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알렉스가 부모와 같이 휴가에서 돌아오자, 그 아이는 “이게 우리집이야”라는 소리를 연발하며 현관문과 자기 베개와 여러 가지 물건에 입을 맞추며 돌아나녔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아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집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당도하면 어린 알렉스가 행동한 것처럼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고 있는 신자들은 주님께서 나타나실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곳에서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순례자이며 이방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사십 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선교사의 삶을 살다가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탔습니다. 그 배에는 아프리카로 코끼리 사냥을 갔던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도 타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항구에 도착하자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지만, 선교사를 환영하기 위해 나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처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대통령은 집에 돌아왔지만, 너는 아직 집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우리도 하늘에 있는 우리 집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천만천사의 환영을 받는 것은 물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승천하심으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기 위해 알현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어린 알렉스와 같이 우리의 진짜 집의 현관과 문턱에 정신없이 입을 맞추며 돌아다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와 그가 뿌리신 피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해 줍니다.”(히12:22-24, 새번역)
공산주의가 지배하였던 소련의 암흑기에 바실 리 슈크라는 형제가 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 세 자녀의 이름은 앤드류, 게나, 탄야이며, 그 자녀들이 어릴 때 슈크 형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은 감옥에 갇힌 아빠에게 편지들을 보냈습니다. 먼저 10살된 앤드류의 편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이름으로 아빠에게 키스를 보냅니다. 제가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바깥은 춥고 황량합니다. 아빠는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건강은 어떠신지요? 이 모든 광풍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우리의 가슴이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 한 분만을 믿을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모진 바람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폭풍우 뒤에는 반드시 평온함이 따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이번에는 그 평온이 영원하리라는 것, 결국에는 끝없는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폭풍우를 꼭 이겨내야 합니다. 집에는 모든 일이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빠를 뵐 희망뿐 아니라 우리 주님을 뵐 희망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는 영원한 삶 속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가슴으로부터 키스를 보냅니다. 아빠의 아들 앤드류 올림.” 10살 밖에 안된 앤드류가 얼마나 믿음과 소망이 가득차 있습니까? 비록 바실 리 슈크라는 형제와 그의 자녀들은 어렵고 힘든 고난의 길을 갔지만, 이분들의 끝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커다란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어제에 이어 오늘 역시 소련 시절에 믿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바실 리 슈크 형제와 그의 자녀들 사이에 오고 간 편지를 읽어 볼까 합니다. 그 당시 열두 살이었던 게나
의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아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문안드립니다. 아빠, 우리는 한시도 아빠를 잊
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빠를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빠의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모든 다른 죄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그분들 모두를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빠, 새해가 되려면 아직도 너무 멀었고, 우리 모두 아빠를 보고 싶어하니까, 감옥 소장님께 가족 면회를 허락해 달라고 부탁 좀 해보세요. 우린 아빠가 너무너무 그리워요. 아빠의 사랑하는 아들 게나 올림.”
여기 14살된 딸 탄야의 편지가 또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어요! 안녕하세요? 아빠가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부활하신 주님께서 아빠가 계신 감방도 밝게 비춰주셨으면 좋겠어요. 전 찬송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졸아들고, 아무리 눈을 꼭 감아도 자꾸 눈물이 흘러요. 우리 모두 곧 서로를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빤 혼자 계신데, 우리는 같이 있어요. 그러나 곧 모두 다 지나간 일이 될 것이고 아빠도 우리와 같이 있게 될거예요. 힘내세요! 아빠의 딸 탄야 드림.”
우리도 이 어린이들에게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거나, 박해를 받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배워야만 하겠습니다.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13:3).
아프리카에 있는 어떤 감리교 선교사는 한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이는 주일학교에 가서 하나님께 양을 제물로 바친 아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년은 그 다음날 들판에 나가 몇 개의 돌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양고기 한 덩어리를 얹고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나의 아버지, 당신께 제물을 바칩니다. 제게는 단 돈 2펜스밖에 없어서 양 한 마리를 다 살 수 없었습니다. 제게 돈이 있었더라면 양 한 마리를 다 드렸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 고기 한 덩어리밖에 드릴 수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꼭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제물을 살라 주십시오.” 당연히 하나님은 불을 내리시지 않았습니다. 놓아 두고 간 제물은 개미가 와서 다 없애버렸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배워야만 할 점은 아벨과 같은 옛 성인들을 본받아 기꺼이 하나님께 귀한 제물을 가져올 수 있는 어린이의 순결한 마음입니다. 이 반면, 어린이는 지력이 약하기 때문에 성경을 듣고 해석하여 오늘의 시대에 비추어 올바르게 적용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 사례에서도 아벨의 행동을 본받아 하나님을 섬기려는 갸륵한 마음을 가졌지만, 더 이상 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구약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그 어린이는 몰랐습니다. 사리판단이 약한 그 어린이가 성경대로 행한 결과는 오직 개미에게만 유익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 특히 구약을 읽을 때 주의해야만 하는 것이 이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어린이들에게 맡겨 통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사이건 교회이건 가정이건 모두 같습니다. 우리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우리가 맡은 분야에 정통해야 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19-20).
범브란트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 최고의 고통은 죽음을 통해 아이를 잃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실례를 제시합니다. 소련 연방에 있는 드브로보라는 마음에 슬로보다(이 러시아의 말은 ‘자유’를 의미함)라는 이름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공산치하에서 이들은 예수를 믿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 죄로 슬로보다 부인은 4년간 감옥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다섯 자녀는 – 갈리라, 슈라, 콜리아, 리우사, 파브리크(막내는 다섯 살이었음) – 무신론적인 아동 수용소로 끌려가 그곳에 수용되었습니다. 이런 식의 헤어짐은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슬로보다 부인은 두번 다시 자기 아이들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고문 때문에 그녀는 마흔 아홉의 나이에 감옥에서 죽었고, 아이들은 그녀의 장례식에만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무덤 곁에 서서 아이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도 어머니처럼 의롭게 살도록 도와 주십시오. 어머니처럼 당신을 증거하다 죽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아이들은 순교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공산주의 수용소에 수감되는 형벌도 그들을 두렵게 하거나 ‘재교육’시키진 못하였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참된 크리스천의 모범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신앙을 가지고 진실로 자유롭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유산을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값진 보화입니다. 그러나 신앙유산을 물려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말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의 눈은 무섭습니다. 그들은 들은 대로가 아니라, 본 대로 행합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의 염려와 여러 가지 취미 생활에 빠져 자녀들에게 주님을 경외하는 삶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을 때 올바른 신앙생활을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주님을 경외하는 삶이 무엇인지 말과 행동으로 가르치고, 그들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늘 기도하여 주어야만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