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1/12/27 – 31)

시편69:22-23절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지금도 그렇지만 바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였습니다. 로마서(11:8-9)에서 사도는 그들의 불순종을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돌립니다. 율법(신29:4), 선지자(사29:10), 그리고 성문서(시편69:22-23)의 말씀이 그 근거로 인용되었습니다. 세 번째 인용된 시편69편은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삶, 특히 그분의 고난을 뒷받침하는 성경이었습니다(막3:21 등). 사도가 본 구절에 나오는 다윗의 원수들을 그리스도의 원수들에게 적용한 것은 타당합니다. 주의할 점은 인용된 시편의 상세한 부분 보다 일반적 의미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밥상 table’의 히브리 원어는 ‘식사를 위해 땅 위에 펼쳐놓은 동물의 가죽-보자기’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가까우며 친숙한 그 가죽 보자기는 때에 따라 덫이 될수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모세 율법의 규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매하게 된 궁극적 원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사29:10). 성경의 신비입니다. 가장 가깝고 잘 아는 율법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자, 율법은 덫으로 화하여 그들을 실족시켰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가지고 있는 신비와 이중적 성격(영생과 영벌의 소식)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4)

시편69:25절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가룟 유다의 직을 대신할 사람을 뽑자는 사도 베드로의 제안의 근거입니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행1:20). 여기의 시편은 69:25절(앞부분)과109:8절(뒷부분)입니다. 또 한 명의 사도였던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시는(행12장) 이런 제안이 없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시편 69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당한 깊은 곤경을 토로하면서 구원과 원수들의 심판을 호소합니다. 초대교회는 본 시편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분을 배반하고 거절한 자들을 묘사한 메시야 시편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편 69:25절은 자연히 가룟 유다에게 적용됩니다. 가룟 유다가 산 밭은 나그네를 위한 매장지로 사용되었고(마27:7), 그의 거처는 황폐하였습니다. 다만 히브리 원문은 ‘그들의 거처’(복수)이지만, 베드로는 ‘그의 거처’(단수)로 변형시켜서, 다윗의 저주가 가룟 유다 한 사람에게 적용되게 하였습니다. 이런 해석과 적용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사도들에게 주어진 지혜와 권한입니다. 이런 사도들도 로마의 속국으로 있던 이스라엘의 독립을 알 권한은 없었습니다(행1:7). 성경은 세속 역사를 알려주는 예언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신천지와 같이 성경의 예언을 사사로이 풀어 특정인과 특정 시기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파멸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언을 푸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이미 확립한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그것(‘바울의 편지들’임)을 잘못 해석해서, 마침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벧후3:16, 새번역).

잠언16: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한 단락을 이루는 잠언 15:31-16:15절은 15:31-33절에서 ‘주님을 경외하여 겸손히 살면 명예롭게 될 것이다’는 지혜를 다루고(서론부분),  본론인 16:1-15절에서 그 근거를 자세히 보여줍니다. 1절은 계획의 주도권은 사람에게, 결정(말의 응답)은 주님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계획을 세워야 하지만 – 하나님이 계획을 세워주시는 것이 아님 – 그 계획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계획은 주님의 통치에 따라 좌우됩니다. 인간이 세우는 계획이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서로 상의하여 의논하고 잘 정리하여 주의깊게 계획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수립된 계획은 하나님의 지시사항을 따라 수행되어야 열매(성공)가 맺힙니다. ‘경영(계획들)’의 원어는 ‘배치 or 정돈’‘을 뜻하는 ‘마르케’로서, 전투진형을 배열하듯이 주의깊게 요소요소에 배치하거나, 혹은 제사를 위해 나무를 차곡차곡 쌓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경영’은 생각나는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논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계획들을 지칭합니다. 물론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꾀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신실하게 살아 가야만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음을 듣고 울며 자신이 가서 성벽을 중수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금식하였습니다. 어느 날 왕을 섬길 때 그런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곧 주님께 기도하고 왕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자, 왕은 선선히 승락하였습니다. 이는 세상의 주관자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느1, 2장). “왕의 마음은 흐르는 물줄기 같아서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이끄신다.” (잠언21:1새번역)

