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02/22 – 25)


2021/02/22
시편 9편
“주님은 억울한 자들이 피할 요새이시며, 고난받을 때에 피신할 견고한 성이십니다.”(9절, 새번역)

시편 9편과 10편은 하나의 시입니다. 그 이유는 현존하는 히브리 원문의 사본이 이 두 시편을 하나로 취급하고 있고, 형식적으로도 두 시가 하나로 묶여지는 기교(acrostic pattern)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감사를 드립니다(1-3). 그 다음으로 이방 국가들에 대한 재판장으로서의 야훼를 상술합니다(4-8). 셋째로, 야훼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그분은 친히 피난처가 되십니다(9-14). 마지막으로, 악인들에 합당한 심판을 묘사하면서 9편을 마칩니다(15-20). 한편, 9절에 있는 ‘요새’와 ‘견고한 성’은 같은 히브리 단어(misgab)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히브리 단어는 접근이 불가능한 높고 견고한 바위로 된 장소로서, 침입해 오는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억울하게 고난 받을 때 하나님께 피한다면 안전할 수 있습니다. 비시1,300년경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태평세월을 거치자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미디안을 불러들여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셨고, 7년 간 미디안의 학정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서서 간절히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은 이들의 회개와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을 보내어 미디안을 쳐 부수고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피할 요새가 되심은 물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고, 시편 기자처럼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약5:13, 새번역).


2021/02/23
어떤 사람이 12살 된 유대 소년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이런 경고를 하였습니다.
 “만약 이 모든 이야기가 다 사실인데, 네가 믿지 않는다면 너는 멸망하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자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 마찬가지 이유로 만약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닌데 선생님이 이것들을 믿는다면, 선생님은 멸망하리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유대인들과의 이 논쟁은 2천년이나 되었고, 이 논쟁 때문에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었습니다(AD48). 논쟁의 핵심은 “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 정통 보수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에 규정된 할례, 안식일, 음식 규정 등을 지키며, 선행을 하되, 범하는 죄악들에 대한 속죄는 제물, 기도, 회개, 그리고 선행으로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은 선악을 비교하여 선을 행한 것이 많으면 천국에 그렇지 않으면 지옥의 심판을 내린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상의 속죄이외에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어떤 방법도 없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만약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속죄를 이루신 뒤, 부활 승천하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된 전형적인 유대인은 사도 바울입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도마 등 수 많은 유대 증인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십시요. 그러면 만유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3-4).


2021/02/24
러시아에서 한 안내인이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설명하고, 끔찍한 종교 재판 장면과 오래된 십자가를 보여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학생들, 옛날엔 사람들이 무식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어요. 사람들은 그가 죄에서 구해 주려고 하늘로부터 왔다고 생각했어요.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그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고, 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믿었어요. 우리 조상들은 아주 무식했던거죠. 더구나 그들은 죽었던 예수가 부활했고, 그 부활한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쳤답니다.”
그러자 열두 살된 소녀가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생님 동무, 이렇게 재미있는 일들을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잘못한 일들 때문에 늘 마음이 괴로웠어요. 우리 어머니는 저 때문에 우시곤 했구요. 전 아버지를 속이고, 학교에선 부정 행위를 하였어요. 전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다 벗어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어요. 전 죽는 게 무서워요. 전 장례식을 볼 때마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관 속에 눕게 되고, 모든 게 다 끝장 날거야’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러나 전 살고 싶어요.”
소녀는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비록 현대에서 그런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해도, 저는 우리 조상들의 어리석은 믿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똑똑해서 죄에 짓눌려 살고, 천당을 놓치는 것보단 어리석더라도 죄를 용서받고 부활하는 게 더 좋아요. 제게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하여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갖겠어요.” 자신이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 한 어떤 누구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에 어떤 사람들은 비웃었고 또 더 듣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행17: 32, 새번역).


