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창세기 2:15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전부를 인간의 지배 아래 놓으셨듯이, 이제 그분은 특별히 에덴 동산을 사람의 보호와 책임 아래 두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몇가지 일과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일은 일하는 자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창조성 안에서 즐거움과 성취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셨으며, 인간에게 통치권을 주셨다는 두 가지를 함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그분의 통치권을 공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할 수 없는 자연지배가 가능한 것입니다. 창조적 일에 대한 우리의 잠재력은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 형상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일은 우리 인간성의 불가결한 부분입니다. 이  때문에 실업은 기독교적 시각에서 볼 때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실업은 하나님이 주신 일하는 자로서의 부르심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지런히 일하는 대신에 게으르다면, 또는 창조적으로 일하는 대신에 파괴적이라면, 우리의 인간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인간적 성취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2:24).

일에 관해 생각할 두번 째로 언급할 주제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창조시에 하나님은 인간의 협력을 얻기 위해 자신을 의도적으로 낮추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주셨습니다. 한여름에 어느 경건한 신자가 아름다운 정원 곳곳을 안내받고 있었습니다. 정원사는 화초가 잘 자라나 있는 화단으로 그 신자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은 멋진 색상의 화초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그 신자는 “창조주 하나님은 얼마나 멋지신 분인가” 하고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러자 정원사는 “이 정원이 하나님 손에만 있었을 때는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 보셨어야 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상 그 정원이 하나님의 손에만 있었을 때는 혼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정원을 돌볼 정원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작업에서 하나님의 역할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은 분명히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화초를 심고 물을 주지만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가 심고 물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것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하며, 이와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존하십니다. 이를 루터는 “하나님은 당신을 통하여 소의 젖을 짜기까지 하신다”고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파리 의과대학의 벽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쓰여 있습니다. “나는 상처를 싸맸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치유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은 치유하셨지만 나는 그 상처를 싸맸다고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즉, 내가 상처를 싸맬 필요가 있으며, 치료를 할 때 나는 하나님과 협력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경작자입니다.둘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창조와 경작, 자연과 문화, 원재료와 솜씨는 짝을 이룹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이라는 이 개념은 모든 고귀한 일에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지구상의 생명체가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하게끔 하셨습니다. 하나의 분명한 예로 어린아이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린아이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연약한 피조물입니다. 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어린아이들이 주님의 유업이요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산모의 수고가 있지만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이를 어머니의 품에 안기시며 “이제는 네가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수년 동안 그 아이는 부모, 선생, 의사, 그리고 기저귀나 유모차 등 아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생산하는 산업계 종사자들의 손에 의지합니다. 이러한 인간적 노력이 없다면 아이가 어떻게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자라서 성숙한 존재가 되기까지 우리의 협력에 의지하십니다. 어른의 삶에서도 이것은 같아서 삶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부요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이 원리는 적용됨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한 남자가 시골 길을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채석장을 지나치다가 궁금하여 들렀습니다. 그 중 한 사람에게 다가가서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 사람은 다소 못마땅하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보면 모르겠소?” 나는 지금 돌을 쪼고 있단 말이오” 다음 사람에게도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얼 하고 계십니까?” “무얼 하고 있냐고요?” 그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매주 150파운드를 벌고 있답니다.” 이번에는 세 번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무얼 하고 계십니까?” 세 번째 사람은 정을 내려놓고 일어나더니 가슴을 열어젖히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무얼 하는지 알고 싶은가 본데, 나는 지금 대성당을 짓고 있소” 여기서 우리는 일에 대한 상이한 태도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 하고 있는 일 이상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의 궁극적인 결과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의 예에서 그것은 대성당입니다. 그리고 목사들의 경우 그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의사들의 경우, 그것은 건강이며 질병과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병과 죽음에 직면하여 분개하셨으며 그 희생자들에게 동정을 베풀셨던 예수님의 사역에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보증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 직장, 사회,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실 궁극적인 영광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존 스토트 목사님은 런던 포트에서 공중보건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한 고급 관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런던 포트를 구경시켜 주고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해 준 데 대해 감사의 편지를 보내자, 그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목사님에게 보냈습니다. “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 것, 월급봉투, 부수입, 사회적 안정 그리고 연금을 위해 일하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저는 제가 좀 더 큰 인간의 활동 구조에 책임을 지고 있고, 우리 모두가 우리의 재능에 따라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의 경이로운 창조주의 뜻에 복종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저는 매일 행복하게 일을 시작한답니다.” 목사님은 “바로 이 사람은 하나님과 협력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일에서 성취감을 누리는 것입니다”라고 언급한뒤, 일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습니다. “일이란 육체적인 일이건 정신적인 일이건 또는 둘 다이건, 일하는 자에게는 성취를, 공동체에게는 유익을 하나님께는 영광을 가져오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와 같이 일할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짧은 일생을 사는 동안 먹고 마시며 자기 일에 만족을 느끼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며 이것이 인간의 운명임을 알았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부와 재물을 주셔서 그것을 누리게 하시며 복을 받아 자기가 수고한 것을 즐길 수 있게 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전5: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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