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소명은 당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 ‘천직(vocation)’ 이라는 단어는 ‘음성(voice)’이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것을 들으려면 매우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소명을 선택’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모순입니다. 소명이란 개념은 성경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은 거듭 사람들을 그분의 일을 하도록 부르십니다. 소명에는 부르는 사람과 부름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름을 받는 쪽이고 하나님은 부르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일꾼들을 무장시키고 일을 위임하십니다. 마이클 노박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성격, 재능, 갈망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준 것이 아니다. 만물의 창조주는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철저히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것을 우리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 설령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우리 각자에게는 숙명적으로, 운명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행운이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가장 높은 소명은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직업과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목소리가 우리 귀에 들려옵니다. 이런 가운데서 소명은 어떻게 발견되어지며,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눅18:22).

예술을 하려면 재료의 속성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위대한 조각가는 정을 대기 전에 대리석의 성질을 연구합니다. 그들은 대리석을 쪼아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리석이 이미 가지고 있는 형태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잠재성과 한계를 가진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명이란 “마음 깊은 곳의 기쁨이 세상의 깊은 필요와 만나는 곳”입니다. 세상의 깊은 필요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것은 나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할 때 기쁨을 느끼고 갈망과 열정을 품고 있습니까? 그것들 역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육상 선수들은 3,000미터 5,000미터를 뛰는 것은 물론 42킬로미터를 넘는 거리를 뛰는 경주를 좋아하고 도전을 즐겁게 받아들여 최선을 다합니다. 사실 상으로 받는 트로피와 메달도 중요하지만 이들은 경기 자체를 좋아하여 경쟁하는 것입니다. 회의적인 학생들로 가득 찬 강의실에 들어가, 그들에게 배움의 문을 열어 주려는 선생님이 그런 사람입니다. 자원도 부족하고 사기도 떨어진 조직을 바라보며, 그들의 잠재된 능력을 이끌어 내고 싶어 안달하는 리더가 그런 사람입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좋아하는 정원사가 그런 사람입니다. 물론 소명을 따르면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힘든 일을 당할 때에도,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술과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알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삶 자체가 그것을 말하도록 하여야 합니다(Let your life speak).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19:5-6).

파커 팔머의 얇은 책 《네 삶이 말하도록 하라 Let your life speaks》에는 천직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파커는 교육계에서 이름이 높아져 한 교육 기관의 총장 제의를 받았습니다. 수락하기만 하면 월급, 지위, 영향력이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퀘이커 교도들은 소명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그 사람의 친구 여섯 명으로 구성된 ‘명료화 위원회’를 소집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 위원회는 하나님의 소명을 더 분명히 분별하기 위한 질문들을 던지기 위해 모였습니다. 한동안 위원회는 그 학교에 품고 있는 파커의 비전이 무엇인지, 그 학교가 사회에 어떻게 봉사할 것인지 등의 쉬운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매우 간단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파커, 총장이 되는 것이 왜 좋은가?” 파커는 한참 동안 대답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나는 경영하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 기금을 모금하는 것도 싫고….”파커, 내 질문은 자네가 무엇을 좋아하냐는 거야” 질문자는 문제를 다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생각하고 있다구.” 파커는 약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여름 방학을 포기해야 하는 것도 싫고, 이런 일도 저런 일도 하고 싶지 않고….” 그러자 세번 째 같은 질문이 날라왔습니다. 파커는 자신의 중심에서 나오는 정직한 단 하나의 답변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총장이라고 쓰인 명패가 밑에 달린 내 사진이 벽에 걸린다는 거야”라는 파커의 답변에 함께 앉아 있는 친구들은 그 말은 우습지만 매우 위험한 문제라는 것을 알자 심각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그 질문자가 침묵을 깨고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파커, 자네 사진을 벽에 거는 더 쉬운 방법을 찾아보지 않겠나?” 파커의 정신이 깨어났고 그를 각성시켰습니다. 그것은 “나는 내 자신의 소명을 선택할 수 없다. 나의 삶이 말하고 있다”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파커 팔머는 “당신의 소명을 선택할 수 없다. 당신의 삶이 말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소명은 선택이 아니라 경청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초창기부터 우리는 어떤 활동이나 존재, 행동 방식에 이끌려 왔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내가 되려면 신중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학습하고 그것으로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도록 창조되었는지 모릅니다. 독서와 묵상과 저술과 가르침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목표는 사업에서 크게 성공하는 거야!”라고 스스로 강변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인생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말을 걸어 오는 삶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팀을 이끌며 고지를 점령하는 힘을 가지고 태어난 여성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아. 그냥 뒤에 머물러 있어!”라는 말을 듣고는, 당신이 받은 은사를 묻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당신에게 말을 걸어 오는 삶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자신의 원재료를 존중하지 않으면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소명도 아닌, 내 은사도 아닌 것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경고하는 목소리에 대항해 귀를 막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반면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있으면 막대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으면 그 한계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가장 큰 한계는 주님이며 그분이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3:5-7).