2021/02/25
잠언12:19절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이 잠언은 짧지만 기교가 들어가 있습니다. 중심된 내용은 ‘영원히’와 ‘잠시 동안’이라는 부사의 대조입니다. 이 두 부사는 히브리 원문에는 이 구절의 중심에 배치되어 뜻이 대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단어 사용의 재치(wordplay)가 들어 있습니다. 원문의 순서대로 풀어 보면 “진실한 입술은 굳게 세워지는데 그 기간은 무한정이다 그러나 눈 깜빡할 동안 존재하는 혀가 있는데 (그 혀는) 거짓되었다.” 진실한 입술이 영원히 굳게 세워지는 이유는 바로 주님이 창조하신 질서에 일치하기 때문이고, 거짓된 입술이 눈 깜빡할 사이에만 존재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거짓된 혀들을 미워하십니다. 거짓과 관련된 드라마틱한 성경의 사건은 바로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10명의 이복형제들입니다. 이들은 질투의 대상이 된 요셉을 은 20량에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아버립니다. 그후 찢은 요셉의 옷에 양의 피를 묻혀 아버지 야곱에게 보이고 요셉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20년 동안 야곱은 속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고된 훈련을 통과시키면서 훌륭한 신앙인이자 정치가로 키워내셨습니다. 거짓말은 탄로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기는커녕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아버지 야곱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던 형들의 입장은 그야말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에게 여러분의 자녀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요셉과 같이 진실한 사람으로 키워내실 것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신다.”(잠17:3).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스도(4)


요한복음 6장 1 – 15절
오병이어의 표적이 주는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돌보시는 신실하신 주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겸손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만 한다 교훈입니다.
전자와 관련하여 주님은 이미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명령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이 모든 것 – 직장, 건강, 성공, 명예, 음식 등 – 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하나님 너희 천부께서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너희 부엌에 채워주신다” 이 약속을 오늘 본문에서 성취하셨습니다. 즉 바쁜 삶의 일상을 잠시 버려두고 말씀을 듣기 위해 멀리까지 따라와서 오랜시간 들은 2만명의 청중들에게 도시락을 공급하심으로 입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원동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왕으로 옹립하려는 군중들을 흩으시고 산으로 홀로 떠나가신 모습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그 목적이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을 백성들이 깨닫고 돌아가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힘써 일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여야만 그 속에 불의가 없습니다. 일찍이 광야에서 마귀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유혹을 거절하신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때와 환경이 되었다고 판단하시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어 시장한 2만명의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자신의 세상적인 입지를 굳히려는 유혹은 버리셨습니다. 우리 삶에 간직해야 할 모범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무슨 기림이 있고, 즐거운 일이 있고,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 때, 보내신 분의 영광만을 구하려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매일묵상(2021/02/15 – 19)

2021/02/15
잠언12장17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증거를 보이지만, 거짓 증인은 속임수만 쓴다”(새번역)

본절은 재판을 전제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증인의 인격과 거기에서 나오는 증언이 재판과 정의에 미치는 효과는 지대합니다. 양심적인 증인은 진실을 말하여 공동체를 견고하게 합니다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재판관을 오도하여 해를 끼칩니다. 증인의 증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근거로 재판관은 확신을 가지고 판결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한편, 거짓이라는 말은 단순한 거짓말 정도가 아니라, 재판에 영향을 미칠 의도를 가지고 거짓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당연히 의도성이 담겨 있습니다. 거짓된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도 증인의 말이 중요하지만, 과학적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던 구약 시대에 “사건을 목격하였다” 혹은 “그런 말을 들었다”라는 증인의 말은 처벌을 내리는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에 따르면 두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사형집행도 가능하였습니다. 이 반면 그가 거짓 증인으로 밝혀진다면, 그 거짓증언을 통해 피고에게 의도하였던 해악을 동일하게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6-19). 그러나 세상은 불의하기 때문에 권력에 의하여 억울한 희생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비시850년경 아합 왕 때 일어난 나봇의 억울한 죽음입니다. ‘속임수’란 재판관을 오도하여 정의를 좌절시키는 말들을 지칭합니다. ‘속임수’가 통하는 그 사회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합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3-34).


