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신뢰와 두려움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을 것입니다. 신뢰와 두려움은 인간의 마음을 점령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 왔으며, 결국 둘 중 하나가 이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반추해 보면 우리를 배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잡아 두는 것은 두려움이라는 요소가 가장 크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이란 무엇이겠습나까? 두려움은 위험이 가까이 있으니 그것에 대비해 뭔가 해야 한다는 내면적인 경고입니다. 이것은 행동을 유발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는 동기를 부여할 정도로 충분한 불쾌감을 야기합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도망가도록 혹은 싸우도록 준비시킵니다. 그 결과 상황에 따라 우리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삶에 파괴자의 역할을 합니다. 특히 두려움의 특별한 형태는 걱정으로 나타납니다. 걱정은 여장을 풀고 장기 숙박을 하는 두려움입니다. 걱정은 결코 스스로 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쫓아내야만 합니다. 미국 생리학 협회는 수많은 연구 결과를 모아 요약하다가 한 가지 모순을 발견하였습니다. 높은 자존감을 가질 만한 수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 중 매우 많은 사람들이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성취합니다. 재능이 있고, 남에게 호감을 주고, 좋은 환경을 가졌지만 자존감의 문제와 씨름합니다. 많은 것을 성취하고 분명히 성공한 사람조차 종종 자기 회의와 열등감에 빠지고 맙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 결과는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의 태도에 따라 자존감이 결정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정면 대응하는가, 아니면 피하고 겁내고 도망가 숨는가의 여부에 따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어렵고 힘든 상황이 올 때 정면 대응하는 사람은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내가 어려운 일을 했어. 도전을 감당했어.” 하며 밀려오는 기쁨을 경험합니다.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망을 가 숨는 사람은 비록 결과는 좋을지라도 그 내면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사실 나는 겁먹고 꽁무니를 뺐어. 어려운 일을 하지 않고 쉬운 길을 택했어.” 회피는 내면의 자신감과 자존감을 손상시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진실한 칭찬을 받더라도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면에서 이미 자신의 가치를 절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진실을 안다면 나를 칭찬하지 않을 거요. 당신은 내가 보여 준 모습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전을 받아들인 사람은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신하고 성장합니다. 만약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구는 불한당(?)이 있다면 그 사람과 대면하십시오. 어렵거나 재미없을 것 같아서 두려워하고 미룬 업무에 손을 대시기 바랍니다. 평소 비위를 맞추거나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기에 급급했을 사람에게 당당히 여러분의 진정한 의견을 말하십시오. 당신이 미뤄 온 어려운 결정의 책임을 떠맡으십시오. 또 당신이 회피해 온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 바랍니다. 당신이 숨기려 한 죄나 인격의 흠을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인정하면서, 변화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간구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내면은 더 강해 질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
만약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산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잠재성을 결코 실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장은 항상 위기를 수반하고 위기는 항상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존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친구 중 한 명에 관해 안타까운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그 친구는 분명 재능이 있는 예술가요 탁월한 작가였지만 자신을 소모시키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능력과는 상관도 없는 일이고, 그 또한 전혀 그 일에 애정이 없었습니다. 그저 출퇴근 기록부만 찍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계속 거기에 머무르고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새로운 것을 시도했는데 잘되지 않는다면? 필요한 만큼 돈을 충분히 벌 수 없다면? 사람들이 그를 어리석다고 생각하면? 알고 보니 그 재능도 별 대수롭지 않다고 변명된다면? 더 나아가 그는 성공마저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될 것이라는 철통 같은 보장을 손에 넣을 때까지, 모든 위험 요소가 제거될 때까지, 그는 있던 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마침내 정체될 것이라고 판단되었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그 친구는 결국 그렇게 일하다가 은퇴하여, 여생 동안 최대한 편한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일을 결코 하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실 때 계획하신 존재가 결코 되지 못할 것입니다. 두려움의 대가로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대가로 치러야 합니다. 그것은 너무 비싼 값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제대로 된 믿음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한편 두려움은 우리의 기쁨을 파괴합니다. 두려움을 넘어서야 환희를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굴복하면 기쁨이 소멸됩니다. 늘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좋고 상상력이 풍부한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면서 살면 그 두려움은 지금 나의 삶을 빼앗아 갈 힘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진정으로 신뢰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자신의 아들이 열 살되었을 때를 적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열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패러세일링에 갔습니다. 보트를 운전하는 사람은 120, 180, 240 미터까지 올려 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 위로 얼마나 높이 날고 싶으세요?” 그가 물었습니다. 가격이 비싸서 목사님은 120미터 높이로 조종해 달라고 하였지만, 아들은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아들이 두려움에서 자유롭기를 원해서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아들은 몇 분 동안 생각하더니 결정을 내렸습니다. “ 240미터까지 올라가겠어요. 처음에는 무섭겠지만 비행 시간은 몇 분밖에 안될 것이고 그 경험은 영원히 제 것이니까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때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한 경험은 영원할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것을 잘 증거하여 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창39:20-22).
오토버그 목사님의 딸이 어릴 때 별명은 ‘메이메이’였습니다. 그녀가 매우 어릴 적에 툭하면 하는 말은 “메이메이 혼자 할 거야!”였다고 합니다. 걸음마를 떼려 하다가 넘어져서 부모가 다가와 도와주려 하면, 그 아이는 손을 흘들며 “메이메이 혼자 할 거야”라고 말하였고, 조금 더 자라서 자기의 작은 자전거를 타다가 부딪쳐 넘어졌을 때, 부모가 도와주려 하면 “메이메이 혼자 할 거야”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실패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두 살짜리 아이는 걸으려다가 넘어져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같으니! 나는 너무 어리석고 서툴렀어. 난 걸을 수 없나 봐. 내가 넘어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시 그런 창피한 경험을 하느니 평생 기어다니겠어.” 아이는 걸을 때까지 불안정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참아 냅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은 넘어지는 것을 더욱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분야에서 걷기를 배우느니 차라리 움직이길 거부합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사셨다고 공식적인 기록이 있는 분은 122살에 돌아가신 프랑스의 잔 루이즈 칼망(1875-1997) 할머니이십니다. 그러나 이분은 100살이 될 때 펜싱을 비로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물 위로 걷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그의 믿음만큼 불안하였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더욱 신뢰하는 모험을 하기 위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려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패하였다고 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먼저 구해주고 온유하게 문제를 짚어 주셨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런 구원과 가벼운 책망은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와,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사랑 속에는 진리와 배려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14: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