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위기 관리를 연구한 철학자 래리 로던은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 현대인들은 위기 정체 상태에 빠져 고통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위기 관리에 대한 그의 글을 열아홉 가지 원칙으로 요약했는데, 첫 번째 원칙은 “모든 것에는 위험이 따른다”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안전은 없습니다. 집에만 머무르면서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면 안전할 것 같습니까? 미국에서만 해도 50만명이 침대에서 떨어져 응급실로 실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수년 전에 연세드신 제 이모께서 밤에 침대에서 떨어지신 적이 있습니다. 이모부께서 오래 전에 돌아가셔서 혼자 살고 계셨기 때문에 간신히 외지에 살고 있던 아들와 연락이 닿아 응급실에 가보니 다리의 뼈가 세 동강이 나셨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오랫 동안 치료를 받으셨고, 지금도 그 휴유증 때문에 고생하고 계십니다. 또 열심히 창문을 가리다가, 실수로 자기 집 창문의 블라인드 줄에 목이 졸리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습니다(미국에서만 매년 10명이라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타석에 선다면 삼진 아웃을 당할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타자도 세 번 중 두 번은 실패합니다. 그러나 타석에 서지 않는다면 홈런을 치는 영광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배 밖으로 나오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배 안에도 위험은 있습니다. 밖이 두렵다고 계속 배 안에 머물러 있다면, 그 배가 무엇이든지 당신은 죽을만큼 지루함과 지겨움을 맛볼 것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냄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기적을 체험하였지만 막상 목표로 하였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시니 그만 주저 않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삶 역시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님의 칭찬과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4:1-2).
예수님을 따르려는 선택, 성장하려는 선택은 끊임없이 발생하는 두려움의 선택입니다. 당신은 매일 조금씩 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배를 탔고 폭풍에 직면했으며 물 위를 걷는 분을 보았고 두려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을 잊고 그 뒤로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까? 여기에 물 위로 걷기에 관한 진리가 있습니다.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성장하고 싶다면 계속 새로운 환경으로 들어가야 하고,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두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수전 제퍼즈의 말처럼 “내가 성장을 지속하는 한, 두려움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두려움과 성장은 바늘과 실처럼 늘 함께 합니다. 성장을 결단하려면 먼저 위험과 안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안락을 궁극적인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편하고 안락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 이 소식은 매우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 시대에 우리를 가장 유혹하는 것은 안락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은 ‘배 붙박이’들이었습니다. 보는 것으로 만족할 뿐 뭔가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그러합니다. 영성과 관련된 위로는 좋아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필요한 위험과 도전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영생은 죽어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어디로 인도하던지 그를 따라 가면서 모험을 하는 삶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위험이나 안락의 선택은 습관이 됩니다. 우리가 배 밖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다음에도 배 밖으로 나가기가 쉬워집니다.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우리를 파괴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저항할수록, 그 음성을 거부하고 배 안에 머물기를 택할수록 부르시는 목소리는 점차 작아집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그 음성을 전혀 들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 방향을 돌려 우리가 두려워 하는 ‘실패’라는 관점에서 베드로의 사건을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람을 보고 두려워 하자 물에 빠져들기 시작한 베드로는 실패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패는 어떤 사건이라기보다 그 사건에 대한 판단이기 때문입니다.실패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이나, 우리가 사물에 붙이는 딱지가 아닙니다. 실패는 우리가 결과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조너스 솔크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해 내기 전에 200번의 백신을 실험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200번 실패할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솔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200번 실패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저는 ‘실패’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라고 배웠어요. 어떻게 해야 소아마비 백신이 효과가 없는지에 대한 200가지 방법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만유를 지으신 분이며, 지금 만유를 붙들고 계시고, 결국 만유를 상속받으시도록 임명받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섭리 가운데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3).
누군가 처칠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1930년대 중반에 독일의 히틀러와 영국이 타협하자는 유화기 때 공공연히 히틀러를 반대할 수 있었고,그 다음에는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대영 제국을 이끌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초등학교에서 1년을 재이수했던 경험입니다.” “아니 초등학교에서 1년을 실패했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처칠은 대답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어떤 실패도 하지 않았습니다. 올바로 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얻었을 뿐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초등학교 1년을 재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처칠은 결코 실패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실패자입니까? 아마 어떤 면에서는 그랬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의심이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람을 보자….” 베드로는 눈길을 두지 말아야 할 곳에 두었으며 그래서 가라앉았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배 안에 앉아 있는 열 한명은 조용히 실패했습니다. 남몰래 실패했습니다. 그들의 실패는 주목받지도, 관찰받지도, 비판받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베드로만 공개적으로 실패하여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베드로는 두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즉 오직 베드로만이 물 위를 걷는 영광을 알았고, 가장 필요한 순간에 예수님의 손에 붙들리는 영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 가질 수 있는 큰 특권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특권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0-12).
베드로가 도움을 구하자마자 예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건져 주셨지만 동시에 문제를 정확히 지적하셔서 베드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성경은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에야 둘이 배로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훌륭한 멘토이신 주님은 다른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오른 손으로 은밀하고 안전하게 잡으시고서, 베드로가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도록 온유하게 도우셨습니다. 문제는 매우 분명합니다. 베드로가 가라앉느냐 물 위를 걷느냐는, 폭풍에 초점을 맞추었느냐, 아니면 주님께 초점을 맞추었느냐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온전히 믿음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깊이 이해하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실패의 위험을 감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패 그 자체보다 남이 우리의 실패를 보는 것을 더욱 싫어합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가 하는 모습을 배 안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실패를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실패는 배움과 성장에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때 우리는 실패가 우리의 모습을 빚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 반응하는 우리의 방법과 태도가 우리의 모습을 빚는다는 사실을 꼭 알아두어야만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체포 당하여 심문을 당할 때 세 번 부인하는 실패를 겪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었고, 심문당하는 주님 역시 돌아 보셨습니다. 그 수치를 견디지 못하여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의 도우심으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일어나 주님을 위해 전심을 다하여 살았고,끝내는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은총을 얻었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