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케냐의 고아원에 많은 약품을 기부하도록 만든 밥은 다시 방문 요청을 받고 케냐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 고아원은 케냐에서 가장 큰 고아원이었기 때문에 대통령도 축하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대통령은 밥에게 수도 나이로비를 관광시켜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관광 도중에 그들은 한 감옥을 보았습니다. 밥은 그곳에 있는 죄수들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정치범입니다.” “이런 처사는 옳지 않습니다. 그들을 풀어 주셔야 합니다.” 밥은 쾌활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밥은 관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국무성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신이 밥입니까?” “예” “최근 케냐에 가셨습니까?” “예” “대통령에게 정치범들에 대해 언급하셨습니까?”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들을 풀어 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국무성 관리는 자신들이 그 죄수들을 석방시키려 수년 간 노력했지만 허사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정규 외교 채널과 정치적 수단은 막다른 골목에 닿았는데 이제 죄수들이 석방되었고, 국무성은 그것이 밥 덕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사를 표하려고 전화했던 것입니다. 몇 달 후, 케냐 대통령이 밥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정부를 개편하고 새로운 각료들을 선출하려는데, 그 중요한 업무를 하는 사흘 동안 밥이 와서 기도해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와는 전혀 관계도 없는 밥은 다시 한 번 비행기를 타고 케냐로 날아가, 그 나라의 리더가 정부 각료를 선택할 때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간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밥이 믿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먼저 기도하고 그 나라가 도래하도록 일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삶의 모든 부분을 주님이 채워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16:24).

그렉 르보이라는 분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만 약속하셨습니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행복할 것, 두려움이 전혀 없을 것, 항상 문제에 처하리라는 것.” 폭풍우 치는 날 배 밖으로 나간 베드로는 물 위를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바야흐로 베드로는 영웅이 되려는 시점에 있었습니다. 배 밖으로 나가는 어려움은 이미 겪었습니다. 그는 물 위로 걷는 일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습니다. 폭풍이라는 현실을 바라본 것입니다. 처음의 열정이 가라앉자 폭풍이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람을 본 것입니다.” 마태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한동안 믿음 안에서 걷던 사람이라도 폭풍 때문에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바람을 보았고 무서워하여 물 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전력투구해야 할 임무를 맡거나 새로운 가정을 꾸미는 큰 모험을 시작할 때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희망과 소망이 가득합니다. 배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곧 영웅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해 낼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현실이 다가옵니다. 바람을 보게 되며, 장애물에 직면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갈등이 우리의 사기를 꺾고 계획이 틀어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굴복하여 패배하나, 어떤 사람들은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고, 결국 생존뿐만 아니라 성장하기까지 합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낼까요?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18:10)

“폭풍에 직면하면 어떻게 해야 견딜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오토버그 목사님은 몇 가지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먼저, 이겨 내는 사람은 자신을 수동적인 피해자로 보기보다, 자신이 운명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계속 자각한다. 두 번째로 이겨 내는 사람은 자기 가치를 배반하지 않는 용기가 크다. 세 번째로 이겨 내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 속에서 목적과 의미를 발견한다 라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물 위로 걷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저 강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특성 하나 하나는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여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형적인 분이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요셉은 17세에 형제들에게 잡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20량에 넘겨졌습니다. 그 후 420킬로 남쪽으로 떨어진 애굽으로 끌려가 결국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은 거기서도 굴하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갔으며, 하나님께서 범사에 그와 함께 하심으로 보디발의 가정총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자 모함을 받았고 노예보다 더 못한 죄수의 신세가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여기에서도 신실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섭리가 또 작동하여 감옥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만 백성의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 이런 요셉의 이야기를 가지고 인생의 폭풍을 이겨내는 요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7-19).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구를 정말 좋아하는 두 친구가 있었는데, 누구든 먼저 죽은 사람이 돌아와서 다른 사람에게 천국에 야구가 있는지 없는지 알려 주기로 했습니다. 그 두 친구 중 한 사람이 먼저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친구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좋은 소식은 천국에 야구가 있다는 거야. 나쁜 소식은 네가 이번 금요일에 투구할 거라는 거야.” 이렇게 우리 인생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반복되어 이루어지는 이야기이며, 요셉의 인생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이 사랑받는 것을 싫어했다” 이것은 나쁜 소식입니다. “요셉의 아버지가 그에게 아름다운 겉옷을 주었다”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형들이 그 옷을 찢고, 피를 묻혀 그가 죽은 것처럼 가장하고, 먼 나라에 노예로 팔았다” 이것은 매우 나쁜 소식입니다.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린 요셉의 인생 또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계속 번갈아 가면서 나타나면서 감옥에 2년 이상 갇혀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끝이 궁금합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반복되는 모든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반전입니다어떻게 끝나는가? 나쁜 소식으로 끝나면, 그 전의 모든 좋은 소식은 헛된 희망만 불러일으킨 잔인한 익살일 뿐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으로 끝나면 이야기 전체가 만회되고, 모든 나쁜 소식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살기에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결국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요셉이 노예로 팔리기 전 청소년 시절에 채색 옷을 입었습니다. 채색 옷은 그가 가장 총애받는, 선택된 아들임을 말해 줍니다. 의심의 여지없는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 삶을 약속하는 징표였습니다. 형들이 방에 들어오면 아버지는 양 떼가 어떤지, 일은 잘했는지 물었지만, 요셉이 방에 들어오면 아버지의 얼굴은 환해지고 눈에서는 빛이 났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아버지가 자랑하고 다니는 아들이었습니다. 백 가지도 넘는 방법(대부분의 부모는 인식하지도 못하지만 어린이들은 십 리 밖에서도 볼 수 있음)으로, 야곱은 요셉을 편애하였습니다. 채색 옷은 그것이 가장 확실한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겉옷이 가족의 문제로 불거진 것은 단지 비싸고 좋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의복은 신분을 표현했습니다. 채색 옷은 요셉이 아버지의 귀염둥이라는 징표였습니다. 노골적인 편애를 공개적으로, 눈에 보이게,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그 옷을 입을 때마다 형들은 어뗳게 느껴졌겠습니까? 자신들은 결코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채색 옷은 가족의 수의(壽衣)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형들은 폭발하였습니다. 요셉의 채색 옷을 벗겨 찢은 후 그를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요셉의 인생의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우연히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가난한 어느 집에서 아들 중 한 명에게만 그것도 오직 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을 대어주었다고 합니다. 형제들은 그런 불공평을 평생 기억하고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 각자를 편애하지 않고 사랑하도록 각고의 노력을 하여야만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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