매일묵상(2021/12/20 – 24)

시편69: 9절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신약의 두 곳, 요한복음(2:17)과 로마서(15:3)에서 본 구절 전단과 후단을 각각 그리스도께 적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와 말기, 두 번에 걸쳐 성전 정화 작업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초기의 것을 증언합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2:17). 원수들은 성전에 대한 다윗의 심오한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방하였습니다. 그 만큼 다윗이 주님의 집(성전)에 대한 열심은 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요한은 다윗의 경험에서 그리스도에게 발생될 예언적인 패러다임(틀)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현재 당하는 비방은  그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삶에서 일어날 비방을 미리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소, 양, 비둘기 등 제사용 제물과 상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신 이유는 순결한 예배를 보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열성이 결국 그리스도를 삼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나를 삼키고”라는 부분은 다윗에게는 열정의 강도를 말하나, 요한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포함시킵니다. 한편,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웃에게 덕을 세우도록 권고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심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착한 일(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을 행하시다가 많은 비방을 받았습니다. 바울 역시 다윗의 경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았습니다. 이런 비방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만, 주님의 돌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맡기십시오” (벧전4:19,새번역).

시편69:21절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


마태복음이 전하는 십자가 사건입니다:“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마27:34,48). 같은 사건에 대한 요한복음의 증언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28-30). 마태복음은 생략하였습니다만, 요한복음은 본 사건이 구약의 성취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염두에 둔 것은 본 시편 구절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구속의 계획의 일환이며 구약성경에 미리 기록되었습니다. 그 계획은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성취하시는 행동)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요한 이를 깨닫고 요한복음을 통해 증언한 것입니다. “응한다”의 원어는 ‘텔레이오세’로서, ‘텔레이오오 –(아무 흠도 없이) 완전하게 만들다’ 의 수동형입니다. 우리 주닝의 모든 생애는 성경에 적힌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여 완전하게 하시는 삶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은 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그들의 주님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동시에 수고와 고난이 신자의 삶에 늘 존재하는 이유는 이때문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  

잠언15:31절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본 잠언은 ‘밝은 눈’에서 ‘듣는 귀’로 초점을 바꾸지만,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은 같습니다. 만약 사람이 ‘생명을 주는 책망’을 듣는 귀를 가지고 있다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열쇠를 가진 것입니다. 사람이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본 잠언 후단은 그를 ‘지혜자’라 호칭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듣는 귀를 위한 동기를 부여합니다. 마치 음식을 아름답게 장식하여 구미를 돋구는 것과 같습니다. 현자의 책망을 듣는 자는 누구나 지혜자의 공동체에 속하여, 즉시로 그들과 함께 살기 시작합니다. 이와 반대로 거만한 자는 혼자 지혜로운체 하며, 지혜자와 어울리지 않습니다(잠15:12). ‘듣는 귀’를 가진 자는 거만한 자와 달리 생명의 원천에 가까이 살면서, 아침마다 저녁마다 지혜의 책망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2:12).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능력은 그분으로부터 “듣는 귀와 보는 눈을 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입니다(신29:4).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가장 중시하여 보물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복음이야말로 ‘생명의 경계’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롬3:23)고 선포합니다.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진 자는 회개합니다. 겸손히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그분의 피로 죄를 씻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습니다. 그의 남은 생애는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특징지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사명입니다. 그는 지혜자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교훈을 저버리는 사람은 제 목숨을 잃고 책망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지각을 얻는다.”(잠언15:32,공동번역)

잠언15:32절
“훈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지만, 책망을 잘 듣는 사람은 지식을 얻는 사람이다.”(새번역)