2021/02/16
6살 된 도로시는 어머니가 자신의 인형 ‘엘리자벳’을 그냥 인형으로만 생각해야 한다는 말에 항의하였습니다.
“그녀는 인형이 아니라 소녀란 말예요. 그녀가 만약 그냥 인형이라면 내가 그녀에게 기저귀를 채우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자벳은 그냥 인형이 아니예요”

물론 도로시의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세상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도로시의 생각이 현실화 되는 메타버스(가상 우주)게임에서는 그 인형이 소녀로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가상 우주 공간은 인간이 만든 그야말로 가상의 세계이고, 우리가 숨쉬고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현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든 세상입니다. 이 현실 세상에서는 우리가 주장한다고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규정에 합당하여야 비로서 작동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의미부여’정도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시각(철학, 관점, 세계관)에서 만물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여한 의미를 토대로 자신들의 삶을 전개해 나가고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열매들을 보고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세상이 우연히 생겼다거나 아니면 모르겠다 등의 전제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의 생각과 틀리게 되면 어린 도로시의 생각과 같게 됩니다.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인의 이성은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전제로 사고하기 때문에 인형은 인형이고 사람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며 그에 합당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이 지혜이며 성숙한 이성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롬1:22, 새번역).


2021/02/17
여섯 살 된 소년이 부모와 같이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습니다. 식사 도중에 아이가 여주인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여사님, 요리가 맛이 없어요 정말 요리할 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고 하셨지만,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잘못 이해한다면 위의 어린 아이와 같이 말하게되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었지만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성경 역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통해 발명한 문자와 문학 그리고 상식 역사 철학 등이 도구가 되어 기록되었음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각 권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문학작품이요 역사책이고 철학(신학)책입니다. 시편이 그렇고 잠언이 그러하며, 욥기, 에스더, 신명기, 요한복음, 로마서, 사도행전 등이 그러합니다. 어린 아이는 도저히 이런 성경들을 쓰거나 이해할 지성과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와 관련한 중요한 메시지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고난 주간에 주님은 하나님 사랑괴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한 율법사는 그런 삶이 번제와 제물보다 더 낫다고 동조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하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고백과 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깨달음과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면 나는 빠른 시일 안에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오만방자한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알아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고전4:19-20).


2021/02/18
미하이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외관이 허름한 식당에 외식을 하러 나가자, 식당을 본 알렉스가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왜 우리를 이렇게 누추한 식당으로 데리고 가세요?”

그러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니 모든 것이 깨끗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알렉스는 자기가 식사 기도를 하겠다고 자청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 당신께서 좋은 교훈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바깥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흉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언제나 안을 볼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안을 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극작가 도로시 세이어즈(1893-1957)는, “… 지적이고 호소력을 지닌 배우가 대사 속에 자기만의 개성을 불어넣어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창조적인 극작가에게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또한 배우가 난해한 해석을 적절하게 해내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대단한 즐거움이다.”(창조자의 정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세상에서 살아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여기에는 소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온갖 모험, 스릴, 고난, 기쁨, 슬픔, 고통, 두려움, 삶과 죽음 등이 존재합니다. 자유의지가 등장 인물 각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각자는 반응에 차이가 있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러 난관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났지만, 인내하면서 통과해 내자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욥의 모든 역경을 돌이켜주셨습니다. 당연히 우리 역시 삶의 여러 부분에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고전12:20, 새번역).


2021/02/19
잠언12장 18절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 (새번역)

잠언은 사려깊은 언어 사용을 격려합니다. 그 방법은 생각 없이 쏟아 내는 말이 주는 정신적 상처를 비수에 찔린 치명적인 육체의 상처와 대비시키거나, 혹은 사려깊은 말이 미치는 좋은 영향을 육신의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양약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는 말이나 혹은 성급하게 말하는 사람은 잠언에서 바보들이나 하는 반응이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한편, ‘비수(검)’는 죽이기 위하여 고안된 전투 무기로서 의도적이고 무정한 살인자를 상징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혜로운 자의 말(혀)은 치료제입니다. 이 비유는 해로운 갈등들을 풀어서 화목하게 만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존 빌립 목사님은 차를 몰고 2틀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친구 부인이 암으로 임종 직전에 있었고, 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인의 죽음이 자신의 약한 믿음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친구를 만나 고린도전서3:21-23을 펴서 “메리가 죽어가고 있으나 그 죽음은 네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고 말하여주었습니다. 사실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인 동시에 선물의 성격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말기 암에 걸린 메리에게 죽음은 고통을 잠잠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약과 구약’이라는 좋은 ‘약’이 있어 사람들을 치료하기 너무나 좋은 위치에 있음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엡4:29, 새번역).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스도(3)

