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가운데 얻는 지혜와 안전

조선일보 5월 15일자 기사입니다.

“정치 계산따라 脫원전한 벨기에, 만성 전력난”

“”에너지 전환 정책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팩트와 숫자’를 바탕으로 치열한 토론 끝에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 없이 정치적으로 탈(脫)원전을 결정했던 벨기에는 에너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14일 ALC ‘에너지정책과 민주주의 원칙’ 세션에서 연설한 이브 르테름 전 벨기에 총리가 각국의 에너지 정책을 설명하며 한 말이다. 그는 “신재생에너지는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를 감당하기엔 발전 효율이 낮기 때문에 원전의 필요성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션 후 인터뷰에서는 “탈원전을 추진 중인 한국 정부가 벨기에 같은 상황에 놓이는 것을 경계하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이 벨기에처럼 원전을 대체할 에너지 생산 계획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대규모 전력 부족 사태를 겪을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다.….. 그는 “재생에너지 확대는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방향이지만, 어쩔 수 없이 원전을 써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대기오염의 주범인 석탄과 천연가스를 무한정 뗄 수 없다면 대안은 원전뿐”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탈원전에 대해서는 “부디 객관적인 자료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확실한 대안을 마련해 둔 다음, 탈원전에 착수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에서 배우고, 평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누구의 경험도 배우지 않는다.” 라는 경귀가 있습니다. 우리 대한 민국은 마땅히 벨기에가 20년 동안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원전의 정책을 결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현명한 국가가 될 수 있고, 그 국민은 지혜로운 국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이 지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살아가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 자연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까지 설정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혜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법칙까지 지키면서 삶을 영위하고, 진로를 개척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거나,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들은 모두 패가하는 형제(잠18:8-9)라고 잠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세상의 지혜나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나 모두 같습니다. 그러면 이 양자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위태로울 때, 환난을 당할 때 아주 안전한 망대가 있습니다. 그 망대는 주님이십니다. 어려움을 당하여 그것을 타개하여 나갈 지혜가 부족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때 당황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 다니거나, 절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믿음에 굳게 서서 담대하게 주님께 바로 달려가는 지혜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또 구하는 자들에게 풍부한 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그리고 그 가장 어려울 때가 주님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할 때 대적이 능히 당할 수도 없는 지혜를 주시겠다는 특별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핍박과 박해를 당할 때 여러분은 먼저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기 훌륭하게 약속을 지키신 주님을 증거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루마니아에서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1959년 1월 재차 체포되어 두 번째 감옥에 갇힌 지 4년이 지난1963년의 일입니다. 목사님은 이때 병이 악화되어 병감에 이송되었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다 모이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모든 죄수들은 큰 마당에 모였습니다.거기서 한 시간 동안 서서 몇몇 죄수들의 연극을 구경하였습니다. 그 연극은 기독교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으로, 사령관 주위에 앉아 있는 장교들이 손뼉을 치거나 웃을 때마다 관중들도 따라하였습니다. 연극이 끝나자 사령관 알렉산드레스쿠는 거칠고 큰 목소리로 연극에 대해 가부간의 논평을 요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올라가서 종교를 비판하는 표어들을 외워댔으며, 그들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올 때, 몇 사람은 범브란트 목사님을 껴안고 “이것이 끝날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을 정도로 분위기는 엄중하였습니다. 사령관은 드디어 목사님의 이름을 불렀고, 목사님은 10여년 전에 열렸던 종교 회의에서 아내가 자신에게 “가서, 예수님의 얼굴에서 이 수치를 씻어 주세요”라고 하던 말이 기억되었습니다. 그때도 목사님은 연단에 올라가 체포를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목사님의 얼굴은 많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수백의 눈동자들은 모두 목사님에게 집중하여 “저 사람도 공산주의를 찬양할 것인가?”하고 묻는 듯 하였습니다.알렉산드레스쿠 중령이 “빨리 말해!”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지금 주일 아침입니다. 우리 아내들과 가족들이 교회나 집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신 이 연극을 보았습니다.”  죄수들의 눈에서는 가족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이 고였습니다. “ 여기 계신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쁘게 말씀하셨는데, 여러분들이 그분을 나쁘게 말할 무슨 건덕지가 있습니까? 예수님 역시 무산층으로 목수였습니다. 여러분은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벌써 몇 백 년 전에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유층들을 비난하셨는데, 예수님도 돈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회초리로 쫓아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공산주의를 원한다면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모든 소유를 같이 나누어 쓰는 공동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여러분들이 가난한 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미 성처녀 마리아가 부른 성모가에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부자보다 높이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모든 좋은 것이 다 기독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모든 무산층이 단결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무산층 중에서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고,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이고,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들인데 우리가 서로를 조롱한다면 우리들은 단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옳지 않습니다.” 이어 목사님은 죄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을 재생시키는 데는 기독교가 가장 이상적인 종교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서문을 인용한 다음, 누구든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에 대해 죄를 지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알렉산드레스쿠스 중령은 의자에서 몸을 이리 저리 움직이고 구두발로 땅을 차기는 했어도, 목사님의 말을 중단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죄수들 역시 조용했으며, 감동을 받고 있음을 알아채자 목사님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도 잊고,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에 대해 공공연히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시험이 없는 학교나, 만들어 낸 물건을 자세히 검사 하지 않는 공장이 있다는 소리를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과 우리 동료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뒤 중령을 바라보며 “알렉산드레스쿠 중령님 당신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는 목사님의 말을 듣고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랑을 가르치셨으며, 영원한 삶을 주시는가에 대해 언급하고는 말을 마치자,죄수들에게서 갑자기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습니다. 저항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죄로 목사님은 병감이라고 하는 성역에서 쫓겨나, 다시 신부들의 감방으로 옮겨졌을 뿐 아무런 해도 당하지 않았습니다.(리챠드 범브란트, 하나님의 지하운동(하), 16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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