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쎄룰로라는 전도자가 하이티의 한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너, 예수님을 아니?” “그게 미국에서 새로 나온 음료수인가요? 난 코크밖엔 물라요.” 소년이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선전하는 사람들보다 코카콜라를 선전하는 사람들이 더 효과적인 선전을 한 셈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예수’라는 이름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장사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갖지 못한 이로운 점이 있긴 하지만,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있습니다. 물건을 파는 것은 그들의 일이지만, 사람을 소개하는 것은 교회의 일입니다. 교회가 소개하는 분은 한 번 마신 사람이 다시는 목마름을 느끼지 않게 할 수 있는 생명의 물을 가진 분이십니다. AD28년 5월 경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도중 사마리아의 수가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남서쪽으로 약 800미터 지점에 이스라엘 조상 야곱이 4,000년 전에 팠다는 우물이 있습니다. 그 우물은 지금도 존재하는데 깊이가 30미터나 하고 가장 밑바닥에서는 샘물이 흘러가며 그 중 일부가 우물에 고이고 있습니다. 주님은 행로에 피곤하셔서 이 우물 가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그때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저녁 6시 경 마실 물을 긷기 위해 혼자 이 우물로 왔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남편을 5섯명이나 두었으나 전부 사별하거나 헤어졌고, 지금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불행한 일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 여인을 사랑하거나 돌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독한 이 여인은 우연히, 아니 하나님이 정한 그 때에,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직접 그 여인을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알고보니 이 여인도 메시야를 기다리던 야곱의 자손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자신이 그녀가 기다리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려주셨고, 그녀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얻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에도 그녀가 지고 있는 세상의 불행과 어려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녀는 매일 우물가로 물을 길러 와야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마음에 큰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토록 솟아나는 생수를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영원한 생수를 주시는 이분을 모든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위대한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3:16).

나네뜨 토센 스나잎스 라는 여 성도는 여섯 살짜리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가 진달래 나뭇가지와 씨름을 하는 것을 보고 정원으로 달려갔더니 이미 가지는 부러져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학교에 이 꽃 가져가도 돼요?”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무척 아끼던 진달래 나무였었기에 눈에서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허락을 하여주었습니다. 그날 하루를 우울하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후 2시 반이 되자 아이를 데리고 오려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잠깐 자신을 보자고 하더니, “조나단이 오늘 학교에 꽃 가져온 거 아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로 인한 아픔을 애써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제 일을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저기 여학생 보이시죠?” 고개를 돌려 보니 눈이 맑은 한 여자아이가 웃으면서 벽에 붙은 화려한 색 그림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다시 끄덕였습니다. “어제는 저 아이가 거의 정상이 아니었어요.  엄마와 아빠가 이혼 수속 중이거든요. 살고 싶지 않고 죽어버렸음 좋겠다고 말했어요. 저 어린아이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반 전체에 다 들리도록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이를 달래는 것밖에는 없었지만 그럴수록 아이는 더 크게 울어 댔지요. 그런데 오늘 조나단이 저 아이에게 다가갔어요. 그러고는 예뿐 분홍색 꽃을 아이에게 주면서 이렇게 속삭이지 않겠어요? “나는 너를 사랑해”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한 행동이 너무도 자랑스러워서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말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선생님이 제게 최고의 선물을 주셨어요.” 그녀는  그날 저녁 정원에서 잡초를 뽑으면서, 조나단이 오늘 친구에게 베푼 사랑을 생각하는데 성경 구절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아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동안 자신은 분노만 실천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귀가하는 남편에게 진달래 가지를 하나 꺾어 “사랑해요 여보”라는 말과 함께 주었더니 남편의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 두란노,105-107). 가정은 작은 천국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구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목적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다른 사람의 짐(burdens – 혼자 감당하기에는 무거운 짐을 의미)을 들어 주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길입니다.”(갈6:2, 쉬운성경).

성탄절 연극에서 여덟 살난 소년이 요셉의 역할을 하고, 동갑내기 소녀가 마리아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아이는 무대 위에서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을 꾸짖었습니다. “너는 지금 네가 누구의 역을 맡고 있는지 잊어버렸단 말이야?” 요셉은 마리아와 싸운 적이 없단 말이다.” 소년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빠가 어떻게 아세요?” 아버지는 갑자기 입이 막혔습니다. 사실 그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제자들이 싸웠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 동기는 누가 잘났는가 혹은 위대한가의 여부였습니다. 항상 미소를 짓고 있는 성인들의 동상이나 그림은 다 어른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성인들은 악할 수도 있고 세속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크리스천인 부모들과 같이 살고 있는 아이들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싸운다거나, 어떤 죄를 짓게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위대한 바울과 바나바는 제2차 전도여행에 바나바의 생질 마가를 동반하는 문제를 가지고 심히 다투어 서로 갈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는 제1차 전도 여행이 고됨을 체험하자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떠나 배를 타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간 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행13:13). 그러나 10 여년 후 죽음에 임박하여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마가가 자신의 사역에 유익하니 함께 오라고 고백하는 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딤후4:11). 바나바는 아마 벌써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고 위로하는 태도 역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단순히 보물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흙으로 만든 단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흙으로 만든 단지에 담긴 보물입니다. 이런 흙으로 만들어진 단지의 존재를 부인하면 크리스천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빛을 비추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가진 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고후 4:6-7, 현대인의 성경)