요한복음 6장 1-15절
 80억 명의 지혜를 다 모아도 쌀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벼는  땅 물과 햇빛 그리고 바람만 있으면 놀랍게도 맛있는 쌀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은 아무리 땅에 서 있고 물을 마시고 햇빛을 쐬도 쌀은 커녕 오히려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을 뿐이니 아무 의식도 없는 벼는 이미 쌀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땅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란 늘 하나님께서 식물이나 물고기들이나 포도나무 등을 통해 공급해주시던 밀, 보리, 물고기, 포도, 무화과 등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나 당신의 아들을 통해 직접 만들어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오병이어의 기적이 늘 베플어졌다면, 사람들은 의례 그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여 기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희소성 그것이 기적의 요체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40년 동안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의례 내려오는 만나 무엇이 그렇게 신기해! 그래서 만나에 질렸다고 하나님께 불평을 하며 오이도 호박도 부추 마늘도 없이 만나만 있는 우리는 너무나 불쌍하다고 울었습니다. 주님 역시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오직 두 번만 행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죽고 부활하신 뒤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존재를 섭리 가운데 드러내고 계십니다.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들 역시 신자들만 알도록 암암리에 베풀고 계십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유의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주님 오병이어를 통해 갈비나 불고기로 만들어 주지 않으신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주님은 우리의 노동을 요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힘든 노동이야말로 교만한 우리를 변화시키는 신성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삶의 본질적인 요소인 ‘불안’을 누구나 가지고 있음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겪고 함께 노동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몸으로 체득해야 비로서 온전한 제사장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그들과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것을 주님께 드려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실천되도록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스도(2)

요한복음 6장 1-15절
사도 요한은 유월절을 다시 언급하면서 요한복음 전체가 나아가는 구성 즉 플롯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시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로 가시는 그 길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왕으로 좌정하시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심판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이 하나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2천년 역사는 당신을 믿는 백성들을 하나 하나 죄와 사망 그리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구원하시는  구속의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구속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드시는 주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보여주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과 함께 일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광야에 모인 이만 명에 이르는 군중들을 보시고, 먼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요청하심으로 시작됩니다. 저녁 그리고 빈들에 가진 것은 보리 떡 5개와 생선 두 마리!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를 아시고도 주님은 제자들이 먼저 행동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 만들어 가는 이야기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해야만 합니다. 소망은 우리가 만들어 갈 때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으로 만약 우리의 힘이 다하면 그때 주님은 그 능력의 손을 펼치사 우리와 함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하나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시기 위해 천지를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창조하신 것입니다.

매일묵상(2021/02/08 – 10)

2021/02/08
시편 7편
“주님께서는 뭇 백성들을 판단하시는 분이시니, 내 의와 내 성실함을 따라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8절, 새번역)

이 시는 원수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탄원시입니다. 시편 기자의 적들은 사자 같이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피신하여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하나님의 법정에 선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악행을 한 피고들을 심판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무죄한 자들을 놓아주실 것을 확신하며 감사와 찬송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재판장이라는 믿음은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사상은 시편에서 거듭거듭 나타나는 주제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두려움과 가슴이 철렁하는 경악감 대신 신뢰와 위로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묵상하라고 우리를 초청합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그 피난처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임재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가볍게 그리고 경솔하게 취급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판관 포청천 앞에 선 원고나 피고 모두 떨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우리 자신의 죄의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도록 합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과업을 마치시고 부활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를 죄인으로 단정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롬8:34, 현대인의 성경).


2021/02/09
미하이가 어렸을 때 늘 중간에 자면서도 철야기도회에 따라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배가 너무 짧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가 종종 한 말입니다.
“교회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생을 교회에 가서 사는 게 어때요? 교회는 우리의 놀이터가 되어야 해요.”

미하이는 정말 교회가 놀이터인 양 행동했으며, 어느 주일 예배 때에는 도를 넘었습니다. 목사님은 집에 오자 미하이를 징계하기로 한 뒤 엄히 물었습니다.
“네가 목사의 아들이라서 버릇없이 굴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빠는 내가 설교를 듣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들었어요.”
“좋다. 그럼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아빠는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열심히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지금 그렇게 하셔야 해요.” 목사님은 더 이상 야단 칠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의 위대성이 여기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벌써 3년이 흘렀습니다. 정치자금법을 위반하여 5천만원을 받았다고 수사를 받던 한 정치인은 당과 동지들에게 너무 미안하여 아파트 17층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 여비서가 성추행 당하였다고 고소하려고 하자 그 날로 산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 서울시장도 생각납니다. 이분들에게 세상 것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가 탄로나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가올 심판의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용서의 근거를 만드시고 또 한편으로는 심판할 준비를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이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파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눅 24:45, 현대인의 성경).