심리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저명한 작가이기도 한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나는 직선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거나, 공구를 잘 다루지 못하는 내 한계를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견디기 힘든 한계들도 있다.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죽을 것만큼 힘든 것이 있다. 그런 한계들에 직면하면, 가끔은 내 소명이 정말 참된 것인지,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의심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아는, 심오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진리와 지식을 탐구하는 그들은 깊은 학습 경험과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고 일정 수준의 학습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지만, 그런 정신은 결코 갖지 못할 것이다. 아마 나는 그런 대화 자리에 끼지도 못할 것이다. 또 나는 엄청난 리더십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그들을 개발시키고 일을 성취해 내는 리더들을 본다. 나도 정말 그런 은사를 원했지만, 정직하게 자신을 평가하면 고통스럽기만 한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한 교회에 대해 품었던 꿈을 생각해 보면, 나는 교회 개척을 열심히 도왔지만 그 교회는 내가 바라고 기도했던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나의 한계에 책임이 있었다.” 파커 팔머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 프로그램을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노력하기만 하면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내가 한계에 부딪히자 특히 실패라는 한계에 맞닥뜨리기 시작하자 문제는 시작되었다.” 우리 역시 인생을 살면서 이런 경험들을 여러 번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은 우리 자신을 현실에 직시시키는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씨에스 루이스의 말처럼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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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하면서 베드로는 물 위로 걷기를 위해 예수님의 허락을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능력은 예수님의 주권하에 있었기에, 베드로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배밖으로 나오기 전에, 예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해야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충동적인 행동 그 이상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때로 인간관계, 재정, 언행에서 무모한 결정을 내리고서는, 그것을 영적인 언어로 포장하여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프랭크 파알리는 30년 간 T타입, 즉 ‘스릴 추구 성격(Thrill-seeking personality)’을 연구하였습니다. 이들은 위험도가 높은 상황과 행동에 매력을 느끼며, 불확실성, 예측 불가능성, 새로움, 다양성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쉽게 지루해 하며 끊임없는 자극을 열망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과학자들은 소위 ‘위험 감수 유전자’를 발견하였는데. 그 유전자는 D4DR이라고 불리웁니다. 흥분을 잘하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내성적이고 느긋한 사람들보다 이 유전자가 더 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극한 스포츠인 암벽 등반, 페러글라이딩, 행글라이더 등을 즐깁니다. 이런 타입의 사람들은 큰일을 할 수도 있지만, 물질 남용, 잘못된 성적 행동, 도박 등의 파괴적 행동을 할 잠재성 역시 큽니다. 이 경우 우리의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성취감을 느끼지 못할 때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무모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타입에 속하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우리가 용감하게 위험을 감수하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를 숙고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5:17).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와 “어리석지 말지니라”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어렵습니다. 언제 배 밖으로 나가서 모험을 해야 하는지 알려면 용기뿐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는 지혜, 주님의 음성을 인식하는 분별력, 명령을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충동에 휘둘리는 T타입을 찾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W 타입 즉 물(Water) 위를 걷는 성격을 찾으십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과의 모험을 갈망하는 ‘하나님 유전자’가 필요한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하나 제기됩니다. 배 밖으로 나오라는 하나님의 진정한 부르심과 나 자신의 무모한 충동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W 타입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소명을 발견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소명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여러분의 삶에서 분별되었고 실현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하나님은 하루 종일 무엇을 하실까? 성경은 한 문장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일하신다.” 리랜드 라이켄은 이런 면에서 기독교가 매우 독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 헬라인들은 신은 일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번개를 던지는 일 외에, 제우스와 그 일동은 언제나 놀고 쉬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빛을 어두움에게서 나누시고, 하늘과 천체를 만드시고, 물을 모으시고, 흙에서 인간을 만드시는 등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그러고도 여섯 날 후, 하나님은 은퇴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주가 기계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하나님이 운영하신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편104편). 특히 하나님은 사람들과 활발히 동역하십니다. 예수님 역시 일하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목수로 일하셨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창조하고, 인도하고, 공부하고, 조직하고, 고치고, 개발하고, 가르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아서 밀러는 이것이 주7일 신앙의 핵심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받은 재능을 사용하여 세상을 탁월하게 섬기고, 그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것을 온전히 활용하는 소명은 거룩한 과업이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분명히 소명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듣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으나 어린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가 부른 줄 알고 일어나 두 번이나 엘리에게 간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렉 르보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종종 이름을 두 번씩 부르신다고 지적했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야곱아 야곱아, 모세야 모세야”처럼 말입니다. 한 번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는 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런 예화를 언급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조립이 필요함”이라고 쓰여진 물건을 사 주는 것을 두려워 했다. 나는 조립에 소질이 없다. 수많은 부품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땅바닥에 널려 있기 일쑤다. 그 부품들은 제 역할을 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확실한 목적으로 우리와 우리의 삶을 디자인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소명을 이룰 수 있도록 특정한 은사, 갈망, 재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선물들을 잘 파악하고, 기술적으로 개발하고, 기쁨으로 겸손함으로 사용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섬기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가장 근원적이고 높은 소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표현하시고는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사람도 있고,우리 후에 올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바로 지금 나타나려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자리를 맡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소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유대 신비주의의 일파인 하싯즘의 옛 이야기를 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기 위해 두 개의 주머니가 있는 코트를 입어야 하였습니다. 한 호주머니에는 “너는 우주의 수억, 수백만 모래의 하나에 불과하다”라고 쓰여 있고, 다른 호주머니에는 “내가 이 우주를 너를 위해 만들었다”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소명을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경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염려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나의 구원과 가치는 나의 직책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일은 우리가 최고의 에너지를 쏟아 부을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보리 떡 일곱 개의 기적