본 잠언은 책망을 받아들이지, 반발하여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교훈합니다. 후단의 표현 중 ‘지식’이란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 원문은 ‘레브’로서 ‘속사람, 지성, 마음’이란 의미를 가지나 이 문맥에서는 지성(intelligence)을 뜻합니다. ‘레브’의 결여는 정신적, 도덕적 능력의 부족을, 그 반대로 ‘레브’를 얻었다는 것은 살아가기에 충분한 정신적,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또한 잠언19:8절은 “지혜(레브)를 얻는 사람은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얻는다.”고 하여, ‘레브’를 얻는 것은 ‘자신(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행위임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훈계를 싫어 하여 ‘레브’를 얻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책망을 자주 받으면서도 고집만 부리는 사람은, 갑자기 무너져 회복하지 못합니다(29:1).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고 또 보내어 이들로 하여금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라고 가르쳤으나 목을 곧게세우고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최초의 징벌이 40년 간 광야의 길을 돌게 하신 것이고, 그 절정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죄입니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깨졌습니다. 지금 팔레스틴 지역에 세워진 이스라엘은 세속국가일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분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책망으로부터 참된 지혜(호크마)를 얻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황금을 얻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잠3:14,새번역).

잠언15:33절
“주님을 경외하라는 것은 지혜가 주는 훈계이다. 겸손하면 영광이 따른다.”(새번역)

잠언15:30-16:15절의 서론은 15:30-33절이며, 끝 구절인 33절은 16:1-15절에 묘사된 주님의 통치와 섭리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열쇠는 주님을 경외하라는 가르침이며, 이것이 지혜의 핵심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면 겸손하게 되고, 사회적 명예는 덤으로 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 가는 길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사회적 존중을 받는 길은 겸손입니다. 지혜는 마음(heart)의 문제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지혜자 중의 한 명이지만(31), 주님을 경외하여 겸손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참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국어사전은 ‘겸손’을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로 정의합니다. ‘겸손’의 히브리 원어는 ‘아나바’로서, ‘압제를 당하여 굽혀지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난을 충분히 통과하면 겸손해지게 되어있습니다. 거만하고 냉소적인 바보는 하나님의 계시를 경멸하지만, 잠언의 제자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도덕질서와 삶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한 사람입니다. 그는 결코 그 질서에 반하여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주님께 백기를 휘두르고 투항해야 비로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벧전5:6).  유다의 웃시야 왕은 강대해지자 교만하여 왕에게 금지된 제사장직까지 행하려고 하다가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나병환자 아람 장군 나아만은 선지자 엘리사의 말에 겸손히 순종하여 고침을 받고 그 믿음이 지금까지 회자됩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습니다. 우리는 다 모난 돌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징계를 겸허히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회적 성공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잠언22:4,새번역)

매일묵상(2021/12/13 – 17)

시편69편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9절)

다윗은 이 시편에서 연약한 사람나와 고백합니다. 구약을 보면 이 시의 배경이 될만한 다윗의 삶은 없습니다. 다윗은 기록되지 않은 부당한 환경에 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 자신은 성전 건축 준비를 위해 헌신하였지만(9), 재정적(?) 부정 행위에 연루되었다거나, 이 때문에 마땅히 행할 국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을 것입니다(4). 다윗이 가진 정의감은 무디지 않았습니다. 비방과 배반이 일어나자 다윗은  자기정죄(5)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성품과 도덕적 민감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생명은 위협당하였고 증오는 계속되었습니다(1-4). 그를 지지하는 경건한 사람들은 모욕당하였고(6), 가족들과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8). 그의 신앙 고백과 삶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10-12). 곤란이 중첩하나 신속한 응답이 없자 의심이 들며 두려워하였습니다(17). 이 모든 것이 주님과 그분의 집에 헌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진정한 공격의 대상은 다윗이 아니라 주님이었습니다. 이 시편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저주들(22-28)의 이유입니다. 두 가지가 주목됩니다. 첫째, 이 시가 해결되지 않은 위기의 상황(29) 하에서 기록되었지만, 결국 다윗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읽으면 다윗은 평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도하고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둘째, 이 시는 시편 중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여러 번 인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영원과 맞닿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종들의 자손이 그 땅을 물려받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살게 될 것이다.”(시편69:36 새번역).

