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에게 한 달란트를 지급받은 세 번째 종은 그 엄청난 선물을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토버그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의 대학 시절, 한 친구는 자신의 어떤 면이 그와의 관계를 어렵게 하는지 지적해 주었습니다.그러나 자신은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에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도움을 구하는 대신, 오히려 그와 멀어지려고 뒷걸음질쳤다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는 “흥, 그렇게 말한다 이거지…. 난 너와 더 거리를 두고 의례적으로 대할 테니까. 네가 그 애기를 꺼낸 것을 후회하길 바래”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오토버그 목사님은 좋은 친구가 될 뻔한 사람도, 성장할 기회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진실을 직면하길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자신은 진실을 묻어 두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세 번째 종은 마음 속에 주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수탁받은 한 달란트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하였고 그래서 그 당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땅 속에 묻어버렸던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두 가지의 동기로 자신의 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합니다. 하나는 탐욕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전자는 우상숭배와 같으므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노력하고, 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그분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스’라는 말씀을 붙잡고 현실을 직면하면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12:6-7).
달란트 비유를 통해 주님이 주인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두 번째 원칙은 “그분은 회계 결산을 하는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은 바로 이 원칙을 망각하였습니다. 그는 선물을 준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라는 말로 주님은 그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교묘하게 발뺌하여 자기 잘못의 결과를 벗어나려고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교통 벌칙금을 내지 않으려고 경찰에게 변명한 적은 없습니까? 선생님을, 상사를, 혹은 배우자를 서툰 변명으로 속이려 한 적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모두 그분 앞에 서야만 합니다. 어떤 변명이나 거짓말도 소용없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지만, 결산 보고에 대해서는 칼 같으십니다. 우리는 그 보좌 앞에서 잔꾀를 부릴 수 없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사실을 잊는지 모릅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배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면서 괜히 외부 환경을 탓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돌아오고 계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회계하실 것입니다. “내가 준 것으로 너는 무엇을 했느냐?” 그분은 각 개인에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종은 이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은사를 묻어 버린 것을 합리화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9-10)
달란트 비유에서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을 등장시켜 이야기 하신 것은 주목할만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반응과 기쁘시게 못하는 반응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은 두 명만 등장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즉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말입니다.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은사의 양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도록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적인 삶에서 은사는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같은 은사라고 하여도 그 양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돋보이고 칭찬받는 은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은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하십니다. 그것은 달란트 비유에서 첫 번째 종이 두 번째 종보다 훨씬 큰 은사를 받았지만, 주인이 둘을 똑같이 대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달란트가 다섯이냐, 둘이냐, 아니면 한 개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은사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마음을 단호하게 뿌리쳐야 합니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앞설 때는 교만과 거짓된 우월감에 빠지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뒤질 때는 비참함에 빠지게 됩니다. 최악의 경우, 은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내게 주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가치 절하하여 땅에 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롭고 선하십니다.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은사를 주셔서 당신의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파악하고, 개발하고, 투자하고, 귀하게 여기고, 누려야 합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은 주인에게 또 다른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보물을 땅에 묻게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주인의 부름에 불순종하게 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목회를 하면서 한 친구가 자신의 생활에 관해 물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진실을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그에게 다시 가서 거짓말을 밝혔는데,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합니다. 그 일을 돌이켜 보면서 목사님은 자문을 했습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했지?” 그것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진실을 말하면 그가 어떻게 생각하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부추킵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일으키는 것은 거짓말뿐만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할 때 우리는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담합니다. 왜냐하면 나만 소외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그렇게 난리법썩을 떨었던 것 아닙니까? 리빙스턴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적대적인 부족들이 화살을 겨누고 있는 중에 조용히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리빙스턴은 마음에 “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가장 엄숙하신 신사께서 하신 말씀임을 기억하면서 안전하게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늘 함께 하시는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세 번째 종은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의 이야기에서 우리를 가장 일깨우는 측면입니다. 그는 훔치거나 횡령하거나 착복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은사를 땅에 묻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악하고 게으르다”고 심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나태’를 죽음에 이르는 일곱 죄악 중 하나로 꼽을 만큼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솔로몬 슈멜은 나태가 영적인 죄이며, 일곱 죄악 중 그리스나 로마의 악의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은 유일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행동과 같습니다. 영적 죄악으로서의 나태는 신체적 게으름과 다릅니다. 그것은 분주함과 공존할 수 있습니다. 나태는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미, 목적, 희망의 상실이 타인의 복리에 대한 무관심과 결부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길 때의 열심과 기쁨의 반대말입니다. 세 번째 종의 두려움은 결국 나태로 이끌어 그의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두게 만들고,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 최소한 은행에라도 맡겨 원금과 이자가 주인에게 돌아가도록 관리하지를 않았습니다. 그의 나태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종은 그 달란트를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데 던져졌습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일생에 대한 비유입니다.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나중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매우 중요한 심판 대상이 됨을 인식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