마태복음 15장 29-39

절은풍은이라는 홍콩영화를 보면 이런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형사 두명이 주가 조작을 통해 일확천금을 하려는 범죄 조직의 활동을 도청하던 중 기가막힌 주가 정보를 입수합니다. 지금 형사 한 명은 얼마전에 병원에서 진찰을 한 결과 간암 판정을 받아 죽기전에 가족들에게 재산을 남겨주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다는 결론을 가졌으며 또 한 명은 형사월급이 뻔하니 한 탕하여 많은 돈을 벌고 인생을 편하게 살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 은행에서 많은 돈을 빌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재산을 투자하였습니다. 그 정보는 진짜여서 이들은 많은 돈을 벌고 이를 숨겨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실을 감찰관실에서 알게 되고 해당 범죄조직도 알게 되어 이 두명은 먼저 경찰이 손을 대기전에 범죄조직에 의하여 타살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정 때문에 여기에 말려든 형사반장은 자기 동료 두명을 해치운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한 뒤 자신은 경찰에 자수한다는 내용입니다. 인생에 돈이면 충분할까요? 이 영화에서조차 돈만 가지고는 안되는 병과 죽음의 문제가 나와있고, 빵의 문제를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서는 이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요?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하여 자신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이 충분히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생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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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아울러 우리가 고려해야만 하는 요소는 편안함입니다. 버클리 대학의 연구진은 아메바를 완벽한 환경 속에 집어넣고 반응을 살피는 실험을 했습니다. 이상적인 온도, 최적의 습도, 지속적인 식량 공급, 어떤 것에도 굳이 적응할 필요가 없는 최상의 환경이었고, 질병을 초래할 요소들도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게도, 아메바는 죽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심지어 아메바까지도 도전을 필요로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편안함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음식과 공기만큼, 변화와 적응과 도전도 필요합니다. 편안하기만 하고 아무런 도전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의 의의도 찾을 수 없고,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또한 이런 편안함은 우리가 잠재력을 실현시키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유혹입니다. 편안함은 자주 우리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학생을 성장시키려는 선생님은 답이 아닌 문제를 제시해 줍니다.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과정에서만,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강화되고 인내심이 강해지며 자신감이 견고해집니다. 누군가 내게 답을 알려 주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지는 몰라도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노력하고 도전해야만 강해지듯이, 우리의 마음과 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편안함은 개봉하지 않은 선물의 비극을 무마할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12:23-25).