시편69편 4절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본 시편은 메시야 시로서 4, 9, 21, 22, 25절은 신약에서 빈번히 인용됩니다. 4절의 전반부는 최후의 만찬을 행하신 마가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15:25). ‘율법’이란 시편을 포함한 구약성경 전체를 지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인 사실을 공개적으로 여러 번 증거하셨습니다. 그것도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많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직접 선언하셨습니다. 좋은 예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신 기사입니다(요5장). 또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살리신 사건입니다 (요11장). 유대인들은 표적과 가르침 속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보았으나 오히려 미워하여 원수가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경험을 노래한 구절들을 예수께 적용하기 위해서는 ‘모형론 Typology’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만약 다윗이 까닭 없이 미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는 얼마나 더 미움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자신이 의지하는 율법에 의하여 오히려 정죄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반석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돌입니다. 복음의 신비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

잠언15:28절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지만, 악인의 입은 악한 말을 쏟아낸다.”(새번역)

마음은 악한 생각들 혹은 정결한 언어를 구축하며, 탐욕 혹은 관대함의 원천이고(27), 선한 동시에 적절한 대답(23)을 하게 만드는 바로 그 열쇠임을 이 구절이 보여줍니다. 의인의 마음은 상대방의 삶이 선한 열매를 맺도록 적절한 말을 찾아 깊이 생각합니다. 현자는 준비된 답변을 가지고 있지만(23), 좀 더 적합한 대답을 찾아 여전히 연구합니다(2). 악인의 입은 악한 말, 즉 도덕적으로 불쾌하며 더 나아가서 해로운 말을 불쑥 내뱉고 맙니다. 마음과 입은 상호보완적인 존재입니다.‘악한 말을 쏟아낸다’는 문장은 성급함을 말하고,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는 문장은 ‘좋은 것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70인역이나 탈쿰역은 ‘좋은 것들’을 ‘신실한 것들’로 번역하여 사회적 배려를 강조합니다. 의인은 신중하며 자제력이 있습니다. 의인은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본 잠언은 이런 면들이 악인과 다름을 가르쳐 줍니다 . 악인의 마음에는 악한 생각, 꾀, 계획, 거만함으로 꽉 들어차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상대방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늘 분주합니다(24:2).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악인은 의인과 확실히 차이가 있습니다.  17세기 프랑스 대주교였던 페넬롱은 사려깊은 분이었습니다. 조언을 구하는 편지가 오면, 그는 깊이 생각하고 답변을 주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무려 2년이나 걸렸습니다. 이분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당연합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엡4:29,새번역)

잠언15:29절
“주님은 악인을 멀리하시지만, 의인의 기도는 들어주신다.”(새번역)

이 잠언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의인을 판단하는 신학적 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이란 주님이 가까이 하여 기도를 들어 주시는 사람입니다(시145:18). 사람이 위기에 처할 때 만유의 주님의 돌보심은 가장 든든한 보장책입니다. 의인의 자랑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는 공동체 안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악인의 경우는 다릅니다. 주님은 멀리하십니다. 그의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멀리하신다’는 의미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은혜 받지 못함을 뜻합니다. 주님과 악인 사이에는 교제가 없습니다. 양측 모두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극한 상황이 지옥입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자비와 영광이 떠나 있습니다. 악인은 종종 경건한 사람으로 위장합니다. 누가 악인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혜자는 분별합니다. 지혜자는 사람 마음 속 깊은 생각까지 길어올립니다. 지혜자 또한 악인을 멀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잠언은 악인이 회개하는 모습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악인이 진정 회개한다면, 그는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적 회개는 악인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악하게 획득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늘 그렇듯이 예외는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주님과의 교제가 생명 보다 나음을 깨닫자 회개합니다. 그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구원의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하겠습니다.”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눅19:9-10, 새번역).

