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요셉처럼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수 읽을 수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상태를 얼굴에 드러냅니다. 친구, 가족, 이웃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는지 주목하고 함께 염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야만 합니다. 역설적입니다만, 자기 몰두는 자기 파괴와 외로움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동료 죄수들에 대한 배려를 질문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그들은 심란한 꿈을 꾸었다고 요셉에게 설명합니다. 요셉은 도움을 줄 순간을 포착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데 내게 고하소서.” 술 맡은 관원이 포도 나무와 포도 송이에 관한 꿈을 이야기 하자 요셉은 사흘 안에 전직을 회복할 것을 알려 줍니다. 이에 반해 떡 굽는 관원의 꿈 이야기를 듣자 요셉은 사흘 안에 사형 집행 당해 죽을 것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술 맡은 관원에게 자신의 석방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의 말처럼 사흘이 지나 석방이 됬지만 이내 요셉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요셉은 실망을 씹으면서 2년을 더 감옥에서 지내게 됩니다. 도대체 요셉의 고난은 언제 끝날 것으로 생각됩니까?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와 같이 어두움 가운데 하염없는 인내는 우리의 완전을 이룩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보다 훨씬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7-19).
요셉은 술 맡은 관원이 감옥에서 나간 뒤 기억함을 받지 못하고 2년이나 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종종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마 요셉 역시 그런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겪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눈여겨 보시는 중요한 대목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여부입니다. 요셉의 경우 하나님은 아직 할 일을 마치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최고의 날들, 즉 이집트의 국무 총리, 리더로서의 영향력, 아버지와의 재회, 형들과의 화해는 고난의 폭풍 후에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셉은 그런 것들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통상 신자들이 괴로워 하는 주된 이유는 그들의 앞날이 창창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육체 안’의 삶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 있는 것은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환경이나 타인이 나의 인격을 또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나의 삶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시기하는 형들도, 어리석은 아버지도,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도, 잘 잊어버리는 술 관원이나 거만한 파라오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원한 누림을 가질 것이고, 현 생애에서는 어느 상황에 우리가 처해 있든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항상 믿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는 나쁜 소식이 결말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사실과 전혀 다름은 요셉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여러분의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 손에 던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책임지시고 하나 하나 풀어가시는 것을 목격할 것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성경에 가장 자주 나오는 명령은 무엇일까요? “더 많이 사랑하라”는 아닙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핵심일 수 있지만, 가장 자주 하신 명령은 아닙니다. “교만하지 말라”나 “겸손하라”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어떤 명령보다 자주 등장하는 하나의 명령, 하나님이 가장 빈번히 반복하시는 지시는 이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놀라지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나를 신뢰하라, 두려워 말라 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사실 두려움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의 목록에 들어 있지도 않습니다. 두려워하기 때문에 교회의 징계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다른 어떤 말씀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그렇게 많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감정적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려는 유혹을 받는 첫 번째 이유가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이 배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 명령은 항상 필요합니다. 로이드 오길비는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구절이 총 366번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1년에 365일에서 윤년까지 위한 개수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범브린트 목사님 역시 “두려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꼭 366번 성경에 나오는 것을 투옥 초기에 발견하고 그 힘으로 15년 간의 루마니아 감옥 생활을 견디었습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만, 거의 모든 경우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으로 요청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시고 자신의 우편에 앉히신 위대한 능력입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9).
두려움과 신뢰 간의 싸움을 잘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세 살난 여자 아이가 수영장 가에 서 있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수영장 안에서 팔을 활짝 펴고 말합니다. “애야, 펄쩍 뛰어. 겁내지마. 아빠가 있잖니. 아빠가 잡아 줄게. 어서 뛰어들어.” 그 순간 아이는 갈등합니다. 마음 한쪽에서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외칩니다. 물은 깊고 차갑고 위험합니다. 전에 이런 일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수영도 전혀 할 줄 모릅니다. 뭔가 잘못된다면 어쩌나?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이 밀려들어 옵니다. 그러나 아빠가 물속에 계십니다. 아빠는 그녀보다 크고 강하며 믿음직하였습니다. 아빠는 자신 있어 보입니다. 신뢰는 말합니다. “뛰어들어!” 두려움은 말합니다 “안돼!” 그러나 평생 수영장 가에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결정해야만 합니다. 결정하려면 두려움이나 자신감 이상이 필요합니다. 아이의 내면에는 작은 의지의 조각이 있고, 그것으로 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만일 아이가 뛰어내리기로 결정한다면 자신을 붙잡아 주는 아빠의 능력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번에도 또 뛰어내릴 가능성이 커질 것입니다. 물이 덜 무서워질 것입니다. 반면 뛰어내리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아빠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기회를 잃고 맙니다. 다음번에도 더욱더 안전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두려움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만, 저는 신뢰가 두려움보다 더 크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2-33절에 적혀 있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이야기에서 두려움(무서움)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각 한 번씩 등장하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역시 주어집니다. 각 경우를 생각해 보면서 두려움의 본질을 파헤쳐 보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마태복음 14장 22-33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두려움은 두 번 등장합니다. 먼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그들이 폭풍속에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오해한데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풍랑에 괴로움을 당하는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데일 브루너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용기를 내거라! 내가 있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단지 자신을 알리시는 것(It’s me)이 아니다. ‘스스로 계신(I AM)’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계시인 것이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너를 사랑하였은즉,” 또 다른 두려움은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든 후에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칠흙같이 어두운 밤 풍랑이 거세게 이는 바다 위로 뛰어들어 걷기 시작하였을 때 한동안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람을 인식하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려움이 엄습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 상황의 주관자시라는 확신을 잃었습니다. 베드로는 물속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물속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걱정과 염려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그렇게 자주 말씀하시는 이유는, 두려움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를 가장 빨리 침몰시키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훼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 바로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12:3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