달란트 비유를 통해 주님이 주인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세 번째 원칙은 “그분은 상 주는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선물을 주고 회계를 결산하기도 하지만 상도 주십니다. 그분의 보물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은 놀라운 선물을 준비하십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칭찬을 하나님께 받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주인은 종들을 자신의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초청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주인은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라고 말하여 오히려 더 큰 일을 맡긴 것을 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즉 주인의 의도는 “이제 네가 진짜 일을 맡을 때다!”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엄청난 부를 주었으면서도“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작은 일에 불과하다니! 그렇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것에 비교하면 그렇습니다. 록펠러나 빌 게이츠의 재산이나 진시황의 권력이나 마이클 조던의 명성 등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주님 보시기에 ‘작은 일’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실버 타운 같은 곳은 절대 아닙니다. 그곳은 우리가 지음받은 목적인 모험, 창조성, 풍성한 열매를 드디어 온전하게 경험하며 우리의 잠재성이 실현되는 궁극적인 곳입니다. 그곳에 개봉되지 않은 선물이란 없을 것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  

여러분은 풍성한 달란트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재정, 인간관계, 능력으로 은사의 주님께 막대한 것을 되돌려 드릴 수도 있는데,혹시 그것들을 그냥 깔고 있지는 않는지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 나의 가장 깊은 꿈은 무엇인가? (2) 나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열정을 느끼는가? (3)나의 묘비에 무엇이라고 기록되기를 원하는가? (4)요즘 나는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가? (5)나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 필요한 모험을 얼마나 자주 하는가? (6)어떤 일을 하도록 내가 태어났다면, 그 ‘일’은 무엇이라고 믿는가? (7)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은사의 주님께 받아 그분의 왕국에 투자해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시간이나 재능 분야에서 아직 여러분의 잠재력이 실현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하고 저녁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은퇴하고 죽는 삶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매순간을 소중하게 취하여 “하나님 이것은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 은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온전히 연마하고 개발하고 인내하고 부단히 힘써서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하나님께 즐거움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게임에 뛰어들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왕국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일생일대의 기회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은사와 관련하여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특별한 재주도 없고, 뛰어난 지혜나 기술, 그리고 재산도 없는 사람이니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는가? 물론 인간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여러분은 훌륭한 은사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각각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분여하였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우리는 은사의 주인이신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오병이어를 취하여 많은 무리를 먹이실 수 있습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말더듬이 도망자인 모세를 사용하셔서 세계 권력을 쥔 독재자 파라오와 그의 군대를 전부 물리치실 수 있습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피 묻은 십자가에서 빈 무덤을 만들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사의 주님은 엉성하고 실수가 많은 열한 명의 제자로, 쇠할 줄 모르는 꿈을 가진 공동체를 창조하셔서 전 세계로 퍼뜨리셨습니다. 그분은 놀라울 정도로 지략이 풍부하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신 주인 되신 바로 그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여러분이 바치는 보잘 것이 없는 것을 취하여 영원한 차이를 만들어 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잠재력이 어떤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은사와 재능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투자하면 은사의 주님이 돌아오실 때 그 진가가 나타날 것이고, 우리는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물 위를 걸으려면 모험을 감수할 용기뿐 아니라 소명을 분별할 지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어리석음은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천국 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문지기 베드로는 “특별한 공을 세운 것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예, 하나가 생각납니다. 폭주족들이 아가씨를 위협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지요. 저는 즉시 아가씨를 놓아주라고 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가장 덩치가 크고 문신을 많이 새긴 놈에게 가서 그의 뒤통수를 갈기고 오토바이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그의 코걸이를 낚아채어 땅바닥에 던지고는 ‘지금 당장 이 아가씨를 놔 주지 않으려면 나랑 붙자!”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깊은 인상을 받고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언제 그랬습니까?” “바로 몇 분 전이죠. 그래서 여기 온 겁니다.” 이 사람은 즉시 맞자 죽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려고 배밖으로 즉시 뛰어나가지 않고 먼저 주님의 허락을 구했다는 것에 주목하여야만 합니다. 믿음은 결코 어리석은 충동이 아닙니다. 이런 어리석은 충동을 요구한 장본인은 바로 사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올려놓고 “거기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천사들이 나타나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보호할 것이다”라는 되지도 않는 성경 해석을 통해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충동하였습니다. 믿음과 어리석음을 분별하지 못하면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예전에 삼각산 부흥회에 참석하러 가다가 급류를 만난 세 처녀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사실을 생각해 내고 기도한 뒤 믿음으로 급류 위에 발을 내딛다가 모두 물에 휩싸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시32:9).