잠언15:30절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잠언15:30-16:15절은 3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도입부분(15:30-33), 주님의 주권(16:1-9), 그리고 왕을 통한 주님의 통치(16:10-15). 도입부분은 ‘듣다’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6:1-15절은 이를 상세히 교훈합니다. 본 구절에서 ‘눈이 밝다’는, 가르침을 받고 깨달은 마음을 지칭합니다. ‘좋은 소식(기별)’이란 문맥상 ‘주님의 통치’(16:1-15)를 언급합니다. ‘윤택하게 한다’는 ‘살찌게 한다’의 의역으로, 풍성함, 충만한 만족 그리고 건강을 말합니다. ‘뼈’는 사람을 뜻하는 제유법으로서 육체와 정신을 모두 포함합니다. 본 잠언의 실례는 빌립보서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바울은 2년 동안 로마 셋집에 갇혔습니다(AD60년). 빌립보 교회는 또 다시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이 예물을 통해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물론, 경제적 곤궁도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바울은 매여 있었지만, 바울의 사정이 로마군대 내에 알려져 복음은 오히려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빌1:12-14). 사도 바울 자신의 눈이 밝아지는 계기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 소식을 빌립보 교우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는 매여져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놀라운 소식에 기뻤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서신의 마지막 부분은 성도들 사이의 아름다운 인사를 전합니다. 우리도 이같은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십시오. 나와 함께 있는 교우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빌4:21, 새번역)

매일묵상(2021/12/6 – 10)

시편68편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1절)

시편에서 가장 떠들석하고 신나는 시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벳에돔의 집에서 언약궤를 메고 다윗 성으로 행진할 때를 기억나게 합니다(삼하6:12).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서, 언약궤의 행진은 하나님 곧 이스라엘 왕의 행진이었습니다. 아벡의 전투 후 언약궤는 오벧에돔의 집으로 들어갔고, 지금 100년이 흘렀습니다. 시에서 잘 나타나 있지만, 다윗 왕이 앞서고, 레위인들이 메었으며, 수 많은 백성들이 뒤 따르면서 소고 치며, 여러 악기로 기쁘게 찬송한(25)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적은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언약궤가 광야를 행진할 때마다 모세는 기도 드렸습니다. 1절은 그것을 반복합니다(민10:35). 그러나 이 언약궤의 행렬은 가나안을 정복한 이래로 400년 동안 없었습니다. 다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지금에야 하나님이 당신이 거할 처소로 선택하신 ‘높은 산’(예루살렘)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시의 구조입니다: (1-6) 찬양의 팡파르/ (7-18) 왕의 행진/ (19-31) 왕의 위엄/ (32-35) 마지막 팡파르.  한편, 이토록 중요시한 ‘언약궤’는 400년 뒤 지상에서 사라졌으며, 그것을 보관하던 성전 역시 붚태워졌습니다. 어떻게 된 이유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때문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언약궤 자체가 그리스도의 언약의 그림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관련하여 18절을 인용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4:7-8).

시편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새번역)

본 시편은 다윗과 그의 백성이 아비나답(오벧에돔)의 집에서 언약궤를 메어100년 만에 예루살렘의 성소에 안치하는 행진을 노래한 시라고 언급하였습니다. 그 행진은 출애굽을 완성하는 승리의 행진을 의미하나, 그러면 여기서 ‘사로잡은 자들’은 누구이며, 선물은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먼저 이 구절은 가나안 왕 야빈에게 승리하여 부른 여사사 드보라의 승리의 찬가(삿5:12)에서 뽑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승리하신 후 자신의 도성(높은 곳)에 들어가셨습니다. 반역자들에게는 공물을 부과시키고, 당신의 백성들과는 전리품을 나누십니다(19).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왕으로 등극하시기 위해 승천하시는 모습을 그린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모습을 이 구절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 그리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포로)들을 다시 사로잡아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사로잡은 자들로 구성된 교회의 각 성도들에게 선물(은사)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은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그리고 목사와 교사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통해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힘을 공급하십니다. 교회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서로 결합하고, 각자가 그리스도께 받은 은사를 발휘함으로 몸이 자라되, 사랑 가운데 스스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엡4:16).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4:7-8).


