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다윗과 같이 적에게 쫒겨 혹은 세상에서 실패하여 들어간 굴 속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귀한 장소입니다. 어느 날 사울은 다윗을 찾으러 군사 3,000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삼상24:3). 이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동굴 뒤쪽에 있었습니다. 부하들은 다윗을 설득하였습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 굴 속에서 불행하고 비참하게 살기를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칼로 사울을 찌르기만 하면 당신의 모든 꿈이 실현됩니다.” 엄청난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이 동굴에서 나갈 수 있어. 더는 숨을 필요가 없어. 더는 실패도 없어 나는 왕이 될 수 있어.’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왕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왕좌에 앉느니, 차라리 굴 속에서 살겠다는 결단이 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실로 다윗의 마지막 목표는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패의 동굴은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먼저 담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1)나는 올바른 꿈을 쫓고 있는가? (2)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소명과 일치하는가? (3) 나는 하나님의 소명을 위해 일하는가, 아니면 성공과 명예가 주된 목표인가? (4)굴 안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께 진실한 것이라면 나는 머물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7-8).

굴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말합니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물론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굴 속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 그가 왕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둘람 굴 속에 들어가 있던 다윗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지금 아는 것은 그 동굴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에게 피난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우리는 굴 속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도 당신을 거기서 꺼내 줄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뿐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동굴이라도 완벽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진정한 피난처를 발견한 것입니다. 때로는 굴 밖으로 나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뿐입니다. 하나님도 굴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우리처럼,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그분은 그 가라앉는 느낌을 다윗보다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그분도 지위, 신분, 친구, 안전한 삶을 상실하셨습니다. 물론 생명의 위험에 처했으며,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분의 시신을 굴에 넣었습니다. 세상적인 측면에서는 철저한 절망이 찾아온 것입니다. 주님의 몸은 굴에서 사흘 간 머물렀지만, 그러나 굴은 영원히 그분을 붙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최고의 역사를 굴 속에서 행하신다는 사실말입니다. 굴은 하나님이 죽은 것들을 부활시키는 장소입니다. 혹 여러분은 지금 굴 속에 있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당신의 아들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능력을 믿고 마음속에 간직해야만 합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9).

지금까지 우리는 비시 1020년 경 사울의 추격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남서쪽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엔게디로 도망을 간 다윗과 그 용사 600명의 이야기를 전제로 우리 삶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엔게디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찾아온 사울을 피하여 어느 동굴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굴이라는 상황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직장일 수 있으며, 실패한 결혼일 수 있고 사랑하는 자녀의 실망스러운 행동일 수 있습니다. 또는 제대로 꽃 피우기도 전에 접어야만 했던 갈망일 수도 있습니다.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 부분에 대한 학습후기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 번 반추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여러분의 부모와 가족은 당신에게 어떤 실패 관리 모델을 보여 주었습니까? 2. 실패에 대해 당신이 가장 흔하게 보이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1) 수치심 (2) 두려움 (3) 더 확고한 의지 (4) 부인 (5) 타인을 비난함 (6) 기타. 이 항목 중 해당되는 것을 선택하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실패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4. 현재 실패의 두려움이 당신을 붙잡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이 질문에 대하여 제가 가지고 있는 중고책에는 “자녀교육” 이라고 파란 볼펜으로 적혀져 있습니다.) 5. 여러분은 “주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는” 일에 얼마나 숙달되었습니까? 또한 이런 믿음을 더 효과적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만 할까요? 오늘 하루 이상의 5가지 질문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답을 적고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2-3).

오토버그 목사님은 젊을 때 스위스에서 스키를 탄 경험을 적고 있습니다. 알프스 산맥에서 리프트는 수백 미터 상공으로 상승하였습니다. 사모님은 스키를 잘 탔지만 높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수백 미터나 리프트가 오르자 두 부부는 둘 사이에 있는 금속 막대를 움켜잡고 뱀처럼 거기에 딱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겁이 난 사모님은 목사님에게 “여보,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 남편이고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지만 이 막대기 보이죠? 이건 내 막대예요. 이 막대를 건드렸다가는, 오늘 당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거예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스키 초보인 목사님은 “아래를 내려다 보지 말아요!”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정상까지 올라가는 T자형 스키리프트로 갈아타 산꼭대기에 거의 도달하였을 때 그만 두 분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목사님은 한동안 멍하니 눈 위에 앉아 구조견이 나타나길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십 명의 스키인들이 지나가면서 독일어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미국인인 목사님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은 “Dumkopf!”였으며 그 의미는 “바보”였습니다. 얼마 후 다른 한 부부도 같은 지점에 떨어졌으며, 남편 이름은 한스였습니다. 이분은 영어를 조금 할 수 있어서 가장 가까운 슬로프까지 엉덩이 높이로 쌓인 눈을 헤쳐 나가며 목사님 부부를 안내하고는 유의사항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밑을 보지 마세요. 경사에 놀라고 거리에 압도될 것입니다. 신참들은 내려다보고는 겁에 질려 버리죠. 이렇게 가파른 슬로프에서 앞을 똑바로 보면 말이죠….” 사실 스키를 타고 내려갈 슬로프는 각도가 90도에 가까웠습니다. 목사님은 오싹해졌습니다. 한스는 이어 말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단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밑을 내려다보지 마세요!” 그날 “밑을 내려다보지 말라”는 충고는 목사님 인생의 제 1 수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생의 폭풍을 맞이할 때 우리는 두려움에 가득차 오싹할 것입니다만,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밑을 내려다 보지 마십시요” 오직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시18:1-2).

젊은 시절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던 날 “밑을 내려다보지 말라”는 충고를 가슴에 새기고 오토버그 목사님은 스키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면서 지그재그 회전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를 앞질러 지나간 후, 리프트를 타고 다시 올라가서 또 한 번 앞지르면서 그를 몇 번이나 앞지를 수 있는지 내기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마음에 “아! 아마 나는 지금까지 알프스에서 스키를 탔던 사람들 중 가장 흉한 포즈로 스키를 타고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제대로 한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절대 밑을 내려다 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멋진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랬기에 목사님은 산 아래로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생각의 초점을 예수님께 맞추는 동안, 그는 물 위를 걷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초점은 폭풍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윽고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두려움은 그를 물 위로 걷도록 지탱한 주님에 대한 믿음을 방해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폭풍이 세차게 불어닥치는 갈릴리 호수에서 크게 출렁이는 파도를 밟고 오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이 소망은 베드로를 배 밖으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는 그를 지탱시킨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물 위를 걷다가 몰아닥치는 폭풍과 파도를 보고 두려움이 몰려오자 베드로는 그만 물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베드로가 구세주에게 초점을 맞추었는가, 아니면 폭풍에 초점을 맞추었는가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삶을 살려면 소망, 신뢰, 확신이 꼭 필요합니다. 그것은 시도하는 사람과 포기하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혹은 다른 요소 때문에 그런 것들을 잃으면 우리도 인생의 항해에서 베드로처럼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밑을 내려다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하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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