수요일터예배

요한일서 3장 1-3

“매듭짓기”라는 책을 보면 이재철 목사님의 젊은 시절 홍성사를 운영할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배우 고은아의 동생으로1949년 생입니다. 그분이 쓴 책 매듭짓기에는 자신의 젊은 날의 소신을 적고 있습니다. 외대 불어과를 졸업한 1971년 봄 수 개월 째 신입사원으로 어느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상사가 불러 첫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것은 세무 공무원에게 뇌물을 전달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회사는 이중 장부를 사용하면서 엄청난 매출을 누락하였다가 세무조사에 의해 발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건네 준 봉투에는 10만원권 수표가 15장으로 총 150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서울의 변두리 국민주택이 60-70만원 할 때니 엄청나게 큰 돈이었습니다. 이재철 사원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가서 술 자리를 마련하고 봉투를 건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그 세무 공무원은 자신을 불러 봉투를 주었습니다. 그 봉투에는 어제 주었던 수표 중 3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전달자에게 통상 30%를 주는데 이재철 사원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20%만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함께 공범을 만들어 입을 막자는 계산이었습니다. 완강하게 거부하자,그러면 받은 돈을 전부 돌려주고 엄청난 세금을 물리겠다고 협박하여 할 수 없이 받고 회사에 와서 그 사실을 말하고 회사에 돌려주었습니다. 이재철 사원은 자신이 사업을 시작하면 결코 탈세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단단히 하였다고 합니다.  홍성사를 1974년 설립하고는 외국항공회사 총 대리점을 하면서 정직하게 세무신고를 하였으며, 여기서 그분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고 20대에 벤츠 끌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1977년 출판업에 손을 대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출판업은 그 당시 복마전이었습니다. 모든 서점이나 출판사가 세금문제 때문에 자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결심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이재철 사장은 철저하게 자료를 발생시키자, 많은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한 거래업체 사장이 오더니 거래 자료를 그렇게 100% 발행하면 홍성사의 책을 사갈 서점들이 줄 터인데 그러면 독자들에게 좋은 책을 공급한다는 출판사 본래의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관행에 맞추어 홍성사도 처신하였으면 한다는 권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재철 사장은 생각하기를 헌법에 기재된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더 높은 의무가 아닌가 하고 판단하고 그 거래처 사장의 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분 일어나서 “네가 이 바닥에서 일년 이내에 망하지 않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고 소리치고는 나가버렸습니다. 이후 홍성사는 무역업에서 번 돈으로 최고의 필진을 동원하여 “홍성신서”를 출간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젊은 층에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일년쯤 지났을 때 그 도매상 사장님이 다시와서 거래 자료를 백 프로 받을 터이니 자신에게도 홍성신서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물론 홍성사는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려고 노력하다가 세무당국의 인정과세로 위기를 맞았고 1980년대에 결국 두 번이나 부도를 맞았으며, 이재철 사장의 전 재산을 쏟아 부었습니다. 홍성사의 이런 노력은 출판업계를 자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부정의 길을 간다면 그것은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징표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자기부정의 길을 즐겁게 갈 수 있는 비결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실로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증거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으며,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님의 증거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상속자의 지위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은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겉사람이 후패하며, 썪어질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여러 환난과 고난을 당하지만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숨겨져 있음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 옛날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간 야곱이 자기가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하려고 무려 7년을 노력하였지만 그것을 수일이 지난 것처럼 생각한 것은 외삼촌 라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믿음과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가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분의 참 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주님을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과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부정을 하며 즐거이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도록 만드는 비결임을 알아야 합니다.