잠언 15:25
“야훼께서 거만한 사람의 집은 헐어버리시고 과부의 밭 경계선은 지켜주신다.”(공동번역)

본 잠언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 오기 전, 약자가 생명의 길을 걷고 있더라도 힘을 가진 악인에게 착취를 당한다는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4절(생명의 길을 걷는 슬기로운 자)은 25절과 함께 읽어야만 합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이런 악인의 행위를 심히 규탄하고 있습니다(사1:10-17 암2:6-8). 본 구절은 짧지만 ‘교차대구’,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提喩)법, 환유법 등의 문학적 기교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힘있게 전달합니다. ‘집’이란 삶의 필수불가결한 수단을 상징하기에, 집을 헌다는 것은 그의 삶을 파괴시킨다는 내용이며, 그것도 영원한 파멸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악인에게는 아주 두려운 존재입니다. ‘거만한 자’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을 높이고,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을 짓밟는 폭군을 뜻합니다(환유법). 또한, 남편 없는 과부는 고아와 함께 약자의 대명사로서 착취로부터 보호받아야만 합니다. 악인은 지계석(경계선의 돌)을 한 번에 조금씩 이동시켜 마침내 과부의 밭을 상당부분 잠식합니다. 이를 잘 알지만 힘이 약한 과부는 원한이 맺힐 수밖에 없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런 원한을 풀어줄 책임은 왕에게 있습니다만, 구약성경은 독특하게 하나님을 궁극적인 회복자로 선포합니다. 주 예수께서 억울한 일을 당해 불의한 재판장에게 호소하는 과부의 비유를 통해, 불의한 일을 당하나 수단이 없을 때,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인내할 것을 요청하신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신실한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여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잠언15:26절
“악한 꾀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26절은 ‘여호와(야훼, 주님)’라는 주제어로 25절과 연결되고,  25절에게 신학적 근거를 줍니다. 따라서, 25절의 ‘거만한 자’는 악하여 주님이 미워하시는 자로 암암리에 규정되며, 약자와 압제 당하는 모든 자를 대표하는 ‘과부’는 ‘정결’하여서 주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자임을 알게 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자애로운 임재를 거두어 가십니다. 그 결과 악인은 확실하게 영원한 죽음 속에 버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말’은 너무나도 주님의 마음에 맞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에, 그분의 자애로운 임재는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됩니다. 한편, 솔로몬은 ‘악한 꾀’와 ‘선한 말’을 대조함으로, 악인은 불쾌한 말을 만들어 내는 존재이지만, ‘선한 말’은 좋은 사람의 외부적 표식임을 가르쳐 줍니다. ‘정결’이라는 단어는 제사 의식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거룩한 주님은 당신의 면전에서 부정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이 단어는 ‘깨끗함’으로 종종 설명됩니다. 물론 반의어는 ‘부정/깨끗치 못함’입니다. 오직 깨끗하고 정결한 자만 제사를 드릴 수 있고, 희생제물은 온전하고 정결한 짐승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 개념은 ‘도덕적 정결’이라는 의미로 전용되어 왔습니다. 가난하나 참된 사람의 계획이나 말을 들어보면 부정한 비윤리적 요소들 – 거짓됨, 왜곡, 거칠고 불쾌하게 함 – 이 없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주님 앞에서 성소의 순금과 같이 빛날 뿐만 아니라. 듣는 자들에게 달콤함을 주고, 그들의 뼈를 치료합니다. 우리는 이 길을 가야만 합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언16:24).

잠언15:27절
“불의한 이익을 탐내는 사람은 자기 집에 해를 끼치지만,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은 오래 산다” (새번역)

이 구절은 ‘집’이라는 주제어로 25절과 연결되고, 거만한 자(25)와 악인(26)이 자신의 집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예로서 ‘불의한 이익(뇌물)’을 들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주어인 ‘불의한 이익을 탐내는 사람’과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을 중심에, 술어인 ‘자기 집에 해를 끼친다’와 ‘오래 산다’는 처음과 끝에 배열시키는 교차대구법을 사용하여 기억하기 쉽도록 되어 있습니다.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자’는 타락한 사기꾼, 특히 관료를 지칭합니다. 그의 집을 파괴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25). ‘불의한 이익을 탐내는 사람’의 반대에 서 있는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이란 선인(의인)의 특정한 행동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선인은 말도 정결하고, 뇌물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불의한 이익’을 탐낸 대표적인 사람은 구약에서는 게하시,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나병에서 회복된 나아만 장군은 사례하고자 하나 엘리사는 완강히 거절합니다. 이를 나중에 안 게하시는 분노하여 쫓아 가서 거짓말하여 은덩이와 두 벌의 옷을 받아 집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게하시와 그 후손들이 계속해서 나병환자가 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게 게하시의 집(가문)은 파괴당하였습니다 (왕하5:27). 가룟 유다는 겨우 은 30량을 탐내어 주님을 팔아 넘기나 목매어 죽고 맙니다. 그러므로 ‘오래 산다’는 어구는 그의 집의 계속적 보전이, ‘집에 해를 끼친다’는 그의 생명의 상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목숨을 살리는 책망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잠언15:31,새번역)