범브란트 목사님의 아들 미하이가 다섯 살 때, 성인(聖人)들이 언젠가는 흰 옷을 입고 예수님과 같이 걷게 될 것이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에게 맞는 작은 옷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모든 크기의 옷이 다 있다고 아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몸이 작은 사람이나 큰 사람이나 각기 맞는 옷이 다 있는 것처럼 믿음이 작은 사람이나 큰 사람도 다 자기에게 맞는 옷이 있는 법입니다. 블독이 주머니 크기 만한 푸들을 보고 물었습니다. “너도 너를 개라고 생각하니?” 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도 내가 너만큼 크지 않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고양이라고 부르지 않는 건 분명해. 작은 개도 여전히 개거든.” 약하고 겁이 많고 타락한 적이 있는 그리스도인도 역시 그리스도인이고, 그를 기다리는 흰 옷이 있습니다. 그의 넘어지고 서는 것은 주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무거워 지기 매우 힘들어 하는 짐을 보거든 함께 질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집으로 진리의 기둥과 터인 동시에 사랑이 행해지는 공동체이어야만 합니다. 우찌무라 간조 선생이 19세기 말 신학을 하기 위해 미국 펜실베니아에 도착하자, 아이작 켈린(1834-1893)이 운영하는 정신병원의 간호보조원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켈린 의사는 매우 실천적인 박애주의자로서 다른 사람들이 간조 선생의 영혼을 걱정할 때, 이 의사는 선생의 배를 염려하여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선생이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켈린 원장은 선생의 신앙의 진실성과 정통성을 의심하지 않았고, 미국에서 원조해 주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인간화시킨 사람이 바로 그였다. 만약 내가 책과 대학, 신학교에서만 기독교를 배웠다면, 나의 기독교 신앙은 차갑고 경직되고 관념적으로 굳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성령께서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빚으시는지!”(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184).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함을 배워야만 합니다. “사람들아, 여호와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 너희에게 보이셨다. 그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며 한결같은 사랑을 보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너희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다.”(미가6:8, 현대인의성경).

우찌무라 간조 선생이 1885년 1월 25일 자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인생은 천국에 들어가는 법을 배우는 학교다. 따라서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은 ‘소중하고 영원한 교훈’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 계기는 10여일 전 당직을 설 때 읽은 <프랜시스 하버갈(1836-1879 영국의 찬송가 작사자)>의 전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을 통해서 새로운 수업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프랜시스 하버갈이 가장 두드러지는 천사이다. 이 때까지는 기독교의 체제 아래 살면서도 이 지상에서의 삶이 내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내가 새 신앙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 신앙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영적인 가치 때문이기보다는, 주로 행복한 가정, 자유로운 정부 등과 같은 실용적인 목적에서였다. ‘내 나라를 유럽이나 미국처럼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내 인생의 최고 목표였고, 이러한 의도를 실행하는 데 기독교는 무엇보다 강력한 원동력이라 생각했기에 나는 기독교를 환영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이유들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있는지 잘 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에 대한 사랑을 위해 조국에 대한 사랑을 희생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장 진실하고 고귀한 의미에서의 조국에 대한 사랑이 내 안에 회복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선생의 일생은 일본의 선지자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이때 선생의 나이 24살이었으며, 선교사가 세운 일본의 대학을 졸업한 뒤 잠시 농상무성 관리로 있다가, 6개월 전 미국에 도착하여 앰허스트 대학(Amherst)에 다니던 중이었습니다. 뱃삯만 가지고 미국으로 와서 고학을 한 것은 물론입니다. 졸업 후 하트포드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888년 소명을 품고 귀국하여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1891년 천황의 ‘교육칙어’를 불경시했다는 이유로 교직을 떠나야 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저술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20세기 초 일본의 기성 교회가 너무나 조직과 교리에 잡혀 있고 생명력을 잃은 사실을 개탄한 나머지 무교회주의의 운동을 편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해가 되지만 그 부분이 매우 애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일본 교회가 약하게 된 것이 이런 분들의 주장도 한 몫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한국의 김교신, 함석헌과 같은 선각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 분으로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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