2021/02/10
잠언12장17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증거를 보이지만, 거짓 증인은 속임수만 쓴다”(새번역)

본절은 재판을 전제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증인의 인격과 거기에서 나오는 증언이 재판과 정의에 미치는 효과는 지대합니다. 양심적인 증인은 진실을 말하여 공동체를 견고하게 합니다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재판관을 오도하여 해를 끼칩니다. 증인의 증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근거로 재판관은 확신을 가지고 판결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한편, 거짓이라는 말은 단순한 거짓말 정도가 아니라, 재판에 영향을 미칠 의도를 가지고 거짓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당연히 의도성이 담겨 있습니다. 거짓된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도 증인의 말이 중요하지만, 과학적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던 구약 시대에 “사건을 목격하였다” 혹은 “그런 말을 들었다”라는 증인의 말은 처벌을 내리는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에 따르면 두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사형집행도 가능하였습니다. 이 반면 그가 거짓 증인으로 밝혀진다면, 그 거짓증언을 통해 피고에게 의도하였던 해악을 동일하게 집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9:16-19). 그러나 세상은 불의하기 때문에 권력에 의하여 억울한 희생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비시850년경 아합 왕 때 일어난 나봇의 억울한 죽음입니다. ‘속임수’란 재판관을 오도하여 정의를 좌절시키는 말들을 지칭합니다. ‘속임수’가 통하는 그 사회는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합니다. 여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3-34).

오병이어의 기적과 그리스도(1)


요한복음 6장 1-15절
주님이 주 대상으로 한 갈릴리 민중들은 생존을 위해 땅을 갈거나, 아니면 생존비를 받고 남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들로서 음식과 생계수단에 관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들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이것은 남쪽 유대 지역에서 주님이 만난 청중들과 대조되는 면으로, 유대의 청중들은 좀 더 신학적인면, 즉 성경의 예언의 성취, 율법과 주님의 가르침에 포함된 신학적인 내포점들과 싸우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모여든 갈릴리 청중들의 수준은 아무래도 유대청중들에 비해 현실적이었고 비신학적이었기 때문에, 표적들을 보고 몰려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는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해 몰려든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려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어서, 사도요한은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보여 불쌍히 여기사, 먼저 그들을 영접하시며,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며 (마태, 마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며(눅),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마, 막, 눅). 그리고 저녁이 되자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이들이 주리지 않도록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사 남자만 오천명을 먹여주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사시다가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사랑합니다.

매일묵상(2021/02/01 – 05)

2021/02/01
시편 6편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5절)

이 다윗의 시는 초대교회에서 읊은 일곱 개의 참회 시 중 하나입니다. 사순절(부활주일 전 40일)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그 일곱 개의 시편들을 읽고 노래한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관행이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와 함께 이로 인한 감정적인 괴로움을 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탄원합니다. 3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병과 근심에서 구원해주시기를 호소하는 탄원(1-5), 시편기자가 겪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묘사(6-7),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인한 승리의 선언(8-10).

시편 기자는 거의 죽을 지경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만약 주님의 구원이 없다면 자신은 죽어 ‘스올’에서 거처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려주시기를 절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스올’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죽으면 내려가는 장소입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하나님과 관계도 없고, 어둡고 소망 없는 곳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계시를 가진 시편기자도 놀라고 있는데, 하물며 구약도 없는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겠습니까? 이 반면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에 새 창조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맹인에게 빛이 돌아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피할 수 없는 고난은 그 자체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성숙함과 고난을 당하는 분들 앞에서 함께 울고 기도해 주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망과 고통 그 자체는 인류의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3-4).


