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9. 10. 21 – 25

죄는 매우 끈질긴 추격자입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요셉처럼 죄에서부터 도망가서 곧장 하나님께 달려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요셉은 자신의 믿음과 가치에 굳게 섰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고용주에게 충실했고 유혹을 정면으로 대결하여 이겨 냈으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켜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보상해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때때로 보상의 시기와 방법이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보디발의 부인은 요셉의 옷을 손에 들고 서 있으며, 그것은 요셉을 불리하게 만든 증거로 전환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아내의 고소를 듣고 분노했고 요셉을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나쁜 소식들이 더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소식 가운데 익숙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하나님은 요셉에게서 감옥행을 면제시켜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감옥에서 요셉과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요셉은 주님과 함께 고난을 겪는 쪽을 선택하였지, 모든 것을 갖는다 하더라도 주님이 거기에 없다면 버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믿음을 본받아야만 합니다. 그런 믿음을 400년 뒤 모세가 본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4-26).

성경을 보면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을 만난 곳은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이들은 호렙 산 꼭대기에서 혼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변모도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요나나 사도 바울의 경우 같이 어쩌다 바다 한가운데서 나타나신 적도 있습니다. 바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위험한 폭풍과 사악한 세력의 장소로 여겨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고양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가장 약하고 두려워서 낮아졌을 때 오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가 폭풍 가운데 있을 때, 두려워 할 때 오시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려우면 우리의 사고가 굳어지게 마련입니다. 폭풍치던 날 밤 갈릴리 호수에서 항해하는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께서 찾아오신 것과 같이, 감옥이라는 두려움의 장소에 떨어진 요셉의 경우에도 그러하셨습니다. 주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게 되었고 죄수들의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게 되자,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요셉이 성실하였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간수장이 요셉에게 맡긴 모든 일이 제대로 처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감옥에는 많은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그럴 경우 간수장은 책임을 져야만 하나, 유독 요셉에게만 일을 맡기면 아무런 불상사도 발생하지 않고 평화롭게 모든 일이 처리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사 우리 모든 일에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나타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16:3).

그러던 중 요셉이 관리하던 감옥에 떡 굽는 관원과 술 맡은 관원이 죄수로 들어왔습니다. 이들을 시중들던 요셉이 어느 날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요셉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이들에게 어떤 이유인지를 물었습니다. 사실 요셉과 이들은 보디발의 집에 있는 왕의 죄수를 다루는 감옥에 함께 갇혀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망스러운 사정에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도 실망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고 자신의 상처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세계가 좁아지고 오직 자신의 고통만 중요하게 여길 뿐입니다. 타인에 대한 마음이 무감각하게 굳어지고 의미를 상실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만 이렇게 어그러진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죄수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주목하고, 안부를 묻고, 진정한 관심을 표현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가능합니다. 이어령 선생의 최근 조선일보 인터뷰 중 한 대목입니다.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7-18)

박효진 장로가 쓴 ‘하나님이 고치질 못할 사람은 없다’에는 사형수들에 관해서도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개화된 오늘날도 교도관들이 교도소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수 천년 전 이집트의 감옥에서 간수장의 업무를 위임받은 죄수 요셉은 일이 막중하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감옥에 갇힌 일이 모함 때문에 억울하게 발생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분해서 속을 삭이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타인의 안녕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만큼 요셉의 신앙이 성숙해 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주 넘어지는 곳은 바닥이 아니라 산꼭대기입니다. 혜택받고 부러움을 사는 위치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무감각해 지고, 자신의 그 자리를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에게 몰두하게 되는 경향을 사람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폭풍을 겪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총리가 되기 전에 노예로, 죄수로 산 것은 우연이나 사고가 아닙니다. 인생의 폭풍은 다른 것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 가르침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거나 타인의 처지를 공감하는 능력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공감능력 없이 타인과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들고 일어난 파리 시민들에게 프랑스 왕비 마리 앙트와네뜨의 말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백성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나요?” “빵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아요?” 결국 마리 앙트와네뜨는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다 잡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약1:12).

스코트 펙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인생은 문제를 만나고 해결하는 전체 과정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 우리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자라는 것은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 이런 이유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환영하며 문제의 고통도 환영하는 법을 배운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결코 형들과 공동체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역경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채색 옷을 입는 한, 요셉은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하나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요셉은 채색 옷이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의 엄청난 꿈들과 높은 위상이 형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감옥 안에서 그는 알 수 있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요셉에게 긍휼의 눈을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정의가 없으면 사회는 범죄로 무너집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의만 존재하고 구체적인 인간의 사정을 배려 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각박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반드시 정의와 사랑이 균형잡혀야 하며, 경건한 사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지혜를 갖춘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할 줄 알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역경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난 은총 중의 하나인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요셉은 채색 옷이 벗겨지고 노예와 죄인의 처지에 놓이면서, 거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이 요셉으로 하여금 총리에 올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능력이었음을 우리는 모두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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