매일말씀나눔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에게 한 달란트를 지급받은 세 번째 종은 그 엄청난 선물을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의 대학 시절, 한 친구는 자신의 어떤 면이 그와의 관계를 어렵게 하는지 지적해 주었습니다.그러나 자신은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에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도움을 구하는 대신, 오히려 그와 멀어지려고 뒷걸음질쳤다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는 “흥, 그렇게 말한다 이거지…. 난 너와 더 거리를 두고 의례적으로 대할 테니까. 네가 그 애기를 꺼낸 것을 후회하길 바래”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오토버그 목사님은 좋은 친구가 될 뻔한 사람도, 성장할 기회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진실을 직면하길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자신은 진실을 묻어 두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세 번째 종은 마음 속에 주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수탁받은 한 달란트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하였고 그래서 그 당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땅 속에 묻어버렸던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두 가지의 동기로 자신의 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합니다. 하나는 탐욕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전자는 우상숭배와 같으므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노력하고, 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그분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스’라는 말씀을 붙잡고 현실을 직면하면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12:6-7).

달란트 비유를 통해 주님이 주인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두 번째 원칙은 “그분은 회계 결산을 하는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은 바로 이 원칙을 망각하였습니다. 그는 선물을 준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라는 말로 주님은 그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교묘하게 발뺌하여 자기 잘못의 결과를 벗어나려고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교통 벌칙금을 내지 않으려고 경찰에게 변명한 적은 없습니까? 선생님을, 상사를, 혹은 배우자를 서툰 변명으로 속이려 한 적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모두 그분 앞에 서야만 합니다. 어떤 변명이나 거짓말도 소용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지만, 결산 보고에 대해서는 칼 같으십니다. 우리는 그 보좌 앞에서 잔꾀를 부릴 수 없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사실을 잊는지 모릅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배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면서 괜히 외부 환경을 탓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돌아오고 계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회계하실 것입니다. “내가 준 것으로 너는 무엇을 했느냐?” 그분은 각 개인에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종은 이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은사를 묻어 버린 것을 합리화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9-10)

달란트 비유에서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을 등장시켜 이야기 하신 것은 주목할만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반응과 기쁘시게 못하는 반응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은 두 명만 등장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즉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말입니다.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은사의 양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도록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적인 삶에서 은사는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같은 은사라고 하여도 그 양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돋보이고 칭찬받는 은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은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하십니다. 그것은 달란트 비유에서 첫 번째 종이 두 번째 종보다 훨씬 큰 은사를 받았지만, 주인이 둘을 똑같이 대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달란트가 다섯이냐, 둘이냐, 아니면 한 개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은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마음을 단호하게 뿌리쳐야 합니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앞설 때는 교만과 거짓된 우월감에 빠지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뒤질 때는 비참함에 빠지게 됩니다. 최악의 경우, 은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내게 주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가치 절하하여 땅에 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롭고 선하십니다.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은사를 주셔서 당신의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파악하고, 개발하고, 투자하고, 귀하게 여기고, 누려야 합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은 주인에게 또 다른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보물을 땅에 묻게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주인의 부름에 불순종하게 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목회를 하면서 한 친구가 자신의 생활에 관해 물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진실을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그에게 다시 가서 거짓말을 밝혔는데,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합니다. 그 일을 돌이켜 보면서 목사님은 자문을 했습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했지?” 그것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진실을 말하면 그가 어떻게 생각하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부추킵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일으키는 것은 거짓말뿐만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할 때 우리는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담합니다. 왜냐하면 나만 소외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그렇게 난리법썩을 떨었던 것 아닙니까? 리빙스턴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적대적인 부족들이 화살을 겨누고 있는 중에 조용히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리빙스턴은 마음에 “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가장 엄숙하신 신사께서 하신 말씀임을 기억하면서 안전하게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늘 함께 하시는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세 번째 종은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의 이야기에서 우리를 가장 일깨우는 측면입니다. 그는 훔치거나 횡령하거나 착복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은사를 땅에 묻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악하고 게으르다”고 심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나태’를 죽음에 이르는 일곱 죄악 중 하나로 꼽을 만큼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솔로몬 슈멜은 나태가 영적인 죄이며, 일곱 죄악 중 그리스나 로마의 악의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은 유일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행동과 같습니다. 영적 죄악으로서의 나태는 신체적 게으름과 다릅니다. 그것은 분주함과 공존할 수 있습니다. 나태는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미, 목적, 희망의 상실이 타인의 복리에 대한 무관심과 결부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길 때의 열심과 기쁨의 반대말입니다. 세 번째 종의 두려움은 결국 나태로 이끌어 그의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두게 만들고,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 최소한 은행에라도 맡겨 원금과 이자가 주인에게 돌아가도록 관리하지를 않았습니다. 그의 나태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종은 그 달란트를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데 던져졌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일생에 대한 비유입니다.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나중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매우 중요한 심판 대상이 됨을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세상을 두려워 하지 말라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29:25

