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11 – 15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배움의 기회가 됩니다. 실패로 인해 그들은 더 굳건한 끈기, 더 활발한 헌신, 더 담대한 마음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실패로 인해 철저히 패배합니다. 그들은 절망, 수치심, 다시는 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은밀하면서도 단호한 결의를 다집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실패로 인하여 배우고, 자신을 인식하고, 다시 시도하려는 의욕을 가다듬는 사람들은 실패 관리의 달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은 예체능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좌절에 직면할 때 보이는 열정과 인내력 같은 특정한 정서적 자질들’을 가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정서적 자질들이 탁월하게 나타난 성경의 인물은 다윗 왕입니다. 다윗은 이미 소년이었을 때 하프를 연주하는 음악가요, 용사였습니다. 시편의 절반은 다윗이 지은 시이며, 이스라엘 중 노래를 잘 하는 자로 자타가 인정하는 자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을 죽이고 나서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되었고, 이어 왕 사울의 딸 미갈을 맞아들여 부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미움을 받아 부마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무려 10년 간 정처없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 블레셋 도시 가드로 망명하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가드도 안전하지 않아 다시 유대의 한 동굴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곳은 아둘람 굴이었습니다. 실패도 이런 실패는 없습니다. 왕궁에서 바로 어두컴컴한 굴로 떨어졌고, 더구나 사울의 추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왔으며, 전혀 장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다윗은 어떻게 견디어 갔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더 나아가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약속들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3-24).
한때 다윗은 부, 권력, 명성, 친구, 안전, 빛나는 미래를 보장받았지만, 이제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며 아둘람 굴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굴은 우리를 도울 도움, 능력, 지지자들이 마지막으로 찾게 되는 곳입니다. 굴은 우리가 꿈꾸던 대로 되지 않을 때 머물게 되는 곳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혹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굴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을 잃었거나,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꿈꾸던 가정이 무너졌기 때문에, 친구나 배우자, 의지하던 관계가 사라졌기 때문에, 건강을 잃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굴 속에 있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이 나를 놓치신 건가?’라는 의심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잊지는 않으셨을까 나는 여기서 나갈 방도가 없는 것인가 등등의 생각이 우리를 괴롭히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굴은 하나님이 우리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빚으실 수 있는 곳입니다. 때로 삶의 모든 버팀목을 빼앗기고 오직 하나님만 남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때로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고 절망할 때, 하나님은 그 약점을 통해 그분의 능력을 보이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횐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는 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피하여 굴 속으로 전전하며 10년을 보내었으며, 요셉은 노예살이를 거쳐 굴 보다 더한 감옥에서 절망과 싸우면서 최소 3년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남보다 다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도를 행하였다는데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렇게 어려운데도 그들이 당신의 뜻을 행하는지를 매우 궁금해 하셔서 시험을 보내셨습니다. 다윗에게는 그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사해에 인접한 엔게디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은 군사 3천명을 이끌고 엔게디의 들염소 바위로 가던 중 근처 굴에 들어가 뒤를 보고 있는데 바로 그 뒤에 다윗과 그 군대가 숨어 있었습니다. 단 한 번의 창으로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일전에 “내가 네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요, 다윗이 왕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 역시 사울을 죽이자고 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용변을 보고 있는 사울의 뒤로 가만히 다가가서 그 겉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와 부하들이 사울을 해치는 것을 금하고 사울이 안전하게 굴에서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윗 역시 굴에서 나가 자신이 사울을 해칠 수 있었음에도 옷자락만 베고 사울을 보낸 것과 같이 자신에게는 왕 사울을 죽일 의도가 전혀 없음을 외쳐서 알려주었습니다. 물론 사울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감정이었고 또 다시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테스트를 훌륭하게 통과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와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자신의 힘으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사울을 맡기고 계속 사울을 추격을 피해 도망을 다녔습니다. 이런 태도는 피흘림 없이 전 이스라엘을 통일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신앙의 삶은 이처럼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염원하는 삶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눅6:2).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길라 산 길 가에서 진치고 잠이 든 왕 사울을 다시 한 번 살려주고는 견디다 못하여 군사 600명과 함께 블레셋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거기서 시글락을 거주지로 배정받고 1년 6개월의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던 중 블레셋과 사울 왕의 전쟁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편에서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블레셋 방백들의 거절로 다윗과 용사 6백명은 아벡에서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글락은 불탔고 처자들과 모든 재물은 약탈당하였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 600명의 용사는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 지도자인 다윗을 돌로 치자고 하여 다윗이 몹시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삼상30:6). 여러분은 울 기력도 없이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더구나 지금까지 10년이나 생사고락을 같이한 부하들의 분노를 받아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처한 아주 위급한 상황에 이른 적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상30:6은 아주 큰 영적 인생의 큰 비밀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자원이 사라졌을 때, 모든 지지자와 도움이 사라졌을 때, 철저한 실패를 맛보았을 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은 약탈한 아말렉 족속을 쫓아가 쳐부수고 처자들과 함께 모든 재물을 되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남쪽에서 이런 곤경을 당하고 있을 때 북쪽에서 왕 사울은 블레셋에게 패배하여 그 가문이 몰락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연스럽게 왕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신뢰하여야만 합니다. 주님이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장래와 자녀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굳게 주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11:9).
시편에 보면 불안할 때, 횡행하는 악에 대해 분노할 때, 원통할 때 및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탄식하고 부르짖는 구절들이 매우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다윗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시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실망할 때 그런 마음을 내면 깊이 묻으려고 합니다. 마치 극기하는 것처럼, 자신을 억지로 추스르지만 내면의 진실한 고통은 경험하기를 거부합니다. 사실 실패는 종종 수치심을 동반합니다. 이 감정에 직면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입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셰익스피어 무덤을 가 본적이 있습니다. 그의 시신은 일반적으로 파는 2미터가 아닌 5.5미터의 땅속에 묻혀져 아무도 파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도 가끔 자신의 실패 의식을 그처럼 파묻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학생일 때 자신은 반장 선거에 나가고 싶었지만, 떨어질까 무서워서 출마하지 못한 경험을 가졌습니다. 대학 때도 무슨 위원의 자리에 도전했지만 이루지 못했습니다. 항상 우승하고 싶었던 테니스 결승전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선수와 붙었지만 졌습니다. 더나아가 원하는 직장에 원서를 냈었지만 떨어진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런 실패의 아픔을 너무 예리하게 느꼈기 때문에 마음에 파묻었을 뿐, 거기서 뭔가를 배우지 못하고, 뒷걸음친 것을 후회스러워 하였습니다. 이런 자세는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합니다. 원통하거나 어려움에 닥쳐 낙심될 때, 우리는 먼저 주님 앞에 우리 마음을 토하고 애통의 시로 기도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시 1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