매일묵상(2021/11/29 – 12/3)

시편66편
“내가 마음 속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더라면,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18,새번역)

이 시의 배경은 불확실하지만,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하신 일은 ‘와서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초청의 근간을 이룹니다(1-7). 시편 기자는 홍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주님을 지켜보라고 요청하면서,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찬양하고, 반역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냅니다(5-7). 시편 기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 속으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고”고 할 정도로 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10-12). 그러나 현재 주님이 그분의 백성을 대하시는 행동은, 과거에 그분이 행하셨던 일에 비추어 이해되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홍해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관점에서 봅니다. 그들이 홍해의 물 속으로 지나간 이유는 바로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새로운 주인인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12). 홍해의 사건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도 같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죄로부터 해방이라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깨닫고, 현실에서 체험하여야만 합니다. 또한, 문제가 클수록 환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은총을 증거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그분의 거룩하신 섭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17)와 거룩함(18)이 없이는 구원의 축복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좋은 예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서, 순교를 위해 옥에 갇힌 베드로를 구원하시려고 천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12:5)

시편67편
“이 땅이 오곡백과를 냈으니,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6,새번역)

이 시를 추수 감사의 한 장면으로 본다면 흥미롭습니다. 1-3절에서 예배 인도자가 말하고(1행) 회중은 화답합니다(2행). 4절에 이르면 인도자와 회중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함으로 절정을 이룬 뒤, 다시 5-7절에서 주고 받고 있습니다. 주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추수기에 땅의 소산(오곡백과)을 주심으로 축복하신 것과 같이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하에 들어와 복을 받게 하여 주시도록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유일무이하게 축복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축복 자체가 목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론의 축복(1절, 민6:24-26)뿐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축복(창12:2-3)도 누리고자 합니다. 즉 그들이 축복을 받는 이유는 천하 만민에게 그 복이 미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복은 아브라함의 씨로부터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속사역을 말합니다. 그분을 깃발로 믿고 구원받은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모여듭니다. 한편, 6-7절을 보면 추수가 또 한 번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선하심은 홍해의 기적과 같은 놀라운 구원의 역사(시편65,66) 뿐만 아니라, 평범하고 해마다 계속되는 자비와 섭리 안에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축복은 장차 올 더 큰 축복의 담보인 동시에(6),  온 세상을  포괄하는 보증이기도 합니다(7). 왜냐하면 추수는 전 인류 중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비유이기 때문입니다(사27:12-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67:7).


잠언 15:22
“의논이 없으면 계획이 실패하고, 조언자들이 많으면 성공한다.” (쉬운성경)