본문말씀: 누가복음 12:4-12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녹녹하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경기가 좋지 않은데 일본에서는 7월 초에 우리나라 주력 상품인 반도체 생산을 위한 소재 중 3가지 품목을 규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8월 2일에는 화이트 리스트 즉, 일본에서 물품을 구입할 때 편의를 보아주는 국가들 중 한국을 제외시켰습니다. 많은 걱정과 논의가 한국에서 진행 중입니다만,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분간은 우리 국가의 기업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시 똘똘 뭉쳐서 나가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것이며,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은 일본의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 4차 산업혁명을 주도 국가가 될 수 있으며, 오히려 일본은 뒤쳐저 2류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맞이하여 두려워 하며 주저앉냐 아니면 긍정적인 자세로 맞서 나가냐 하는 것은 한 국가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서도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 경기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미국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 댄 잰슨(Dan Jansen)은 두려움 때문에 스케이트 경기에서 여러 번 실패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시작은 1988년 캐나다 캘러리에서 있었던 동계 올림픽 때부터였습니다. 그 동계 올림픽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누나의 죽음이 있었고 그는 슬픔을 안고 경기에 임하였습니다. 그 당시 세계 단거리 스피드 스케이트 챔피언이었던 잰슨은 당연히 500미터 혹은 1000미터 경주에서 우승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나간 그 두 경기에서 경기도중 넘어지는 통에 메달을 딸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경기에서 두 번이나 넘어진 경험은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에서 열린 그 다음 동계 올림픽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강력한 메달 후보였지만, 그가 나간 단 거리 경기에서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때의 경기에 관하여 댄 잰슨은 “경기 도중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 하자면 나는 컨디션은 좋았다. 미끄러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가 나를 붙들어 전속력을 내지 못하게 했다.” 라고 심정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실패에서 온 두려움 때문에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극복했는지 그는 드디어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 1000미터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에서 최고의 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존 맥아더, 고난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능력,121-122)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삶 역시 마치 댄 존슨이 두려움과 투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좌절을 겪을 때 먼저 두려움이 솟아 오르고 그런 두려움에 지배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그런 시련을 예상하지 못하였다면 더욱 그런 두려움이 마음에 팽배할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들어올 때 어떻게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때 우리는 성경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이치를 따지는 신앙을 가져야만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4-12은 이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심판을 더 두려워 하라: 가장 두려운 존재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만, 성경은 죽음 다음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두려움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둘째,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생각하라 : 주님은 가장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참새와 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들 역시 하나님은 모두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릴 때에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한 마리도 가져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한 사람당 머리카락은 통상 140,000개라고 추정되는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의 머리카락을 전부 세신다는 그 전지하심을 늘 고려하고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치를 따져보는 신앙에 이르지 못하면 그 신자는 제대로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유일한 수단인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기억하라: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우리의 삶 범사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시인하고 기꺼히 그의 멍에를 우리 생각에 두고, 우리의 의지 위에 두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믿어라: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고난을 당할 때 우리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셔서 마땅히 할 말을 가르치시고 지혜를 주심을 믿고 살아가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