니다. 오늘 기도의 교훈을 주신 주님 역시 3흘 뒤 겟세마네에서 드린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중핵에는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3번이나 기도를 드렸으나 응답받지 못한 후 이를 깨닫고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는 늘 시편 기자의 외침이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께 몸을 피하는 것이, 높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시편118:9, 새번역).


2021/3/31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서기관 중 한 명이 와서는 모든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인지 질문을 하니 주님은 그 유명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막12:29-34). 이 답변 후에  주님은 역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막12:28-37). 이어 외식하는 서기관 등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들이 성전의 웅장함을 보고 감탄을 금하지 못하자, 주님은 성전이 철저히 파괴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실 날은 하나님 아버지이외는 어떤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성전은 이후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때 예루살렘에 있던 신자들은 주님의 예언을 기억하고 전부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2021/4/1
목요일: 예루살렘 성 내에서 제자들과 저녁에 유월절을 지내셨습니다(눅22:7-13). 식사하시는 도중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가룟 유다를 포함한 12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뒤 다시 자리에 앉으사 옷을 입으셨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을 축약적으로 보여주시는 모습입니다. 이어 가룟 유다가 밀고 하기 위해 나갔고,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다고 공언하였으나, 주님은 오히려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 하셨습니다(요 13장). 그리고 주님은 이른바 다락방 강화를 통하여 당신이 죽고 부활하면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제자들과 후에 믿을 당신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요14장-17장). 식사를 마친 뒤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1시간 동안 피 땀 흘리시며 하나님께 기도하신 뒤 마음을 정하시자마자, 로마 군인과 성전경찰들에게 잡혔습니다.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고, 안나스의 사위이자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또 받은 후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밝히셨기 때문입니다(마26:62-66). 주님은 사형선고를 받은 후 또 다시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고 주먹으로 얼굴을 맞는 모욕을 당하였습니다.(마26:68-69). 이때가 금요일 아침까지 일어난 일입니다. 물론 이 가운데 베드로가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었습니다(눅22:54-62). 이 사건과 이사야 53장 6-8절을 함께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7-8).


2021/4/2
금요일: 아침에 빌라도에게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밝히셨습니다(요18:36-37).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빌라도는 정치적 목적을 따라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아침 9시에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오후 3시 운명하실 즈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유월절 양을 잡는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요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시체를 자기 묘실에 장례를 지냄으로써 이사야 53장 8절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마27:59-60). 삼일 후 부활하실 때까지 주님은 무덤에 계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잘 해설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이사야53: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