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은 당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 ‘천직(vocation)’ 이라는 단어는 ‘음성(voice)’이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것을 들으려면 매우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소명을 선택’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모순입니다. 소명이란 개념은 성경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은 거듭 사람들을 그분의 일을 하도록 부르십니다. 소명에는 부르는 사람과 부름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름을 받는 쪽이고 하나님은 부르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일꾼들을 무장시키고 일을 위임하십니다. 마이클 노박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성격, 재능, 갈망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준 것이 아니다. 만물의 창조주는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철저히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것을 우리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 설령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우리 각자에게는 숙명적으로, 운명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행운이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가장 높은 소명은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직업과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목소리가 우리 귀에 들려옵니다. 이런 가운데서 소명은 어떻게 발견되어지며,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눅18:22).
예술을 하려면 재료의 속성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위대한 조각가는 정을 대기 전에 대리석의 성질을 연구합니다. 그들은 대리석을 쪼아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리석이 이미 가지고 있는 형태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잠재성과 한계를 가진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명이란 “마음 깊은 곳의 기쁨이 세상의 깊은 필요와 만나는 곳”입니다. 세상의 깊은 필요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것은 나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할 때 기쁨을 느끼고 갈망과 열정을 품고 있습니까? 그것들 역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육상 선수들은 3,000미터 5,000미터를 뛰는 것은 물론 42킬로미터를 넘는 거리를 뛰는 경주를 좋아하고 도전을 즐겁게 받아들여 최선을 다합니다. 사실 상으로 받는 트로피와 메달도 중요하지만 이들은 경기 자체를 좋아하여 경쟁하는 것입니다. 회의적인 학생들로 가득 찬 강의실에 들어가, 그들에게 배움의 문을 열어 주려는 선생님이 그런 사람입니다. 자원도 부족하고 사기도 떨어진 조직을 바라보며, 그들의 잠재된 능력을 이끌어 내고 싶어 안달하는 리더가 그런 사람입니다.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좋아하는 정원사가 그런 사람입니다. 물론 소명을 따르면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힘든 일을 당할 때에도,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술과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알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삶 자체가 그것을 말하도록 하여야 합니다(Let your life speak).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19:5-6).
파커 팔머의 얇은 책 《네 삶이 말하도록 하라 Let your life speaks》에는 천직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파커는 교육계에서 이름이 높아져 한 교육 기관의 총장 제의를 받았습니다. 수락하기만 하면 월급, 지위, 영향력이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퀘이커 교도들은 소명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그 사람의 친구 여섯 명으로 구성된 ‘명료화 위원회’를 소집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 위원회는 하나님의 소명을 더 분명히 분별하기 위한 질문들을 던지기 위해 모였습니다. 한동안 위원회는 그 학교에 품고 있는 파커의 비전이 무엇인지, 그 학교가 사회에 어떻게 봉사할 것인지 등의 쉬운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매우 간단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파커, 총장이 되는 것이 왜 좋은가?” 파커는 한참 동안 대답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나는 경영하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 기금을 모금하는 것도 싫고….”파커, 내 질문은 자네가 무엇을 좋아하냐는 거야” 질문자는 문제를 다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생각하고 있다구.” 파커는 약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여름 방학을 포기해야 하는 것도 싫고, 이런 일도 저런 일도 하고 싶지 않고….” 그러자 세번 째 같은 질문이 날라왔습니다. 파커는 자신의 중심에서 나오는 정직한 단 하나의 답변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총장이라고 쓰인 명패가 밑에 달린 내 사진이 벽에 걸린다는 거야”라는 파커의 답변에 함께 앉아 있는 친구들은 그 말은 우습지만 매우 위험한 문제라는 것을 알자 심각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그 질문자가 침묵을 깨고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파커, 자네 사진을 벽에 거는 더 쉬운 방법을 찾아보지 않겠나?” 파커의 정신이 깨어났고 그를 각성시켰습니다. 그것은 “나는 내 자신의 소명을 선택할 수 없다. 나의 삶이 말하고 있다”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파커 팔머는 “당신의 소명을 선택할 수 없다. 당신의 삶이 말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소명은 선택이 아니라 경청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초창기부터 우리는 어떤 활동이나 존재, 행동 방식에 이끌려 왔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내가 되려면 신중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학습하고 그것으로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도록 창조되었는지 모릅니다. 독서와 묵상과 저술과 가르침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목표는 사업에서 크게 성공하는 거야!”라고 스스로 강변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인생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말을 걸어 오는 삶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팀을 이끌며 고지를 점령하는 힘을 가지고 태어난 여성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아. 그냥 뒤에 머물러 있어!”라는 말을 듣고는, 당신이 받은 은사를 묻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당신에게 말을 걸어 오는 삶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자신의 원재료를 존중하지 않으면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소명도 아닌, 내 은사도 아닌 것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경고하는 목소리에 대항해 귀를 막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반면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있으면 막대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으면 그 한계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가장 큰 한계는 주님이며 그분이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3:5-7).
심리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저명한 작가이기도 한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나는 직선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거나, 공구를 잘 다루지 못하는 내 한계를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견디기 힘든 한계들도 있다.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죽을 것만큼 힘든 것이 있다. 그런 한계들에 직면하면, 가끔은 내 소명이 정말 참된 것인지,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의심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아는, 심오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한다. 진리와 지식을 탐구하는 그들은 깊은 학습 경험과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고 일정 수준의 학습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지만, 그런 정신은 결코 갖지 못할 것이다. 아마 나는 그런 대화 자리에 끼지도 못할 것이다. 또 나는 엄청난 리더십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그들을 개발시키고 일을 성취해 내는 리더들을 본다. 나도 정말 그런 은사를 원했지만, 정직하게 자신을 평가하면 고통스럽기만 한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한 교회에 대해 품었던 꿈을 생각해 보면, 나는 교회 개척을 열심히 도왔지만 그 교회는 내가 바라고 기도했던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나의 한계에 책임이 있었다.” 파커 팔머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 프로그램을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노력하기만 하면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내가 한계에 부딪히자 특히 실패라는 한계에 맞닥뜨리기 시작하자 문제는 시작되었다.” 우리 역시 인생을 살면서 이런 경험들을 여러 번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은 우리 자신을 현실에 직시시키는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씨에스 루이스의 말처럼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