2021/02/02
범브란트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가 네 살 가량 되었을 때 가족이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미하이가 도중에 공중화장실을 다녀오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기 책임자는 좋은 그리스도인이에요. 사람들이 자기 집을 냄새나게 만들어도 가만 있어요.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린 미하이의 표현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것입니다. 미하이는 공중화장실에서 냄새가 나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책임자에 대하여 오히려 좋은 말로 표현해 주었습니다. 실상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정한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가난한 사람, 세리와 죄인과 같이 멸시를 받는 사람,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영접하시고, 그들을 존중하고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세상의 임금들은 사람들을 주관하고, 집권자들은 은인이라고 칭함을 받으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셨습니다(눅22:24-27). 우리로서는 명쾌하게 이해가 되지 않고 이 말의 의미를 깨닫는데 평생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범 되신 주님은 훌륭하게 이를 행하시고 속죄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깨닫고 본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만들어진 새로운 종(種)이요 피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2021/02/03
미하이가 다섯 살 때 범브란트 목사님은 그를 심히 나무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는 네 이름이 적힌 페이지가 있다. 그 페이지에 하나님은 네 죄를 낱낱이 적어 놓으신다. 거기에 그저께도 하나 적혔고, 어제도 하나 적혔는데, 너는 오늘도 다시 죄를 지었다.”
미하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빠는 하나님이 내가 저지르는 나쁜 짓만 써 놓으신다고 생각하세요? 착한 일은 써 놓지 않나요?”

미하이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법을 어긴 사람만 단속하는 경찰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인 동시에 해로운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잘 한 행위를 기록해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바로 이 측면을 단단히 붙잡고 소돔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나그네 3명을 대접한 뒤 알고 보니 주님과 두 천사였습니다. 주님은 소돔을 심판하러 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정의로운 심판자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드린 후, 의인의 수를 계속 낮추다가 10명까지 허락을 받았습니다. 즉, 10명의 의인만 있다면 소돔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의인이 없던 소돔 성은 불과 유향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반면 어떤 성인은 주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때, “주여, 제가 잘한 일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늘 유념하여야만 할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2021/02/04
어떤 아이가 동전 두 개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갖고, 다른 하나는 교회에 가서 헌금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동전 두 개를 손에 쥐고 교회로 가다가 도중에 넘어져 동전들을 떨어 뜨렸는데, 하나는 도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하나님 미안합니다만 하나님의 동전을 찾을 수가 없네요”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테스트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니엘입니다. 17살에 바벨론에 잡혀간 다니엘은 섭리 가운데 왕립학교에서 3년을 공부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아~ 그런데, 학생들에게 주는 음식 특히, 고기와 포도주는 모세율법의 규정상 먹을 수 없어서 – 우상에게 미리 바쳐진 음식 등의 이유 – 마음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청년들이 고기를 먹지 않고 어떻게 튼튼하게 자라겠는가?”라는 환관장의 입장 역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로에 섰습니다.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순교를 무릅쓸 것이냐?” 다니엘과 세 친구는 섭리 가운데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보고자 음식 담당자에 10흘만 채식을 주어 비교해 보라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담당자의 입장에서 채식으로만 목적이 달성되면 그 보다 좋은 것은 없기 때문에 시험을 허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더 아름답고 살이 윤택하도록 만드셨고, 이들의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지혜와 지식의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여 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2021/02/05
잠언12장16절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16절은 15절의 서론적 교훈을 언어와 관련한 도덕과 신학을 다루는 부분들(17-22절)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중심적 교훈은 다양한 환경에서 가지게 되는 위험한 감정(분노 등)들을 잘 통제하라는 권위적 충고입니다. 랍비 일레아지는 사람을 판단할 때 그의 컵, 지갑 그리고 근심을 살펴보라고 합니다. 즉 마시는 동안, 돈 거래를 하는 동안, 내적으로 흥분상태에 있을 동안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해 보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fool)는 몸짓과 언어로 자신이 얼마나 옹졸하고 배우지 못하였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는 분노 때문에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슬기로운 자는 모욕을 무시합니다. 여기서 무시한다는 히브리어 ‘코세’는 ‘덮어 보이지 않게 하다 혹은 보호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는 격한 감정에 휘둘려 구경 거리가 되느니 참아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이 가져오는 위험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무례한 자를 못 본체 하는 것입니다. 이어 나오는 여러 구절(17-22절)에서 지혜자는 이런 지식을 근거로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모든 상황에 반응할 수 있음을 적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살아가는 마을에서 결국 그가 존경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보인 자제력으로 인하여 선한 결과가 도래되어 그의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악한 자를 벌주려고 광분 하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도의 교훈은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