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뒤 갈릴리 바다 위로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은 폭풍 속에서 여간 곤란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 폭풍은 예수님이 새벽 3시경 격랑을 치는 물결을 밟고 오셔서 배에 오른 뒤에야 비로서 잔잔해졌고, 제자들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배에 오르시기 전에 바람을 잔잔하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림을 배워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같습니다. 만약 물 위를 걷는 능력을 받으려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주님이 폭풍을 사라지게 하실 때까지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믿음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보여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약점을 완전히 노출시키며 맡기는 것입니다. 존 오트버그 목사님은 매우 설교와 강의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소명이었고 기쁨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던 35년 전 어느 주일 아침에 설교를 시작한 지 10분쯤 되었을 때 설교 도중 기절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그후 1년이 지나 다시 그 교회에서 설교했을 때 10분이 지나 또 다시 기절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긴장을 풀라고 조언을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하는 것이 두려워졌기에, 그 두려움을 없애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했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이사야40:30-31을 기억하고 그 주일에 다시 설교를 하였고 끝까지 설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후 목사님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약간 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토버그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기절할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이따금 섬광처럼 지나갈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고 그런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곤 하였습니다.이런 태도는 적어도 목사님에게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연습이었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30-31).
지금도 주님은 베드로처럼 배 밖으로 나올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왜 우리는 배 밖으로 나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의 유일한 길이요, 참된 믿음을 개발시켜주며, 소명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일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모험심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유를 능가하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물은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물은 어둡고 차갑고 위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 안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배 밖으로 나간 이유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언급합니다.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당신에게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하고는, 배 밖으로 나가 “예수께로 갔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와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전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자신들의 운명을 그분 손에 맡길 수 있었다는 것을 전보다 더 잘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홀로 물결을 밟으시는 분이신 것을 알고 그분께 절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마지막으로 배 밖으로 나간 것은 언제였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모험적이고도 심오한 믿음을 성장시키는 방법은 배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훌륭한 강의를 듣거나 좋은 책을 읽는 것보다, 하나님은 현실 세상의 도전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능력을 개발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5-47).
우리는 안락한 세상을 추구합니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며 통제 가능한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지나가시며’모든 것을 뒤흔드십니다. 배 밖으로 나오라는 부르심에는 위기, 기회, 실패, 두려움, 고통,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벅차 보이는 과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성장시키고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려면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도 물 위를 걸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나를 명하셔서 당신께로 오라 말씀하소서”라고 말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 거절과 희생을 의미할지라도, 봉사와 대가를 의미할지라도, 심지어 실패의 가능성을 의미할지라도 모험을 감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가라앉고 대로는 솟구쳐 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은 배 안에 머무른 지 오래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푹신한 의자에 안전 장치도 있는 매우 좋은 배 안에 있기 때문에,아무리 폭풍이 쳐도 절대 뱃멀미를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배에 있는 것이 아주 편안하고 즐거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지나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배 밖으로 나갈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배 밖으로 나간다면 문제에 직면할 것입니다. 밖에는 폭풍이 이는데 당신의 믿음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험에는 항상 실패의 가능성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여러분이 배에서 나간다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첫째, 실패하면 예수님이 구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은 2천년 당시 베드로를 구하신 것과 같이 21세기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따금 한 번씩 물 위를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믿음의 일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선 배 밖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4:8).
존 오토버그 목사님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는 어머니께 전화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다락에서 플로렌스의 물건들을 살펴보다가 오래된 접시들이 들어 있는 상자를 발견했으며, 먼저 며느리에게 보여준 후 관심이 없다면, 구세군에 기증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할아버지 댁에 갔습니다. 평범한 식기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상자를 열어보니, 여태껏 본 것 중에서 가장 정교한 도자기들이었습니다. 각 접시에는 물망초 무늬가 그려져 있었고, 진주층을 박아넣어 장식되어 있는 컵들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컵과 접시에는 금테가 둘려 있었습니다. 그 식기들은 제2차 대전 중에 파괴된 바이에른 지방의 공장에서 수공으로 제조된 것이라 이제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시집 오신 지 20년 동안 그 식기들을 한번도 보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도 모르셨습니다.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할머니는 매우 젊었을 때부터 졸업이나 생일이 되면 이 도자기 식기를 선물로 하나씩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모든 것들입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식기를 한 점씩 선물 받으실 때마다, 특별한 경우에 쓰려고 조심스럽게 상자에 넣어 다락에 보관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할머니가 생각하는 특별한 경우가 일어나지 않아, 할머니는 그 훌륭한 선물을 다시 열어 보지도 못하고, 사용하지도 않으신 채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제 그 식기들은 어머니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될 수 있으면 모든 때에 그 식기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게 식기들은 마침내 상자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은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마태복음에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숨겨두었다가 그것을 다시 내밀자 주인은 그를 악한 종이라고 여겨 한 달란트를 빼앗아 10달란트를 가진 종에게 주게 한 뒤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25:29-30).
선물을 받은 사람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중 하나는 “이 선물이 너무 소중하니 함부로 사용할 수 없어”라는 방법입니다. 이를 따르는 사람들은 선물이 상자 밖으로 꺼내지면 부서지거나 더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잘못 사용되기도 합니다. 괜히 꺼내서 보여 줬다가 사람들에게 무시받을 수도 있습니다. 선물을 상자 밖으로 꺼내는 것은 항상 위험 부담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선물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해야 해”라는 방법입니다. 이를 따르는 사람들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선물이 상자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결코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선물을 상자 안에 넣어 두는 것은 준 사람의 소망을 좌절시키는 것입니다. 뜯어보지 않은 선물은 비극입니다. 여러분도 선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하나님이 당신에게 무슨 은사를 주셨는지, 무엇을 하도록 당신을 부르셨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가차없이 자기 평가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선물과 함께 그 선물을 뜯어서 사용할지 그냥 보관할지 선택해야 할 권리도 받았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두 방법 중 무엇을 따르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두 번째 방법을, 다른 제자들은 첫 번째 방법을 택했습니다. 어떤 차이가 발생하였을까요?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눅19:2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