어릴 때는 부모가 필요하나, 어른이 되면 그 방면에 권위있는 조언자가 필요합니다. 본 잠언은 이 부분을 교훈합니다. ‘계획이 실패한다’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라는 의미로써, 좋은 친구가 주는 신뢰할만한 조언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현명한 결정에 이를 때까지 사랑으로 서로 고쳐주고 격려해주는 조언자들입니다. 거만하며, 고집이 세고 완고한 사람의 계획은 실패하기 쉽습니다. 그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면서 계획을 세우기에, 그 결정은 이기적이고 현실을 무시하는 경향을 담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교만한 그는 교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반면, 그 방면에 지식과 경험이 많은 조언자들이 함께 하면, 의논하는 계획마다 성공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겸손과 신뢰를 기반으로 권위 있는 조언자들의  정당한 평가를 거치기 때문에 늘 성공하기 마련입니다. 실로, 많은 조언자들이 마음을 열고 정직한 조언을 줄 때, 계획 중에 숨어있는 잘못들이 바로 잡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약점, 무지, 그리고 한계를 상쇄시켜줄 조언자들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온 세상의 주인을 알고 그분 앞에 겸손한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가르치시고, 깨우쳐주시는 분은 보혜사(保惠師-보호, 은혜, 스승)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란  헬라어 ‘파라클레이토스’의 번역으로 ‘돕기 위해 부르심 받아 옆에 와 계신 분’을 뜻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가장 훌륭한 카운셀러이시기에, 그분의 조언을 받아들여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하여만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잠언 15: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이 잠언은 ‘사메아-기쁨’을 다루는 단락(20-23절)의 최종입니다. ‘조언’은 서로 대화하면서 주고 받습니다. 만약 적절한 대답을 듣게 되면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는 자신의 좋은 조언(훈계)을 자녀들이 받아들일 때 기쁨을 갖습니다(20). 현자는 윤리적 조언(22-23)을 받고 주는데서(23) 기쁨을 느낍니다. 더나아가, 성인이 찾아갔을 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답을 주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여기서 ‘대답’ 이란 ‘마네’의 번역으로 ‘상황에 대한 참되고 올바른 반응’을 말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이 참혹한 시련을 겪고 있는 이유는 욥이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뒤, 회개하라는 대답(조언)을 계속 주었습니다. 물론 욥은 그런 대답은 잘못되었다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러자 함께 듣고 있던 엘리후는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 세 친구의 말에는 욥의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전혀 없고 다만 정죄하는 말만 나열하였기 때문입니다 (욥32:3,5). 한편, ‘아름답다’는 말은 ‘토브 – 좋다’는 뜻인데, 이는 그 대답(조언)이 너무나도 상황에 잘 들어 맞아서 대화를 나누는 모두에게 생명과 번영을 주게 됨을 의미합니다. ‘때에 맞다’는 기회가 생기는 적절한 때를 말합니다. 그것은 성급한 말(29:20)이 아니라, 준비되고 사려깊은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조언을 주는 사람이 그 상황에 꼭 알맞은 적절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이상한 꿈을 두 번 겹쳐 꾸고 근심하는 바로에게 요셉이 적절한 대답을 준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잠언15:1, 새번역).

잠언 15:24
“슬기로운 사람이 걷는 생명의 길은 위쪽으로 나 있어서, 아래로 난 스올 길을 벗어난다.”(새번역)

24절은 교육의 기쁨을 다룬 단락(20-23)과 의인을 보호하고 악인을 심판하시는 주님을 언급한 단락(25-29)을 연결합니다. 또한 현재 의인에게 주는 보상인 기쁨을, 주님과 연관된 영원한 생명으로 승격시킵니다. ‘생명의 길’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갖는 상태를 언급합니다. ‘위쪽으로 나 있다’는 말은 ‘아래로 난 스올(무덤)의 길’과 대조를 이루면서 무덤(죽음)을 넘어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을 함축합니다. 실로 준비된 생명의 길의 수혜자는 ‘슬기로운 사람’이고, 그들의 정체는 의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위쪽으로 나 있는 생명의 길을 걷는 결과, 자연히 ‘아래로 난 스올 길’을 벗어납니다. 그들은 인생의 참된 성공자입니다. 그러므로 스올(무덤, 죽음)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예기치 않게 죽지 않는다는 말 그 이상입니다. 생명의 길을 사망이 삼키는 것이 아니라, 사망이 생명(이김)에 의해 삼켜질 것입니다(고전15:54).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4:4) 명령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생명의 길을 걷기에 ‘슬기로운’ 사람이며,  스올로 상징되는 영원한 죽음(심판)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한편, 세상에 살 때 닥쳐오는 근심 걱정, 두려움, 문제 거리 등은 감사와 함께 기도로 아뢰면 됩니다. 놀라운 응답을 체험할 것입니다. 더구나 영생의 소망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늘 넉넉합니다. 본 구절은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적합니다. “야훼께서 거만한 사람의 집은 헐어버리시고 과부의 밭 경계선은 지켜주신다.”(잠언15:25, 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