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6 – 20
기다리기를 싫어하는 우리는 예수님이 신속한 행동가이기를 원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벳세다에서 베푸신 예수님은 저녁이 이르자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앞서 가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무서움에 소리를 지를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즉시’ 대답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바다에 빠지며 구원을 요청할 때,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들은 신속하고 분별력 있고 단호하였습니다. 그분은 경적을 울릴 찰나도 낭비하지 않스십니다. 그러나 한편 이것은 기다림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새벽 3시가 지나서야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 안에 있었던 것은 전날 해지기 전부터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리 오래 지체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폭풍과 동시에 나타나시거나 그보다 조금 전에 나타나시는 것을 원하였을 것입니다. 롤린슨은 핍박의 폭풍을 겪고 있는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연약한 마음들은 주님이 그들을 버렸는지 의심하거나, 그리스도의 실제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을 수 있다. 그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그들을 보고 계시며….바람과 바다의 주인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 ‘밤 사경’에라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신속하게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이 이야기에서 배워야 했다.” 우리도 같습니다. 삶에서 여러가지 소원과 간구의 제목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신속하게 해결해주시는 경우도 많지만 때로는 기다림을 배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인내를 온전하게 이루시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믿음의 핵심은 인내이고 인내의 중요한 요소는 기다림입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약속은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대표적인 예언이 이사야 11장 1-4절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고 그 위에 성령께서 강림하신다는 예언으로 예수님께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주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서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또 그 다음 세대로 그리고 한 세기에서 다음 세기로 또 다음 세기로 계속해서 기다려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을 때, 성경에 집중하고 메시아를 고대하던 시므온 같은 사람들만 알아보았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라고 묘사된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다림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30년간 나사렛에 은둔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고 나서 3년 반이 지난 후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 승천하심을 기다려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승천 후에도 제자들은 성령님께서 강림하실 것을 기다려야 하였고, 오신 뒤에도 주님이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주님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를 왜 기다리게 하시는 것일까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1:4)
잘 기다리는 능력은 성숙의 척도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만족의 연기(延期)를 감내하는 능력” 이라고 부릅니다. 스코트 펙은 “만족의 연기란, 고통을 먼저 만나서 경험하고 극복함으로써 즐거움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삶의 고통과 즐거움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과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대니얼 골먼이라는 학자는 삶의 성과는 인지 지능보다 ‘정서지능(emotional intelligence)’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서 지능의 핵심에는 만족을 연기할 수 있고 충동에 휘둘려 살지 않는 능력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의 가장 잘 알려진 예가 바로 ‘마시멜론 테스트’입니다. 마시멜론이라는 과자를 둔 방 안에 네 살짜리 아이가 있고 실험자는 그 아이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합니다. 만일 실험자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면 과자 두 개를 먹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지금 당장 먹기 원한다면 하나만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충동과 억제, 이드와 에고, 욕망과 통제, 만족과 연기 사이의 영원한 전투가 벌어지는 소우주”인 그 어린 아이의 영혼에는 큰 시험이 될 것입니다. 어떤 아이는 실험자가 나가자마자 금방 먹었고, 어떤 아이는 한 개를 더 먹으려고 노래 부르기, 혼자 애기하기, 손가락 가지고 놀기 등 온갖 전략을 개발해 내면서 참고 실험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불과 네 살이 표현한 이 성격들이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영향은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 팀이 이 아이들을 오랫동안 추적 조사함으로 밝혀냈습니다. 그 성격들은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어 갔을까요?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5).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팀은 마시멜론을 가지고 네 살짜리 어린아이들을 테스트한 후 그들을 오랜 기간 추적 조사를 하였습니다. 네 살일 때 기다릴 수 있었던 아이들은 기다릴 수 없었던 아이들보다 더 사교적이고, 스트레스에 더 잘 대처하고, 압력을 받을 때 덜 포기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참지 못하고 즉시 과자를 집은 아이들은 더 고집이 세고 우유부단하며, 좌절에 더 쉽게 격분하고, 충분히 갖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SAT 라는 미국대학학력고사의 성적에서도 과자를 기다린 그룹이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평균 210점이 높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과자를 먼저 집은 아이들은 여전히 욕구 충족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충동 통제 능력의 부족이 비행, 과소비, 이혼과 연관성이 높다는 것 또한 연구 결과 드러났습니다. 골먼이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서 잘 기다리는 능력을 ‘가장 중요한 적성’이라고 부른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과자에 대한 테스트를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하물며 어릴 때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가르침을 받아 성장한 아이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충동에 대한 통제 불능과 인내하며 신뢰하기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한 속성의 핵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과일을 한 입 베어 먹은 이후로 삶은 늘 그래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이와 반대되는 성숙한 인격을 만들어 내야만 하고 그 좋은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 가운데서 그 아들의 형상을 우리 안에 만드시고, 그 결과 성령님의 열매가 우리의 삶에 맺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1-5절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담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라고 가르친 뒤, 우리의 남은 삶은 이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고 큰 기쁨에 차서 살아가자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영광을 소망하는 우리의 기대가 결코 현재 겪는 환난 때문에 감소되지 않는다고 그 가운데서도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인격을 의미)을 연단은 소망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소망은 절대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병이나, 자녀의 문제, 직장의 문제나, 가족의 문제나,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때나, 어떠한 경우에 처해서도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새롭게 깨닫고 되며, 그와 동시에 우리가 붙잡고 있는 소망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즉 죄인이며 원수였을 바로 그 때에도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도 사랑하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아들을 믿어 거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을 어찌 사랑하시며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의의 길을 걷는 당신의 백성들을 성숙하게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낙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가 되기 위한 과정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삶’ 그것이 바로 ‘경건’이며, 애초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